' 일주일은 더 신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

낡아빠진 쓰레빠가 발등을 쓰는 것이 느껴지자 남자는 짜증을 내며 신발을 적당히 벗어던졌다. 신발장에만 안착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날려보낸 낡은 쓰레빠는 자신의 신발과 대조되는 어여쁜 분홍 운동화에 위에 당연하다는 듯이 부딪혔다. 아차, 하면서 주변을 살피니 분홍운동화의 주인은 아무래도 집 안에 없는 것 같았다.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쉰 남자는 깨끗해 보이는 분홍 운동화에 혹시 먼지 한 톨이라도 올라갔을까 싶어 요리조리 살피며 후후 제 입으로 운동화를 털어냈다. 

분홍 운동화의 주인이 자신에게 화를 내면 귀찮아 지기도 하지만 남자가 이 분홍 운동화에 이리도 악착같이 구는 이유는 하도 졸라대서 없는 살림에 겨우겨우 산 비싼 명품 스포츠 운동화님이셨기 때문이었다. 집안에 있는 물건 중에 비싼 물건을 순서로 늘어놓으라고 하면 이 운동화가 못해도 랭크 5에는 들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운동화 보다 집 안 가구들을 좋은 걸로 사놓으려 해도 제때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면 웬간한 물건은 수거함에서 주워오거나 적당히 망가진 것을 고쳐다 쓰기도 바쁘다. 

그러나 분홍 운동화의 주인은 질풍노도 사춘기의 시기였다. 집 안 사정을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꾸거나 예쁜 것에 관심이 갈 소녀의 마음을 언제까지고 넣어두기만 하라곤 할 수 없었다. 

벌써 이 운동화를 산 것도 반 년 전의 일이지만 소녀는 자기가 억지를 부린만큼 어렵게 산 운동화라는 것 또한 알고 있는지 정말 신고 싶은 날이 아니면 신지 않으며 애지중지했다. 그래서 몇 번 빤 기억도 없는 운동화가 이리도 깨끗하고 반짝거리는 것이다. 

처음 운동화를 샀던 날이 기억난 건지 남자의 입가에는 미소가 만연했다. 어디서 또 모진 소리라도 듣고 온 듯 시무룩해 있는 그녀의 앞에 내밀었던 이 분홍 운동화에 그녀는 못해도 한 달간은 행복해 했다. 지금이야 늘 먹던 밥 위에 계란장이 올라오는 걸 더 좋아하고 있지만 말이다. 

운동화에 털어낼 것 하나 없다는 걸 체크한 남자는 그제야 때가 타지 않는 곳에 잘 올려두고 신발장을 정리하면서 자신의 쓰레빠를 쓰레기통으로 넣었다. 

남자는 이 빠진 다다미가 깔린 집 안으로 들어와 여기저기 늘어져있는 옷들을 주으며 뭉기적 집 안 청소를 시작했다. 소녀에게 그만큼이나 어지른 건 제 때 치우라고 일러뒀거늘 일주일에 한 번 들을까 말까다. 어딜 또 급하게 나간 것인지 잠옷부터 어제 입었던 옷까지 바닥에 늘어진 흔적을 따라가듯 주워 밀린 빨래를 돌리기 시작한 남자는 다시 어기적 걸어나와 닳은 가죽 소파에 그제야 피곤을 풀어내듯 걸터앉았다. 

' 그러고보니 집에 이제 계란장 없지 않나? '

아니, 계란은 남아있나. 장을 안 본지 오래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남자는 멍하니 천장에 묻어있는 더러운 흔적을 눈으로 좇다가 다시 벗어둔 겉옷을 집어들었다. 며칠동안 일을 하느라 잘 챙겨주지도 못했으니 오늘은 반찬 거리라도 몇 개 만들어둬야 할 것 같았다. 

버린 쓰레빠를 대신해 또 희생이 될 운동화를 아무렇게나 구겨 신었다. 싸구려 신발 때문에 발 뒤꿈치가 까진 기억이 있어서 인지 남자는 신발을 제대로 신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운동화나 다른 신발들은 모두 힐탭부분이 잔뜩 구겨져 회생불가 상태인 것들이 많았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잔소리를 하는 이들이 있기에 일부러 요근래는 쓰레빠를 신고 돌아다닌 것이었는데.. 하나뿐인 쓰레빠가 그리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남자는 뒷 부분이 잔뜩 구겨진 것에 반해 운동화의 끈만큼은 제대로 고쳐 매는 부질없는 짓을 하고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왔다. 

' 우중충 하구만. '

남자가 사는 동네는 그다지 치안이 좋지 못한 동네였다. 그래서인지 날씨가 화창하든 화창하지 않든 어딘가 거무죽죽함이 느껴지고 묘한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했다. 그게 가부키쵸(歌舞伎町)답다면 다운 것이지만.

가부키쵸는 온갖 부정한 가게들이 즐비한 환락가로 유명했다. 밤새 시끄럽고 거리를 돌아다니기만 해도 술냄새가 코를 스치는 그런 동네다. 사람이 웃고 떠들기는 좋아도 주거 생활을 할만한 동네는 아니지만 다행스럽게도 남자의 셋방은 환락가와는 먼 외곽에 붙어 있었다.

시끄러움과는 멀기는 해도 지금처럼 긴장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가부키쵸에서 그가 떠날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직업 때문이었다. 남자의 직업은 이른바 환락가 헬퍼. 클럽이나 캬바쿠라, 호스트바, 오카마바 혹은 단순한 술집까지 일손이 부족할 때마다 나가 도왔다. 정해진 곳에서 제대로 된 직함으로 일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남자의 일처리는 제법 꼼꼼해서 지금은 그래도 하루라도 안 찾아주는 날이 없을 정도는 되었다. 이렇다보니 종종 몇 가게에서는 아예 여기서 정직원으로 일해달라는 소리도 해줄 때가 많았지만 남자는 곧잘 거절하고는 했다. 어디 하나에 묶이는 것이 싫다는 둥 그런 뻔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이런 식으로 굴면 자신의 몸 값이 올라가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환락가에서 몸 값 운운 하긴 하였지만 딱히 남자가 하는 일은 몸을 파는 일은 아니었다. 헬퍼라는 건 말 그대로 홀 서빙이든, 경비일이든 그런 잡다한 일을 도와주는 정도였다. 가부키쵸에서는 매일 사고가 끊기지 않기 때문에 일을 해야하는 사람이 도망가버리는 일이 잦았다. 남자는 그 구멍을 메워주는 역할이었다.

 남자, 그러니까 사카타 긴토키가 처음부터 이런 일을 하기로 마음먹고 살아온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이름 하에 책임져야하는 꼬맹이들이 생기면서 어쩌다보니 흐르고 흘러 이런 인생을 살고 있었다.

[ 다시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줄래요? ]

어떤 사람과의 가부키쵸를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rôle 역할,임무,(사물의) 기능

현대 AU 히지카타 토시로 x 사카타 긴토키
written by. 팟챠



유통기한 제일 긴 거. 긴토키가 장을 보는 기준이었다. 유통기한이 제일 길고 싼거라던지, 특가 세일이라고 적힌 곳은 가만히 멈춰서서 고민하다가 한 두개씩 집어 넣는다. 오늘은 운 좋게도 메인으로 사려던 계란마저도 할인 상품이었다. 

' 미친, 결국 보고 말았네. '

알뜰하게 장을 본다기 보다는 그저 쪼들리는 생활을 감수한 마트 장보기 방식이었지만 그런 그를 붙잡는 유일한 코너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유제품 코너였다. 

긴토키는 욕심이 없다. 없다기 보다는 욕심부려봐야 가질 수 없다는 걸 너무 어린 나이부터 깨달았기에 웬간한 물욕은 버린채로 인생길을 거닐었다.

그러나 눈감았다 뜨면 30을 앞둔 20대 후반의 살아온 세월이 무색하게도 그는 달콤한 음식에 대한 선망과 집착만큼은 버릴 수 없었다. 당분은 정의다. 적어도 긴토키 안에서는 그랬다. 피곤하거나 기분이 더러운 날에도 시럽이 잔뜩 묻은 크래커를 먹는 것만으로도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기분을 풀었다. 유제품 코너에는 그런 그를 만족 시킬만한 것들이 잔뜩 있었다. 딸기우유 라던가, 요거트라던가. 다른거야 먹고 있으면 한심하다는 둥 몸에 안좋다는 둥 잔소리만 돌아오지만 우유나 요거트는 건강에도 좋고 제 자신의 소소한 행복도 채울 수 있었다.


" 세일.. "


세일을 하고 있는 유제품을 눈으로 스캔했지만 무슨 시련인 것인지 하나도 없었다. 그 흔한 +1 제품조차 없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장보기 기준에 낙선했으니 포기하고 굽히는 것이 맞았지만 아침까지 일을 하고 돌아온 그의 피곤함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세일이 없다면 유통기한이라도 긴 걸 찾으면 된다. 적어도 2주 이상은 먹을 수 있는 걸로.

결국 그는 1L짜리 종이 팩 딸기 유유를 하나도 아니고 세 개나 플라스틱 장바구니 안으로 골인시켰다. 아주 조금 남아 있던 그의 알뜰한 이성이 양심은 괜찮냐고 묻는 것 같아 손가락을 꼼지락 대며 안절부절했지만 이렇게 된 거 집에 있는 꼬맹이들이 좋아하는 것도 하나씩만 더 담자 라는 것으로 자신과의 합의를 마쳤다.

긴토키는 주머니를 뒤적여 두둑한 지갑을 쳐다봤다. 헬퍼라느니 뭔가 있는 것처럼 말해도 결국 일이 없으면 백수나 마찬가지임에도 그가 이런 일을 집착하는 이유는 또 하나있었다. 하루를 일하면 그 날 바로 돈이 들어온다. 월급이니뭐니 성취감이 바로 느껴지지 않는 일은 그래서 더 별로였다.

 아침까지 냄새 고약한 오카마 바에서 설거지 일과 쓰레기 뒤치닥거리를 하고 얻은 돈이 있으니 오늘은 조금 더 욕심을 부려도 될 것 같았다. 집에서 늘 먹을 것을 찾아대는 소녀, 카구라를 위한 고기와 요즘 들어 부쩍 몸 가꾸는 거에 관심이 많아진 신파치를 위한 샐러리를 집어 들고 그는 편안한 표정으로 계산대로 향해 걸어나갔다.

카구라와 신파치는 자신의 식솔들이었다. 둘 다 아직 미성년자이기에 책임 질만한 일들이 생기면 모두 긴토키가 그 몫을 지고 있었다. 둘은 자신과 혈연관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소중한 이들이었다.

긴토키는 곁에 누군가를 둔다는 것이 제 주제에 어울리지도 않는 감투를 쓰는 거라고 여겨온 세월이 길었다. 그런 그가 카구라와 신파치를 쉬이 외면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긴토키와 같이 어딘가 하나정도는 부서진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로에게 기댈 등 같은 건 없다는 걸 알지만 기댈 등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셋은 어느 순간부터 작은 셋방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생활하게 되었다. 

가뜩이나 홀로도 빠듯한 생활에 책임져야 할 이들까지 생긴 긴토키는 무리하지말자 라는 주의도 떼버리고 투 잡은 물론 쓰리 잡까지도 하루 만에 소화할 때도 많아졌다. 어제도 오카마 바 한 곳에서만 일한 것이 아니다. 그 옆에 있는 가라오케에서 카운터를 보기도 했고, 그 가라오케 지하에 있는 클럽에서 과일안주 손질도 했다. 그야말로 잡일꾼. 긴토키는 그런 자신을 헬퍼보다 더 구색 좋게는 해결사로 부르고 있다.

오랜만에 무게감이 느껴질 정도로 장을 보았단 증거로 제 손을 조여오는 비닐봉지가 묘한 만족감을 불러 일으켰다. 당분간 또 바쁘게 일해야할테니 이정도는 냉장고에 넣어놓지 않으면 카구라가 일을 하던 도중에 칭얼대는 전화를 걸 것이 뻔했다. 


[ 다 함께 불러요~ Hoy,Hoy,Hoy! ]

신파치 녀석, 또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돌그룹 노래를 내 핸드폰 벨소리로 설정해 놨겠다. 긴토키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핸드폰을 열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속으로 제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을 들킨 것일까. 카구라로부터의 전화였다. 


[ 긴 쨩, 집에 왔다갔냐.해? ]

" 아아, 장 보러 나왔어. "

[ 정말이야? 뭐 사서 올건데? 나는 전골이 먹고싶다,해. ]

" 계란장 할거야. 다 먹었더라. "

[ 정말? 전골이 먹고싶긴하지만 그 것도 좋으니까 봐주겠다,해. ]


카구라는 중국에서의 영향인지 중국 말씨가 섞인 말투를 아직까지도 쓰고 있다. 어쩔 때는 그게 자신의 가련한 중국 미소녀 이미지를 업 시킨다며 연예계 데뷔를 해도 되지않겠냐는 황당무개한 말을 하기도 했다. 본체는 결국 일본인인 주제에 말이다.

그녀는 흔히 말하는 귀국자녀(帰国子女)였다. 귀국자녀라 하면 보통은 부자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가부키쵸에 살고 있는 소녀를 보고 짐작할 수 있듯 카구라는 그런 부자와는 거리가 먼 버려진 쪽에 속했다. 그래도 집안 자체는 이미지대로 중국에서 사업을 할 정도로 유명한 집안인 것 같았지만 그 집에서 그녀의 반항기나 어리광을 받아주는 건 그녀의 어머니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어머니에게 문제가 있었다면 드라마에서나 나올 숨겨진 불륜녀였다는 사실이었고 그런 어머니의 딸인 카구라는 당연하게도 집안의 애물단지 같은 존재로 자라왔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녀의 유일한 편인 어머니가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자 그녀는 집에 붙어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사업문제로 그녀의 가족들과 일본에 왔을 때 홀로 도망쳐 가부키쵸까지 오게 되었다.

[ 나를 귀엽다고 생각하냐,해? ]

그런 그녀는 긴토키에게 자신을 살 생각이 없냐는 말과 함께 처음 인연이 닿았었다. 그 때 그 처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잡았던 작은 손의 감촉은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긴토키는 전골을 아쉬워 하는 카구라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나름 오랜만에 고기도 샀다는 말을 덧붙였다. 전골용 고기는 아니었지만 그간 고기를 먹은 횟수가 적었기 때문일까 잔뜩 고무된 목소리로 신이 난 카구라가 집 청소하며 기다리겠다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 집 청소는 내가 거의 다 하고 나왔는데 뭘 하겠다는 건지. '

긴토키는 설렁설렁 골목을 걸어 나갔다. 유흥가와는 제법 떨어진 거리에 있는 긴토키의 집은 가부키쵸 치고는 제법 조용한 동네라고 할 수 있었지만 살기 좋은 의미로서의 조용함은 아니었다. ' 범죄자나 야쿠자와 연관되어있다보니 무섭게 살벌해서 ' 조용한 동네가 정확한 수식어였다.

 아직 어린 신파치와 카구라가 드나들기엔 위험한 곳이긴 했지만 긴토키가 살고 있는 셋방은 나름 든든한 지원군이 뒤를 봐주고 있는 곳이었다. 긴토키와는 시시콜콜한 농담을 나누기도 하는 자신의 셋방 주인인 여자는 이 동네에서 한 자리 잡고 있기로 유명한 여자였다. 물론 긴토키가 그녀를 도와 사업을 한다던가 세력싸움을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제 사람은 제법 아끼는 편이었다. 그게 긴토키가 이런 위험한 동네에서 단지 지름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으슥한 골목길을 아무렇지 않게 쏘다닐 수 있는 이유였다. 

작은 골목을 지나 낡아빠진 건물 앞에 도착한 긴토키는 자신도 모르게 신파치가 바꿔놓은 이상한 벨소리의 노래를 흥얼댔다.


" 긴 씨, 오셨어요? "


아직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신파치가 나와서 긴토키를 반겼다. 낡은 건물이다보니 계단을 오르면 삐걱대는 소리가 건물 안에 사는 이들에게 울린다. 진작에 보수 공사 좀 해달라고는 했지만 셋방 주인에게 있어서 이 건물은 제 손을 떠나 버린 건물이었다. 한 번 부숴서 엎어놓고 새 사업장을 구축해도 이상하지 않을 땅이지만 그녀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녀 주변에 제 사람이다 싶은 사람이 갈 곳이 없어지게 되면 지낼 곳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였다. 

월세만 꼬박꼬박 내면 그녀는 이 곳에서 살인을 저지르든 뭘하든 터치 하지 않았다. 허나 딱 거기까지가 그녀의 온정일 뿐이어서 고쳐달라는 계단은 몇 년 째 고쳐지지 않는 채 그대로다.

신파치는 양말을 신은 채로 신발장 바깥에 서 긴토키가 장 봐온 봉지를 들고 뭐가 그리 신났는지 휘파람까지 불며 안을 살폈다. 그하고 어울리지 않는 앞치마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아주 조금 남아 있던 집안일은 카구라가 아닌 신파치가 한 모양이었다. 그럼 그렇지- 라는 생각으로 집 안에 들어서자 아니나 다를까 카구라는 쇼파에 파자마 차림으로 누워 쟈니즈 예능을 보며 감태과자를 우물대고 있었다.


" 어이, 카구라. 청소는? "

" 다 했을걸,해. "

" 다 했을걸 이란게 뭐야. 정말 너가 하긴 했어? "

" …오다츠 녀석 코 성형같지 않냐,해? "

" 계란장 한다고 하셔서 간장소스 준비해 뒀어요. "


말을 돌리는 카구라에 뒤에 있던 신파치가 ' 카구라가 저런 앤거 아시잖아요, 긴 씨. ' 라는 눈빛으로 자신의 등을 토닥였다. 신파치는 생긴 그대로의 아이라고 해야할까. 올 곧고, 올 바른 그런 소년이다. 가부키쵸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치지만 집을 나가버린 누나의 빚을 갚기 위해 이런 동네까지 왔다. 

그를 처음 마주친 때는 헬퍼 일을 위해 나간 이자카야에서였다. 원래 신파치의 집은 세타가야 구世田谷区 쪽에 있는 후타코타마가와二子玉川 였지만 그 곳에서는 어린 학생을 써주는 가게가 없었다. 고작 몇 푼 벌겠다고 이 곳 가부키쵸까지 와 일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긴토키는 자신이 사는 곳에서 같이 살지 않겠냐는 말을 건넸다. 어떻게 보면 고작 왕복 2시간일 뿐인 거리임에도 새벽 알바를 하는 신파치에겐 치명적이었다. 늘 어중간한 시간에 끝나 끊긴 전차를 못타고 결국 아침 차를 기다리며 역 근처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 간장을 다 썼네? 간장도 새로 사올 걸 그랬다. "

" 내일 제가 사올게요. 어차피 당분간 먹을 것도 많을텐데요. 뭘 이렇게 많이 사오셨어요? "

" 파리스 일 의뢰가 들어와서 어쩔 수 없었어. "

" 엑, 그럼 또 일주일은 못 오시겠네요. "

" 할망구 부탁이니 거절도 못하고 말야. 이번에는 무슨 발렌타인 이벤트 파티인지 뭔지 한대나. "


파리스パリス는 가부키쵸에서 유명한 클럽중 하나였다. 그리고 자신의 셋방 주인인 오토세가 운영하고 있는 클럽이기도 하였다. 널린게 가라오케고 클럽인 환락가 가부키쵸에서 그녀의 파리스가 손가락 안에 드는 이유는 성대한 파티가 끊기지 않고 주기적으로 열리기 때문이었다. 한 번 파티가 열리면 기본이 3일 이상 인데다가 자신을 굴려먹을대로 굴려먹어서 먼거리도 아니고 가까운 집을 올 틈조차 생기질 않는다. 잠 잘 곳이라도 제공해 주면 억울하지나 않지 가게 구석에서 쪽잠을 자게 될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졌다.


" 나 일 끝나면 전골 먹자. "

" 카구라가 결국 전골 먹고 싶다는 거 말했어요? "

" 나도 먹고 싶어서 그래. 안 먹은지 오래 되어서. "


전골은 셋에게 특별한 요리라면 특별한 요리였다. 처음에는 카구라, 그다음엔 신파치 이렇게 셋이 살게되어 환영회 겸 먹은 것이 전골이었다. 제법 반듯한 가게에 가서 먹은 건데도 불구하고 하필이면 실수로 버려야하는 재료를 내오는 바람에 그 날 방문한 다른 가게 손님들과 나란히 병원에 누워 식중독을 앓았다. 끔찍한 경험을 겪었는데도 셋은 그저 어이가 없었는지 전골 맛은 맛있었다며 호쾌히 웃어 넘겼다. 카구라는 그 때의 기억이 그리 특별한지 자신의 생일이나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면 축하음식으로 꼭 전골을 찾았다. 걱정이 많은 신파치는 또 식중독에 걸리기는 싫은지 집에서 직접 만든 전골이 아니면 입을 대지 않게 되었지만 말이다.

오랜시간 끝에 노른자를 골라 내어 계란장을 만든 긴토키는 신파치에게 하루 정도는 뒀다가 먹으라고 일러두곤 그새 쌓인 설거지 통을 보고 발을 옮겼다. 신파치가 앞치마를 고쳐 매며 자기가 하면 된다고 옆에 왔지만 긴토키는 알바갈 시간 아니냐며 신파치한테 괜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어 보였다. 신파치는 시간을 보더니 결국 마지못한 얼굴로 앞치마를 긴토키에게 건넸다.

달그락 거리는 설거지 소리가 지속되는 동안 옷을 갈아입고 나온 신파치가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고 나갔다. 인사 대신 묵묵히 마지막 그릇의 물기를 털어낸 긴토키가 앞치마에 손에 묻은 물을 닦으며 나오자 카구라가 그새 곯아 떨어져 색색 숨을 고르며 쇼파에 누워 자고 있었다.


" 먹고 바로 자지 말라고,TV 보다가 자지 좀 말라고 했더니 이제는 둘을 동시에 하냐. "


이미 꿈나라로 간 그녀에게 들릴 리 없는 잔소리였기에 한숨까지 내쉰 긴토키는 카구라를 안아 들고 안 쪽 방으로 향했다. 

긴토키의 셋방은 투룸이라기엔 뭔가 너무 비좁은 그런 옹졸한 투룸이지만 하나 밖에 없는 그 안쪽 방을 카구라의 방으로 둔 상태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여자아이이고 남자인 자신들과 엉켜 재우거나 사생활을 공유할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의 방의 벽지나 바닥은 바깥 방과 마찬가지로 소녀다움이라고는 없었지만 하나 둘 사모아 이런저런 귀여운 용품들이 쌓이고 나니 언제부턴간 긴토키의 구역과 냄새부터 틀려져서 들어올 때마다 흠짓 놀라게 된다.

별 모양이 가득 그려진 침대 위에 그녀를 눕히고 이불을 덮어준 긴토키는 그녀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으며 이불 좀 발로 차지 말라는 말을 남기곤 그녀의 방을 나왔다. 어쩐지 갑자기 조용하게 느껴지는 방 안엔 카구라가 틀어놓은 TV에서 패널들의 웃는 소리만이 나오고 있었다. TV 앞에 카구라가 어질러 놓고 간 요를 덮고 쇼파에 누운 긴토키는 굳이 TV를 끄지 않고 잠을 자려고 눈을 붙였다. 전기세가 아깝긴 하지만 이따금씩 긴토키는 시끄러운 소리가 없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 특히나 갑자기 이런식으로 공허감이 느껴질 때에는.

카구라와 신파치에게 있어서 긴토키는 터무니 없을 정도로 사람이 좋아보이고 남 돕기를 기꺼이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둘을 자신의 식솔로 들인 것은 긴토키의 애기심 탓이 더 컸다. 

혼자 살아보겠다더니, 잊어보겠다더니 그게 잘 안되서 자신의 실 없는 농담을 들어줄만한 이들을 찾아 데려다 놓았을 뿐이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라 한 동안은 자신의 곁에 있어주겠지만 나이가 들면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날 수 있도록 자신이 놓아주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다만 바라는게 있다면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자신이 이들을 지키기 위해 옆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서 데리고 있다는 제 못난 애기심을 눈치채주지 않았으면 했다. 


[ 다 함께 불러요~ Hoy,Hoy,Hoy! ]

' 아, 벨소리 왜 바꿔놨냐고 따지는 거 잊어버렸다. '

 긴토키는 시끄럽게 울리는 벨소리에 벌떡 상체를 일으키곤 통화버튼을 눌렀다.


" 여보세요. "

[ 형씨, 접니다. 오키타. ]

" 무슨 일이야? 일하는 중 일텐데. "

[ 그게 오늘 일하는 놈 중 하나가 아프다고 갑자기 삑 내버려서요. 시간 괜찮아요? ]

" 그거 걔지? 일주일 전에 새로 들어온 애. "

[ 어떻게 알았어요? ]


어떻게 알긴, 네가 괴롭혔잖아.

오키타는 아가페 헤븐アガペヘブン에서 간판 호스트로서 일하고 있는 남자였다. 입담이나 성질머리는 고약하지만 그런 이미지를 좋아하는 여자 손님들로 매상을 톡톡히 올려 그를 지칭하는 칭호도 각양각색일 정도였다. 심할 때는 암퇘지라는 말도 지껄이는 놈을 뭐가 좋다는 건지 긴토키는 이해할 수 없지만 역시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의 말끔한 얼굴이 다 커버쳐주는게 분명했다. 

오키타는 다른 취미로도 유명한 남자였는데 이른바 신입 괴롭히기 였다. 신입 호스트나 뒤에서 일하는 말단 직원에게 장난이란 말로 이런저런 사고를 저지르기 때문에 아가페 헤븐은 그의 표적이 항상 넘치게 되었다. 신입이 그만두면 새로 들어오는 것은 또 신입. 뫼비우스의 띠마냥 그에게 당해줄 신입이 계속 생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긴토키가 아가페 헤븐의 의뢰를 처음 받고 갔을 때도 지금처럼 오키타의 장난질을 견디지 못한 신입 직원의 펑크를 대신 막아주기 위해 갔었다. 당연하다는 듯 긴토키에게도 시비를 걸던 그였지만 이 바닥에서 오키타 보다 더한 놈들도 많이 봐온 긴토키는 그 앞에서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그런 자신이 신기하고 마음에 들었는지 오키타는 제 이름을 놔두고 형씨 혹은 간혹이지만 형님이라고 부르며 묘하게 따르게 되었다.


" 그래도 오래 버텼네. "

[ 뭔가 오해하는 거 같은데요, 걔 진짜 아픈거 맞거든요. ]

" 한시간 후에 갈게. "


어련하시겠습니까.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긴토키는 아직 졸린 눈을 부비고 기지개를 폈다. 요 며칠 잠이라곤 고작 몇 시간 잔게 다지만 일을 뿌리칠 순 없었다. 신파치의 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신파치의 누나 시무라 오타에가 남긴 빚의 액수는 그다지 커다란 액수는 아니었다. 다만 돈을 빌린 곳의 문제로 긴토키가 이렇게 거의 매일 일을 하지 않으면 힘든 상황이 되었다.

그녀가 돈을 빌려간 곳은 악질 중에서도 악질 야쿠자인 카타죠회方城会가 관리하는 대부업체였다. 그 곳은 꼴랑 500엔을 빌리더라도 감당 못할 억지 이자를 붙여 돈을 뜯어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신파치 또한 열심히 일하며 제 값의 빚을 거의 갚아나가곤 있지만 그는 아직 이 불어난 이자에 대한 것은 모르고 있다. 

그의 몰래 자신이 대신 이자금을 갚아 줄 수 있게 된 것은 셋방 주인인 오토세의 힘이 컸다. 미련하게 왜 남의 돈을 갚아주고 있냐는 말을 오토세에게 종종 듣는다. 긴토키는 그런 오토세에게 신파치가 아직 어리다는 이유를 대며 웃어 보였었지만 진실은 따로 있었다.

[ 돈이 필요해요. ]

아직도 긴토키는 오타에가 왜 갑자기 돈이 필요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모른다. 오타에는 신파치를 만나기 전부터 알고 있던 캬바쿠라에서 일하던 여자이자 긴토키의 이웃이었다. 그런 여자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돈을 빌려줄 만한 곳을 적당히 소개시켜준 것은 긴토키였다. 그게 오타에의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른채 말이다. 

신파치가 행방불명된 오타에의 친 남동생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긴토키는 커다란 죄악감을 느꼈다. 아직 어린 동생이 있다고는 이야기했지만 이정도로 새파란 애송이일줄은. 뒤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깨닫고 신파치에게 말은 꺼내야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워 애 먼 시간만 흐른지 오래다.


긴토키의 하나뿐인 스쿠터가 털털 소리를 내며 아가페 헤븐 앞에 멈춰섰다. 긴토키는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풀어헤쳤던 단추를 단정히 잠구며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아가페 헤븐의 오너이자 넘버원 호스트인 혼죠 쿄시로는 아무리 뒤에서 일하는 직원이라 해도 겉모습이 단정치 않은 것을 싫어했다. 그런 그의 까다로움을 아는 긴토키는 괜한 잔소리를 피하고 싶어 비록 싸구려 셔츠지만 더러운 곳은 없는지 들어가는 순간까지 요리조리 살폈다. 자연스럽게 뒷문을 열고 들어가니 기다렸다는 듯이 오키타가 자신을 보고 피던 담배를 바닥에 지지며 다가왔다.


" 너 여기서 땡땡이쳤냐? "

" 무슨 그런 섭한 소리를. 형씨 마중 나온거죠. "

" 몇 번을 말하지만 넌 담배 안 어울려. 담배 캐릭터가 아니라고. "

" 그래서 이렇게 뒤에서만 피잖아요. "

" 일은? "


오키타는 따라오라는 듯 앞장 서 걸었다. 지하실을 지나 홀이 있는 층까지 걸어온 긴토키는 왠지 아가페 헤븐 안이 어수선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봐야 가게 일은 가게 일. 헬퍼의 일은 헬퍼 일이다. 제 영역이 아닌 곳의 일을 신경쓸 필요가 없단 것을 잘 알고 있는 긴토키는 오키타의 뒤만 따라 걸었다.

그렇게 둘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지하 1층 홀과 제일 가까이 붙어있는 코디룸 이었다. 말이 좋아 코디룸이지 그냥 평범하게 호스트들이 옷을 갈아입는 탈의실이었다. 오키타가 문을 열자 가꾸는 용품이 필요한 남자들이 쓰는 곳이라 그런지 온갖 헤어제품 냄새가 긴토키의 코를 찔렀다.


" 여기서 뭘 어쩌라고. "

" 오늘 형님의 스페셜 일거리에요. 일일 호스트가 되어주세요. "

" …너 나한테 거짓말 했냐. "


아프다고 삑을 낸게 신입으로 온 주방 보조가 아니라 호스트였던 모양이다. 자신을 속인 오키타에게 긴토키는 어이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헬퍼 일만 고집하는 긴토키에겐 직접적으로 메인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유명한 룰이었다. 이유는 한 가지 였다. 몸 파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쓰레기 청소하는 주제에 그게 무슨 고결한 척인지 어울리지도 않는 짓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긴토키에게 있어서 이 룰은 무척이나 중요했다.


" 접대하라곤 안해요. 그냥 머릿수만 채워줘요. "

" 안 해. "

" 저도 형씨한테 이런 일 부탁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오늘 오는 거 카타죠회 놈들 이라구요. "

" 뭐? 그 놈들이 여길 왜 와? 시커먼 남자 밭인 호스트바에. "

" 카타죠회 새로운 후계자 소문 아시죠. "


긴토키는 미간을 찌푸렸다. 카타죠회는 야쿠자답게 가부키쵸 이곳 저곳에 발을 걸치고 있다. 아가페 헤븐도 카타죠회가 뒤를 봐주고 있는 곳 중 하나였다. 

긴토키의 직업이 무엇인가. 가부키쵸 헬퍼로 구른 세월 탓에 카타죠회의 이야기라면 귓동냥으로 들은 것으로 빠삭했다. 특히 어제의 오카마 바에서도 시끄럽게 들은 것이 카타죠회의 새 후계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카타죠회의 두목인 히지카타 타메고로는 표현 하자면 독불장군이었다. 그런 그의 무식한 고집은 가족이라고 해도 예외는 없었다. 타메고로는 자신의 자식들에게선 자신의 자리를 물려줄 이들이 결단코 없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었다. 타메고로가 아직 정정한 나이였을 적에야 그의 전설같은 신화의 휘광에 힘입어 후계자 없이도 기세가 등등했지만 타메고로의 나이도 지금은 어느 덧 환갑을 넘긴지 오래다. 거기다 불치병을 얻어 침상에 누워있는 날이 많다는 소문까지 돌 정도로 약해진 상태다보니 다른 야쿠자 일가에서는 후계자 없는 카타죠회를 칠려고 침을 흘리며 때만을 기다리는 하이에나처럼 굴었다. 긴토키가 살고 있는 외곽쪽에서도 이 이유로 사건이 터질만큼 긴장감은 최고조였다.

이런 상황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닫기라도 한건지 얼마전 카타죠회에서 타메고로가 드디어 후계자로 선포한 남자가 생겼다. 그 것도 친아들도 아니고 어디서 데려온건지 모를 남자를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켜서 말이다.


" 그 자식, 무슨 생각인지 카타죠회 입김 닿은 곳은 하나하나 검사를 하고 다닌대요. 오늘은 저희고요. "

" 타메고로 만큼 별종이네. "

" 어제 여기서 일하는 호스트는 몇인지 직원은 누가 일하고 있는지 명단 넘기라고 해서 넘겼는데 하필 호스트 한 명이 오늘 빈 상태가 되어버렸으니.. 머릿수 안 맞는다고 그 놈이 뭔 짓을 할 지 짐작조차 안 가서 오너가 일 할 땐 안 먹던 데킬라를 다 마셨다니까요. "


이제야 오키타가 왜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며 불러낼 수 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갔다. 카타죠회의 방식은 더럽다. 새로운 후계자가 어떤 남자인지는 몰라도 그런 그에게 첫 눈도장을 찍는 날부터 사고를 친다면 아가페 헤븐이 어떻게 뒤집어 질지는 뻔했다. 모든 상황을 전달받은 긴토키는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쉰다는 것은 긴토키의 항복표시나 다름 없었기에 오키타는 그제야 표정을 풀며 다른 호스트의 옷을 준비해두었다며 캐비닛 하나를 가르켰다.


" …오늘 만이야…. "

" 알아요. 죄송해요, 형씨. 대신 페이는 진짜 두둑하게 드릴게요. "


정말 자기 취향과는 하나도 맞지 않는 이도저도 아닌 남색의 수트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 있던 헤어 제품들을 만지작 거렸다. 긴토키는 곱슬 중에서도 악성 곱슬파마 머리였다. 해봐야 소용 없다는 것은 알지만 오늘은 빗지 조차 않은 머리라서 그런지 한 층 더 부스스 해보이는게 신경 쓰였다. 엑스트라 라던가, 슈퍼라이징 이라던가 뭔가 쎄보이는 헤어제품들로 그런 부스스함을 대강이라도 진정시켜 보려했지만 빛 좋은 개살구조차 되주지 않는 머리는 답이 없어 보였다. 결국 가장 단단해 보이는 빗으로 대강의 뜬 머리만 겨우겨우 진정 시킨 긴토키는 거울 앞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 선생님, 용서해주쇼. "


누군가에게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긴토키는 그렇게 말하고 탈의실 밖을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오키타가 긴토키에게 명찰을 넘겨주었다. 명찰에는 오늘 오지 못한 직원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 키츠네? 캬바쿠라에서나 쓸 법한 이름을 호스트 바에서 쓴다고? "

" 그거 오늘 삑 낸 녀석 본명이에요. 애칭은 츠네. "

" 최악이네. "


물빠진 것 같은 남색 수트에 어울리지도 않는 이름까지, 오히려 눈에 띄어서 더 위험한거 아니야? 긴토키는 기껏 정리했던 머리를 벅벅 긁으며 오키타를 따라갔다.

아가페 헤븐에는 몇 번 오기는 했지만 홀을 제대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주로 이 곳에서는 주방 보조의 일을 도맡아 했기 때문에 칙칙하지만 나름 깔끔하게 구색을 맞춘 지하 구역 쪽만 들락거렸기 때문이다. 홀의 분위기는 헤븐이라는 상호에 맞게 화려함 그 자체였다. 그리스를 떠올리게 하는 흰색 기둥에 황금색 몰드와 장식품들. 천국에서 사교 파티를 한다면 이런느낌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반짝거렸다. 

이미 닦을 곳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일 정도로 깔끔한데, 직원들 외 호스트들까지 나서서 바닥청소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까 느꼈던 어수선한 분위기의 근원지는 이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렇단건 아직 후계자라는 남자는 이 곳에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설렁설렁 홀을 걷고 있노라니, 오너인 쿄시로가 긴토키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위해 달려왔다. 언제봐도 번쩍거리는 금발과 얼굴이다. 


" 정말 늘 도움만 받고 죄송합니다. "


그는 비록 여자 돈이나 뜯어먹는 호스트 바의 오너였지만 ' 이 사람 만큼은 달라요 ' 라는 말을 제일 많이 듣는 호스트였다. 그건 그가 나름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별 것도 아닌 긴토키에게 인사를 매번 할 정도로 사람을 대할 때 진심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 때문일게 분명했다. 정중한 인사가 머슥한 지 긴토키는 괜한 콧등을 긁으며 대답했다.


" 저야 뭐, 공짜도 아니고 돈 받고 하는 일인데요. "

" 쿄시로 씨, 도착했답니다! "


멀리서 직원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오며 쿄시로에게 소식을 알려왔다. 쿄시로는 그 말을 듣자마자 허겁지겁 마중을 위해 뛰쳐나갔다.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인지 긴토키도 답지 않게 긴장감이 생겼다. 주머니에 넣었던 손을 빼고 주먹을 한번 꽉 쥐었다 피며 홀 입구쪽을 응시했다. 쿄시로의 목소리만이 들리던 그 곳에서 검정 양복을 쫙 빼입은 남자들을 이끌고 눈에 띄는 장신의 남자가 함께 들어왔다. 그러니까 저 남자가 그 유명한 카타죠회의 작은 두목, 히지카타 토시로인가.

히지카타가 들어오자 호스트들은 언제 부산을 떨었냐는 듯 평소 제자리를 찾아 오늘 하룻밤 전세를 낼 손님을 마중했다. 일렬로 늘어선 모양새를 보고 긴토키도 오키타의 옆에 대강 맞춰서서 남자가 걸어가는 것을 쳐다보았다. 남자의 분위기는 딱 봐도 위험하다는 느낌과 함께 평범지 않은 풍채를 내뿜고 있었다. 사람을 평가하고 싶진 않지만 그런 남자를 콕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집자면, 더럽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나름대로 환락가에 사는동안 내로라하는 호스트들을 많이 만나본 긴토키였다. 이 곳의 오너인 쿄시로도 그렇고 자신을 형씨라 부르는 소고도 만만치 않은 미남들이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런 것과는 차원이 틀린, 그 분위기에 너무나도 알맞을 정도로 날카롭고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 자신의 부스스한 머리카락과는 달리 어디서 관리라도 받는 건가 싶을 정도로 좋아 보이는 직모까지. 그래, 남자의 이상향. 남자라면 이렇게 되고 싶다. 같은 외모였다. 

쓸 때 없이 남자에 대한 감상에 젖어있던 긴토키는 다른 호스트들을 따라 남자가 이동하는 곳으로 따라갔다. 남자는 익숙한 듯 홀 정가운데에 있는 가장 큰 소파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들어올 때부터 지금까지 한마디도 하지않은 남자를 보며 긴토키는 생각했다. 목소리는 별로였으면 좋겠다고.


" 더럽게 반짝거리네. "


생각하자마자 이러는 건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남자는 목소리까지 남자다웠다. 적당히 낮고, 적당히 허스키했다.

긴토키는 자신의 외모에 딱히 불만은 없었다. 애초에 얼굴로 밥 빌어먹고 사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컴플렉스가 없는 건 아니었다. 얼굴 생김새 자체는 본인입으로 나쁘지 않다 자부할 수 있지만 태어날 때부터 백색에 가까운 은발도, 불길해 보이는 붉은 색에 가까운 눈도, 뭘 해도 태워지지 않는 흰 피부도, 그리고 무엇보다 제일 거지같은 천연파마는 남자로서의 매력을 죄다 반감시키는 요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자신의 컴플렉스들을 다 극복한거 같이 생긴 남자를 보니 긴토키의 안에 말도 안되는 호승심이 생겨 이렇게 한탄하듯 남자의 외모에 딴지를 건 것이다. 


" 조명을 낮출까요? "

" 됐어. 그런 번거로운 짓 시킬려고 온 거 아니니까. "

" 술은 뭘 좋아하십니까? 전해 듣기로 위스키를 좋아한다고 하시던데.. 로얄 살루트로 준비시킬까요? "

" 남자가 따르는 술을 뭐에다 쓰려고 마셔? 사내놈들만 득실하니 냄새도 약간 이상해지는 거 같으니까 이놈들도 다 물려. 그냥 눈도장 찍으려고 온거야. 내 얼굴을 알아야 나중에 나를 봐도 지금처럼 대할거 아냐. "


다행이네, 성격이 개차반이어서. 긴토키는 어딘지 모를 안도를 했다. 남자는 '띠꺼움' 그 자체 였다. 

딱 한 번이지만 긴토키는 히지카타 타메고로를 본 적이 있다. 어둠의 세계에서 사는 야쿠자라고는 하나 위압감이라고 하면 이런 느낌이구나 싶을 정도로 존재감이 엄청난 남자였다. 후계자인 남자라고 해서 타메고로에 비해 존재감이 딸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오야붕 다운 위압감 보다는 잘난 맛에 제 멋대로 구는 도련님 딱 그 모양새였다. 이런 남자를 후계자로 삼을 정도면 친 아들들은 도대체 얼마나 못난거야. 긴토키는 속으로 본 적도 없는 타메고로의 아들들을 딱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물러서는 다른 호스트들을 따라 긴토키도 대기 테이블 쪽으로 이동했다. 잘된 것 같다. 이 상태라면 별 거 안하고 돈만 받아 여길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피곤함이 쌓인 상태라 그런지 일도 제대로 안하고 돈을 받는다는 사실이 기뻐 종종 호스트일을 해도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힐끔 남자가 있는 테이블을 다시 쳐다보니 남자는 그저 의자에 늘어지게 앉아 자신을 따라온 남자가 붙여주는 불에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실내 흡연이라고 하면 경악을 지르는 쿄시로 씨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다. 권력이란 저런거구나.


" 사카타 씨, 혹시 좀 괜찮아요? "


대기 테이블에서 뻘줌하게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던 긴토키에게 평소 아가페 헤븐에서 자주 마주치던 직원 코이즈미가 말을 걸어왔다. 아는 얼굴이라곤 별로 없어서 그런가 오늘따라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는 코이즈미가 반갑게 느껴졌다.


" 무슨 일이야? "

" 오늘 뜬금없이 대청소 하는 바람에 옮길게 엄청 많아서요. 잠시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

" …그러지 뭐. "


긴토키는 잠시 히지카타가 있던 테이블을 쳐다 보고는 이 쪽은 신경도 안쓸 분위기 인지라 코이즈미를 따라 나섰다. 홀을 나가 어두컴컴한 지하실로 내려가니 왠지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화려한 자리보다는 역시 이런 곳이 좋았다.

아가페 헤븐은 지하가 무려 3층이나 연결되어 있다. 긴토키가 주로 일하던 지하 1층에는 호스트들의 탈의실, 그리고 주방이 있고 긴토키가 들어온 일명 개구멍 뒷문도 1층에 위치해 있다. 2층 부터는 깔끔 떨기 좋아하는 쿄시로씨가 그 때 그 때 필요한 도구들이 있는 일명 워싱룸이 있다. 칙칙한 벽과는 달리 어울리지 않게 세워져있는 세탁기와 다림질을 할 수 있는 공간, 간이 샤워룸까지 있다. 코이즈미를 따라 2층에 내려온 긴토키는 평소와는 다른 것으로 어질러져 있는 워싱룸을 보며 기함을 토했다.


" 이거 괜찮은거냐. 쿄시로 씨 난리 안쳤어? "

" 너무 갑자기 이것저것 옮기라고 하니까 둘 데가 있어야죠. 아직 쿄시로 씨는 모르세요. 그.. 사카타 씨도 비밀로 해주셔야해요? "

" 이거 어쩌나. 페이는 쿄시로 씨가 주는데. "

" 사카타씨이.. "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자신의 이름을 늘어지게 부르는 코이즈미를 뒤로 하고 온갖 쓰레기로 난리가 난 워싱룸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꽁으로 돈을 버나 했더니 이정도의 일감인가, 분리수거부터 해야겠다.

쓰레기를 옮기면서 긴토키는 눈으로 혹시 쓸만한 것은 없는지 훑는 생활력 강한 가난뱅이 모드에 돌입했다. 주로 자신의 셋방 안에 있는 것들은 이런 식으로 가부키쵸에서 긁어 모은 것들이 많았다. 환락가 답게 유행에 민감한 여러 가게들이 많아서 아직 쓸만한 것들을 버리는 곳들도 많다. 하지만 간단한 요리와 술 밖에 팔지 않는 호스트바 답게 분류해놓은 쓰레기 중엔 그닥 필요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캬바쿠라였으면 카구라한테 줄만한게 요만큼이라도 있었을텐데. 

분류해놓은 쓰레기들을 봉투에 담고 코이즈미에게 일단 이 두 개는 미리 버리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난 긴토키는 대형 봉투임에도 곧 터질듯이 빵빵해진 쓰레기 봉투들을 어깨에 짊어졌다. 아무리 그 깔끔 떠는 쿄시로 씨라도 구석구석 청소는 안하는 구나 싶을 정도의 무게였다. 하긴 그가 신경쓰는 외관상의 깔끔함이지 결벽증 같은 그 것은 아니다.


" 읏차. "


쓰레기를 버리는 장소가 있는 곳은 지하 1층 개구멍으로 나가야지만 있기에 긴토키는 아저씨같은 신음을 내며 계단을 올라섰다. 비좁은 계단이다보니 억지로 힘을 주지않으면 쓰레기 봉투가 자칫 낄 것 같아 자신의 어깨를 요리조리 흔들며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홀 때문에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1층에 다다르자 긴토키는 바깥이 살짝 시끄러워진 것을 들었다. 평소와 같은 아가페 헤븐의 소리. 긴토키는 은연 중에 그새 그 후계자라는 남자가 떠났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쓰레기 봉투를 질질 끌며 개구멍으로 나오니 바깥 공기가  집을 나왔을 때보다 더 차가워져 있었다. 2월 초인데 날씨는 영 풀릴 분위기가 안보인다. 특히 밤이 되면 체감 온도가 너무 낮아져서 잘 때 추위로 인해 눈이 떠질 정도였다. 긴토키는 카구라 방에 보일러를 제대로 올리고 나왔던가를 생각하며 끌고 나온 봉투를 주황색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 아, 허리 아파 '

아직 지하 2층에 쓰레기가 잔뜩남아 있는데 고작 두 개 옮겼다고 지치다니 거친 생활로 다져진 자신의 체력이라 할지라도 잠을 안자니 피로가 많이 쌓인 듯 했다. 


" 씨발, 이게 뭐야. "


다시 돌아가기 전 허리운동을 하던 긴토키의 움직임을 멈춘 건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니 골목 끝에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던 그 남자가 서있었다. 무시를 하고 조용히 들어가는게 제 신상에도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면서 이미 남자와 긴토키는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긴토키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남자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이런 뒷골목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건지 남자의 손가락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남자가 서있던 곳까지 다가가자 남자의 앞에 있던 버려진 낡은 가구 위에 잔뜩 깨진 유리파편들을 보고 대강의 상황이 파악 됐다. 

' 뒷 골목에서 폼 잡고 담배피다가 다쳤구만. '

자칫 잘못하면 웃음이 나올 것 같았기에 긴토키는 입안 벽을 살짝 깨물며 표정을 정돈했다. 그러고는 제 주머니를 뒤적였다. 남색 정장 풀 세트가 마음에 들지 않아 바지 만큼은 입고왔던 바지 그대로 갈아입지 않았던게 다행이였다. 뒤적인 주머니에선 카구라가 항상 챙겨주는 데일밴드가 들어 있었다. 아무 말 없이 히지카타의 손을 붙잡자 히지카타는 흠짓하고 손을 빼려다가 이내 긴토키의 손에 들려진 데일밴드를 보고 가만히 긴토키에게 손을 맡겼다. 핑크색 알 수 없는 캐릭터들로 가득한 유치한 밴드가 남자의 길고 다부진 손가락을 장식했다.


" 하나 더 줄게요. 집에 가면 연고 바르고 다시 붙이세요. "

" ……. "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는 멀리서만 보다보니 몰랐는데 눈 색이 제법 파랗다. 그리고 슬적 본 것보다 더 잘난 면상이었다. 남자의 손 위에 캐릭터 밴드를 하나 남긴 긴토키는 몸을 돌려 다시 길을 가려고 했으나 남자의 한 마디가 그런 긴토키를 붙잡았다.


" 너 여기서 일해? "

" …음, 그렇죠. "

" 키츠네? "

" 하하, 안 어울리죠. "


남자는 더이상 말이 없었다. 긴토키는 안녕히 가세요─. 라는 인사를 덧붙이며 골목을 나왔다. 다시 지하로 내려와 쓰레기 정리를 한 긴토키는 새벽 4시가 되어서야 두둑한 페이봉투를 받고 아가페 헤븐을 나올 수 있었다.

평소보다 더 힘들게 느껴지는 피로감에 긴토키는 환락가 주위에 즐비해있는 모텔 중 하나라도 들어가 금방이라도 몸을 뉘이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오토세가 관리하는 안전한 건물이라 하여도 어린 여자애 홀로 두기엔 위험하고, 무엇보다 돈이 아까웠다. 세워 둔 스쿠터에 왠지 무거워진 몸을 맡기며 털털털 하고 환락가 사이를 가로 질러갔다. 목에 기시감이 느껴져 목을 만지니 너무 피곤한 나머지 빌렸던 넥타이를 그대로 매고 나온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되돌아갈까 말까 고민하던 긴토키였지만 오늘은 이제 틀렸다는 생각에 가던 길을 마저 스쿠터로 움직여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그래봐야 인기도 없는 호스트의 넥타이였으니 비싼 것도 아닐테고 한 숨 자고 돌려준다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시간이다보니 그 시끄럽던 가부키쵸도 제법 조명이 사라진 가게들이 많았다. 털털털 스쿠터를 움직이던 긴토키는 문득 아까 했던 짓이 잘한 짓일까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남자는 잘생기긴 했지만 표정은 하나도 읽을 수 없을 만큼 무표정해서 자신을 귀찮아 했던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못된 짓을 한건 아니니까. 긴토키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달며 집으로 향하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골목 주변에 딱 하나 있는 24시간을 한다고 뻥치는 작은 편의점조차 이미 문을 닫고 조명이 꺼져있어 어두컴컴했다. 그저 스쿠터에 달린 작은 조명 빛을 의지하며 골목을 굽이굽이 돌아 집 앞에 도착한 긴토키는 올라가기 전 자신의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4시 31분. 위험해도 역시 지름길이 빠르다니까.

계단을 올라 익숙하게 문을 열고 신발장을 쳐다보니 신파치는 역시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씻어야지, 씻어야지 하면서도 피로함에 빌린 넥타이만 풀어 곱게 접어 식탁에 둔 긴토키는 어물쩡 걸어 그대로 쇼파 위로 쓰러졌다. 일어나면 씻어야지.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지기 전 긴토키는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몇 시간이나 잔건지 모르겠지만 쓰러진 자세 그대로 자서 그런지 몸을 움직이려 하자 온 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뜨악 하면서 힘겹게 상체를 일으킨 긴토키는 제 귀를 괴롭히던 핸드폰을 잡아 꿈틀거리듯 움직였다.

[ 달콤달콤하게 말해주세요~ 그러면 나는 답하죠 당신과의 KISS! ]

이 자식 도대체 어디까지 바꿔놓은거지. 

알람소리마저 바꿔놓다니 알람 설정하는 방법도 핸드폰을 사고 몇 주 후에나 알았던 자신과는 다르게 재주도 좋다고 생각했다. 자기 핸드폰도 아닌데 이게 무슨 짓인지.

겨우겨우 손을 뻗어 테이블 밑에 떨어져있는 핸드폰을 집은 긴토키는 애매한 시간에 맞춰져 있던 알람을 끄고 이마를 짚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 달콤달콤하게 말해주세요~ 흐으음~ "

" 신파치, 너 이 개자식.. "


자신의 알람소리를 들은 것인지 콧노래를 부르며 들어오는 신파치를 긴토키가 잔뜩 상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긴토키의 마음의 도피처가 당분이라면, 신파치에겐 아이돌이었다. 그 것도 기껏해야 지역 아이돌인 테라카도 츠우의 중증 오타쿠였다. 지역 아이돌치고는 인기있는 편인데다가 신파치가 하도 자기 여자친구마냥 자랑을 해대서 귀엽게 생겼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노래만큼은 결단코 취향이 아니었다. 그마저도 신파치 때문에 하도 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흥얼거릴 때가 있긴 하지만 나중에 생각하면 내가 왜그랬지 하고 후회할 정도였다.


" 긴 씨, 이렇게 안하면 안 일어나잖아요. "

" 너 이거 벨소리 다 돈주고 산거지? "

" …37엔씩 밖에 안해요. "


신파치의 말대로 긴토키는 귀에 정말로 거슬리는 소리가 아니면 일어나지 않는다. 워낙 시끄러운 데서도 잘 자다보니 때리고 일어나라고 소리질러봐야 입 아픈 건 소리지른 사람 뿐이었다. 아직도 머리가 아픈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꾸욱 누르고는 쇼파 등 받이에 고개를 올린 긴토키는 좋은 냄새가 나는 식탁 쪽을 바라보았다. 어제 사다논 버섯으로 볶음을 해놓은 모양이다. 


" 이거 신파치가 한 거냐,해? "

" 맛있겠지? "

" 나는 긴 쨩이 한 거 아니면 안 먹고 싶은데.. "

" 그럼 너가 해서 먹…아니다, 조용히 하고 와서 밥이나 먹어. "


카구라라고 요리를 도와주는 걸 안해본 것은 아니지만 할 때마다 괴상망측한 것을 내놔서 요리를 금지시켰다. 평소 입에 다시마 초무침을 달고다니는 탓인지 요리를 할 때 기본적으로 간을 신맛에 맞춰버린다. 처음 그런 카구라의 음식을 먹었을 때 계란에서도 양말 맛이 날 수 있다는 사실에 기함을 토했다.

그래서 식사준비를 하는 건 신파치와 긴토키의 몫이 되어버렸는데 둘의 요리 스타일도 제각각이었다. 우선 신파치는 겉치레 요리파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맛있어 보이는데 먹으면 그냥 밍밍하다 싶을 정도로 평범한 맛이었다. 그렇다고 긴토키 자신 또한 길었던 자취생활이 무색하게도 요리실력이 썩 대단하고는 할 수 없었다. 다만 입맛이 특이한 여자아이와 한창 자라나야해서 식단관리가 시급한 신파치, 그리고 종종 하게 되는 주방보조의 여력으로 가장 할 수 있는 요리 가짓수가 많게 되었다.

누구의 요리가 맛있냐보다는 할 줄 아는게 많다는 이유로 긴토키가 집 부엌에서도 해결사 역할을 하게 된지도 2년이 조금 넘었다. 그 오랜 기간 동안 긴토키의 손맛에 길들여져서인지 카구라는 이런식으로 안하던 밥투정을 종종 하게 되었다. 사와서 먹는거랑 신파치가 식사 당번인 날엔 그 좋아하던 밥을 입에 넣기 싫어해하며 말이다. 우리 살림에 찬밥 더운밥 가릴 때냐고 카구라를 야단치려 하여도 부담스럽게 선한 눈으로 자신을 이렇게 길들여놓고 어떻게 매정하게 굴 수 있냐면서 너무하다는 우는 소리나 낼 뿐이다.


" 된장국 안했어? "

" 긴 씨 마저 저한테 뭐라할 셈이에요? …보니까 미소도 없더라구요. "

" 아침엔 따스한게 먹고 싶단 말이지. "

" 지금은 아침이 아니라 오후거든요. "

" 우리에게 있어선 아침이잖아. "


오래 자는 건 피부에 좋다며 늘 점심이나 되어야 일어나는 카구라와 항상 일을 늦게 끝마치는 긴토키와 신파치에게 아침식사 시간은 두 시에서 세 시 사이나 되어야 시작된다. 비단 이들 뿐만이 아니라 가부키쵸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이면 타인과는 다른 시간표로 살아가고 있다. 오죽하면 밤이 되고 나서야 아침인 것 같은 거리라고 불리겠는가.

입에 먹을 것을 넣을 때만 조용해지는 셋방 안은 젓가락질 소리만이 길게 이어졌다. 긴토키가 일 때문에 홀로 오래 나가있는 날이 아니고서는 셋은 이렇게 늘 늦은 아침식사를 같이 하는 것을 지키고 있다. 긴토키에게 있어서 평화롭다고 느껴지는 때는 바로 지금 뿐이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말이다.

가장 먹는 것이 느린 긴토키가 느릿느릿 남은 버섯볶음을 마저 처리했다. 볶음류는 냉장고에 넣어서 나중에 또 먹으려고 해도 입맛에 까다로운 카구라가 차가워진데다 냉장고 맛이 난다고 안먹어버리니 바로바로 비워버리는 것이 좋았다. 그릇에 남아있던 마지막 양파조각까지 우물거리면서 긴토키는 빈 접시들을 쌓아 설거지통으로 옮겼다. 그릇이 달각 대는 소리에 신파치는 아침만큼은 자신이 설거지할거라며 앞치마를 매고 쪼르르 나왔다. 이번엔 딱히 제지없이 자리를 내준 긴토키는 근육통으로 욱씬대는 몸을 어기적 거리며 다시 쇼파로 가 앉아 TV를 틀었다. 


" 쯧, 끝났네. "

" 그렇게 좋으면 조금이라도 더 일찍 일어나지 그러셨어요. "


중증의 아이돌 오타쿠 신파치만큼은 아니지만 긴토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라는 것이 있었다. 애매한 시간대에 끝나는 점심예능 이후에 교통상황과 날씨정보를 알려주는 아나운서가 등장하는데 긴토키는 어느샌가 일어나면 그 아나운서를 보는 것이 낙이 되어 있었다. 

평소보다 피곤해서인지 늦게 일어나버려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놓쳐버린 긴토키는 아쉽다는 듯이 채널을 돌렸다. 볼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지막으로 멈춘 채널을 멍 때리며 보기 시작했다. 낮부터 무엇이 그리 심각한지 재미없는 토론을 하는 대머리 아저씨들의 대화소리를 귓등으로 들으며 긴토키는 깍지 낀 두 손을 머리 뒤에 올리고 근육통을 풀기 위한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 긴 씨, 쓸 때 없이 TV 틀어두지 마세요. "

" 라디오 체조 보는 중이거든. "

" 대머리가 TV에 나와서 라디오 체조를 할리가 없잖아요. "

" 큰일났다. 너 이제 대머리들의 저주를 받고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할거야. "


설거지에다 집중할 것이지 곁눈질 짓은 어찌나 잘하는지. 어느정도 상체 쪽의 찌뿌둥함이 풀렸는지 긴토키는 다리를 주무르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자신이 몸을 풀고 있자 카구라가 긴토키에 앞에서 알짱거리며 자신도 어깨를 주물러 달라고 졸랐다. 

긴토키는 일전에 마사지샵에서도 헬퍼 일을 한 적이 있다. 가부키쵸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멀쩡한 마사지샵에서 일이 들어온 것도 놀랐지만 화장실 청소를 하며 친해진 마사지사에게 뭉친 걸 푸는 손놀림을 배웠을 때는 이런게 진짜 효과 있구나 싶었다. 그 때가 그나마 저 자신한테도 쓸모 있는 걸 처음으로 어깨너머 배우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때였을 것이다. 

자신의 앞에 앉은 카구라의 어깨를 주무르자 귀여운 얼굴과는 맞지 않게 노인네같은 소리를 내며 기분 좋아했다. 한참 어깨를 주무르다보니 부스스한 카구라의 머리가 신경쓰이기 시작한 긴토키는 주무르던 것을 멈추고 손으로 카구라의 머리를 대충 빗어주며 머리끈을 달란듯이 카구라의 어깨위에 손을 얹었다. 자연스럽게 팔에 늘 가지고 다니던 노란 머리끈을 카구라가 긴토키의 손에 올리자 긴토키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머리를 한 쪽으로 말아 묶어주었다.


" 파피…. "

" 징그러우니까 떨어져. "


이런 아빠 같은 모습을 보일 때마다 카구라는 파피라는 웃기지도 않을 애칭으로 긴토키를 꼬옥 안아주곤 한다. 긴토키는 마음에도 없는 모진 소리를 하며 카구라를 떼어내고는 주방으로 가 고양이세수를 하였다. 그러고는 찬장을 열어 칫솔과 수건을 대충 챙기고는 신발장에 있는 구겨진 신발에 발을 끼워넣었다.


" 씻으러 가시려구요? "

" 어 , 넌 씻었냐? "

" 네 , 아까. 물 엄청 차갑더라구요. "

" 쯧. "


워낙 낡은 건물에 칸칸이 있는 셋방들은 공간이 비좁다보니 방마다 화장실이 있긴하지만 목욕을 할 공간은 없었다. 제대로 된 목욕을 하려면 그나마 건물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공용샤워룸을 이용해야했다. 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볼을 때렸다. 이렇게나 추운데 뜨거운 물도 안나오는데에서 목욕을 해야한다니. 벌써부터 소름이 돋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긴토키는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핸드폰을 보니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오후 5시에 가까운 시간이다. 

슬슬 일이 들어올 시간이네 하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핸드폰이 울려댔다. 샤워실에 들어서며 번호를 자세히 보니 아가페 헤븐에서의 전화였다. 아무래도 일이 아니라 가져간 넥타이를 돌려달란 연락이었던 모양이다.


[ 형씨. ]

" 또 너냐. 넥타이는 있다가 돌려줄게. "

[ 넥타이 가져갔어요? 없어진 지도 몰랐는데. 그거 그냥 가져도 돼요. 사실 어제 입은 수트도 그냥 코스프레용 수트였거든요. 그거 알죠? 명탐정 코난. ]

" …너, 이 개자식…. "


어쩐지 색이 너무 촌스러운 남색이더라니. 욕지기를 삼킨 긴토키는 거칠게 들고 온 수건을 공용샤워룸 걸이에 걸고 작은 목욕의자에 걸터앉아 마저 통화를 이었다.


" 그럼 뭣 땜에 전화한 건데. "

[ …오늘도 일일 호스트 부탁드려요. ]

" 안 해. 어제 한 번 뿐이라고 했잖아. 너 내가 한 번 말한 건 절대 번복안하는 거 몰라? "

[ 그 자식 또 온대요. ]

" 누구……. 그 후계자놈? "

[ 네, 무슨 변덕인지 여길 또 오겠대요. 거기다 왠 덩치 큰놈까지 와서 어제와 같은 인원대로 안 있으면 안 된다고 으름장까지 놓고 갔다구요. ]

" 아니, 자기 영역이 몇 갠데 같은 델 또 와. 이런 씨발.. "


긴토키는 제 알바 아니라면서 통화를 끊어버리고 싶었지만 순간적으로 어젯밤 남자와 마주친 일이 생각났다. 다른 건 몰라도 제 명찰의 이름까지 알고 갔으니 자신을 기억하고 있지 않을 리가 없었다. 젠장, 역시 아는 척 같은건 하지 말걸. 

자신이 한 일이 있어서인지 긴토키는 쉽게 가지 않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저 왠지 다시금 조여져오는 관자놀이를 꾸욱꾸욱 누르며 어제 그대로의 페이로 부탁한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통화를 끊고 긴토키는 자신의 휴대폰의 수신들이 더이상 오지 않도록 비행기 모드로 바꿨다. 한 번 정해진 의뢰가 있으면 의뢰가 끝나기전까지 다른 연락들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자신이 정한 일을 이렇게 연속으로 거스르게 되다니 짜증이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상대는 그 카타죠회의 야쿠자. 아무리 짜증이 나도 누군가의 목숨줄을 그렇게 쉽게 끊고 싶지 않았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샤워기의 물을 틀자 차갑다기 보단 속살이 베일정도로 아린 물이 튀어져나왔다. 펄쩍 뛰며 물을 피한 긴토키는 정말 이런 물에 몸을 씻어야하나 하며 제 몸의 냄새를 킁킁 거렸다.

' 아저씨가 된건가. '

묘한 냄새를 맡은 긴토키는 눈물을 삼키며 찬 물에 몸을 맡겼다. 정말이지, 오늘은 아침부터 일진이 사납다.









" 머리 만져드릴까요? "

" 시꺼. 뭘 해도 너처럼은 안 되거든. "


멀쩡한 수트가 아니면 돌아간다고 했더니 다행히 정말로 멀쩡하기는 한 수트였다. 색은 여전히 그렇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애초에 자신에게 어울리는 색의 옷은 드무니 어제보단 그런대로 구색이라도 갖춘게 어딘가 싶었다.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캐비닛에 물건을 정리해넣고 명찰을 가슴께에 달았다. 키츠네라니 아무리봐도 익숙해질 수 없는 이름이다.


" 형씨 나름 수트도 어울리는데, 그냥 이 기회에 여기서 일하지 그래요. 쿄시로 씨라면 받아줄걸요? "

" 너처럼 구는거면 몰라도 여자한테 알랑방구 뀌는 건 못해. "

" 그건 안 되겠네요. 형씨니까 좋은거지 제 경쟁상대가 된다고 하면 정말로 괴롭혀지고 싶어질 것 같거든요. "

" 명탐정 코난 옷 이상이냐? "

" 쿡, 형씨. 고작 그게 괴롭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


이 녀석은 진짜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 무서움이 아니라 단 번에 귀찮음이 밀려온 긴토키는 그리 생각했다. 성악설이 존재한다면 이 놈을 위해 만들어진 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따르는 듯 굴어도 소매 속에 칼을 숨기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정도로 신뢰가 안가는 놈이었다. 지금이야 자신도 콧방귀도 뀌지 않고 넘길 수 있는 수준이지만 시간이 지나 지금보다 더 자리잡게 되면 아가페 헤븐은 물론이고 이 일대 호스트 바의 판도가 바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고작 사원 호스트 주제에 쿄시로 다음의 2인자로 꼽히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넥타이를 한 번 더 조이고는 오키타를 따라 홀로 나갔다. 대청소는 어제 끝내놔서 인지 어제보다는 덜 어수선한 분위기다. 거기다 어제 뭔가 까다롭게 굴 것처럼 온 남자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 눈도장만 찍고 조용히 나갔다고 한다. 자리에 앉아서 담배를 두개피 정도 피다가 갔을 뿐이라고 하니 호스트들도 오늘만큼은 남자에 대한 긴장감이 줄어 들었는지 덜 뻣뻣한 분위기로 서있었다. 

시선 둘 곳이 마땅치 않던 긴토키는 홀 내부를 또 훑기 시작했다. 여전히 화려함이 가득한 홀은 긴토키에게는 있어서는 안될 곳으로 인식되었다. 구두 뒷심을 당장이라도 구겨 신고 싶어질 정도로.


" 오늘도 이렇게 발걸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히지카타님. "


입구가 소란스러워지자 긴토키는 오키타를 따라 또 일렬로 서서 ' 아가페 헤븐에 지친 날개를 맡기고 가세요.' 라는 웃기지도 않을 인사를 우렁차게 따라했다. 어제와 똑같이 눈에 띄는 존재감으로 들어온 장신의 남자는 마치 데자뷰처럼 저벅저벅 걸어 가운데 홀을 향해 걸어나갔다. 아니, 걸어나가다가 멈춰섰다.

인사를 하고 오키타와 딱 두 번 연습한 마지막 포즈에서는 마술사처럼 자세를 취하고 있어야 하는 긴토키였기에 앞 상황을 알 순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멈춘 발소리가 신경 쓰여 살짝 실눈을 뜨고 고개를 들려고 하였다. 

긴토키가 실눈을 뜨자마자 눈에 들어온 것은 정확히 자신의 앞에 가지런히 서있는 남자의 구두였다. 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확 들어 위를 쳐다보니 남자가 정확한 구두만큼 정확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어제와는 분명히 다른 행동이어서 주위에 있던 호스트들도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긴토키와 히지카타를 쳐다보았다. 


" 야. "


살짝 수근거림이 섞인 정적을 깬 건 히지카타였다. 긴토키는 대답할 생각도 못한 채 어색한 자세로 그를 올려다 보기만 할 뿐이었다.


" 오늘은 너가 술 따라봐. "


뭐라굽쇼? 소화 못할 말을 들은 긴토키가 쿄시로와 오키타가 있는 쪽을 힐끔 쳐다보니 시키는 대로 하라는 듯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사인을 보냈다. 그제야 예에. 하며 작게 대답을 한 긴토키는 어색한 자세로 히지카타를 따라나섰다. 

가운데 제일 긴 소파에 어제와 같은 포즈로 털썩 앉은 남자는 뭐하냐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호스트여 본적이 없는 긴토키가 뻘줌히 서있자 남자의 눈썹 한쪽이 꿈틀댄다. 그제야 뒤에 있던 쿄시로가 달려와 히지카타의 옆에 앉으며 술은 뭘 드릴까요? 라고 물으며 답지 않은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 누가 너더러 앉으랬어? 쟤 보고 술 따르랬잖아. "


자신의 옆에 앉은 쿄시로를 저리 가라는 듯 쉬익쉬익 손을 퉁긴 히지카타는 다시금 긴토키를 노려보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아직까지 받아들이지 못한 긴토키였지만 그런 생각을 정리할 틈은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저 목으로 침을 한 번 삼키고는 히지카타의 옆에 조심히 앉아 쿄시로의 흉내를 내며 무엇을 마실 것인지 물었다. 남자가 비싼 위스키를 주문하자 당황해 얼 빠져 있던 호스트들도 어제마냥 어수선을 떨며 술을 준비했다. 

긴토키는 여전히 긴장감을 돌릴 틈이 필요했지만 남자의 시선이 한 텀의 쉼 조차 없이 자신에게 부딪히고 있어서 고개를 돌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 때 지켜만 보고 있던 오키타가 둘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 히지카타 님,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이 녀석 신입이라서요. 혹여 실수를 해도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

" 그걸 왜 네가 말해? 야, 너가 말해. 호스트면 말을 잘해야 할 거 아냐. "


오키타의 끼어듬 덕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긴토키는 큼큼 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자세를 고쳐앉았다.


" 오늘은 지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히지카타 토시로 님.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

" 어제하고는 좀 다르네. 어젠 혹시 술 취했었냐? "

" 아니요. 어제는…. 키타 씨 말대로 신입인지라 상황 파악을 덜 했었거든요. "

" 그래서 오늘에서야 나에 대해 알게 되었다? "

" 아니요. 히지카타 님은 언제든 히지카타 님이시지요. 그냥 제 마음가짐이 덜 되어 있었다고 할까. "


아무리 당황스럽다 하여도 이 바닥 생활이 몇 년이냐. 긴토키는 본성을 꾹꾹 누르며 히지카타의 말에 대답해 나갔다. 애초에 긴토키는 남자가 그다지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당황스러워서 긴장하였을 뿐이다. 남자의 말에 신경을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조심히 대답을 해가며 나온 술을 따라 히지카타에게 건넸다. 히지카타가 술을 마시자 긴토키는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르고 히지카타를 따라 조금 삼켰다. 비싼 술이라고 하면 맛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독함만 느껴진다. 이런 맛 없는 걸 먹으려고 돈을 내는 치들을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철저하게 호스트를 연기해야 했던 긴토키는 독한 술이 제 목구멍을 치고가도 차마 표정을 찡그릴 수 없어서 애써 웃는 얼굴로 대신하며 히지카타를 마주보았다.


" 너 진짜 이름이 뭐냐. "

" …키츠네가 본명입니다. "

" 그게 본명이라고? "


그래그래, 안 어울린다는 거 아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주라. 긴토키는 저도 마음에 안드는 이름을 본명이라 거짓말 해야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과거는 묻지 않는 곳, 가부키쵸에서 그것도 호스트바에서 진짜 이름을 묻다니 이 남자는 도대체 뭐가 하고 싶은 걸까.


" 웃기네, 보통 본명을 별명으로 쓰냐. 어지간히 네 이름이 좋은가 보다. "

"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건 소중히 쓰자가 주의라서요. "

" 나랑은 다르네. 나는 날 낳아준 부모가 내 눈 앞에 나타난다면 죽여버릴거거든. "

" 대장부 다우시네요. "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그 잘난 면상판으로 말할 수가 있냐. 거짓말로 자욱한 대화에 긴토키는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가짜 면을 파는 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거짓말을 이렇게 한꺼번에 많이 하는 것은 제 아무리 긴토키라고 해도 익숙치 않은 일이었다.


" 여기서 매일 일해? "

" …아마도요. "

" 내가 여기 왜 또 왔는 줄 알아? "

" ……제가 보고싶어서? "


또 한번의 정적. 긴토키는 아차 싶어 입 가에 손을 올렸다. 실색한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보니 남자의 표정은 여전히 읽을 수 없는 무표정인 상태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개중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못보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짓는 호스트도 있었다. 

이 때즘 되니, 긴토키 스스로도 에라,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행패를 부릴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신을 괴롭히려는 것 같지도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 제가 보고 싶어서 오신거죠? "


긴토키는 능글맞은 말투로 히지카타에게 재차 되물었다. 남자는 여전히 말 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이것저것 질문을 해대던 남자의 입이 봉해지니 오히려 이상한 자신감마저 셈솟았다.


" 손 줘보세요. "


조용해진 남자는 순순히 긴토키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가락에는 더이상 자신이 주었던 밴드가 붙어있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꽤 깊게 베였었던 건지 꼬맨 치료를 받은 흔적이 보였다. 그런 남자의 두터운 손 위에 긴토키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오늘은 밴드는 없지만 나중에 먹으려고 놔둔 사탕이 있다. 자연스럽게 남자의 손 위에 메론맛 캔디를 쥐어준 긴토키는 베싯 웃으면서 히지카타에게 말했다.


" 오늘은 이거 드릴게요. "


사탕을 받은 남자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움직였던 것도 같다고 긴토키는 생각했다.









남자는 오늘도 조용히 돌아갔다. 사탕을 받은 뒤로도 별로 묻는 것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떠날 때 그저 기분이 변했다는 말을 남겼을 뿐이었다. 

큰 사고도 없었고 나름대로 잘 처신한거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만 쿄시로가 와서 저 때문에 숨이 막혀 죽는 줄 알았다는 말을 하며 울상이었다. 자신을 칭찬해준 것은 내내 웃음을 참고 있던 오키타 뿐이었다. 아무리 간댕이가 부었어도 자기도 그렇게 못했을 거란 말을 덧붙이면서. 

긴토키 스스로도 갑자기 어디서 그런 배짱이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사람을 별로 무서워하진 않는다 쳐도 카타죠회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런 카타죠회의 다음 기둥이 될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그런 짓을 한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 다만 이상하게도 긴토키는 히지카타와 대면하고 있으면 무언가 줘야할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 이런 느낌을 어디선가 받았던 것 같은데…. '

긴토키가 아, 하는 깨우침의 소리를 내며 머릿 속에 떠올린건 신파치와 카구라였다. 신파치와 카구라를 볼 때도 긴토키는 이런 느낌을 느낀다. 무언가 줄 것을 안줘서 뭐라도 손에 얹어줘야할 것 같은 느낌 말이다. 

긴토키는 종종 일을 하러 나가는 신파치에게도 간식을 사먹을 용돈을 주거나 이따금씩 카구라에게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을 사와 별 날도 아닌데 주곤 했다. 명백한 돈낭비긴 했지만 긴토키에게 있어서 하루일과와도 같은 일이었기에 딱히 이런 일에 쓰이는 돈들은 아깝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게다가 카구라와 신파치도 어느샌가 그런 긴토키를 답하듯 자신의 옷 주머니 여기저기에 무언가를 집어넣곤 하여서 셋방에 사는 셋만의 애정표시가 되어버렸다. 남자에게 건네주었던 데일밴드도 이러한 연유로 들어가 있었던 것이고 말이다.

생각보다 일찍 종료된 일에 긴토키는 어제와 같이 두둑하게 받은 페이가 들어있는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만족스러워했다. 어제는 쓰레기 청소한다고 새벽 4시 퇴근이었지만 지금은 겨우 12시 반. 가부키쵸의 시간은 지금이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는건 해결사 긴토키로서 한 탕정도는 더 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는 말씀.

긴토키는 내내 비행기 모드로 두었던 핸드폰을 켰다. 모드를 해제하자마자 신파치가 설정해둔 시끄러운 알림음이 울려댔다. 첫 번째 일은 선착순으로 뭐든 하지만, 두번째부턴 괜찮을 것 같은 일을 골라잡아 하는 것이 그의 룰이었다. 

' 오늘은 그냥 일찍 갈까. '

5통정도의 연락을 살펴보았지만 돈 냄새가 훅 하고 스칠만한 일들은 없었다. 평소라면 아쉬운대로 대강 아무거라도 골라 악착같이 일하고 나왔겠지만 파리스의 일을 앞둔 긴토키에겐 체력 보충도 필요했다. 

그만큼 고된 파리스의 이벤트 시즌이지만 그 것만 끝나면 오늘 아가페 헤븐에서 받은 돈은 푼돈으로 느껴질 정도로 큰 돈을 받을 수 있다. 제 주제에 돈 따라 골라잡는 짓을 할 수 있는 시기는 지금 뿐이었다. 

괜한 허세감에 차오른 긴토키는 스쿠터 키를 손가락에 끼고 뱅뱅 돌렸다.

' 근데 그 자식은 결국 왜 왔던거지. '

개구멍을 통해 나온 긴토키는 잠시 그와 마주쳤던 골목에 시선이 갔다. 남자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이 굴었지만 내심 남자가 저더러 술을 따르라고 했을 때는 역시 그 때 감아준 밴드가 마음에 안들었다거나 행동이 방자해보였던건가 싶었다. 남자의 말 한마디면 가부키쵸는 커녕 일본에서 자신이 존재했던건가 싶을 정도로 조용히 세상을 하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긴토키는 스쿠터에 앉아 헬맷을 쓰면서 그저 더이상 귀찮은 일이 생기질 않길 빌었다.




" 출발 준비 되었습니다. "


남자가 뒤를 쳐다보니 자신의 수발을 드는 이들 중 한 명인 야마자키가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남자, 그러니까 히지카타는 아직 반 정도 더 필 수 있는 담배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대충 발로 밟아 불을 껐다. 대답 없이 앞장서라는 듯 주머니에 손을 넣자 야마자키는 차가 있는 쪽으로 히지카타와 함께 움직이며 차 문을 열어 그가 타는 것을 기다렸다.

히지카타는 차에 타기 전 잠시 휴대폰을 확인하고는 부재중 전화가 찍힌 화면을 무심히 닫고 차에 올라탔다. 아직 새 차 냄새가 빠지지않아 묘하게 코신경을 자극하는 냄새가 올라오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만큼 방향제를 뿌리라고 했는데 제대로 뿌린게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짜증이 났는지 자신도 모르게 담배갑을 찾아 정장 안 쪽 주머니를 뒤적이던 히지카타의 손에 부시럭대는 무언가가 집혔다. 멈춘 손 상태로 뭔가를 생각하는 듯 싶더니 주머니 안에서 담배갑 대신 사탕봉지를 꺼내들었다.

[ 손 줘보세요. ]

히지카타의 귓가에 들릴리 없는 목소리가 번져 들렸다.

환청따윈 듣기 싫었는지 만지작 대던 사탕봉지를 거칠게 뜯은 히지카타는 뜯겨진 봉투 안에 있던 동그란 알사탕을 입에 털어넣었다.


" 어이, 야마자키. 메론 맛 사탕이란건 원래 바나나 맛이 나는거냐? "

" 넷? 그,글쎄요. 저 메론을 먹어본 적이 없어서.. "


아가페 헤븐에 다시 찾아간건 변덕 같은 것이 아니라 히지카타의 원래 계획이었다. 한 번 들렸던 곳을 다시 찾아가는 불시적인 검사를 종종 하기위한 초석이었다. 별 목적없이 자신이 그렇게 드나들면 두번째,세번째 부턴 흐트러지거나 방심하니 꾸민 모습이 아닌 진짜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가페 헤븐은 분명히 자신들이 관리하는 곳이 맞긴 했지만 묘하게 오토세와 비즈니스가 아닌 쪽으로 종종 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는 거슬리는 곳이었다. 뒤 구린 짓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증거가 없어서 몰아붙일 수 없었지만 두 번이나 눈도장을 찍어두면 알아서 처신하리란 생각에서 잡힌 그런 계획이었다. 

히지카타에게 예상 할 수 없었던 건 그 아가페 헤븐에 겁대가리를 상실한 신입 호스트가 있었단 것이었다. 제 눈을 피하지도 않고 마주보는 건 기본이요, 제 몸에 아무렇지 않게 손을 대는 것은 부가옵션이었다. 

처음엔 어디까지 할 수 있나 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랬더니 오늘은 자신으로선 언제 마지막으로 먹고 말았는지 기억도 안나는 사탕쪼가리를 제 손 위에 올려놨다. 그럼에도 그가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뭔가 구역질 나는 것도 아닌,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도 아닌 설명할 수 없는… 그저 거슬리는 무언가가 순간적으로 제 몸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히지카타의 계획은 조금 틀어져버렸다. 카타죠회는 오토세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다. 오토세는 딱히 야쿠자는 아니지만 이 가부키쵸 일대의 돈은 거의 그 여자가 움직이는 거나 다름 없었다. 겉보기엔 그녀와 비즈니스적인 관계로 보일지 몰라도 그녀는 틈만나면 카타죠회의 일에 끼어들어 성가시게 굴었다. 어차피 돈만 가지고 있는 다 늙은 여자야 처리하면 그만이지만 그녀는 뒷배 또한 만만찮은 여자였다. 도로미즈회泥水会의 지로쵸가 그녀의 일을 돕는다는 것은 이 바닥 생활을 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카타죠회는 아직도 그 명성에 걸맞는 관동 최고의 야쿠자 일가였지만 토시로가 이 자리를 지켜나가려면 가부키쵸 부터 완전히 그의 것이 되어야만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토세라는 여자가 힘을 잃어야만 했다. 


" 작은 두목, 전화가 온 것 같습니다만…. "


미간을 좁힌 채 알사탕을 입에 굴리던 히지카타는 야마자키의 말에 부르르 떨고 있는 제 휴대폰을 바라봤다. 몸도 아픈 할배가 전화로 뭘 이렇게 사사건건 귀찮게 구는지. 히지카타는 구태여 전화를 받지 않고 신경을 끄라는 말을 하며 차창 너머 풍경을 바라보았다. 

토시로와 타메고로는 악연이라면 악연이지만 끊어 낼 수 없는 악연으로 얽힌 사이였다. 토시로는 딱히 카타죠회의 후계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언제든 버리고 떠날 준비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악연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정신을 차린 순간 제 발목은 물론 , 목까지 쇠사슬로 조이고 있었기에 어쩔수 없이 이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덕분에 토시로는 안팎으로 적이 가득해졌다. 이 자리의 주인이 될 뻔했던 타메고로의 장남이 저를 어떻게 끌어내릴까 궁리하고 있고 다른 회들은 풋둥이가 후계자 자리에 올랐으니 이 때다 싶을 것이다. 

빠각. 히지카타는 사탕을 이빨로 쪼개며 남은 조각들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 제가 보고 싶어서 오신거죠? ]

혓바닥에 아직도 지근하게 남아있는 사탕의 향기가 자신이 먹기엔 너무 단 사탕이라고 생각이 들게 했다.









양말을 벗으며 들어온 집 안에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두리번 거리며 도착한 주방 테이블 위에 신파치가 남긴 듯한 종이가 놓여져있었다. 오늘 오프였는지 카구라를 데리고 젠조의 집에 간 모양이다. 젠조는 신파치가 현재 알바를 하고 있는 곳의 동료였다. 자신과도 몇 번 마주친 적 있지만 그도 제법 오타쿠 근성이 있어 신파치와 여간 죽이 잘 맞는 것이 아니었다. 파는 차원은 다르지만 마음만은 하나. 진지하게 외치던 둘의 모습이 떠올랐다. 

긴토키는 메모가 쓰여진 종이를 내려놓고 냉장고를 열어 구석에 한 캔 남아있던 맥주를 꺼내들었다. 술을 그다지 잘 마시는 것은 아니지만 긴토키는 취하는 기분을 좋아한다. 아니, 취하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해야할까. 주량이 그닥 쎄지 않아 한 캔으로도 적당히 몽롱한 상태가 되는 그는 그 몽롱한 상태로 심야 TV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집에 카구라나 신파치가 없을 때만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적적한 기분을 빨리 지우려 긴토키는 맥주를 쇼파위에 내려두고는 리모콘을 찾아 고개를 좌우로 까닥거렸다. 바닥에 떨어져있을 거라고 생각한 리모콘이 보이지 않자 배를 긁으며 카구라의 방으로 향했다. TV주변에 없다면 이 TV의 주인이나 다름 없는 카구라녀석이 제 방에 갖고들어가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아, 물건은 제자리에 두라고 했거늘.

아니나 다를까, 카구라 방에 들어서자 엉망이 된 이불 밑에 떨어져있는 리모콘을 발견한 긴토키는 이불을 대강 들어올려두고 리모콘을 들고 나왔다. TV의 전원을 틀고 선채로 채널을 돌리던 긴토키의 손이 멈췄다.


" 케츠노? "


무표정이던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늦게 일어나서 아쉽게 보지 못했던 그의 선망의 대상. 케츠노 크리스텔 아나운서가 심야 예능에 등장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긴토키가 ' 첫사랑은 이랬으면 좋겠다 ' 라고 생각했던 모습을 모두 가지고 있는 이상형이었다. 방송용 이미지일 수도 있지만 단아하면서도 털털한 그녀가 좋았고 늘 방긋 웃는 얼굴로 운세나 날씨를 말해주는 것도 좋았다. 


[ 자아, 예능은 오랜만이죠. 케츠노 크리스텔 씨가 나와주셨습니다! ]

[ 안녕하세요, 아나운서인 케츠노 크리스텔 입니다. ]


부드러운 목소리로 제 소개를 하는 케츠노를 보니 아직 한모금 마셨을 뿐인데 훅하고 취하는 느낌이 올라오는 것 같아진 긴토키는 흥얼내듯 MC의 말투를 흉내냈다.


[ 그런데 케츠노씨, 올 봄 좋은 소식이 있으시다고요? ]

[ 아아…. 여러분 모두 아시리라 생각하지만.. 저 봄에 결혼합니다! ]

" 네?! "


긴토키는 TV에서 나오는 관객보다 더한 리액션으로 제자리를 벅차며 일어났다. 제 안에서 무언가 와장창 깨진 기분에 아직 다 비지도 않은 맥주캔을 떨어트렸다. 

그저 선망의 대상일 뿐이니 긴토키 스스로도 저와 그녀가 결혼은 커녕 마주칠 일이라도 있기는 할까 정도로 먼 존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먼 그녀라도 긴토키에게 있어선 몇 안되는 낙의 존재가 아니었던가. 허망한 표정으로 ' 거짓말이라고 말해주세요 ' 하며 애원해보았지만 MC와 다른 게스트들은 눈치도 없이 그녀의 남편에 대한 이야기로 하하호호 웃기만 할 뿐이었다. 

TV 앞에서 덜 익은 야끼반죽처럼 주르륵 몸을 흘러내린 긴토키는 바닥에 코를 박고 지난 잡지에서 특전으로 주는 그녀의 화보사진을 어떻게든 잡지 몇 개를 더 사서 얻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순식간에 술 마실 흥이 다 깨져버린 그는 이대로 바닥과 흡수될 수 있으면 흡수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우울함을 대변했다.

삐걱삐걱. 

긴토키가 인사불성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상태일 때 그의 귀를 어지럽히는 것은 바깥에서 들리는 계단소리였다. 허나 계단소리고뭐고 실연의 상처를 어떻게 극복해야하나, 케츠노 아나운서의 결혼식은 일반인도 축의금을 낼 수 있을까 별에별 잡생각에 빠져있던 그에게 삐걱대는 소리정도는 제 알바 아니었다.

쿵쿵쿵.

그렇게 계단을 타고 올라온 이가 자신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내기전까진 말이다.

 긴토키는 그제야 흠짓하며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을 돌려 아무렇게나 널려져있던 수건을 들어 바닥에 흘러버린 맥주를 닦으며 신발장 쪽으로 향한 긴토키는 문을 열기전 누구인지 확인하기위해 문 위에 조그맣게 나있는 창문을 보기위해 까치발을 들었다. 


" 애송아, 문 빨리 열지 못해? "


긴토키는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들려던 까치발을 내리고 호다닥 문의 잠금쇠를 풀었다.

아니, 저 할망구가 이 시간에 왜 여기까지 온거지. 긴토키는 엎친데 덮친 격으로 느껴지는 재앙의 방문에 맥빠진 표정으로 문을 열어 당연하다는 듯이 서있는 그녀, 오토세를 쳐다보았다.


" 여긴 무슨 일이야, 할망구. 냄새 나서 안온다더니. "

" 나도 네 놈 낯짝 보고싶은 생각 없었거든. 너, 호스트를 한다는게 사실이냐? "

" 뭐야, 그런 쓸 때 없는 일로 온거야? "


오토세는 긴토키가 가부키쵸의 처음 발을 들였을 때부터 만났던 이였다. 가진 것도 없고 갈 곳도 없었던 긴토키가 우연히 그녀가 운영하던 가게들 중 하나인 스마일スマイル에 붙어 있던 직원 모집이라는 글자를 보고 홀린듯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허나 겉으로는 정식집인지, 이자카야인지 구분이 안되는 스마일은 대마초 냄새가 자욱한 유명한 기방이었고 긴토키를 손님으로 들어온 줄 알고 착각한 오토세는 그를 한 몫 뜯어낼 기세로 맞이했었다. 그런 오토세에게 긴토키는 잘못 들어온 줄 직감했음에도 머리를 긁적이며 직원을 모집한다고 해서 왔다고 말하자 그제야 오토세는 그가 가부키쵸에는 처음 온 애송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야, 스마일에서 직원모집은 어디까지나 대외적으로나 '직원'이지. '몸 팔 여자'가 필요한 문구라는 걸 가부키쵸 안에서 모를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긴토키와는 여러가지 일이 있어 오토세는 긴토키를 돌봐주기로 결정했다. 돌봐준다고 해봐야 부려먹을 일꾼이 늘은 정도지만.


" 그거 어쩌다보니 그런거야. 이제 두 번 다시 안 해. "

" 어쩌다보니 그랬다는 놈이 카타죠회 애송이하고 붙어먹어? "

" 그 것도 정말 어쩌다보니라고! 도대체 누가 뭐라 말했길래 이리 야단이야. "

" 너, 그 남자가 얼마나 위험한 놈인지 알고 있는 거냐. "

" 나도 알아, 카타죠회 자체도 위험한데 거기 오야붕이 될 남자가 위험하단 걸 모르겠어? "

" 그 애송이, 후계자 자리 앉자마자 한 짓이 뭔지 알아? "


오토세는 어느샌가 자신의 쇼파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 긴토키를 쳐다보았다.


" 이토 카모타로를 죽였어. 그 망할 애송이가. "

" …뭐? "

" 그 것도 제 손으로 직접. 이미 죽었는데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 몇 번이고 찔렀다더군. "

" ……. "

" 네겐 잘된 일일 수도 있겠지. 시비를 트던 녀석 하나가 없어졌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 남잔 위험해. 더이상 가까이 하지 마라. "


카타죠회라고 해서 오랜 기간 동안 정말로 후계자 자리를 공석으로 둔 것은 아니었다. 히지카타 토시로 처럼 정식으로 공표를 하지는 않았지만 은연중에 다음 후계자는 저 사람 밖에 없다는 존재가 하나 있었다. 그게 바로 오토세가 말하는 이토 카모타로 라는 남자였다. 

수금 같은 것은 보통 잔챙이들이나 하는 짓이었지만 제 돈도 아니고 남의 돈을 대신 갚겠다고 찾아간 사무실에 무릎을 꿇었을 때 자세히 들려달라며 자신을 비웃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토는 따지자면 오토세와 카타죠회 비즈니스 선상의 다리를 놓아주던 자였다. 타메고로의 오른팔로도 유명했지만 말을 잘하는 타고난 외교관같은 기질로도 유명해서 카타죠회의 더러운 자금들은 죄다 이토의 손으로 이뤄낸 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파치의 일로 오토세가 합의를 본 것도 이토였다. 그런 제 사정을 톡톡이 아는 남자는 모든 조건을 들어줄 테니 갚아야 하는 돈은 꼭 긴토키가 자신에게 직접와서 건네는 것을 조건으로 걸었다.

남자는 긴토키가 치를 떨만큼 위험한 자였다. 뱀이 인간이 된다면 이런 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돈을 건네러 올 때마다 저를 모욕하던 목소리가 아직도 귀를 타고 생생한 것 같은데 그가 이 세상을 떠나고 없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 오늘 밤 부터 파리스로 나와. "

" …하지만, 그건 사흘 후잖아. "

" 귓구녕 막혔냐? 파리스로 도망와 있으라 이 말이야. 그 애송이도 거긴 건들지 못할테니까. 뭐가 어찌됐든 그놈하고 만나는 건 피해. "


말은 거칠어도 긴토키의 안위를 위한 말이었다. 그 것을 아는 긴토키도 더이상 대답 없이 돌아가는 오토세를 배웅대신 빤히 쳐다보았다. 오토세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삐걱삐걱대며 긴토키의 귓가를 어지럽혔다. 









" 여기가 마지막입니다. "


도쿄 일대는 카타죠회가 발을 뻗치고 있는 장소가 과할 정도로 많았다. 그 중에서도 가부키쵸만 도는 순회임에도 며칠에 걸쳐서야 겨우 끝자락이 보이니 다른 구를 돌 때엔 얼마나 걸릴지 생각 만으로도 부아가 치밀었다. 

비슷해 보이는 곳만 몇 바퀴는 돌고 있는 히지카타는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아 심기가 꼬인 상태다. 들린 곳 중에 필요 없는 곳은 잘라내어 정리했고, 간혹 유흥을 즐기고 싶으면 제 가게 마냥 굴기도 했다. 처음엔 제 멋대로 굴 수 있단게 마음에 들었지만 그 것도 하루 이틀이지 며칠간 반복된 일상에 질린지 오래였다. 야마자키로부터 마지막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히지카타에게는 아직도 하나가 더 남아있습니다 라는 삐딱선 탄 소리로 들릴 정도로 말이다. 

누군가를 한 대 패고 싶어진 충동을 참으려 야마자키의 얼굴 대신 그의 시선을 따라 가르킨 곳을 올려다보니, 그나마 마지막을 장식할 곳은 사내냄새가 덜한 캬바쿠라였다.

잃어버린 꽃 失われた花 일명 우시하나는 카타죠회에서 중요한 밀거래를 행해주는 곳이기도 했다. 높으신 분들이야 매일 끼고도 질리지도 않는 게 젊은 여자들이니 이 곳에서 여자와 술에 취하다보면 제 간과 쓸개도 내주는 일들이 많다. 그런 캬바쿠라가 우시하나 뿐인 것은 아니었지만 이 곳이 중요한 밀거래를 위한 장소로 낙정된 이유는 이 곳의 마담인 히노와의 힘이 컸다. 

가부키쵸는 여러가지 뒷 별명으로 불리고 있지만 그 중 '여인들의 나라'라는 말이 있다. 눈으로 보이는 세력싸움은 야쿠자가 하고 있어도 뒷면에서 별개의 중요한 전쟁을 하는 것은 이 곳에서 한 자리 잡고 있다는 여자들의 손에 좌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여인들 가운데 제일 유명한 건 아무래도 오토세지만 오토세와 비등한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할 수 여인이 바로 우시하나의 히노와였다. 늘 화려한 옷을 입고 가게 안 보석같은 조명보다 밝게 빛나듯 서있는 그녀는 가게이름에 들어가는 하나라는 어울릴정도로 한 송이의 꽃같은 여자였다. 


" 오셨나요, 작은 두목. "


아직 가게를 열 시간이 아닌데도 여인의 화장은 짙고, 입고 있는 옷은 지나치게 선정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한 차림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비굴함도 없어서 야하다기보다는 그녀와 어울린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게 했다.


" 아직 이른 시간인지라, 저희 꽃들은 아직 피지 않았답니다. "


가게에 아직 출근하지 않은 다른 캬바쿠라 걸들을 말하는 것 같았다. 히지카타는 애초에 신경쓰지도 않았던 부분인지라 여느때처럼 대답도 없이 제 집에 온 듯 가게 안 제일 좋아보이는 곳에 가 앉았다. 입구에 홀로 서있던 히노와는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더니 그저 싱긋 웃어보이곤 그의 앞에 앉아 준비해뒀던 커다란 얼음이 담긴 컵을 테이블에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다른 비싼 술도 아닌 평범한 하이볼을 따라주며 히지카타의 앞에 내밀었다.


" 무슨 짓이지? "


그제야 눈썹 한 쪽을 꿈틀거리며 히노와를 올려다본 히지카타의 앞에서 히노와는 대답없이 자신의 잔에도 하이볼을 가득채웠다. 그러고는 건배를 하자는 듯 자신의 잔을 조금 올렸다.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히지카타는 하이볼이 담긴 제 잔을 들어 여자의 잔에 부딪혔다. 챙. 하고 불협화음같은 소리가 정경을 물들였다.


" 아가페 헤븐에 요새 신경쓰고 계신다고요. "

" 네 손 같은건 안 벌릴거니까 신경 꺼. "

" 거기서 오토세와 내통하는 자가 누군지 알고있다면요? "


취향에 안맞도록 단 하이볼을 결국 다 마시지 못하고 테이블 위에 거칠게 내려놓은 히지카타는 뭔 소리냐는 듯 히노와를 쳐다보았다. 여자의 웃음은 거짓 웃음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을정도로 가식적이었지만 딴지를 걸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거니까, 좋아하시지 않는 술을 드린거에요. 취하면 제 말 따위가 작은 두목 귀에 닿기는 커녕 꽃을 즈려 밟고 갈지도 모르니까요. "

" 빙빙 돌리지 말고 본론만 말해라. "

" 오토세가 가지고 있는 가게들. 일이 끝나면 파리스는 제게 남겨주신다고 약속해주세요. "

" 네 년이 뭔소리 하는지 모르겠는데. "

" 늙은 여우를 사냥하실 거잖아요? 히노와는 그저 작은 두목의 도움이 되고 싶답니다. "


히노와는 히지카타의 잔에 남아있던 하이볼도 마저 자신의 입으로 흘러넘겼다.

히지카타는 맹랑한 여자의 행동에 파핫 하고 어이없다는 듯이 짧게 웃더니 발 한 쪽을 의자에 올려 그 무릎 위에 팔을 걸치고는 히노와 쪽으로 상체를 빼들었다. 오른손으로 히노와의 턱을 부여 잡은 히지카타는 금새 날이 선 목소리로 여인의 귓가에 속삭였다.


" 늙은 여우를 잡아봐야 뭐에 쓸까. 능구렁이를 삼켜서 이매망량이 되기 직전인 암컷 여우가 하나 더 있는데. "


히지카타는 턱을 잡고 있던 손을 펼쳐 히노와의 가느다란 목쪽으로 살금 내려와 그녀의 목을 쓰다듬었다. 그런 히지카타의 행동에도 여인의 가식적인 미소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히지카타는 그런 여인의 얼굴을 보고는 짧게 입꼬리를 올리고 다시 등받이에 몸을 뉘었다.

위험한 여자라는 것을 전해듣긴 했지만 위험하다기 보다 무엇을 노린다는 것이 너무 뻔히 보이는 여자였다. 자신을 노리고, 뒤에는 수를 감추고 있는 것 까지 보인다. 재미없을 정도로 속셈을 솔직하게 드러낸 여자지만 히지카타는 그녀가 딱히 거슬리지 않았다. 여자가 이렇게 대놓고 굴 정도면 그만큼 확실한 정보가 있다는 이야기였고 그걸 이용해달라는 듯 애걸하는데 이용해주지 못할 것은 또 무엇인가. 


" …늙은 여우를 잡으시려거든, 그 곳의 여우(キツネ키츠네)를 조사해보세요. "


그런 히지카타를 거슬리게 한 것은 의외의 복병이었다. 

[ 하하, 안어울리죠. ]

며칠전부터 뼛성이 나게 하는 자신의 귓가를 간지럽히는 환청이 다시금 제 귀를 덮쳤다.




우시하나를 나온 히지카타는 야마자키와 다른 수하들을 거칠게 밀고 나가며 차를 열어주는 것도 기다리지 않고 제 손으로 차문을 뜯을 듯이 열어 차 안으로 몸을 구겨넣었다. 그런 히지카타의 모습을 본 야마자키는 지레 겁을 먹고 헐레벌떡 운전석에 타며 룸 미러를 만지작 거리며 히지카타의 표정을 살폈다. 저렇게까지 표정이 안 좋을 땐 절대 말을 걸어선 안돼. 침을 꿀떡 삼킨 야마자키는 그렇게 히지카타가 자신에게 말을 걸 때 까지 차에 시동조차 걸지 않은 채 침묵을 유지했다.


" 아가페로 가. "

" 네,넷?! 넷! "


평소보다 더 텐션높게 대답을 마친 야마자키는 그제야 시동을 걸고 남자가 말한 장소로 부리나케 운전을 시작했다. 도대체 안 에서 무슨일이 있었던 것인지 짐작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 아가페에 간다고 연락할까요? "


곁눈질을 하며 히지카타를 쳐다보던 야마자키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답 없는 남자는 여전히 표정이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았다. 괜히 말한 것인가. 야마자키는 날 죽이면 어쩌지 란 생각으로 더이상 뒤를 쳐다보지 않기로 하였다. 이 상황에서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언제 칼빵을 맞을지 모른다.

야마자키는 처음부터 히지카타의 수족은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타메고로의 수족으로 그마저도 조직 내에서 그렇게 존재감이 있지 않아 있는듯 없는듯 조용한 일을 할 때만 움직이던 위치였다. 타메고로의 곁에 있을 때도 눈치를 살피느라 정신없이 살기는 했지만 토시로와 타메고로를 비교하자면 토시로 쪽이 무섭기는 훨씬 무서웠다. 이유는 표정이었다. 타메고로는 무섭긴 해도 뭘 하고자 하는지 공기를 읽으면 알 수 있어서 대응이 가능했지만 토시로는 기분이 좋든 안좋든 표정을 전혀 읽을 수 없다. 다행인 점은 정말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저렇게 까지 잔뜩 구겨져 살기를 내뿜기 때문에 정말 건들이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헌데, 과연 이 것을 정말 다행이라고 말할수 있을까. 저 상태가 된 토시로는 꼭 사람 하나는 죽이고 나서야 원래대로 돌아온다.

야쿠자 일가에 몸을 담은 지 오래인 야마자키로서도 사람 죽는 일이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일인지 안다. 제 손으로도 다른 이의 목숨을 앗아간 적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토시로의 방식은 야쿠자인 야마자키로서도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보통 죽을 위기에 처한 사람은 죽이지 말아달라고 하지, 죽여달라고 애걸복걸하지 않는다.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는지 야마자키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에 꾹 힘을 더했다.


" …연락하지 마라. "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톤으로 그의 현재상태를 분석한 야마자키는 한 층 더 결심을 굳혔다. 도착할 때 까지 절대 룸 미러를 보지 않기로.

' 이런 , 씨발. '

히지카타 스스로도 왜 이렇게까지 열이 받는지 알 수 없었다. 수상하다고 생각했던 녀석이 수상한 짓을 하던 녀석이 맞다는 것을 들었을 뿐인데도 말이다. 평소라면 오히려 일이 잘 풀렸다며 그 키츠네 라는 남자를 앞으로 어떻게 구워삼을지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워야 맞았다. 지금 처럼 쓸 때 없는 소리를 지껄인 히노와를 죽이고 싶단 충동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몇 초 더 있었으면 정말 여자는 목숨을 잃고 자신의 앞에 엉망으로 누워 있었을 것이다. 


' 아니라고 말 해. '

옆에 있지도 않은 남자에게 히지카타는 말을 걸었다. 허상에 말을 걸었다는 것을 인지한 히지카타는 자신이 그제야 그 남자가 히노와가 말한 짓을 저지르지 않았길 바란다는 것을 알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 남자를 마주하거나 떠올라면 항상 이렇게 마비가 된 듯 한 느낌이다. 이러한 느낌때문에 히지카타는 사실 두 번 다시 남자를 만나고 싶지 않았었다. 

' 아니라고 말 해,씨발. '

아이러니 한 점은, 지금은 당장 키츠네의 얼굴을 보지 않으면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어느덧 아가페 앞에 도착한 것이 차창너머로 보이자 히지카타는 또 야마자키가 문을 열어주는 것을 기다리지조차 않고 헐레벌떡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빠르게 차를 나와 아가페의 문을 잡아당겼다. 문 앞에 서있던 호스트들이 제 얼굴을 알아보고는 당황한 표정을 띄우기 시작했다. 


" 오늘은 누굴 지명하시겠습니까? "


그러한 자신의 앞에 호스트를 해도 괜찮은 건가 싶을정도로 평범하게 흐릿한 인상의 얼굴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 키츠네. "

" …예? "

" 키츠네 불러오라고. "


자신의 말에 생글생글 웃던 평범한 남자의 얼굴도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이내 표정을 고친 평범한 남자는 볼을 긁적이고는 자신의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 지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키츠네입니다. 멋진 남성분에게 지명받긴 처음이네요. "


그제야 히지카타의 눈에 평범한 남자가 달고 있던 명찰이 들어왔다.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남자는 키츠네라고 적힌 명찰을 달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생긋 웃고 있다. 히지카타는 하, 하고 짧은 탄식같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러고는 역겹게 웃고 있다 느껴지는 남자의 상판에 세게 주먹을 내질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엎어진 남자는 한 대를 맞았을 뿐인데 입 안이 찢어졌는지 입가에 선혈을 흘러내렸다. 무슨 일이 벌어진건지 알 수 없다는 듯 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들 떨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남자의 배를 한 번 더 걷어차고는 히지카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 네가 뭔데 그 자식 행세를 하고 있어? "











파티가 시작된 파리스의 안은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그 큰 음악소리를 뚫는 사람들의 환호로 가득차 있었다. 파티장 안에 꾸며진 장식품들은 제법 그럴듯한 느낌으로 꾸며져 있었지만 매번 파티의 내용은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춤만 춰댈 뿐인데 쵸코렛을 건네주는 수줍은 발렌타인 데이와 어떠한 연관이 있는건지 긴토키는 이해할 수 없었다.

대걸레 봉 위에 턱을 걸치고 있던 그는 댄스홀을 내려다보는 것을 멈추고 건들건들 VIP룸을 청소하는 척을 했다. 파리스에 갇혀 집에도 못 들어간지 벌써 6일 째다. 다른 곳이면 몰라도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려고하니 명색이 만능헬퍼 해결사 긴토키라고 해도 지루하고 피곤했다. 거기다 유니폼으로 건네준 조끼는 누가 입던 것인지 자기하고는 사이즈가 맞지 않아 움직일 때마다 겨드랑이 밑을 조여서 거슬리게 했다. 


" 긴 씨, 여기 있었어요? "

" VIP룸 예약 들어왔어? "

" 아뇨. 슬슬 배고파하실 것 같아서요. 참치 샌드위치 괜찮아요? "

" 또 빵이야? 요 앞에 정식집이라도 가면 안될까? 된장국 한 모금이어도 괜찮으니까 "

" 그러고 싶은데…. 밥 먹을 시간이 없으니까요. 저도 긴 씨처럼 농땡이라도 피우고 싶네요. "

" 내가 언제 농땡이를 피웠냐. 여기도 더럽고 저기도 더러운 거 안보여? "


어딜봐도 깨끗한 룸 앞 마루를 더럽다고 우기는 긴토키는 사토시가 건네준 참치 샌드위치의 그릇을 받았다. 파리스에서 만들어지는 음식은 호텔에서 일하던 쉐프가 만들고 있어서 맛은 보장되어 있었지만 여기 온 내내 빵 사이 내용물만 다른 샌드위치를 먹다보니 이제는 빵 겉 쪼가리만 봐도 토할 것 같았다. 불만가득한 소리를 했음에도 샌드위치의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긴토키는 사토시와 함께 VIP룸 앞에 있는 소파에 걸터앉았다.

사토시는 파리스의 알바생으로 일하고 있는 남자였다. 자신과 나이 차이도 한 살 밖에 나지 않아서 서로 반말을 하자고 하였지만 한 살이라도 형님은 형님이라며 안면을 튼지도 오래인데 여태 자신에게 말을 놓지 않고 있다. 더불어 긴토키가 사토시와 친해진 이유는 지금 살고 있는 셋방이 원래 사토시의 방이었기 때문이다. 사토시는 오토세와 직접적인 연은 없었지만 오토세의 밑에서 일하고 있는 다른 사람과 연이 닿아 그 낡은 건물에서 처음 세들어 살던 남자였다. 처음엔 정직하게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가부키쵸를 떠나고 싶어하던 사토시지만 은혜를 진 오토세에게 빚을 갚고 싶다는 이유로 용돈벌이 삼아 파리스에서의 일을 시작했다.


" 아가페 헤븐 이야기 아직 못들으셨죠? "

" 왜 무슨 문제라도 터졌대? "

" 거기 어제 장난 아니었대요. 폭력사건 터져가지고 호스트 두 명인가 병원에 실려갔다고 하던데요? "

" 카타죠회가 관리하고 있는데서 폭력을 썼다고? 어디서 미친놈이 굴러들어갔나보네. "

" 미친놈은 미친놈이라도 진짜 무섭게 미친놈이긴 하죠. 바로 그 카타죠회 후계자가 그런거니까요. "

" 뭐? "


깜짝 놀란 긴토키는 어젯밤 창고 옆에서 쪽잠을 잘 때 언뜻 들었던 앰뷸런스의 소리가 생각났다. 도대체 그 히지카타 토시로라는 남자는 아가페 헤븐에 무슨 원한이 있기에 또 가서 그런 일을 저지른걸까. 남자와 마주하던 순간들이 떠오르면서 혹시 자신 때문은 아닐까 싶었지만 자신과 만난건 일주일도 전 이야기이고 그럴리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 오늘 보니까 결국 영업 당분간 쉬기로 한건지 간판 조명도 깜깜하더라구요. 진짜 파리스에서 일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카타죠회가 관리하는 데서 일하는 다른 놈들 지금 완전 사리느라 골목에서 담배도 안피는 거 있죠. "

" 걔넨 이번 기회에 금연이나 하라고 해. 꼭 여기 근처 와서 펴서 잘 때도 냄새나더라. "

" 그러면 오늘 밤은 완전 쾌적하게 주무실 수 있으실걸요. "

" 이제와서 그러면 뭐 해. 나 오늘은 집에 갈거야. "

" 아, 참. 오늘 파티 마지막 날이구나. "


긴토키가 설렁설렁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지막 날이라 평소보다 일거리감이 많이 줄어들어 있어서 가능한게 컸다. 첫 날에 비하면 댄스홀에서 춤을 추고 있는 이들도 줄어 들었고 긴토키의 담당 구역인 VIP룸들도 오늘은 예약 하나 없었다. 사토시가 이만 가봐야 한다며 자리를 뜨자 긴토키도 대걸레를 다시 잡고 일어섰다. 계단이라도 다시 닦아야 겠다며 사토시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 긴토키는 콧노래를 흥얼 거리며 조끼 주머니에 넣어둔 쵸코렛을 입에 넣었다.

예상대로 고난의 연속이었던 파리스의 파티 기간이었지만 긴토키는 발렌타인 데이 파티 만큼은 자주해도 괜찮다는 생각도 했다. 먹고 열심히 일하라며 쵸코렛을 주는 손님들이 많았었기 때문이다. 후한 팁에 주머니 가득 쵸코렛이라니 긴토키에게는 천당이 따로 없었다. 비록 오늘은 발렌타인 데이로부터 이미 사흘이 지난 후라 쵸코렛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그간 모은 양이 제법 되는지라 긴토키의 기분은 들떠 있는 그대로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새벽 3시가 되자 오토세로부터 퇴근 명령이 떨어졌다. 긴토키는 자신의 겨드랑이를 괴롭히던 조끼를 신나게 벗어던지고 마지막 뒷정리를 시작했다. 테이블의 각을 맞추는 일까지 마친 그는 아껴둔 쵸코렛을 종이 봉지에 담고 사토시에게 전달받은 급료 봉투는 겉 옷 안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간 고생한 직원들끼리 눈 인사를 맞추고 파리스의 정문을 열자 탁한 술냄새만 가득한 거리 공기도 어쩐지 달콤하게 다가왔다. 괜히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신 긴토키는 신파치에게 퇴근 하였냐는 문자를 보내고는 스쿠터가 있는 쪽으로 털레털레 걸어갔다. 하도 오래 세워둔 탓일까, 자신의 스쿠터 근처에서 무슨 짓을 한건지 더러워진 바퀴를 보며 긴토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보면 정비소에 안간지도 오래 되었다. 돈도 생겼으니 조만간 정비소에 가리라 마음먹은 긴토키는 스쿠터 손잡이에 쵸코렛 봉지를 소중히 걸고 시동을 걸었다. 털털 거리는 소리가 왠지 자기를 너무 오래 버려둔 것 아니냐고 꾸중하듯 들려왔다. 


" 다 함께 불러요, Hoy- Hoy- "


기분이 좋아서인지 또 저도 모르게 신파치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한 긴토키는 사토시의 말대로 인영 하나 없는 골목 사이들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평소라면 저기서 농땡이 치거나 몰래 담배를 피거나 간혹 그렇고 그런짓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을 텐데 말이다. 가부키쵸답지 않은 풍경이긴 해도 퇴근길인 긴토키에겐 지름길이 10개는 생긴거나 다름 없었다. 오늘은 더 일찍 집에 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며 평소라면 꿈도 못 꿀 경로로 굽이굽이 스쿠터로 골목길을 헤쳐나갔다. 

그렇게 한참 네온사인이 가득한 거리풍경들을 지나쳐오자 긴토키는 왠지 처연하게까지 느껴지는 아가페 헤븐의 간판 앞에서 잠시 스쿠터를 멈추었다. 쿄시로나 오키타, 코이즈미가 다친 것이 아니길 빌며 다시 손잡이를 고쳐잡고 스쿠터를 움직였다. 개구멍이 있는 골목을 털털 지나가는 긴토키는 멀리서 보이는 골목길 끝 인영에 얼마가지 못하고 스쿠터를 멈춰세워야 했다.


" 야. "


스쿠터를 멈춰 세운 긴토키의 앞에 껌벅이는 골목길 가로등 밑으로 골목길 끝 인영이 걸어왔다. 긴토키는 점점 다가오는 인영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 오랜만이네, 키츠네. 나 기억해? "


더럽게 잘생긴 얼굴이 자신의 코 앞까지 다가왔다. 술을 마신 것인지 얼핏 술  향기가 스쳤다. 긴토키는 잡고 있던 스쿠터 손잡이에 힘을 주며 당황감을 풀어보려했다. 도대체, 히지카타 토시로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것일까.


" …오랜만이네요, 히지카타 님. "


대답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아 긴토키는 힘들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히지카타에게 인사를 건넸다. 자신을 빤히 쳐다보던 남자는 긴토키가 쓰고 있던 헬멧을 살짝 벗기고는 긴토키의 턱을 들어올려 자신과 눈 높이를 맞추었다. 무슨 짓인가 싶어 남자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긴토키는 한 번 더 입에 포물선을 그어 웃어보였다.


" 너 이름 뭐야. "

" 아시고 계시잖아요. "

" 그래, 키츠네였지. 근데 뭔가 좀 이상하더라고. "


무표정하기만 했던 남자가 자신을 따라 웃기라도 하듯 냉소했다.


" 어제 내가 여기있던 키츠네라는 놈을 반 죽여놨거든? 그러면 넌 누굴까. "


아뿔싸. 상황 파악이 된 긴토키는 잡혀있던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고개를 뒤로 뺐다.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이리도 잘 들어맞는단 말인가. 긴토키의 생존 본능에 적신호가 들어왔다.

어떻게 해야하지, 어떻게 해야하지. 이리저리 앞 짱구를 굴리던 긴토키는 자신의 안 좋은 머리로 더 이상의 거짓말을 해봐야 남자에게 명줄을 빨리 끊어달라고 재촉할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잠시 겉옷 안 주머니를 다시 뒤적이던 긴토키는 무언가 잡히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히지카타의 손을 잡아 그 위에 안 주머니에서 꺼낸 것을 올려주었다. 남자는 자신의 손 위에 올려진 네모난 종이를 다시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 이야, 그게 들켜버릴줄이야. 죄송해요, 히지카타 씨. 다시 소개할게요. 저는 해결사 사카타 긴토키 라고 합니다. "


히지카타의 손 위에 올린 것은 긴토키로서는 이제 그닥 쓸모없어진 제 자신의 명함이었다. 지금이야 자신이 힘들게 발로 뛰지 않아도 연락이 오지만 처음 헬퍼로 일을 할 때에 이러한 일을 하는 자신이 있다며 홍보가 필요했기에 그 용도로 만들어둔 명함이었다. 새 사업장과 이야기 할 때만 가끔 필요해서 겉옷 주머니에 봉인해둔 상태였는데 마침 그 여분이 고대로 들어있어서 다행이었다.


" 해결사라고 적혀 있긴 하지만 그..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그런거에요. 부르면 뭐든지 하는. 몸 파는 일 빼고요. "


남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긴토키는 필사적으로 자기소개를 덧붙였다. 명함을 쳐다보던 남자가 자신과 다시 시선을 마주치자 긴토키는 또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 그 말은 넌 원래 여기서 일 안한다? "

" 네, 그냥 대타였어요. "

" …뭐든지 한다고? "

" 아, 히지카타 씨도 뭔가 필요한 일 있으시면 연락하실래요? 원래는 가게하고만 일하지만…. 특별하신 분이시니까 특별 서비스랄까. "


절대 연락하지 말아줘. 긴토키는 본심을 애써 뒤로 숨기며 히지카타의 눈치를 살폈다. 그 놈의 무표정.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 근데 지금 어쩐지 분위기 좋지않아? '

긴토키는 처음 남자를 마주쳤을 때와 달리 주변 공기가 이상하게 가벼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자의 표정도 어딘가 처음과는 조금 아주 조금 달라보였고 말이다.


" 잘 부탁드린다는 의미로 이거 드릴게요. 발렌타인 쵸코 받으셨어요? 히지카타 씨는 왠지 많이 받으셨을 거 같기도 하고 발렌타인은 이미 지나버렸지만.. "


긴토키는 조금이라도 상황을 더 좋게 풀기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제가 다 먹고 싶어서 챙겨온 쵸코렛 봉지를 히지카타에게 건넸다.  남자의 표정이 아주 조금 더 움직인 것 같아 보였다.


" 저어…. 시간이 늦어서 그런데 이만 가봐도 될까요? 무슨 일 또 있으시면 거기 번호로 연락주시면 냅다 받을게요. "

" …이거 진짜 여우 새끼네. "


한참 말이 없던 남자가 하, 하고 짧게 웃으며 작게 말했다. 긴토키는 ' 아, 역시 틀렸나 ' 싶어 제 손가락을 괜히 한 번 부여잡았다.


" 날 밝으면 전화 할테니까 받아라. "


그 말은 가도 된다는 뜻? 두 눈을 크게 뜨고 정말이냐는 듯 남자를 쳐다보자 남자가 막고있던 길을 스윽 하고 비켜서준다. 만세! 안 죽는다! 금방이라도 환호성을 지르고 싶어진 긴토키는 이번에도 입 벽을 꽉 깨물며 목구멍 바로 앞까지 튀어나온 만세 삼창을 겨우겨우 집어 넣었다. 슬적 목인사를 하며 스쿠터를 타고 남자의 옆을 지나가고는 뒤를 돌아 멀어져가는 남자의 인영을 잠시 쳐다보았다. 여기저기서 저 남자는 위험하다고, 가까이 해서는 안되는 남자라고 하지만 긴토키는 정말 그런가 싶어졌다. 물론 남자가 평범한 남자라는 것은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자기가 준 사탕도, 쵸코렛도 잘 받아가는 거 보면 괜찮은 사람이 아닐까. 

' 단 거 좋아하는 사람은 성격도 좋으니까. '

털털털 집으로 돌아가는 긴토키의 머릿속엔 남자보다는 남자에게 죄다 줘버린 쵸코렛 봉지가 걸렸다. 몇 개는 빼달라고 해도 용서해줄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아쉬운 듯 혀를 차며 동이 트는 것을 본 긴토키는 케츠노 아나 방송 전까지는 꼭 일어나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 야마자키, 넌 달릴거 달린 새끼가 너 유혹하면 어쩔거냐. "

" …옛? 그거야…. 엄청 기분 나빠서 쥐어패버리지 않을까요. "


근데 그게 기분 나쁘지 않았단 말이지. 히지카타는 남자에게 받은 명함을 검지와 중지로 돌리며 생각했다. 

자기가 정신을 못차리고 패버린 남자 쪽이 ' 진짜 키츠네 ' 쪽인 걸 알았을 때 히지카타는 이 자리에 오르고 처음으로 황당해했다. 남자가 의식불명 상태인지라 아직 오토세와 어떤 뒷거래를 하고 있는 남자인지 캐낼 수는 없었지만 히지카타는 어쩐지 이제 제 할 일은 다 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 밤 , 자신이 마주했던 키츠네는 그럼 도대체 누구인지 다른 호스트를 잡고 쥐어패기 시작했을 때 남자의 정체를 알려주는 이가 좀처럼 나오질 않자 히지카타는 초조해지기까지 했다. 그 남자가 키츠네가 아니란 걸 알았으면 거기서 그치면 될텐데 자신으로서도 쓸 때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는 자각은 하고 있다. 그 뒤로도 며칠간 일부러 가부키쵸를 차 없이 휘적였지만 눈에 띌 은발의 사내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홀렸던 것처럼. 

남자가 처음 자신의 본명이 키츠네라고 말했을 때 그닥 어울리지는 않는 이름이라고는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채로 시간만 흐르자 이름은 어울리지 않더라도 사실은 진짜 여우의 망령이 아니었을까 했다. 미신이든 귀신이든 그닥 좋아하지도 않고 믿지 않기도 하지만 여우라 하면 사람으로 둔갑할 수 있다고도 하지 않던가. 

괜히 정신이나 어지럽히는 남자 찾기를 거의 포기하고 술이나 한 잔 걸치러 나온 히지카타는 우연히 자신의 눈에 들어온 은발의 사내를 보고 취했던 것도 잊고 달렸다. 조그만 스쿠터를 따라잡기엔 영 글렀다고 생각했는지 남자가 가는 방향을 대강의 눈길로 읽고 다른 길로 달려 남자와 처음 마주쳤던 골목 앞에 멈춰서 있자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스쿠터를 탄 익숙한 사내의 얼굴을 보고 히지카타는 그제야 자신이 홀리지 않았단 걸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남자는 제 앞에 두고 있는게 누군지 알면서도 참 잘도 종알댔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자신을 향해 계속 방긋 웃어보이면서 말이다. 그 어두컴컴한 골목 속에서도 그 모습이 무언가 반짝거린다고 생각했던 히지카타는 그제야 자신이 느꼈던 남자의 위화감의 정체가 무엇인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 여우새끼는 지금 나를 유혹하고 있다.

히지카타는 지금껏 여자가 궁해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오는 여자, 가는 여자 안막기도 하지만 웬간하면 자신이 가만있기만 해도 옆구리가 비는 날은 드물었다. 그렇게 여러 여자를 접하다보니 여자들이 자신을 유혹할 때 어떤식으로 구는지 알고 있었다. 잘 웃고 잘 말한다. 

어젯밤의 여우새끼도 그랬다. 계속 웃고 계속 말을 걸어왔다. 거기다 만날 때마다 선물공세까지. 같은 사내자식이 하는 짓이었기에 히지카타가 머리로 해석하기 오래 걸렸을 뿐 틀림 없었다.

히지카타는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렇게 많이 반반한 얼굴은 아니지만 피부가 하얗고 눈 색은 그 피부와 대조되도록 붉었다. 어딘가 자신의 취향인 점이 있나 곱씹어보았지만 애초에 자신의 취향은 여자 한정이었다. 히지카타가 지금 이상하다고 여기는 것은, 그렇게 취향인 구석 하나 없는 남자의 유혹을 받았는데 이상하게 몸이 동했다는 것이었다. 

[ 부르면 뭐든지 하는. 몸 파는 일 빼고요. ]

남자의 명함을 받은 뒤 히지카타는 야마자키를 시켜 남자의 뒷조사를 했다. 짜증나게 거리를 돌아다녔던 것이 무색하게 남자의 이름은 가부키쵸에서 제법 알려진 이름이었다. 해결사라고 자신을 소개하긴 했지만 헬퍼로 더 유명한 그는, 이 가게 저 가게 옮겨다니며 일하는 잡일꾼이었다. 

히지카타의 책상에는 남자의 조사를 하다보니 같이 굴러들어온 고리대금업체의 계약서가 올려져 있었다. 남자는 딱히 직접적으로 이 곳에서 돈을 빌려가진 않았지만 다른 이의 보증인이 되어 이자 변제를 도맡아 하고 있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별 것도 아닌일을 한동안 코빼기도 안 보일 정도로 열심히 하는 것을 보면 딱하기까지 했다. 


" 작은 두목, 오카마 바 일 때문에 그러세요? "

" 오카마 바가 왜. "

" 왜, 그 저희가 딱 하나 관리하고 있는 오카마 바 사이고 말입니다. 그 때 찾아갔을 때 유일하게 문 닫은 곳이라 거기만 정리 못 했었잖아요. "

" 가봐야 기분 더러워지는 곳인데 알아서 피한 거겠지. "


그래, 히지카타는 딱히 남자와 연애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역겹기까지 했다. 여태 남자와 밤을 보내본 적도 없고 그런 별세계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땐 기함을 토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히지카타에겐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봐야 막상 역겹지 않은 호모를 봤으니 한 번 만나보겠다는 소리 밖에 더 되겠는가.

책상에 올려둔 손에 검지를 세우고 계약서 위를 톡톡 거리던 히지카타는 저가 은근히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 했다.

히지카타의 보좌, 야마자키 만이 대낮부터 뭘 저리 살벌하게 웃는가 하며 입을 꾹 닫아 올렸을 뿐이었다.




결혼 하기 전까지는 좋아해도 괜찮지 않아? 긴토키는 아직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케츠노 아나가 나오고 있는 TV를 쳐다보았다. 케츠노의 결혼 소식에 상실감이 컸던 긴토키지만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으니 어쩐지 이제 아무려면 어떤가 싶었다. 사랑하면 예뻐지는게 여자라더니 딱 맞는 소리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아침 준비를 시작했다.

새벽 잠을 좀 설쳐서인지 노곤함에 금방이라도 눈이 감길 것 같았지만 빵만 먹은 며칠이 서러워 아침엔 꼭 화식을 먹어야겠다는 의지로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냉장고에 신파치가 그새 사온건지 뜯은지 얼마 안되어 보이는 미소를 발견하고는 긴토키는 한 번 더 눈을 비비며 잠에서 빠져나오려 애썼다. 그 밖에도 아침 밥으로 먹기 위한 여러가지 재료들을 꺼내 재료를 다듬기 시작하자 방 안에서 저와 마찬가지로 졸린 표정의 신파치가 걸어나왔다.


" …긴 씨, 언제 오셨어요? "

" 오늘 아침에. 잘 잤어? "

" 피곤하실텐데 더 주무시지. "

" 내가 배고파서 그래. "


능숙하게 두부를 자르고 풀어둔 미소 국물 위로 퐁당 빠트리자 고소한 냄새가 배가 되는 것 같았다. 역시 일본인이라면 화식이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국자를 움직인 긴토키는 싱크대 근처에 모아둔 손질해둔 야채를 후라이팬에 부었다.


" 긴 쨩! "


음식 냄새에 잠이 깬 건지 잔뜩 뜬 머리로 카구라가 쪼르르 달려나와 긴토키의 허리를 부여잡는다. 위험하다고 떼어내려고 해보았지만 껌딱지처럼 붙어서는 제 옆구리에 얼굴을 부비고 있다. 고작 일주일 안봤을 뿐인데 무슨 야단인가 싶긴 했지만 이런 카구라를 보는 긴토키의 기분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떼어내길 멈추고 카구라의 머리를 토닥거리며 위험하다는 말을 다시 덧붙이자 카구라는 그제야 긴토키를 놔주었다. 그러고는 옆에서 긴토키가 없는 동안 빨래 돌리기는 자신이 했다며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카구라는 꼭 긴 씨 없으면 엄청 착해져요. "

" 그래? 일부러 없어질 수도 없고 큰일이네. "

" 다들 그게 무슨 소리냐, 해. 난 아직 어리광을 부려도 될 나이다, 해. "


실 없는 소리를 주고받는 동안 간단한 야채볶음과 계란말이, 그리고 미소된장국까지 완벽한 아침식사가 준비되었다. 그릇들을 놓을 수 있게 식탁을 정리하는 신파치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젓가락을 올리고 있는 카구라를 보니 그제야 긴토키는 집에 온 기분이 들었다.


" 신파치는 계란말이에 소금을 넣어서 싫었다,해. "

" 카구라 쨩, 어른이 되간다는 건 설탕보다는 소금을 가까이 하는 거야. "

" 그러면 나는 어른이 아니라는 거냐. "


오랜만에 봐서인지 먹는 동안만큼은 조용했던 식탁에도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오갔다. 신파치는 알바하는 곳에 츠우의 광고 전단지가 들어왔다며 어떻게 몰래 가져올 수 있을지 이야기하고 카구라는 못 보는 사이에 자기 키가 얼마나 컸는지 레이디 카구라로 불러달라며 조잘댔다.

이번에도 마지막으로 식사를 마친 긴토키가 식탁에 빈 그릇을 수거하려던 찰나, 신파치가 절대 안된다며 자신을 거실로 밀어넣었다. 그런 신파치의 손이 긴토키의 간지러운 곳을 자극했는지 푸핫하고 웃으며 알았다고 놓아달라고 야단떨었다. 신파치에게 뒷 정리를 마치고 어느샌가 TV를 보고 있는 카구라 옆에 앉은 긴토키는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졸음에 자신의 한 쪽 뺨을 살짝치며 잠을 깨기 위해 노력했다.


" 긴 쨩. 졸리면 더 자도 된다,해. "

" 먹고 바로 자면 건강에 나빠. "

" 긴 쨩은 이미 당분중독이라 건강함과는 거리가 머니 괜찮다,해. "

" 너는 가끔 아무렇지 않게 독설을 하더라. "

" 욕을 들어야 오래 산단 말도 있으니 그러는 거다,해. "


괜히 미운 소리를 하는 카구라의 머리에 아프지 않게 꿀밤을 먹인 긴토키는 잠을 깨려면 얼음물에 샤워를 해야할 것 같다고 느끼고 수건을 챙기려 몸을 일으켰다.


" 아, 긴 씨. 공용 샤워룸이요. 수도 고장 났어요. "

" 뭐? 거기가 그나마 새 건물인데 왜 고장나. "

" 요새 날이 오히려 더 추워졌잖아요. 얼다 못해 부숴졌나봐요. "

" 하…. 어쩔 수 없지 뭐. 다 같이 목욕탕이라도 갈까? "

" 돌아올 땐 전골먹는 거냐,해? "


그러고보니 잠시 잊고 있던 전골 약속이 있었다. 긴토키가 오늘은 특별히 소고기 전골을 먹자는 이야기를 하자 카구라는 어쩔줄 모르며 방방 뛰었다. 신파치가 설거지를 마치고나자 셋은 나갈 준비로 분주해졌다. 목욕탕에 가서 우유까지 사먹으려면 잔돈이 필요하니 긴토키는 저금통을 뒤적거리며 동전을 챙겨 넣었다.

[ 다 함께 불러요~ Hoy,Hoy,Hoy! ]

동전을 챙기던 긴토키의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이 진동과 함께 소리를 냈다. 오늘은 일 의뢰를 받을 생각이 없는데다가 아직 이른 시간에 울린 전화인지라 긴토키는 무시할까 생각하다가 누구에게 온 것인지 만이라도 확인 하기 위해 휴대폰을 확인했다.


" 어디지, 이거. "


긴토키의 연락처에는 이런저런 가게들이 이미 많이 등록되어 있어 모르는 가게에서 연락이 오는 일은 굉장히 드물었다. 혹시 자기가 실수로 등록 안한 번호이거나 눈에 익은 번호인지 다시 한번 앞에서 부터 숫자를 읽어봤지만 역시 기억에 없다. 하는 수 없이 받아서 상대를 확인하기로 결정한 긴토키는 수신 아이콘을 누르고 귀에 휴대폰을 올렸다.


[ 휴대폰 번호는 거짓말이 아니었나보네. ]

" …히지카타 씨? "


누구의 목소리인지 단 번에 알아챈 긴토키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 졌다. 그러고보니 날이 밝으면 전화한다고 했던가. 


[ 문자 보낼테니까 그 쪽 주소로 와. ]

" 네? "

[ 뭐든지 한다며. ]

" 그렇긴 한데…. 오늘은…… "


긴토키가 더이상 말을 이을새도 없이 전화는 끊겼다. 끊기기 무섭게 바로 알림음과 함께 문자가 왔다. 주소를 확인하며 긴토키는 핸드폰을 닫았다. 한 참 고개를 숙인 상태로 있던 긴토키는 나갈 준비가 다 된 신파치와 카구라에게 면목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가부키쵸는 그다지 이미지가 좋은 동네는 아니어도 늘 찾아오는 사람은 많은 동네다. 그 인산인해의 대부분은 인생의 황금기를 아깝게 소모하고 있는 젊은이들이나 질 낮은 놈들이 주된 층이지만 돈이 많은 사람, 그러니까 속된 말로 높은 분들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가부키쵸로 제 재력을 과시하러 오곤 했다. 이 때문에 거기서 거기여 보이는 복잡한 가부키쵸도 나름 구역이 갈라져 있었다. 질 낮은 놈들이 노는 곳과 높으신 분들이 노는 곳으로 말이다. 

헬퍼로 일하고 있는 긴토키는 그런 높으신 분들이 노는 곳에서는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런 곳에서 일을 하려면 일단 신분이 확실해야 했고 개중엔 높으신 분들과 말이라도 통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학력을 보는 곳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긴토키가 현재 일하는 곳에서 고급진 곳이라고 해봐야 오토세의 파리스 정도 뿐이었다.

' 여기 도대체 어디야. '

그런 긴토키가 가부키쵸에서 처음 와보는 골목으로 들어와 있다. 자신과는 연이 없어 갈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높으신 분들의 구역에 말이다. 당연하다는 듯 길을 잃고 한복판에 멈춰선 긴토키는 가부키쵸가 자기 앞마당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세월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다시 꺼내 남자가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핸드폰으로 길찾기도 가능하다 던데 긴토키의 핸드폰은 인터넷을 할 수 없도록 막아논 구형 핸드폰이었다. 그저 받은 문자 안 주소로 이 골목 저 골목 제 발을 혹사 시키기도 40여분. 남자가 몇 시까지 오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늦게 가도 되는건가 싶어 마음이 점점 조급해져갔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긴토키는 결국 다시 문자 수신함을 열어 남자에게 전화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낯선 골목으로 빠질 때부터 남자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지만 상대가 상대이다보니 그래선 안된다고 생각하고 꾹 참았다. 하지만 이대로 남자의 앞에 못 나타나는 것이 더 죽음과 가까울 거라는 계산이 나오자 ' 고작 전화거는 거고 오라고 한 쪽은 저 쪽이잖아 ' 하며 제 자신에게 긍정적이게 변하는 주문을 걸 듯 중얼대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 …뭐야. ]

" 히지카타 씨? 안녕하세요. 저.. 사카타 긴토키입니다만 혹시 데리러 나와주실 수 있나요? "


대답이 없다. 긴토키는 역시 전화를 걸어서는 안되었었다고 생각하며 이마를 짚었다. 가뜩이나 대면하고 있을 때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을 남자인데 통화상태로는 주변 분위기조차 읽을 수 없으니 목이 바짝 타는 것 같았다. 


[ 어딘데. ]

" …아! 여기가 어디냐면, 그… '가라쿠리'라고 적힌 큰 간판이 보이는 곳이에요. 저 이런데는 처음 와 봐서 뭐라 설명 드려야 할… "


뚝 하고 전화가 끊기자 긴토키는 제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지적하고 싶었지만 남자를 혼을 낼수 있다면 꼭 전화통화를 할 때에도 예절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히지카타의 위치가 카타죠회 후계자라는 어마무시한 위치라는 것은 알아도 외관상 나이로 따지자면 자신과 비슷하거나, 자신보다 어릴 것이 분명한 남자였다. 그런 남자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해가며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것도 서글픈데 결국 데리러 온다는건지 뭔지 모를 상황에 놓였으니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었다.

긴토키는 아직 열리지 않은 가게 앞에 놓여진 벤치에 몸을 맡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는 자신의 말에 적잖이 실망했을 텐데 괜찮다며 신경쓰지 말라고 웃는 신파치와 카구라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둘이서 라도 즐거운 하루 보내라고 넉넉히 용돈을 손에 쥐어주긴 했지만 자신이 준 돈을 쓰기 어려워하는 그 치들이 전골은 커녕 목욕탕을 가기나 할지 신경쓰였다. 

상념에 젖어 구름이 흘러가는 것만 쳐다보던 긴토키는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에 고개를 내렸다. 척 봐도 새 차로 보이는 검은색 차량이 긴토키가 있는 길로 들어오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자세를 고쳐 앉은 긴토키의 앞에 차가 멈추고 뒷 좌석 창문이 스르륵 열렸다.


" 안녕하세요. "


창문으로 보이는 건 선글라스를 슬적 내리며 자신을 확인하는 히지카타였다. 그리 햇빛이 쨍하지도 않는데다가 차 안에서 무슨 선글라스인가 싶었지만 원래 얼굴에 붙어 있었던 것 마냥 썩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사에 대한 대답 대신 차 문을 열고 제 옆에 앉으라는 듯 왼쪽 좌석으로 몸을 옮긴 히지카타를 보던 긴토키는 반짝한 차량에 제 신발에 묻은 흙이라도 묻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몸을 집어넣었다.

차 안은 번쩍거리는 외관만큼 깔끔해보였다. 버스같은 거야 가끔씩은 타도 승용차를 타는 것이 몇 년만인 긴토키는 안전벨트를 메어야 할지 괜히 부스럼을 떨었다. 자신의 옆에 있는 히지카타도 운전을 하고 있는 이름 모를 남자도 벨트를 메고 있지 않은걸 확인한 긴토키는 답지 않게 공손한 자세로 무릎 위에 손까지 올렸다.


" 근데, 히지카타 씨. 오늘 저는 무엇을 하면 될까요? "

" 가보면 알잖아. "


아니, 설명이 필요하다고 요 녀석아. 속마음과는 달리 미소를 잃지 않고 ' 그렇겠네요. ' 하며 다시 무릎 위 제 손으로 시선을 돌린 긴토키는 남자가 혹시 자신을 데리러 온 것에 화가 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헤매긴 했어도 아까 자신이 있던 장소가 히지카타가 오라고 한 장소 근처까지는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았는지 10분도 채 안되어 차가 멈춰섰다. 긴토키가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운전석에 남자가 재빨리 뛰쳐나와 좌석 문을 열어주자 처음 받아보는 대접에 얼떨떨한 기분으로 걸어나왔다. 긴토키가 내린 장소 바로 앞에 있는 건물을 살폈다. 빨간색 벽돌로 깔끔하게 지어진 건물은 가부키쵸에 있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화사한 느낌이 들었다. 가보면 알게된다고 말한 히지카타의 말과는 달리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해야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을 화사함이었다. 유리창 너머 내부를 살펴보니 여러개의 테이블이 있는 것이 꼭 레스토랑 같았다.


" 뭐 해. 들어와. "


어느새 건물 문을 잡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히지카타를 발견한 긴토키는 그제야 건물을 살피던 것을 멈추고 히지카타의 뒤를 좇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온 긴토키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이 곳은 레스토랑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을 굳혔다. 몇 번인가 자신도 양식을 파는 가게에서 입어본 적 있는 유니폼을 입고 있는 직원들과 토마토 냄새 비스무리한 것이 어디선가 맡아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입구에 서있던 직원이 히지카타와 자신을 안 쪽 자리로 안내하는 것을 보며 점점 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은 긴토키는 그렇게 남자와 마주본 채로 테이블에 착석했다. 아무 말 없이 직원이 따라 준 물을 마시는 히지카타를 보며 긴토키는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 히지카타 씨, 저 아무래도 뭘 해야 할지 하나도 모르겠는데요. "

" 레스토랑에 왔으면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

" …밥 먹기? "

" 잘 아네. 밥 먹어. "

" 그러면 일은요? 밥 먹고 시작하나요? "

" 무슨 소리지? "


긴토키는 자신의 얼굴이 지금 웃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답답함에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이 느껴졌다. 상대는 카타죠회의 후계자, 상대는 카타죠회의 작은 두목. 자칫 끊어질 것 같은 이성을 붙잡으려 긴토키는 괜한 허벅지까지 꼬집었다.


" 오늘 저를 부른 건 시키실 일이 있으셔서가 아니었나요? "

" 너한테 시킬 일 없는데. 내가 그렇게 따까리가 궁해 보여? "

" 그러면 도대체 왜 저를 부르신건데요? "

" 밥 먹으려고. "


아니 이 V자 앞머리 놈이. 긴토키는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뒤엎고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물컵에 든 물을 히지카타의 얼굴에 뿌리고 싶었다. 확실히 남자에게 무슨 일이든 하고 있다고 한 것은 자신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돈을 받을 수 있는 일이라는 카테고리 한정이었다. 

상대는 카타죠회의 후계자, 상대는 카타죠회의 작은 두목. 마치 염불을 외우듯 제 속을 진정시키기 바빠진 긴토키의 앞 테이블은 어느새 직원들이 서빙해온 음식들로 가득해졌다. 음식들을 본 긴토키는 하나같이 처음 보는 음식들인데 어찌그리 맛있어 보일 수 있는지 감탄했다. 방금전까지 남자에 대한 분노로 몸까지 부들 떨리던 차였는데 긴토키의 눈엔 더이상 남자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걸 과연 진짜로 먹어도 되는건가 하고 남자 쪽을 쳐다보니 남자는 이미 정갈한 자세로 식사를 시작한 상태였다. 아침 식사까지 충분히 먹고 온 자신의 식욕을 자극할 정도로 빛나 보이는 음식들을 더이상 무시하기엔 힘들어 졌는지 긴토키는 조심스럽게 포크를 들어 그릇 안 음식을 제 입에 옮겼다.


" 미친. "


양식을 그닥 좋아하지는 않는데다가 이렇게 포크로 무작정 찍어먹어도 되는건가 싶었던 요리는 무언가 화장품을 먹고 있는 게 아닌건지 의심이 갈 정도로 자신의 취향이 아니었다. 고급요리는 무슨 맛일지 궁금해 하는 자신에게 향신료가 가득해서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말해주었던 오토세가 정답이었다. 음식을 겨우 삼킨 긴토키가 묘한 시선이 느껴져 남자가 있는 쪽을 쳐다보자 그제야 자신도 모르게 뱉어서는 안될 소리를 뱉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이라는 소리가 나올정도로 맛있네요. 저 이런거 처음 먹어봐요. "


재빠르게 말을 고친 긴토키를 이상하게 쳐다보던 남자는 다시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가뜩이나 맞은 편 남자가 불편해 죽겠는데 취향도 아닌 요리를 비워야 하게 생긴 긴토키는 자신이 앉아있는 자리 밑에 갑자기 구멍이 뚫려서 이 자리를 탈출 할 수 있게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뒤로도 무거운 공기의 점심인지 저녁인지 모를 식사는 게속 되었다. 모든 요리가 화장품 맛이 나는 건 아니었지만 코로 들어가는지 귀로 들어가는지 억지로 먹다보니 맛있을 것도 맛있다고 느낄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어찌어찌 후식을 내오겠다는 직원이 눈 앞에 그릇을 치우자 그제야 뭔가 한숨을 돌린 긴토키는 나중에 혹시나 부자가 되어도 레스토랑은 오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 시무라 신파치와는 무슨 관계지? "

" 네? "


식사 도중엔 말 한마디 걸지 않았던 남자의 입에서 나온 것은 불쾌한 질문이었다.


" 갚아주고 있잖아. 그 녀석이 싼 똥을 네가 대신. "

" …같이 살아요. "

" 고작 그딴 이유로 그 돈을 갚고 있다고. "

"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어떻게 아세요? "

" 처음 만났을 때부터 거짓말만 하던 놈의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뭐하는 놈인가 조사 좀 해봤을 뿐이다. "


그다지 자신의 식솔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긴토키는 히지카타와의 사정청취와도 같은 대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처음으로 남자의 앞에서 미소를 긋지 못하고 무표정으로 되돌아온 긴토키의 앞에 히지카타는 품 속에서 어떠한 봉투를 내밀었다.


" 게다가 이토 놈 하고도 꽤 친하게 굴었던거 같은데 무슨 사이였지? "

" …. "

" 뭐, 어차피 없어진 놈이라 상관은 없지만. 읽어봐. "


정체를 알 수 없는 봉투를 받아든 긴토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남자와 시선을 한번 마주쳤다. 남자는 자신이 봉투 안의 것을 읽기 전까진 말을 이을 생각이 없는지 품 속에서 담배갑을 꺼내 담배를 필 준비를 시작했다. 결국 내용물을 확인하기 위해 봉투를 벌린 긴토키의 눈에 접힌 종이 하나가 들어왔다. 봉투 안에 든 종이를 꺼내 펼치니 변제자명을 바꾸기 전에 마지막으로나 보았던 대금업체와의 계약서였다. 왜 이런 것을 준건지 의아해하며 계약서의 내용을 읽어나가던 긴토키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고개를 들어 다시 남자를 쳐다보았다.


" 이토 놈 오른팔이었던 놈이 지금 내 밑에서 일하고 있어서 말이야. 네 얘길 아주 잘 알던데. 상환금은 꼭 이토 앞으로 가져오고 그 날엔 이토가 뭘 시키든 했다지? 노래를 부른 적도 있다면서 재밌어 하던데. "

" …그건. "

" 그거 이제 다 내 앞에서만 해. 네 머리론 이해가 안갈 것도 같아서 계약서 내용에도 집어 넣어봤는데 어때, 마음에 드나? "


살짝 종이를 꾸긴 긴토키는 남자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문드러져가는 긴토키의 속은 신경도 안쓴다는 듯 남자는 담배 연기를 허공으로 한 번 흘러보내더니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 해결사잖아, 뭐든지 해야지? "











기분이 좋지 않다. 이유는 또 사카타 긴토키라는 남자 탓이었다.

히지카타에게는 자신의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는 남자가 딱 한 명 있었다. 자신이 카타죠회에 들어온 이유도 그 남자를 좇아 들어온 것이나 다름 없었다. 남자의 이름은 곤도 이사오로 히지카타는 그에게 평생에 걸쳐도 다 갚을 수도 없는 은을 입었다. 곤도는 카타죠회 행동대장들 중에서도 '대장'이라는 직함이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히지카타가 카타죠회의 후계자가 된 지금도 그를 얼마든지 곤도를 대장이라고 부를 준비가 되어있을 정도로 말이다. 허나 그런 남자와 대적하며 그에게 큰 상처를 입게 하고 현재도 병원 신세를 지게 만든 남자가 있었으니 제 원수나 다름 없어진 이토 카모타로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히지카타가 후계자로 내정되고 이토 카모타로를 죽음으로 내몰자 잘라내어야 할 것을 잘 판단했다고 타메고로는 말했지만 실상은 곤도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일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없었다.  이미 복수의 대상은 죽어 없어졌다고는 하나 히지카타는 잡아 뺀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카타죠회 안에는 그의 흔적들이 아직 여기저기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가부키쵸를 돌면서 정리한 곳도 카모타로의 입김이 너무 세게 남아있는 곳들이었고 카타죠회 내부에서도 일명 카모 파 라고 불리는 카모타로의 세력들을 정리하는데에 힘 쓰고 있었다. 언젠가 카타죠회로 곤도가 다시 돌아오게 되었을 때 그를 건들일 만한 것들이 하나도 없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 그래서? "

" 그 자식 완전 재미있는 놈임다. 이토 말이면 뭐든 했으니까요. 언제는 노래도 불렀나 그랬을 검다. "


히지카타가 책상 위에 두었던 긴토키의 계약서 종이를 보고 카모타로를 배신하고 자신의 밑으로 들어와 있던 남자의 목소리가 커졌다. 


" 핫치 녀석 말론 그자식 분명 이토한테 몸도 팔았을 거라고 했슴다. 하긴 어쩔 땐 사무실에서 몇 시간이고 안나올 때도 있었으니 저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 "

" 나가봐. "

" 네? "

" 시끄러우니까 그만 떠들고 나가라고. "


히지카타의 톤이 달라진 목소리를 들어서였을까, 남자는 히지카타에게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사무실 밖을 나갔다. 남자가 나가자마자 히지카타는 괜한 의자를 발로 밀쳐 벽에 쳐박았다. 

[ 부르면 뭐든지 하는. 몸 파는 일 빼고요. ]

이 여우새끼가 또 거짓말을 해? 적당히 접히는 포물선을 그리는 눈웃음으로 넘기기도 벌써 몇 번째다. 자신이 그토록 증오하는 이토 카모타로가 여우새끼와도 관련이 있었을 줄이야.

저한테 알랑거릴 때는 아니었지만 이토와 함께 있는 여우새끼를 떠올리자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속이 매스꺼웠다. 그런 제 모습을 바짝 긴장하며 보고 있는 야마자키에게 히지카타는 여우새끼와 엮인 사무실에 전화해 새 계약서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이토 한정으로 뭐든지 하는 놈이었으면, 제 앞에서는 더 뭐든지 하는 놈이 되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아직 일이 남아있었던 히지카타는 오후에 접어들어서야 대금업체 사무실과의 일을 볼 수 있었다. 제 손에 들린 계약서에 여우새끼가 도장이든 지장이든만 찍으면 그 뒤로는 히지카타의 마음대로다. 계약서를 품에 챙긴 히지카타는 구겨진 여우새끼의 명함을 집어들어 전화를 걸었다.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는 수신음에 이 전화번호마저 가짜이면 정말 이 여우새끼를 가만두지 않으리라 추욕 대신 이를 갈았다.


" 휴대폰 번호는 거짓말이 아니었나보네. "

[ …히지카타 씨? ]


이윽코 연결된 전화너머로 여우새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된거냐고 금방이라도 핵정하고 싶었던 제 자신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그는 전화너머 여우새끼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는 건 만나서 들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 문자 보낼테니까 그 쪽 주소로 와. "

[ 네? ]

" 뭐든지 한다며. "


히지카타에게 있어 밥은 배를 채우기 위한 정도면 된다고는 생각하는 정도다. 하지만 제 입맛 만큼은 그렇게 따라주지 않았다. 딱히 반찬 투정을 하는 것은 아니어도 그가 음식을 제대로 먹으려면 느끼하고 달짝지근한 것이 꼭 껴있어야 했다. 이를테면, 마요네즈 같은 것 말이다. 그에겐 단순히 그러한 맛이 좋은 것 뿐이지만 주변에서 자신의 음식취향을 유별나게 쳐다본다는 것을 알고 있다. 카타죠회 후계자가 된 이후로 제 자신이 주인공인 우스갯소리에 민감해진 그는 그런 자신의 취향을 숨기고자 야마자키만 동행하여 몇몇가게에서 스페셜오더로만 만들어진 요리를 먹었다. 

여우새끼에게 문자를 보낸 곳은 그런 레스토랑 가운데 하나였다. 이미 예약은 어제 마친 상태이지만 다시 전화를 걸어 같이 가는 동행이 있다는 이야기를 마치고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나갈 준비를 하면서도 여우새끼가 이토를 향해 웃는 다거나, 이토의 손이 여우새끼를 만지고 있는 것이 저절로 떠올라서 평소보다 준비하는데에 시간이 걸렸다. 거울을 보니 곤도가 항상 좀 풀고 다니라 했던 그의 미간이 잔뜩 좁혀져 있었다. 표정을 숨기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에게 배운대로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열심히 얼굴에 힘을 풀어봤지만 이상하게도 자꾸 표정이 구겨졌다. 결국 그는 폼잡는 것 같아 그다지 쓰지 않으려고 했던 선글라스를 챙겨 야마자키와 나왔다.

레스토랑에 도착한 히지카타는 평소와 같은 메뉴를 준비해달라고 말하며 테이블에 앉았다. 원래는 사람이 북적대는 장소지만 히지카타는 일부러 가게의 브레이킹 타임을 이용해 식사를 하곤 했다. 카타죠회 놈들이 아닌 사람들만 주변에 있다고 해도 보는 눈은 어디에든 있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런 그의 제멋대로인 성정을 레스토랑에서는 곤란해했지만 히지카타 토시로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남자는 아니었다.


" 히지카타 님, 일행분의 식사도 같은 걸로 준비할까요? "


요리를 하던 주방장이 직접 나와 히지카타에게 묻자 히지카타는 알아서 하라고 대답하려다가 잠시 고민하고는 한 개의 다른 코스는 정상적이게 준비하라고 이야기했다. 자신의 스페셜오더는 크림파스타엔 크림을 더 넣거나 다른 소스가 발려져야하는 곳에 마요네즈를 발라야하는 그런 고약한 코스였으니 말이다. 그러기를 몇 십여분. 제법 오래 기다린 것 같은데 남자가 연락은 커녕 코빼기도 비치지 않자 히지카타는 뭐가 그리 거슬리는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런 그의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아직 저장은 하지 않았지만 하도 곱씹다보니 외워진 여우새끼의 번호가 떠있었다.


" …뭐야. "

[ 히지카타 씨? 안녕하세요. 저.. 사카타 긴토키입니다만 혹시 데리러 나와주실 수 있나요? ]


여전히 제 주제를 모르는 여우새끼는 기 막힌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지껄이고 있었다. 곤란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긴 했지만 히지카타는 저한테 한 소리가 맞나 싶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전화 너머로 들리는 풍경의 소리를 듣다가 결국 그는 욕지기를 삼키며 대답했다.


" 어딘데. "

[ …아! 여기가 어디냐면, 그… '가라쿠리'라고 적힌 큰 간판이 보이는 곳이에요. 저 이런데는 처음 와 봐서 뭐라 설명 드려야 할… ]


여우새끼의 말을 듣고 바로 전화를 끊은 히지카타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야마자키에게 손짓을 하며 들어오라고 사인을 보냈다. 재빠르게 들어온 그에게 대강의 장소를 설명하며 그를 데리고 오라 명령하려 했지만 잠시 고민하더니 야마자키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길을 헤매기라도 한건지 이상한 골목 벤치에 앉아 있던 그를 태워 다시 레스토랑으로 와서는 식사를 시작했다. 여우새끼는 그 와중에도 무언가 이상한 것들만 질문해댔지만 히지카타는 공복이었던만큼 일단 식사에 집중하고 싶었다. 여우새끼가 또 특유의 눈웃음을 쳐가며 이런 것은 처음 먹어본다느니 말도 안되는 소리를 했지만 히지카타는 여전히 신경쓰이는 구석이 있어서인가 일부러 그와의 시선이 마주치지 않도록 식사를 이어나갔다. 

어색하게 나이프와 포크를 잡고 있는 손이 고개를 숙여도 절로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음식을 삼키던 히지카타는 저 손으로 이토에게 무엇을 했을지에 대한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제 취향이 있나 고민하게 만드는 얼굴과는 다르게 길고 곧게 자리 잡은 손은 계속 그의 눈에 밟혔다.

직원이 테이블을 치우자 그제야 히지카타는 여우새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더 허여멀건해 보이는 것이 신경쓰였다.


" 시무라 신파치와는 무슨 관계지? "


조사로 알게된 시무라 신파치는 남자는 긴토키와 전혀 연고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올린 순간 여우새끼는 처음으로 미소가 아닌 살짝 일그러진 표정을 그렸다. 어쩐지 그 못난 표정이 히지카타는 마음에 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글생글 웃을 땐 왜 웃는 건지 궁금하기만 했는데 저런 찡그린 표정은 그의 속내가 보이는 것 같아서 였기 때문이었다. 

물어본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이해가지 않았다. 별 관계도 아닌 남자의 돈을 갚아주면서 힘겹게 사는 주제에 그마저도 제대로 된 이유도 없다니, 이해할 수 있을리 없었다. 허나 히지카타가 사실 궁금한 것은 그깟 애티가 나는 남자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도 적당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어떻게 아세요? "

" 처음 만났을 때부터 거짓말만 하던 놈의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뭐하는 놈인가 조사 좀 해봤을 뿐이다. "

" …. "

" 게다가, …이토 놈 하고도 꽤 친하게 굴었던거 같은데 무슨 사이였지? "


이토의 이름을 올리자 남자의 표정이 일그러지다 못해 구김살이 잡혔다. 이번에는 대답조차 하지 않으려는지 입술을 닫은 채다. 히지카타는 그런 남자에게 제대로 실토하라고 성을 내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분명히 듣고 싶다고 생각해서 꺼낸 이야기였는데 막상 말을 뱉으니 대답을 왠지 듣기가 싫어졌기 때문이다. 이토의 것을 빨았을 지도 모르는 저 입으로 이토와의 밤이 어땠는지 따윌 들었다간 히지카타는 무언가 참지 못할 것 같았다.


" 뭐, 어차피 없어진 놈이라 상관은 없지만. 읽어봐. "


히지카타는 자신이 준비해온 계약서를 남자에게 들이밀었다. 남자는 이게 무엇인가 하는 표정으로 봉투를 쳐다보다가 이윽코 봉투 안 계약서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별로 좋지 않았던 표정이 살짝 펴지면서 놀란 듯한 기색이 드러난다. 히지카타는 그런 그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이어 말했다.


" 이토 놈 오른팔이었던 놈이 지금 내 밑에서 일하고 있어서 말이야. 네 얘길 아주 잘 알던데. 상환금은 꼭 이토 앞으로 가져오고 그 날엔 이토가 뭘 시키든 했다지? 노래를 부른 적도 있다면서 재밌어 하던데. "

" …그건. "

" 그거 이제 다 내 앞에서만 해. 네 머리론 이해가 안갈 것도 같아서 계약서 내용에도 집어 넣어봤는데 어때, 마음에 드나? "


그래, 남자가 이토와 무엇을 했든 간에 과거의 이야기다. 이토의 이름을 듣고 그다지 좋은 표정이 아니었던 것을 보면 그다지 즐기면서 그런 짓을 해왔던 같지도 않다. 이런 더러운 남자가 자신을 유혹을 해왔다는 것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히지카타는 이즘에서 계약서를 갱신하면서 결정한대로 남자의 유혹을 받아주기로 하였다. 다만 남자의 어디에서도 더 이상 이토의 구더기 같은 냄새를 풍기는 부분이 있어선 안되었다.


" 해결사잖아, 뭐든지 해야지? "


어르듯 말하던 히지카타는 긴토키의 앞에 지장을 찍을 수 있도록 인주를 놓았다. 자신의 얼굴 올려다보던 하얀 남자는 아무런 대답없이 계약서에 지장을 남겼다. 히지카타의 입술이 만족에 찬 미소를 만들어냈다. 남자가 계약서를 다시 히지카타에게 밀어넘겼다. 히지카타는 그가 넘긴 계약서를 품에 넣으며 직원이 내온 커피를 홀작였다. 


" 먹지 그래. 아직 볼 일도 있는데. "


케이크로 후식을 주문한 남자가 고개만 수그린 채 멈춰있자 히지카타가 말을 걸었다. 참새마냥 움직이던 입은 벌써 오랜시간 멈춰있다.


" 안 먹을 거면 이만 일어날까? "

" …들어가 봐도 되나요? "

" 볼 일이 있다고 했잖아. 새 계약도 했으면 바로 계약이행을 해야 할거 아냐. "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긴토키의 팔을 붙잡고 히지카타는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대기하고 있던 야마자키가 제게 허리를 숙이고는 차 문을 열며 히지카타가 타는 것을 기다렸다. 그런 야마자키에게 히지카타는 고개를 절레 지었다.


" 됐어, 이대로 갈 곳이 있으니까 넌 사무실에나 가 있어라. "

" …그런! 혼자서 자꾸 그렇게 돌아다니시면 안된다니까요. "

" 시끄러, 이번엔 혼자가 아니잖아. "


보란듯이 제가 끌고나온 긴토키를 가르키고는 무어라 소리치는 야마자키를 뒤로 하고 발걸음을 움직였다. 

가부키쵸에서 히지카타가 마음에 드는 점은 딱 하나였다. 밥 먹을 곳, 술을 마실 곳, 그리고 제 욕정을 풀 수 있는 곳이 어딜가나 널려있다. 

긴토키를 이끌고 길만 한 번 꺾으면 있는 그런대로 쓸만한 기억이 남아있던 모텔로 들어왔다. 카운터에 서있던 여직원이 저를 알아보고 목인사를 건넸다. 히지카타는 여직원에게 카드를 넘기고는 큰 방을 달라고 말을 걸었다. 두리번 거리는 긴토키의 팔을 잡고 여직원의 길 안내를 따라 엘레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적당히 어두운 카키색 복도를 따라 멈춘 방 앞에서 여직원이 방열쇠를 건넨다. 여직원에게 수고했다는 의미로 적당히 지갑에서 돈을 꺼내 그녀의 유니폼 주머니에 찔러넣어주자 여직원은 다시 한 번 목례를 하고는 자신들이 걸어왔던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 여기서.. 뭘 하시려고요? "


여직원이 사라지자 그제야 입을 연 긴토키가 뻣뻣하게 서있다. 히지카타는 열쇠로 방을 열자마자 그런 긴토키를 방에 집어넣었다.

침대까지 갈 시간도 아깝다.

그리 생각을 마치곤 문 옆 벽으로 긴토키를 밀어넣고 히지카타는 거칠게 입술을 밀어 붙였다. 당황한 것인지 저를 밀어내기 시작한 긴토키의 팔목을 부여잡고 그의 입안을 마저 탐색하듯이 휘저었다. 반대쪽 손을 긴토키의 상의 안으로 밀어넣자 그는 잊고 있었다는 듯 다시 버둥대기 시작했다. 그런 그를 아예 벽에 가두려고 히지카타는 한 쪽 허벅지를 긴토키의 다리 사이에 넣어 그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밀었다. 반항을 멈춘 남자에게 얄작한 소리가 나도록 집요하게 키스하던 히지카타는 긴토키의 상의를 완전히 벗기고 나서야 입을 뗐다. 

예상한대로 남자와의 키스는 역겹지 않았다. 히지카타는 설핏 웃고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긴토키는 숨쉬는 것조차 까먹었었는지 코와 뺨이 발갛게 물들어서는 참던 숨을 힘들게 내뱉고 있었다. 


" 이게…무슨 짓…. "

" 레스토랑에선 밥을 먹었지. 모텔, 그것도 가부키쵸에 있는 모텔에서 하는 건 그럼 뭐겠어? "

" 저는 이런 건.. "


키스만으로도 지친 듯한 남자를 끌고 침대로 가 이불 위로 던지듯 눕혔다. 올라타서 제가 벗겨놓은 상반신을 보니 얼굴만큼, 아니 얼굴보다 더 하얀 몸이다. 정복욕을 돋구는 흰 캔버스에 금방이라도 달려들 준비가 된 히지카타는 그의 목덜미부터 물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성감대를 찾기 위해 벗겨진 몸 여기저기를 지분거렸다. 하지 말라는 듯 제 어깨를 망치질하듯이 안간힘을 쓰는 남자를 무시하며 왼쪽 쇄골 끝까지 훑자 일순 긴토키는 주먹질을 멈추고 별난 신음을 냈다. 

우선은 여기인가. 공략할 곳을 하나 찾아내자 눈을 빛낸 히지카타는 사냥감인 긴토키가 더이상 발버둥 치지 못하도록 두 팔목을 한꺼번에 잡고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그렇게 다시 그의 몸을 탐하려던 히지카타를 긴토키가 제 무릎을 끌어 막아서며 소리쳤다.


" 나는 이런건 안 한다고, 개새끼야!! "


저 입에서 거친 욕을 내뱉듯이 나온건 처음이라 히지카타도 몸을 멈추고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기세등등하게 욕을 외친 것 치곤 그의 눈가엔 살짝 눈물도 맺혀있었다.


" 이토랑은 했잖아? "

" 뭔소리야, 씨발. 내가 그 옘병할 놈이랑 이딴걸 왜 해? "

" 안 했다고? "

" 그래!! 처음에도 말했잖아. 몸 파는 일은 안한다고! "


억울함이 가득찬 눈으로 뭐 더러운 거라도 묻은 거 마냥 긴토키는 열심히 제 입술을 한쪽 팔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 아까부터 말이 짧네. "

" 이딴 상황에서도 대접해주길 바라냐? 너 몇 살이야, 절대로 나보다 네놈이 더 어리다에 내 불알 두 짝을 건다. "

" 하. "

" 돈 주는 날엔 꼬박꼬박 찾아갈 거고 계약서대로도 할건데, 이따위 짓 또 하면 차라리 혀 깨물고 뒈진 후에 망령이 되서 널 저주할거니까 그렇게 알아. "


안녕히 계세요, 개새끼 히지카타 씨. 라고 덧붙이며 제 앞에 중지를 들이민 긴토키는 침대 밖으로 걸어나가 히지카타가 벗긴 자신의 옷을 주워들고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런 긴토키를 굳이 막을 생각은 없었는지 그저 그가 나가는 것을 쳐다보던 히지카타는 그가 나가자 마자 처음으로 큰 소리를 내며 한참 웃었다.


" 안했다 이거지. "


재밌다, 재밌어. 히지카타는 남자가 너무 재미있었다. 이렇게 시원하게 웃어본 것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생글생글 웃고 꾸역꾸역 예의 바르게 굴더니. 이게 본성이었나. 하지만 제 기분을 거슬리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장난감을 하나 주워서 갖고 놀 수 있을 만큼 다 논 줄 알고 끝장을 보려 했더니 다른 기능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라는 느낌으로 흥미롭게 다가왔을 뿐이다. 히지카타는 셔츠 목을 풀어헤치고 담배갑에 남아있던 돛대를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자 희멀건 연기가 제 시야 앞을 장식했다. 그가 이토와 아무런 밤관계도 없었다는 건 무언가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지만 한 편으론 다른 욕구를 일으켰다.




개새끼, 젠장할 새끼. 무슨 수식어가 붙은 욕을 해도 긴토키의 기분은 풀어지지 않았다. 제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 식솔에 대한 이야기와 이토의 이야기를 한 것도 치미는 부아를 겨우겨우 집어넣을 정도였는데 모텔까지 끌고와서 이런 짓을 할 줄이야. 

눈치가 없진않아 설마설마 하면서도 따라들어온 모텔이지만 바로 그 설마하던 입술박치기가 시작됐을 땐 긴토키는 눈 앞까지 캄캄해질 뻔 했다. 가부키쵸에서 일하는 만큼 많은 사람을 마주친 긴토키이다. 게이든,트렌스젠더든 자신은 전부 이해까진 못 해도 사람 대 사람으로서는 아무런 문제가 여기며 살아왔었다. 하지만 그 후계자 놈이 게이인데다가 저한테 불끈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입술을 닦아도 닦아도 입 안에 뭐가 남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긴토키도 나이가 있으니 연애를 한 번도 안해보진 않았다. 궁색한 인생임에도 자신을 좋아해주는 여자가 있는게 스스로도 놀라웠지만 그도 연애를 했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오래전의 이야기이어서 키스 자체도 그만큼 오랜만이었다. 남자로부터의 키스가 무언가 느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닿은 부분들이 얼얼한 느낌은 스스로 알고 있던 키스하고는 너무 달라서 인걸까. 입가 주변이 쓸리도록 닦아대던 긴토키는 모텔 밖을 나오자마자 보이는 빈 깡통을 멀리 날려보냈다. 깡통이 멀리 날아가 땅에 쳐박히는 것을 본 긴토키는 그대로 주저앉으며 머리를 쓸었다.


" 그 새끼가 잘못한 거니까…. "


분명 그 변태 자식이 자신에게 해를 가한 것은 맞다. 그런데 그 변태가 누구였던가.

상대는 카타죠회의 후계자, 상대는 카타죠회의 작은 두목. 이제사 자신을 진정시키는 주문을 읊조려봐야 소용없단 것은 알지만 긴토키는 마지막에 역시 가운뎃손가락까지는 날리는 것이 아니었다고 후회했다.


" 역시 형씨네. "


부여잡은 제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자 긴토키는 그림자의 주인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 소고? "

" 여기선 처음 보네요. 여기는…아하, 데이트? "

" 아니거든! "

" 모텔 가 앞에서 그런 말을 해봐야 설득력 없는 거 알죠? "

" 너야말로 여기 왜 있는건데. "


오키타는 긴토키에게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긴토키는 예상치 못한 인물을 만나서인지 자연스럽게 오키타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 아가페 헤븐일을 못하니까 부업이랄까요. "

" 여기서? "

" 아, 형씨는 모르겠구나. 저 T대생이거든요. "


아무리 학벌에 관심없는 긴토키더라도 들어본적 있는 대학 이름이었다. 가부키쵸는 저마다 가면을 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장소다. 그래서 많은 사람과 연이 닿아있어도 정말로 이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 면을 트고 개인적으로 밥까지 먹은 적이 있는 오키타이지만 그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은 것도 지금이 처음이었다.


" 연락 못해서 미안. "

" 형씨 바쁜거야 다 아는데 뭘 그런거 가지고. "

" 다친게 너가 아니라서 다행이다. "

" 만년 말단 애들이 다쳤어요. 그래도 쿄시로 씨는 엄청 책임감 느끼나봐요. 형씨야 말로 데이트가 아니라면 이런데서 뭐해요? "

" 그냥 좀…. 돌아가는 길이었어. "


당한 자신도 믿기지 않고 잊고 싶어 죽고 싶은 일이다보니 긴토키는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카구라와 신파치에게도 절대 말하고 싶지 않을 정돈데 남 책 잡히는 일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오키타에게는 특히나 더 말이다.


" 흐응. 그럼 전 가 볼게요. 일 중이어서. "


긴토키가 무언가를 숨긴다는 것을 모를리 없는 소고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소고가 걸어가는 걸 잠시 바라보던 긴토키는 축 쳐진 몸을 옮기며 핸드폰을 꺼냈다. 신파치랑 카구라 집에 돌아왔을까. 









" 긴 씨, 너무 오래 있어도 건강에 안 좋아요. "


2주가 꼬박 흐르고 나서야 긴토키는 신파치,카구라와의 약속을 지키러 목욕탕에 올 수 있었다. 수도관이 동파된 공용 샤워룸은 여전히 고쳐지지 않아서 며칠동안 코인샤워룸에 의지했더니 이렇게 느긋하게 목욕을 즐길 수 있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 이러면 딸기 우유가 더 맛있어져. "

" 목욕 후엔 커피 우윤데, 취향 진짜…. 긴 씨 진짜 당분으로 요절할걸요. "

" 신파치, 커피 우유나 딸기 우유나 당도로 따지면 그게 그거거든? "


신파치의 잔소리가 더이상 듣기 싫었는지 긴토키는 제 몸을 녹이고 있었던 온탕에서 나왔다. 신파치의 옆에 있는 작은 목욕의자에 앉아 물을 틀면서 꼭지에 입구에 손을 막아 신파치에게 물이 가도록 하자 신파치는 펄쩍 뛰면서 때수건을 던졌다. 긴토키는 자신의 얼굴에 맞고 떨어진 때수건을 주워 거울 앞에 배치된 바디워시를 묻혔다.

더러워. 긴토키는 자신의 목덜미 근처를 긁으며 생각했다. 쉽게 떨쳐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남자의 손길이 닿은 부분들은 목욕할 때 유난히 거슬렸다. 한 번은 너무 빡빡 긁어서 피가 난 적도 있다. 지금은 그 때 보다야 많이 괜찮아 졌지만 하마터면 몸 파는 남자로 전락했을 위기였으니 신경 쓰이는 것은 마찬가지다.

[ 손가락이 길고 예뻐서 피아노 치기 좋겠네요. ]

긴토키는 몸을 파는 일에 대해 이리도 기휘하는 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그와 관련된 트라우마가 있어서였다. 긴토키가 아직 가부키쵸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막노동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 때 현장 근처에서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는 요시다 쇼요를 만났다. 쇼요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곧잘 말을 걸거나 인사를 하는 사람이었다. 바로 옆이 공사현장이 되버려 학원에도 소리가 울릴텐데 오히려 먹을 것을 들고 고생한다며 격려를 하러 와줄 정도로 사람이 좋았다. 사람에 대해 쉬이 믿지 못하던 그 때의 긴토키조차 처음 경계를 풀고 친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딱히 쇼요에게 피아노를 배우는 건 아니지만 쇼요 밑에서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이 부러워 긴토키는 언제부턴가 쇼요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따르게 되었다. 쇼요 또한 그런 긴토키가 싫지는 않았던 듯 긴토키가 말을 안들으면 선생님 말을 안들을거냐면서 잔소리를 시작하게 되었다.

쇼요의 피아노 학원은 바로 옆 공사현장이 말해주듯 재개발 위기에 처해있었다. 간혹 피아노 학원과는 어울리지 않는 장정들이 학원 앞에서 쇼요를 곤란하게 하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지만 긴토키는 제 자신이 어떻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보고도 모른 척을 하기 바빴다. 하지만 그 때 그래서는 안되었다. 어떻게든 쇼요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없었는지 물어야 했었다.

목욕거품을 씻어내기 위해 샤워기를 튼 긴토키는 제 얼굴에 먼저 물을 뿌렸다. 쓸 때 없는 회상을 해버렸다는 듯.


" 카구라는 제가 저녁 먹일게요. "

" 하아…. "

" 왜 그러세요? "

" 오늘 가는 곳, 사이고거든. "


긴토키의 말에 신파치가 힘내라는 듯 어깨를 토닥이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사이고는 가부키쵸에서 여러 의미로 유명한 오카마 바였다. 일반적인 오카마 바와는 달리 정말 여자가 되고 싶은 건지 의심이 가는 우직한 아저씨들로만 가득하다는 것도 그 이유중 하나였지만 그 곳의 마마인 사이고 토쿠모리는 정말 유명인사였다. 애초에 가게 이름도 마드모아젤マドモアゼル인데 그 곳을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고 사이고라고 부르고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사이고는 긴토키가 내심 자신의 가게에서 일해주는 것을 바라고 있다. 몸 파는 일을 싫어하는 긴토키지만 그의 우악스러움에 그 곳에서 일할 때는 자신도 여장을 해야만 했다. 여장이라고 해봐야 그와 겨우겨우 타협하여 요상한 가발을 끼고 살짝 화장을 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그만큼 긴토키로서 감당하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헬퍼로서 보통 일하기 어려운 곳이 생긴다 하면 다음 번 부터 발을 빼면 되지만 사이고는 오토세와 친한 이들 중 한 명이었기에 쉬이 그럴수야 없었다. 긴토키가 조금이라도 싫은 티를 내거든 그대로 오토세의 귀에 들어가 잔소리가 시작된다.

시간이 애매했기에 긴토키는 사우나를 한 번 더 하고싶은 욕구를 누르고 신파치에게 인사를 하며 탈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캐비닛을 열어 핸드폰부터 꺼낸 긴토키는 역시나 오늘도 와있는 문자에 수신함부터 눌렀다.

이토의 괴롭힘도 견뎌낸 긴토키지만 히지카타의 생각은 정말 읽을 수가 없었다. 계약서의 내용은 이토 때와 비슷하면서도 오히려 더 까다로워졌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하루에 한 번씩 뭐하는지 자신에게 보고하라는 것이었는데 남자는 보고문자를 보내고 나면 꼭 대답하는 문자를 답장해주곤 했다. 답장이라고 해봐야 그래라던가 알았다라던가 어쩔때는 ㅇ 이라고만 보낼 때도 있어서 이럴거면 왜 자신에게 보고를 하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덕분에 긴토키의 메일수신함은 남자가 보낸 알았다로 잔뜩 도배가 되어 있었다.

[ 그래 ]

오늘도 짧게 와있는 문자를 보며 긴토키는 핸드폰을 비행기모드로 돌렸다. 일이나 하자─. 라고 생각하면서.

목욕탕을 나온 긴토키는 스쿠터를 타고 아직 해가 지지 않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이고는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이라서 영업시간은 4시간이나 뒤인데도 영업준비는 늘 일찍 시작 하는 가게였다. 오토세와 친한 사람이어서인지 늘 파티를 하는 파리스처럼 사이고는 코스프레 기간이라는 이벤트를 매주 진행했다. 말 그대로 무언가 테마를 정해 코스프레를 하며 영업하는 방식이었는데 자주 보는데도 영 그들의 코스프레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 이번주, 간호사 라고 했던가. '

병원놀이를 하자며 저를 괴롭힐 사이고를 떠올리니 긴토키는 벌써부터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어느덧 환락가다운 골목 풍경이 나오자 긴토키는 아가페 헤븐의 간판부터 쳐다보았다. 아가페 헤븐은 사흘 전부터 다시 영업을 시작했다. 허나 그 사건 이후로 관둔 호스트가 몇 있어서 가게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아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심지어 오키타조차 가게에 나오는 일이 줄었다고 했다. 2주전, 우연히 마주친 오키타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긴토키는 골목을 꺾어 지하가게들이 많은 장소로 이동했다. 아가페 헤븐이 있는 곳은 지상부터 휘황찬란한 호스트클럽이나 캬바쿠라가 있는 곳이지만 뒷 편 골목은 사이고처럼 특이한 가게들이 많은 곳이었다. 뭔가 좋지 않은 느낌마저 드는 골목 가운데에서 유난히 공주풍의 눈에 띄는 간판이 보이자 긴토키는 스쿠터를 멈춰세우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 어머머, 얘들아 파코 왔엉! "

" 파~코~ "


윽. 긴토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파코는 사이고가 자신에게 붙여준 별명이었다. 제 자신도 신경쓰이는 파마머리를 이름으로 바꿔부른 것은 마음에 안들었지만 그녀에게 불만을 말할 수 있을리가 없어 가만히 있었더니 주변에서 조차 자신을 파코라 부르기 시작했다.


" 마마는? "

" 글쎄, 파~코~. 좀 들어봐, 요새 마마 기분이 영 안좋아서 말이야. 가게 준비 시간에도 방 안에서 안나오는 거 있지? "

" 이게 바로 인생에 한 번 씩은 온다는 소녀의 그 날이라는 걸까낭? "


아직 여장을 덜 마친 이들조차 호들갑을 떨며 긴토키에게 달라붙었다. 그런 그들 사이를 헤집고 아즈미가 긴토키에게 다가왔다.


" 그만하고 다들 가서 마저 준비나 해. 파코 쨩은 마마가 잠깐 보자고 하던데 어서 가봐. "


아즈미는 가게에게 두번째 마마같은 준비로 언제나 이렇게 상황을 적당히 정리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아즈미의 말에 조용히 고맙다고 말하며 긴토키는 가게 뒷 편으로 향했다. 긴토키가 일해 온 가게의 대부분은 홀 쪽은 화려하고 뒷 편은 그렇지 않은 쪽이지만 사이고만큼은 이 뒷 편조차 여러 여성스러운 용품들로 잔뜩 꾸며져 있다. 그만큼 필요 없어지는 용품들도 자주 있어서 카구라에게 방을 꾸미라 건네 물건의 대부분은 이 곳에서 코스프레기간이 끝나면 얻어온 것들이 많았다. 물론 카구라에게는 진실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말했다가는 무슨 짓을 하며 비뚤어질지 감도 안잡힌다고 생각하며 긴토키는 여왕님 이라고 적힌 방문을 열었다.


" 파코. "

" 잘지냈어,마마? "

" 파코, 빙빙 돌려 말하지 않을게. 너 정보책이라는 게 사실이냐? "


평소의 여성스러운 톤이 높은 말투는 버린 사이고를 보며 대화가 길어질 것 같다고 느낀 긴토키는 열어둔 방문을 닫았다.


" 정보책? "

" 카타죠회 놈들의 개가 됐냐, 이 말이야. 일단 너도 오토세의 사람 중 하나니까 이런건 확실히 해야하는 거잖아. "

" 뭔소리야,그게? 그 놈들한테 빚진 돈 때문에 몇 번 만났을 뿐. 그 외엔 없어. "

"  사실이겠지? 요즘 카타죠회 녀석들 마약까지 다시 손댄 것 같아서 우리들도 신경이 바짝 섰어. 얼마 전엔 오토세 클럽에서도 그 마약 판매하는 놈 걸려 들었고. "

" 할망구도 그렇고 왜이리 다들 날 의심 못해서 난리야. 나같은 놈이 그런 간 큰 짓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쓸 때 없는 부분에서만 높게 평가해주는 거 필요 없거든? "


오토세는 마약으로 인해 남편을 잃었다. 그 이후로 마약관련이면 치를 떤다는 것을 긴토키도 잘 알고 있다. 긴토키는 뒷머리를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 그게 걱정인거야. 쓸 때 없는 일에 휘말리지 말라고. "

" 나는 그냥 하루에 한 번 푸딩이라도 먹을 수 있으면 족해. 알잖아. 이만 일하러 갈게. "


긴토키는 손을 저어보이며 사이고의 방문을 닫고 나왔다. 사이고도 오토세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것은 알고 있다. 사이고의 말대로 가부키쵸의 거리 분위기가 흉흉해졌기 때문에 카구라나 신파치같은 어린 아이들이나 유랑자같은 자신은 불상사에 엮이기 쉬운 상태였다. 아무리 오토세의 온정을 받고 있다고 해도 오토세가 제 목숨까지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어서 거리 분위기가 안 좋을 때는 충분히 몸을 사려야 했다.

그런 점에서 히지카타와의 연락이나 히지카타를 대면해야하는 일은 껄끄러웠다. 대면 정도면 넉살이라도 떨지 그 남자가 자신에게 손까지 대려고 한 사실도 있지 않은가. 머릿속으로는 알지만 긴토키는 정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저 히지카타가 이이상 자신에게 별난 짓을 하지 않았으면 하고 기도하는 수 밖엔.

긴토키는 일이 시작되면 제 꼬라지를 보고 또 잔소리를 할까 싶어 바구니에 들어있던 양갈래 가발을 머리에 붙였다. 화장도 미리하는 편이 좋을까 생각했지만 시간이 빠듯할 것 같아 급한대로 립스틱만 대충 칠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사이고에 오면 늘 긴토키의 위치는 주방 근처였다. 메이드 카페 마냥 취급하는 음식이 많고 심지어는 그 음식을 꾸며서 내줘야 했기 때문에 가장 일손이 부족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긴토키는 도착한 주방에서 일하는 요리사 켄이치와 서로의 안부를 묻고 팔을 걷어올렸다.


" 파코, 거기 끝났어? "

" 응, 담기만 하면 될 것 같아. "


이런저런 야채손질과 과일손질을 반복하며 바로바로 쓸 수 있도록 플라스틱 통에 구분해 담았다. 켄이치가 만지기 쉬운 주방 안 판대로 옮기고 나면 가게 오픈 전에 해야할 일은 어느정도 끝난 거나 다름없다. 

주방 안으로 들어온 긴토키는 시계부터 확인했다. 빨리 한다고 했는데도 한시간 뒤면 가게가 열릴 것 같다. 사이고는 꾸며져 나오는 요리 탓인지 요리 사진을 찍어 SNS에 자랑하려고 오는 손님들이 많았다. 손님들만 보면 오카마 바가 맞나 싶을 정도로 젊은 남녀 커플들이 주된 층이다.  처음엔 이런 상황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사이고였지만 가게를 운영 못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겼는지 오히려 요리의 메뉴를 더 복잡하게 만든다거나 신메뉴를 매번 내는 식으로 하여 손님들의 발걸음이 끊기지 않는 것을 택했다. 오카마 바 마드모아젤이 아닌 레스토랑 사이고라는 별칭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통을 다 옮긴 긴토키가 그릇을 정리하려고 선반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선반대 근처까지 왔을때 평소보다 더 소란스러워진 데다가 무언가 깨지는 소리까지 들은 긴토키는 한숨을 내쉬며 빗자루를 챙겼다.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그렇게 수다를 떨고 춤을 춰대니 오픈 전부터 오카마들의 뒷치닥거리도 긴토키의 몫이었다.


" 또 뭘 깨트린 거… "

" 아직 영업시간이 아니라고 말하잖아! "

" 근데 이 남자 제법 괜찮지 않앙? "


빗자루를 들고 나온 긴토키는 자신이 예상했던 상황이 아닌 전혀 다른 상황에 쳐해진 가게 안 상황에 발걸음을 멈췄다.


" 하, 오늘은 여장까지 하고있네. "


뭐야, 저 놈이 왜 여기에 있는거야. 긴토키는 가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자의 등장에 아무 말도 못하고 서있었다. 남자가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던 다른 오카마들도 무슨 상황인가 싶어 남자를 더이상 제지 하지 않았다. 남자는 그런 오카마들을 밀치고 의자에 걸터앉으며 긴토키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말을 이었다.


" 여기도 지명제도가 있나? 저 여우새끼를 부르고 싶은데. "


남자의 말에 오카마들의 시선은 긴토키에게 모아졌다. 긴토키는 들고 있던 빗자루를 길다란 의자 옆에 세워두고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오카마들은 일단 자리를 비켜주기로 마음 먹었는지 홀을 나와 가게 뒷편으로 움직였다. 아즈미가 떠나기 직전 마마를 불러오겠다며 주먹을 꾹 쥐고 싫은 표정을 짓고 있는 긴토키에게 살짝 귓속말을 남겼다. 


" 여긴 왜 왔어? "

" 이제 착한 척은 아예 안하기로 했나보군. "

" 착한 척이 아니라 비굴하게 굴었던 거야. "

" 조금 마음에 들었었는데 말이지. "


히지카타는 바 카운터 너머에 있는 글라스를 들어 긴토키에게 흔들어보였다. 긴토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바 뒤로 가 술을 집어 그의 빈 잔에 따라주었다. 귀엽게 생긴 잔을 들고 있어도 그림이 되는 남자를 보니 왠지 속이 안 좋았다.


" 그 것도 마음에 들어. "


긴토키가 따라준 술을 한 모금 마시더니 유리잔이 든 손으로 검지를 들어 긴토키의 양갈래 가발을 가르킨다. 순간 제 차림새가 어땠는지 깨달은 긴토키는 살짝 얼굴을 붉히고 가발을 거칠게 뜯어냈다. 남자는 그런 긴토키의 모습이 뭐가 그리 재밌는 것인지 웃으며 남은 술을 들이켰다.


" 돌아가. 영업방해 하지말고. "

" 네 가게도 아닌데 뭘 그리 까다롭게 굴어? 따지자면 여긴 내 가겐데. "

" 돈은 제대로 갚을 거라고 했잖아. 감시라도 하고 싶은거야? "


히지카타는 살짝 몸을 일으키곤 긴토키의 턱을 잡아들었다. 덜커덩 하는 소리와 함께 히지카타가 앉아있던 의자가 넘어졌다.


" 보고 싶어서 온거야. "

" 뭐라고? "

" 너가 처음에 그렇게 날 꼬셨잖아. 보고싶어서 온 거냐고. "


엄지로 긴토키의 입술에 엉망으로 묻어있던 립스틱을 닦아내며 히지카타는 긴토키의 턱을 살며시 놔주었다.


" 생각해 보니깐 요새는 조금 그랬던 것 같기도 하더군. "

" …난 그런 쪽 취미 없어. "

" 나는 있어보이나? "


긴토키는 다시금 남자가 만졌던 곳이 간지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제 목덜미를 가리듯이 손으로 꾸욱 누르고는 히지카타를 노려보았다. 히지카타는 바 카운터에 두었던 겉옷을 제 옆구리에 챙겼다.


" 일주일 후에 보자고. "


드르륵 하며 닫힌 문을 보고나서야 긴토키는 바 카운터를 붙잡고 태식했다. 그런 긴토키의 앞에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이고가 다가왔다.


" 파코, 너. "


사이고는 방금 전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을 띄었다. 오토세로부터 긴토키가 카타죠회의 후계자와 의심스러운 행동을 보인다고는 전달받았지만 이런 쪽일거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게 문까지 닫아가며 무시하려고 했던 남자지만 사이고는 그가 후계자이기 전부터 봐왔기 때문에 어떤 사내인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긴토키와 있었던 히지카타는 자신의 기억속에 있던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저런 식으로 웃는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을 정도로.


" 무지막지한 남자를 길들이기 시작했구나. "


긴토키는 사이고의 말에 대답조차 하기 싫었는지 바 카운터를 나와 가게 뒷편으로 향했다. 그런 긴토키의 뒷모습을 사이고는 미간을 누르며 지켜보았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마도 긴토키는 단순히 남자가 자신을 놀려먹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사이고는 긴토키만큼은 더러운 판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딱히 긴토키가 순수하다거나 깨끗한 남자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가부키쵸에서 몸을 팔아가며 사는 이들보다 불쌍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긴토키였다. 지켜질 수 없는 약속을 위해 이런 곳에서 제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주제에 데리고 있는 아이들까지. 그런 긴토키를 오토세의 건물에서 살 수 있도록 오토세를 설득한 것도 사이고 자신이었으니 그가 되도록이면 안전한 위치에 있기를 바랬다. 

무언가를 결심한 것일까, 사이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잠깐 소동이 있기는 했지만 레스토랑 사이고는 평소보다 살짝 늦게 오픈을 할 수 있었다. 평소라면 서빙까지 도와줬을 긴토키지만 기분이 안 좋아서인지 절대 홀 쪽으로는 나가지 않고 뒷편에서만 일을 이어나갔다. 긴토키의 기분이 안 좋다는 걸 아는지 오카마들도 평소 하던 농담도 건네지 않은 채 그에게 주방 일을 부탁했다. 

긴토키는 더이상 손질이 필요 없어 보이는 토마토를 엉망진창으로 만들며 주저앉았다. 히지키타를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안된다. 일전에 그로부터 신파치와 카구라와 같은 느낌을 느꼈다고 깨달은 적이 있다. 그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자신의 가족처럼 느껴진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저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이 남자도 제 어리광을 받아주기 시작했다는 것을. 

긴토키는 태어났을 때부터 천애고아였다. 속해있던 고아원마다 문제가 터져서 고아원도 이곳저곳 옮겨다닐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정착생활이라는 것을 모르고 자라왔다. 그래서 혈혈단신으로 사는 것은 익숙해져있지만 그만큼 유년기엔 중증의 애정결핍을 앓을 수 밖에 없었다. 욕심을 버렸다는 것도 어디까지나 물욕한정이지 그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독한 집착을 가지고 있다. 신파치와 카구라에 대한 애기심도 이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긴토키는 칼을 던지듯 떨궜다. 남자가 차라리 더럽게 굴었으면 좋았다. 제 자신을 벌레 보듯이 보는게 나았다. 하지만 여태 겪어온 것으로 알고 있지 않는가. 히지카타가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지금의 생활을 망치지 않으려면 그런 위험한 사람과 계속 이런식이어서는 안된다는 것도. 

[ 저를…. 저를 버리고 가지마세요. 부탁이에요. ]

[ …그러면 말이죠. ]

긴토키는 그리워하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두 눈을 감았다.

[ 다시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줄래요? ]



아직 시끄러운 가게를 뒤로하고 나오자 상천에서 비릿한 냄새가 느껴졌다. 오랜만에 밤거리에 취우라도 내린 모양이었다. 머리 위로 걸려있는 커다란 간판에서 아직 채 마르지 못한 빗방울이 떨어져 긴토키의 앞에 물웅덩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일부러 그 얕은 웅덩이를 꾸욱 발로 밟으며 긴토키는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사이고의 영업시간은 끝나지 않았지만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일하는 놈은 필요없다며 사이고가 긴토키를 쫓아냈다. 제 자신도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대답없이 이렇게 이른 퇴근을 택했다.

지하에 가게들이 많다보니 시타下골목이라고 불리는 골목의 가게들은 이제 막 시작된 밤의 시간에 여기저기 시끄러운 소리만 가득차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를 좋아하는 긴토키는 스쿠터의 한 쪽 손잡이만 잡은 채 서서 그 소리에 집중했다. 비내음과 함께 듣는 정경의 소리를 긴토키는 좋아한다.

한참 가만히 서있던 긴토키는 제정신을 차리려는 듯 자신의 양 뺨을 세게 쳤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얼굴로 집에 돌아갔다간 카구라와 신파치를 볼 낯이 없었다. 그나마 마른 땅까지 스쿠터를 끌고온 긴토키는 제 머리에 헬멧을 쓰고 스쿠터 안장 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 다 함께 불러요~ Hoy,Hoy,Hoy! ]

땅이 젖어서 인지 평소와는 다른 시동소리와 함께 긴토키는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긴토키는 시동을 다시 끄며 핸드폰을 찾으려 제 주머니 이곳저곳을 뒤적였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서 꿀꿀하게 굴 바에야 다른데서 아무렇지 않은 척 일하는게 나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긴토키는 발신자가 누군지도 확인치 않고 전화를 받았다.


[ 형씨. ]

" 오키타? 아가페 헤븐에 무슨 일 또 있어? "

[ 아뇨. 뭣 좀 물어보려고요. ]

" 쓸 때 없는 걸로 전화한거면 끊는다. "

[ 형씨, 카타죠회 후계자놈하고 자는 사이라는게 사실이에요? ]


오늘 진짜 무슨 날인가. 긴토키는 애써 잊으려 했던 화두가 다시 도마위에 오르자 미간이 찌푸려졌다.


[ 그 때 저랑 마주쳤던 날도 그 놈하고 모텔에 있었던거죠. ]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

[ 휴, 형씨하고는 정말 형,동생정도로만 알고 싶었는데. ]

" 어떻게 아냐고. "

[ 어디에요, 데리러 갈게요. 만나서 이야기 하죠. ]


긴토키는 오키타의 말에 머뭇거리다가 자신이 있는 장소를 알려주었다. 끊어진 핸드폰 화면을 빤히 쳐다보다가도 스쿠터를 세워질 장소가 다시 필요해진 긴토키는 주위를 둘러보며 적당한 장소로 움직였다. 오토세, 사이고에 이어서 오키타까지. 히지카타와 만난 이후로 일상이 틀어지고 있었다. 

여기저기가 추적하게 젖어있어서 앉을 곳도 마땅히 없기에 이리저리 걷기도 하고 다리가 아프면 엉덩이가 땅에 닿지않도록 쭈그려 앉기를 반복하면서 오키타를 기다렸다. 멍하니 여전히 물 웅덩이를 만들어 내고 있는 간판 밑 빗방울에 집중하다보니 골목으로 들어오는 차가 있기에 고개를 돌려보니 경찰차였다. 

' 무슨일이지. '

자신의 일그러져가는 일상과는 다르게 가부키쵸는 가부키쵸 답게 오늘도 사건이 터진 모양이다. 경찰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몸을 비켜본 긴토키였지만 경찰차는 골목을 지나가지 않고 그런 긴토키의 앞에 오히려 멈춰섰다. 

긴토키가 자신이 몸을 덜 비킨건가 싶어 아예 뒤쪽으로 몸을 더 빼려던 순간 경찰차의 운전석 쪽 창문이 내려가며 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 것도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 경시청 소속 공안 2과 형사 오키타 소고라고 합니다. 교통방해로 체포해도 될까요, 형씨? "









긴토키가 가부키쵸에 처음 왔을 때 가부키쵸는 술,여자 그리고 마약이 만연한 거리였다. 오토세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녀의 가게에 대마초 냄새가 가득했을 정도로 말이다. 눈 앞에서 거래가 오가도 제재당하는 일이 드물정도로 가부키쵸는 무법지대였다. 그런 가부키쵸에 신종마약과 관련하여 사건이 터진 적이 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도로미즈회에서 몸을 담고 있던 오토세의 남편 타츠고로가 사망했고 거리를 망친 마약의 출처에 대해서 모두가 답을 원했다. 이 점에 대해 서로의 의견이 분분했으나 급작스럽게 당시 대행으로서 잠시 뒷편으로 물러나있던 지로쵸가 자신이 책임을 짊어지겠다고 나섰다. 지로쵸는 사건을 정리하면서 보인 활약으로 오야지 자리에 다시 올랐으나 도로미즈회 자체는 크게 힘을 잃었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잡은 것이 바로 카타죠회였다.

본디 카타죠회와 도로미즈회는 사카즈키를 나눈 동맹관계였다. 타메고로와 지로쵸는 둘도 없는 죽마고우였으며 둘의 세력만으로 관동 일대를 접수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어느순간부터 카타죠회는 더러운 수법을 써가며 자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마약 사건이 끝나고 나서는 제조업자나 판매업자가 카타죠회와 연줄이 닿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명백한 카타죠회의 배신이었지만 지로쵸와 타메고로가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인지 도로미즈회는 보복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이후로 기세가 더 등등해져서 나름 고쿠도라는 말을 운운하며 협객을 자처하던 카타죠회의 모습은 온데간데 사라지기 까지 하였다. 가부키쵸 사람들끼리는 타메고로가 병이 나자 밑에서 무언가 내분이 일어나면서 생긴 일이라고는 하는데 당사자인 오야붕들이 입을 닫고 사건을 덮어버리니 진실은 저너머에 묻힌 채로 시간만 흘렀다. 다만 그로인해 둘의 사이는 분명히 와해되었고 관동 일대를 제 것으로 만든 카타죠회는 도로미즈회가 최소한으로 가지고 있는 구역만은 제외하고 일인자 자리에 올랐다.

마약 사건이 크게 터지고 나자 경시청 쪽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느껴서인지 가부키쵸는 갑작스럽게 마약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게다가 사건 이후로 도로미즈회와 오토세쪽에서 마약의 마자만 들어도 사업장을 가만두지 않았으니 마약류가 아닌 약물조차 유통하기가 까다로워졌다.

그렇게 마약으로부터 좀 평화로워지나 싶었더니 히지카타 토시로가 후계자 자리에 오르기 바로 직전, 가부키쵸에 마약사건때 터졌던 마약과 비슷하지만 성분이 조금 다른 신종마약이 조금씩 다시 돌기 시작했다. 게다가 유통되는 과정 또한 일전에 사건에 터졌을 때와 비슷해서 마약을 만든 범죄조직이 같을 가능성이 높았다.


" 속인건 미안해요. 하지만 몇 년동안 잠복근무 중인 걸 쉽게 들킬 수는 없어서요. "


오키타는 마약사건이 터지자마자 가부키쵸로 와 잠복근무를 하게되었다. 일전에 일로 몇몇 끄나풀들을 소탕하기는 했지만 마약관련으로는 오리무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시 돌기 시작한 신종마약으로 오키타는 새로운 단서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런 제 사정을 설명하는 걸 듣던 긴토키는 그의 원래 직업이 경찰이라는 것은 놀랐지만 이상하다고 여겼던 점들이 오히려 들어 맞는 기분이 들었다. 그 외에는 제 본명 그대로 써가며 잠복근무를 한 걸 보면 그의 성질머리 만큼은 진짜 모습이었다는 것을 대변해줘서 이런 것도 잠복근무라 할 수 있는지 오히려 딴지를 걸고 싶었다. 호스트를 택한 건 백퍼센트 재미있어 보여서 였을 것이다.

긴토키는 가만히 커피잔을 만지작 거리기만 하며 오키타와 시선을 마주치진 않았다. 정말 신경쓰이는 점은 오키타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었나가 아니라 왜 이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는지였기 때문이었다.


" …나한테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

" 히지카타 토시로가 그 마약을 유통하는 것 같진 않은데, 정보가 필요해서요. "

" 안 해. 아니, 못 해. "


오키타가 긴토키에게 부탁한 것은 사이고가 염려하던 '정보책' 자리였다. 엄연히 말하자면 카타죠회의 정보책이 되는 것보다 경찰의 정보책이 되는 것은 차라리 낫다면 나은 자리였지만 긴토키는 어느 쪽이든 할 마음이 없었다.


" 나쁜 조건은 없어요, 위험한 일도 안 시킬거고. "

" 없던 일로 하자, 오늘. 너가 짭새인 것도 어디가서 안 말할게. "


긴토키는 더이상 들어봐야 귀찮아질거라고 판단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긴토키를 오키타는 놓칠새라 팔을 붙잡았다.


" 형씨, 그 자식 좋아해요? "

" 미쳤냐? 그런거 아니라고 아까도 말했잖아. "

" 확실한 건 카타죠회는 분명히 연관 되어있다는 거고 그 카타죠회 대가리나 다름 없는 남자가 형씨한테는 호의적이라는 거잖아요. 알고있었어요? 그 자식 형씨 만날때, 조직원들도 대동안하잖아요. "

" 그래서 어쩌라고? 너도 알겠지만 나는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 이런 거지같은 생활하니까 뭐라도 던져주면 할 거 같지? 근데 나는 이런 생활이 좋거든. 뭔 조건을 제시해든 나는 안 해. "


단호하게 말한 긴토키는 소고가 잡고 있는 손을 뿌리치고 몸을 돌려 걸어나왔다. 숨이 막혀 터질 것 같았다. 

긴토키의 애정결핍은 그가 자라나면서 이상한 형태로 변질되었다. 제 곁에 있어주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반복하는 일과. 긴토키는 이 두 가지가 항상 자신을 받쳐줘야만 했다. 그걸 연애로 극복해보려던 시간도 있었고, 겨우겨우 회사에 취직해 소속감을 이용해 덮어보려고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긴토키는 둘 다 좋지 않은 결말로 버림 받았고 그에게 남은 것은 정말로 약속, 그리고 카구라와 신파치 뿐이었다. 그만큼 긴토키는 이렇게 자신이 생각하는 '일과'라고 생각하는 부분이 깨지면 제 자신도 함께 부숴지고 말았다.

아무리 쌓고 싶어도 쌓아질 수 없는 모래성이 제 눈앞에서 부숴지는 걸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저 모래 한 줌으로 쌓을 수 있는 모래성이면 족했을 뿐인데, 그 한 줌마저도 잡을 수 없는 작은 손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오키타를 단호히 뿌리친 것 치고는 계단을 걸어 나올 때 즘엔 몸이 휘청이기 시작했다. 머리가 심하게 울리는 기분이 들어 용케 넘어지지 않고 길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보이는 전신주를 잡고 취한 사람마냥 먹은 것도 없는 속을 토해냈다. 

[ 보고 싶어서 온거야. ]

왜 이 순간에 자신을 이렇게 걸레같이 만든 남자의 목소리가 떠오른 것일까. 잔뜩 움츠려진 몸으로 겨우 서있던 긴토키는 언제 떨구어졌는지도 모를 핸드폰에서 들리는 벨소리를 가만히, 오래도록 듣고만 있었다.

[ 다 함께 불러요~ Hoy,Hoy,Hoy! 슬픈 표정은 Never,Never,Never! ]




안그래도 아픈 몸 상태 위에 술까지 거하게 걸치고 집에 돌아온 시각은 아직 이른 아침 5시였다. 긴토키는 문을 열자마자 신발을 벗을 힘도 없어서 그대로 쓰러졌다. 신발장 근처라그런지 쾨쾨한 냄새가 풍겼지만 제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술냄새 만큼은 아니었다. 집으로 오게 되면 신파치와 카구라가 걱정할까봐 어떻게든 시간을 때우려했지만 또 젠조의 집에 가있다는 전화를 받고 이렇게 끝장난 하루 속에서도 하나 정도는 다행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기어가듯 몸을 움직여 신발장에서 조금 벗어난 상태로 긴토키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머리의 지끈거림이 너무 심해서 뒤척임을 반복하던 긴토키는 갑자기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고개를 떨구고 잠이 들었다. 


' 선생님, 선생님. 저도 저게 갖고 싶어요. '

' 저건 안 돼. 저건 히로시거야. '

' 그치만 여기 있는 거는 다 같이 가지고 노는 거라고…. '

' 히로시 군은 다음주에 입양되잖니. 입양해 주시는 부모님이 사주신거란다. '

' 저는요? 선생님. 저도 저런거 사주는 엄마,아빠가 갖고 싶어요. '

' 긴토키는 욕심이 많구나. '


긴토키는 욕심이 많다는 말이 싫었다. 그게 사람을 죽이는 일보다 더 큰 죄를 지는 것 같아서였다. 그 말을 들으면 가슴 한 가운데에 무거운 돌이 가득 찬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은 5색 크레파스가 아니라 12색 크레파스가 갖고 싶었어요. 거기엔 황금색하고 은색이 있잖아요.

사실은 보라색이 아니라 파란색으로 하고 싶어요. 파워레인져에서 블루가 더 멋져서 좋아하거든요.

사실은, 사실은….

그런 긴토키에게 하고 싶다, 갖고 싶다 라는 말은 해서는 안되는 말로 변패되어 갔다. 그런 말을 입에 올렸다가는 선생님은 욕심이 많다고 혼을 내실 거고, 그토록 기다리는 부모님도 안 생길게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꾹꾹 눌러담아도 고아원 이동이 잦은 내역이 있는 긴토키는 문제아라는 인식이 생겨 단 한 번도 입양신청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 어른의 사정을 알리 없었던 어린 긴토키가 할 수 있는 건 자책 뿐이었다. 

어제 혼자 파란색 블럭을 갖고 오래 놀아서 인가봐.

밥 먹을 때 편식해서 인가봐. 

긴토키의 사람 좋다는 말로 오해받는 지금의 행동들은 이로 인해 시작되었다. 조금이라도 더 제 안에 욕심을 없애면 좋은 일이라고 생길거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은연중에는 늘 알고 있었다. 이래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다는 걸.

긴토키가 어느 정도 나이가 차고 처음 스스로 돈을 벌 수 있게 되었을 때 즘에야 긴토키의 자책은 조금 줄어들었다. 자기 돈으로 무언가를 산다는 행동은 받을 수 없다면 스스로 하면 되는 거라는 생각을 들게 해줬다. 그렇게 사람과의 관계는 아예 포기했었다.


' 선생님, 선생님. '


이런 긴토키에게도 짧은 청춘이 있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 것은 정말이지 너무 꿈과 같이 짧아서 긴토키가 스무살이 되었을 무렵에는 모두 끝난 이야기였다.


' 긴토키는 욕심이 많구나. '


긴토키의 두 눈이 부르르 떨리며 열렸다. 청소해도 잘 지워지지 않는 흔적들이 가득한 제 집 천장이 아니라 깨끗한 천장을 보며 긴토키는 손을 더듬더듬 거리며 자신이 있는 장소가 어디인지 확인하려 애썼다. 그러자 그런 제 손을 누군가 붙잡는 것이 느껴졌고 힘들게 뜬 흐릿한 긴토키의 시야 안으로 카구라와 신파치가 등장했다. 또 무슨 헛걱정을 하고 있는 것인지 시름도이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을 굴리는 것조차 잘 안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정신을 차리기위해 재차 감았다가 뜨자 이번에는 제 머리 위에서 대롱거리고 있는 링거가 보였다.


" …여기 병원이야? "

" 긴 쨩!! 죽으면 안 된다, 해! 눈 앞에 강같은 거 보이면 절대 건너면 안된다,해!! "

" 카구라 그런 불길한 소리는 하지 말라고 했잖아! 긴 씨, 괜찮아요? "


둘의 목소리가 머리 안에 공간을 만들고 울리듯이 들렸다. 온 몸이 얼쩍지근했다. 가까스로 제 이마를 짚었다 뗀 긴토키는 따가운 목구멍으로 겨우 침을 삼켰다.


" 술 마신 것 뿐인데, 왜 병원에 왔어. "

" 하지만 열나고 장난 아니었다,해. 작년엔 감기도 걸려본 적 없었으면서 얼마나 놀랐는줄 아냐,해? "


카구라는 지금도 열이 나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제 이마와 긴토키의 이마를 짚으며 온도를 확인했다. 열이 없다는 걸 확인한건지 고개를 끄덕이며 긴토키의 손을 다시금 꽉 끌어잡았다.


" 무슨 일 있으셨어요? 긴 씨, 그런 모습 정말 처음 봐요. "

" 아무 일도 없었어. 하아…. 병원비 아까운 게 지금 더 큰 일이다. "

" 아! 그거 말인데요. 긴 씨 언제 그렇게 좋은 친구 분을 만드셨어요? "


신파치의 말을 들은 긴토키는 남남한 소리를 들은 것도 아닌데 이해를 할 수 없자 눈을 찡그리며 무슨소리냐고 되물었다.


" 그… 일단 전화 멋대로 받아서 죄송해요. 일 전화인가 싶어서 받았었거든요. 그래서 긴 씨 오늘 아프다고 이야기했더니 자기는 친구라면서 어디냐고 묻더라구요. "

" …신파치. "

" 진짜진짜 괜찮다고 저는 여러번이나 말했는데 오셔서…. "

" 신파치. 아니지, 내가 생각하는 그런거 아니지? "

" 뭐시냐.. 병원비를 낸 것 같기도 하고…아닌 것 같기도 하고……. "


긴토키의 믿을 수 없다는 따가운 눈초리 때문인지 신파치는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애매모호한 실토를 했다. 긴토키는 몸 아픈 것도 잊고 도대체 누구냐고 핸드폰을 가져다달라고 소리쳤다. 카구라가 화들짝 놀라며 긴토키의 손에 핸드폰을 쥐어주자 긴토키는 자탄하며 통화내역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의 번호를 기어코 확인한 긴토키의 낯빛은 금방이라도 다시 숨이 넘어갈 것 같이 실색하고 말았다.


" 긴 씨, 죄송해요…. 저는 친구 분이라고 하셔서…. "

" 내가 친구가 어딨어! "


제 스스로를 찌르는 말이 아무렇지 않게 나올정도로 긴토키는 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가뜩이나 엮이기 싫어서 미칠 것 같은데 하필이면, 왜!


" 다시마 초무침이 뭔지 몰라서 그냥 다시마과자로 사왔는데 이 것도 괜찮나? "


히지카타!! 긴토키는 경악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벌떡 일어난 긴토키를 보며 히지카타는 그새 눈을 떴냐며 편의점 봉투를 들고 긴토키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히지카타와 긴토키의 관계를 알리가 없는 카구라가 히지카타의 손에 들린 편의점 봉투를 뒤적이며 이게 아니라는 속 편한 소리를 하며 과자를 뜯기 시작하였다.


" 신…파치, 잠깐 자리좀 비켜줄래? "

" …네에. "


그런 카구라를 이끌고 신파치가 먼눈치로 히지카타와 긴토키를 한 번씩 쳐다보고는 입원실 밖으로 나가주었다. 히지카타는 봉투에 담겨져 있던 딸기 우유를 꺼내 긴토키에게 건네주며 간이의자에 앉아 긴토키를 쳐다보고 있었다.


" 이거 좋아한다며. "

" 도대체…. "

" 설마 한 명도 아니고 자식을 둘이나 데리고 있는지는 몰랐어. 그 계집애 빚도 갚아주고 있는건 아니겠지. "

" 도대체 저한테 왜이래요. "


긴토키는 이불보를 잔뜩 구기며 말했다. 히지카타는 들고있던 딸기 우유를 침대 옆 작은 서랍장 위에 두고는 다리를 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 존댓말로 돌아왔네. "

" 그렇게 한가해요? 카타죠회도 별 거 아닌가 보네요. 푼 돈이나 갚고 있는 사람 장난질 하는 거 보면. "

" 말 나온김에 그 푼 돈 정산해 줄테니까 내 밑에서 일할래? "

" 카타죠회 후계자라고 해서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진짜 별 거 아녔네. 이럴 거면 이토 놈이 그 자리 앉는게 차라리 낫… "


긴토키의 말은 히지카타가 긴토키의 목을 쥐어지면서 더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처음으로 보는 남자의 서릿발이 선 기세에 긴토키는 반항조차 못하고 두 눈을 크게 떠 히지카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그런 식으로 기어오르면 조금 곤란한데. "

" ……. "

" 짜증나는 건 나거든. 실실 쳐 웃기나 하고,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구는데 이걸 또 다른 새끼한테도 하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 진짜 죽여버리고 싶어. "


히지카타는 쥐고 있던 긴토키의 목을 따라 손을 내리며 쇄골가 근처를 훑다 그가 입은 병원복의 목깃을 잡고 긴토키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긴토키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입 안을 훑기 시작한 그는 짧은 색적을 마치고 잡고 있던 옷을 놓았다.


" 충분히 쉬다가. 내일까진 입원하는 걸로 이야기 해뒀으니까. "

" …나하고 자고 싶어? 그래서 이러는 거야? "


긴토키의 말에 히지카타는 비소했다.


" 아니, 네가 나한테 안아달라고 조르길 기다리는 거야. "


히지카타는 그렇게 말을 마치고 사라지듯 나가버렸다. 긴토키는 남자가 남기고 간 딸기우유를 멍하니 쳐다봤다.





요근래 가부키쵸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나기가 자주 내렸다. 안그래도 칙칙한 공기가 가득한데 한 번이면 모를까 여러번이나 비가 내리니 그 비릿한 내음이 여기저기 섞여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 정도였다.

비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가 머리 위를 스치듯 울려퍼졌다. 낡은 듯한 마루 위엔 작은 고양이 한마리가 해괴한 자세로 잠에 들어 이따금 만져주는 사람도 없는데 고롱대고 있었다. 히지카타는 그런 고양이 옆에 앉아 제 앞에 있는 연못을 낀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담녹색의 못은 짧은 비가 계속 치고 지나가서인지 정돈되지 않아 보이는 느낌이었지만 그 위에 핀 연지만은 고고하게 제 색깔을 빛내고 있었다. 


" 담배 피지 마라. "


준열하면서 끝이 잔뜩 갈라진 느낌의 목소리가 히지카타의 귀를 때렸다. 남자의 목소리는 저를 공격이라도 할 듯 애차웠지만 히지카타는 보란듯이 담배연기를 남자가 있는 쪽으로 내뿜었다. 

침상에 누워있는 남자는 척 보기에도 병이 있다고 보여질만큼 식어가는 느낌으로 누워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풍채와 유일하게 빛이 남아있는 눈빛만큼은 그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의 갈라진 주름조차 몸에 여기저기 눈에 띄는 흉과 원래 같이 그려져있던 곳 마냥 어우러져 있었고 세월을 알려주는 그의 희끗한 머리색은 일부러 물들인 듯 늙어보이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병상에 누운 지금도 금 하나 없이 우뚝 솟은 고목같은 남자, 타카죠회의 두목 타메고로는 그런 남자였다.


" 일찍 죽고 싶나보구나. "

" 뭔가 착각하는 거 아닌가,할배? 죽어가는 건 지금 당신이잖아. "

" …네 놈따윈 거두는게 아니었는데. "


타카죠회 산하에 있던 직계조직 중에는 타메고로가 친 형제처럼 여기던 남자가 이끄는 조직이 있었다. 그러나 타메고로의 명령으로 일을 수행하던 중 조직 전체가 함정에 빠져 남자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자신과 엮이면 타메고로조차 위험해질 수 있다며 자신과 나눈 사카즈키를 잊어달라 부탁했다. 타메고로는 제 발을 잘라내는 일을 할 수 있겠냐며 길길이 날뛰었지만 당시 아직 두목 자리까지는 아니었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적었다. 

타메고로는 남자에게 언젠가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확실히 매김하여 오야지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오랜세월 찾아 헤매던 아우와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타메고로가 원하던 연락의 답 대신 데려온 어린 아이를 보이며 말했다. 살 날이 얼마 안남았으니 자신의 아이를 부탁한다고. 그게 토시로였다.

타메고로는 토시로를 평범한 아이처럼 자라나게 하기 위해 철저히 자신의 인생을 숨겨왔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토시로가 자라는 걸 먼 발치에서 보는 방법을 택했다. 오야붕인 자신은 평범한 남자아이 곁에 붙어있을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대신하여 자신의 수족 중 제일 믿음직 하면서도 야쿠자 답지 않은 호탕한 성격을 가진 남자, 곤도 이사오를 토시로의 옆에 붙이게 되었다. 그렇게 제 아우의 마지막 바램을 들어주게 되려나 싶었는데 토시로의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자신이 곤도에게 내린 명령을 차기 두목 자리에 앉히려고 내린 명령인줄 오해한 이토 카모타로가 그를 배제 시키기위해 발톱을 갈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곤도는 마지막까지 토시로를 지키려고 했다. 토시로는 그런 그의 마지막을 눈 앞에서 보게 되고 말았고 큰 충격을 받아 한 동안은 실어증 상태에 빠지기도 했었다.

지금처럼 싸락비가 내리는 날이었을 것이다. 제 상처를 극복하고 자신의 앞에 찾아온 토시로가 무릎을 꿇은 날은.

[ 당신의 자리에 오르려면 어떻게 하면 돼? ]

좋은 눈을 하고 있다고, 타메고로는 생각했다.


" 그녀석, 정보책이 맞더군. "

" …그러냐. "

" 할배 말대로 일은 내가 정리할게. 그러니까… "


히지카타는 담배를 재떨이에 지지며 말을 이었다.


"  끝나면 제대로 병원에나 쳐박히라고. "


주춧돌 근처에 둔 검정우산을 들고 히지카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놈의 할배는 말도 안 듣고 원래 집도 놔둔 채 이 낡은 저택에 쳐박혀있다.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부분이 없는 영감탱이다.

뒤 한번 돌아오지 않고 나온 돌길은 평소와는 달리 조금 깨끗해 보이기도 하였다. 히지카타의 구둣굽이 그런 돌길 위를 다시 더럽히듯이 흙자취를 남겼다. 길다란 길을 따라 고당의 대문 앞까지 오자 일렬종대로 서있는 장정들이 히지카타를 향해 허리를 숙인다. 우산을 살짝 위로 올려 주색의 머리를 한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 처리했나? "

" 예. 말씀하신대로 오토세 쪽에서 거래를 하고 있던 놈이더군요. "

" 쯧, 결국 그 계집 말대로 되버린건가. "


아가페 헤븐의 키츠네가 정신을 차린 것은 꽤 최근 일이었다. 그의 의식이 돌아왔다고 전달받자마자 납치해 정보를 캐냈다. 평범한 인상과는 달리 꽤 큰 일을 하던 남자였다. 지금의 상황을 만든 마약을 유통하는 자들 중 하나였으니까. 특히 오토세의 클럽을 뚫은 것은 그 남자가 처음이었다. 이제 두 번 다시 마약 유통도, 호스트도 못하게 되었을 테지만.

카타죠회는 세력이 커진만큼 책임 지기 어려운 직계가 많아진 상태였다. 샤테이(동맹을 맺고 아우가 된 자들)들과 주기적인 회의를 거치고 있긴 하지만 지금처럼 시기가 좋지 않을 때는 이들 중 누가 제 편이고 적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토시로가 후계자로 내정되고 나서는 더욱더 그랬다. 말로는 아직 타메고로가 아닌 자를 위에 올릴 생각이 없다고는 하지만 제 뒷통수를 어떻게 칠까 수를 짜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해서 토시로는 굳이 후계식을 가지지도 않았고 샤테이들과는 서면으로만 인사를 주고 받았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카모타로를 처리한 것이다. 샤테이들이 내심 믿고 있던 카모타로가 무너지자 그제야 몇몇 이들과는 면을 트고 새로운 동맹이라느니 맞지도 않는 알랑방구를 뀌며 다가왔지만 다른 소수의 직계들은 오히려 연락이 끊겼다. 


" 정말로 가실 겁니까? "

" 위험한 일을 할 때는 미친 개를 쓰는게 맞으니까. "

" 하지만 그 놈들은 오야지께서도 건들지 말라고 한 게…. "

" 다 죽어가는 할배 이야긴 그만 꺼내라 했을텐데. "


타메고로의 수족들은 토시로와 타메고로의 사이를 알고 있다. 그래서 충의가 있는 자들은 자연스레 토시로의 수족이 되어주었지만 지금의 토시로에게는 더 큰 힘이 필요했다. 할배가 말한 것을 지키면서도 자신이 정말 이 일가에 군림할 수 있는 힘이.

히지카타는 대문 밖으로 몸을 움직였다.









히지카타는 이제껏 사카즈키고토(술 잔을 나누는 의식)를 한 적이 없다. 저한테 아직 그 것을 할 그릇을 가질만한 배짱이 있는지 아닌지 판단해줄 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꽃노을이 져가는 것이 차창 너머로 보였다. 어지러운 네온사인들이 가득한 거리에만 있다가 트인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는 것을 보니 어쩐지 곤도와 함께 살던 곳에 있던 하천이 떠올랐다.

히지카타가 아직 어렸을 때 곤도가 무엇을 가지고 싶냐고 물은 적이 있다. 곧 생일이니 선물로 뭐든 사주겠다고. 히지카타는 기다렸다는 듯이 곤도가 아끼던 오목한 옻칠 그릇과 똑같은 접시를 가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다른건 다 주던 남자가 이 것만큼은 안된다며 까다롭게 굴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곤도는 자지러 지게 웃으며 아직 너에겐 가질 만한 배짱이 없다고 괜한 꿀밤을 먹였다. 그 때는 곤도가 자신을 또 애취급 한다 생각하여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 작은 두목, 역시 전 좀 내키지 않아요. "

" 질투 하냐, 야마자키. "

" 그게 아니라! 그 놈들 때문에 지금 오야지가! "


히지카타의 손에 그리도 갖고 싶어하던 옻칠 접시가 손에 들려져 있었다. 곤도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절대 쓰지 않으려고 했던 술그릇이었다.


" 할배 이야긴 하지 말랬잖아. "

" 그래도 그렇지. 작은 두목의 첫 술잔을 타카스기 그 놈하고 나눠야 한다니. "


충의를 보인 직계나 수족들을 두고 배신자 소굴이라고 불리고 있는 조직과 사카즈키고토를 하러 간다는 사실에 조직 안은 발칵 뒤집혔다. 당연히 반대가 있었지만 정작 오야지였던 타메고로는 사실을 듣고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 그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저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 작은 두목도 아시죠? 거기 그렇게 저희 산하에서 나가놓고 귀병회인지 변기통인지로 부르는 거. 오야지가 그 쓰레기들 지켜보겠다고 무슨 짓을 했는데…. "

" 야마자키. "


평소의 야마자키 답지않게 히지카타의 제지에도 분을 풀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히지카타는 그런 야마자키를 짐짓 이름만 부르며 말리는 시늉만 했다. 타카스기 신스케. 타메고로의 첫째 아들이 데리고 있던 조직의 고문이었다. 이토 카모타로가 타고난 변재를 가지고 있다면 타카스기는 전술을 작하는데에 있어서 천재였다. 다만 그는 뭐든지 크게 일을 치거나, 제가 정한 방법을 위해서면 그게 설령 오야지의 목숨을 치는 일이라도 망설이지 않았다. 딱히 조직의 리더자리를 노리는 것은 아니어 보였지만 모든 조직원들이 카타죠회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남자라고 입을 모아 말았다. 만약 아직 그가 있는 조직이 카타죠회의 산계조직이었다면 히지카타는 카모타로보다 그를 먼저 치기 위해 고군분투했을지도 모른다. 

히지카타는 딱 한 번밖에 마주치지 못했던 그 사내의 얼굴을 떠올리던 중 제 손에 들린 핸드폰이 진동음을 내는 것을 깨달았다. 

[ 오늘은 캬바쿠라 레드 걸즈レッド·ガールズ에서 술 옮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

히지카타는 풋- 하고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입가에 손을 올리며 막았다. 긴토키가 일부러 그러는 것인진 모르겠지만 그의 보고 문자의 어휘력은 초등학생 일기 수준이었다. 어쩔 때는 '하기 싫지만' 이라던가 '힘들 것 같은데' 같은 제 감상이 붙어있을 때도 있다.

' 그러고보니 아무리 늦어도 5일 후에는 사무실에 있어야 하는군. '

여우새끼가 사무실에 올테니까.

스스로에게 놀랄 정도로 긴토키의 앞에선 제 자신이 풀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토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을 때는 억지로 취해볼까도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알자 히지카타는 지켜보고 싶어졌다. 긴토키가 앞으로 제게 또 무슨 행동을 하고, 무슨 이야기를 할지.


" 도착했습니다. "


풀어진 기분도 잠시, 야마자키의 말에 다시 차창 너머로 보이는 5층 정도의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건물 위를 장식하고 있는 것 같이 걸린 전깃줄들이 들어오면 안된다고 경고하는 바리게이트처럼 보였다. 히지카타는 날이 저물자 다시 어둑하게 몰려져 있는 먹구름을 보며 제 옆자리에 두었던 우산을 다시 쥐었다.


" 작은 두목. "


야마자키가 히지카타에게 문을 열어주면서 진지한 얼굴로 말을 잇는다.


" 저는 솔직히 아직 작은 두목을 위해서는 목숨을 못 바치지만 조직을 위ㅎ… "

" 야마자키, 조연은 조연답게 굴어라. "


쓸 때 없는 말은 잘도 한다. 히지카타는 우산 손잡이로 야마자키의 입을 한 번 톡 치고는 건물의 문을 열었다.



가부키쵸 근처에는 발을 들일 수 없게 된 귀병회의 사무실은 치요다구千代田区에 위치해 있었다. 원래 라면 관동 자체에 발을 들일 수 없어야 하지만 타메고로는 귀병회를 건들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외관상으로 평범해 보이는 건물이었지만 안으로 들어오자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벌써부터 불쾌함이 느껴졌지만 히지카타는 그저 복도에 있는 금방이라도 전기가 나갈 듯 파스슥거리는 껌벅이는 조명을 바라보며 안 쪽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한 번 돌자 그제야 눈에 힘을 주고 저를 쳐다보기 시작하는 장정들이 보였다. 기선제압이라도 해보겠다는 건가 싶었지만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히지카타를 대신해 야마자키만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히지카타는 괜한 기 싸움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다는 듯 그들의 사이를 우산으로 휘적거리며 굳게 닫힌 철문으로 보이는 곳 앞에 섰다.

분명 오겠다는 연락을 취했는데 닫아논건가. 남자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인지라 히지카타는 야마자키를 쳐다보았다. 야마자키는 히지카타의 생각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며 둘이 왔다는 사실을 알리려 크게 불러 보았지만 문 너머는 조용했다. 그런 둘의 모습을 비웃듯 주변에 서있던 장정들이 킬킬 소리가 나도록 웃기 시작했다. 히지카타는 들고 있던 우산을 조용히 들어 철문에서 가장 너덜해보이는 부분에 박아넣었다. 철로 감싸진 안쪽은 나무로 되어 있었는지 목조각들이 튀며 문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 새 후계자님은 성질도 급하시군. "


닫혔던 문이 힘없이 열리자 커다란 의자에 앉아있는 사내가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히지카타와 야마자키를 거의 내려다 보다시피 쳐다보고 있었다. 화려한 셔츠에 붕대로 가린 한 쪽 눈, 히지카타가 기억하는 타카스기 신스케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 네 주제에 맞는 볼품없는 마중을 해주기에 말이야. 화려한걸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것도 아닌가보군. "

" 진짜 손님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고 개가 꼬리를 흔들겠나, 낯선 사람이면 일단 물어 뜯을 각오를 해야지. "

" 그래서, 지금은 어떻지? 꼬리를 흔들건가? "


히지카타의 말에 타카스기는 자세를 고쳐 깍지낀 손 위에 제 턱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 조건만 들어준다면. "

" 그게 뭐지? "

" 간단해. 하나는 가부키쵸에 우리가 다시 발을 딛게 해줄 수 있는 거고, 두번째는 공장장은 우리가 데려간다. "

" 똥개 주제에 너무 고급 사료를 바라는 거 같은데. 발을 딛게 해주는 건 해줄 수 있다, 그 외엔 보장 못해도. "

" 벌써부터 동물학대라니 너무 하는군. "


타카스기가 말하는 공장장은 다시 말하자면 제조업자, 마약을 만드는 사람을 원하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마약사건에서 무언가 저질렀다고 의심받고 있는 남자에게 공장장을 넘겨줄 순 없었다. 조건을 들어주지 않겠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타카스기는 뭐가 즐거운지 그저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럼 이건 어때. 두번째 조건은 일이 끝나면 받는 걸로 하지. "

" 무슨 조건인지는 지금 말하지 않겠다? "

" 그래, 알다시피 이쪽도 관동에서 좀 더 객기를 부리고 싶어서 말이야. 가부키쵸에 발을 디뎌도 뭐가 필요해질진 모르잖아? "

" 작은 두목! 이 자식하고는 역시… "

" 야마자키! "


야마자키가 움직이려던 것을 제지하고 히지카타는 품 속에서 제 옻칠 그릇을 꺼내들었다. 히지카타가 꺼내든 것을 본 타카스기는 등이 움직일 정도로 웃어대더니 뒤에 있던 남자에게 손짓을 하여 술을 꺼내오게 하였다. 히지카타는 건네준 술을 그릇에 따라 타카스기에게 내밀었다. 타카스기는 여전히 히지카타는 내려다보듯 눈을 내리깔다가 고개를 숙이며 술잔을 받아들이고 한꺼번에 들이켰다. 술을 마시고 입을 닦아낸 타카스기가 이번에는 히지카타의 차례라는 듯이 옻칠 그릇에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소나기보다 거친 소리가 옻칠 그릇 위를 노다녔다.











노란색,검정색,초록색.

긴토키는 맥주나 사케정도는 마시지만 고급양주나 와인은 이름만 대강 알고 있다. 그마저도 병의 색깔로 구분할 때가 많았는데 항상 무언가 화려한 양주들을 보면서 얼마나 달콤할까 라는 생각을 하며 술을 옮기곤 했다. 한달도 전에 아가페 헤븐에서 한모금 마시고 그 기대가 와장창 무너지긴 했지만 말이다.

긴토키가 처음 입에 술을 댄건 공사장 일을 할 때였다. 인부들이 늘 끝나면 밥을 먹던가, 술을 먹던가 였기에 따라나서게 되면서 자연스레 배웠다. 처음엔 술이라는 것이 사람이 먹어도 괜찮은 걸까 라는 생각이 들게하는 향이 나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인부들이 어른에게 술을 배워야한다며 따라주는 분위기에 억지로 마셨을 때도 제가 생각했던대로 향만큼 맛 없다고 생각했다. 뭐가 그렇게 좋다고 일이 끝나면 이 술이 자신을 채워준다는 이야기를 하는지 긴토키는 어른의 괜한 허세라고 여겼다. 그런 시절이 있었던 걸 생각해보면 지금 맥주를 즐겨마시게 된 것이 조금 신기하기는 했다. 여전히 인부들이 말한 채워준다는 이야기의 뜻은 모르겠지만 그건 역시 허세였을 것이다.

어느 정도 정리가 마쳐진 술창고를 보고 긴토키는 뿌듯함에 허리를 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게 청소를 하고났을 때도 이런 시원한 감이 느껴지긴 하지만 색,라벨 종류대로 일렬로 모아져 있는 정돈된 모습을 볼 수 있는 술창고 정리는 쾌감이 청소의 배는 되었다.

술을 옮기며 썼던 핸드카트를 접고 지하실에서 나오자 밖에서 담배를 피고 있던 여인이 긴토키를 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 긴토키 씨, 오늘 여기서 일하는 날이었어? "

" 오랜만에 보네,루비 씨. "

" 싫다~ 그냥 사루토비라고 불러도 된다니까. 내가 진짜 이름 알려주는 남자 몇 안되는 거 알지? "


사루토비는 묘한 보라색 머리를 가진 화려한 여자였다. 독특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손님들만 상대해서 그다지 엄청난 매상을 올리고 있다고 볼 순 없었지만 한 번 그녀의 손님이 되면 두 번 다시 빠져나올 수 없기로 유명했다. 듣기로 그녀가 2차라도 나가는 날엔 그 남자의 인생의 문이 다른 것으로 갈아치워지는 날이라고 하는데 긴토키로서는 그게 뭔지 알고 싶지 않아서 그녀를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만 들게했다.


" 나 오늘 일찍 퇴근할려고 하는데~ 긴 씨는 언제 끝나? "

" 나도 곧 끝날 것 같긴 한데…. "

" 정말? 정말? 그럼 나랑 술 한잔 할까? "


긴토키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뒷 머리를 긁었다. 그런 긴토키에게 다가가 사루토비는 우후훗하고 웃어보였다.


" 걱정마~ 긴 씨는 얼굴이 내 취향이긴 하지만 난 돈 없는 남자는 관심 없거든요~ "


사루토비는 윙크를 하며 근처에 있는 이자카야에서 기다리겠다고 하며 나갔다.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과 함께 한숨을 내쉰 긴토키는 핸드카트를 제자리에 놓기 위해 스태프 룸으로 향했다. 제법 큰 방 안엔 레드 걸즈에서 일하는 여인들이 쓰는 캐비닛이 양 쪽으로 서있었다. 긴토키는 구석에 핸드카트를 세워두고 캐비닛에 꽂혀진 이름표를 훑었다. 긴토키의 시선이 그 수많은 이름표 중 한 이름표에 멈추었다. 잠시 그 캐비닛에 적힌 이름을 고음하던 긴토키는 퇴근 준비를 위해 걸어 나갔다.


마담에게 인사를 하고 긴토키는 계단을 내려 걸어갔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오늘도 잠시 비가 내렸던 것인지 바닥에 물이 적셔진 상태였다. 추위가 풀리기는 커녕 비가 내리면서 오히려 더 추워진 감이 들었다. 겉옷을 제대로 다시 한 번 더 여민 긴토키는 신파치에게 전화를 걸었다.


[ 긴 씨, 무슨 일이에요? ]

" 알바 언제 끝나? "

[ 한 삼십분 뒤에 끝날 것 같아요. 긴 씨는요? ]

" 나는 지금 끝났는데 조금 볼 일이 생겨서 늦게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신경쓰지 말라고 전화했어. "

[ 네, 아! 긴 씨. 지금 몸은 괜찮아요? ]

" 괜찮다고 했잖아. 그 날은 그냥 숙취였어. "

[ 그래도… 무슨 일 있으면 꼭 저희 한테도 알려주세요. ]

" 응, 알았어. "


병원에서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하루만 있다가 퇴원했지만 카구라와 신파치는 여전히 자신의 걱정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열이 날 정도로 아픈 것도, 그날 그렇게 신경 돋은 모습을 보인 것도 거의 처음이나 다름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괜찮냐는 말을 어미마다 붙이며 물어오는데 긴토키가 괜찮다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 거기다, 주머니가 폭발할 것 같다고. 요 녀석들. '

긴토키가 무언가를 숨긴다고 생각해서인지 카구라와 신파치가 제 주머니에 무언가를 넣어놓는 물건의 갯수가 많아졌다. 주로 약이나 무인도생존에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이었는데 걸어다니는 응급상자 꼴이나 다름 없게 되어버렸다. 안 그래도 두터운 잠바에 볼록 튀어나온 주머니는 손을 넣을 자리도 없어서 긴토키는 추위에 젖은 손을 제 겨드랑이 밑으로 넣어 사루토비가 기다리는 이자카야로 향했다.


" 어서옵쇼! 몇 명이세요? "

" 아~ 긴토키 씨! 여기야, 여기! "


벌써 몇 잔 걸친 것인지 기분 좋아보이는 사루토비가 긴토키를 불렀다. 긴토키는 종업원에게 저 쪽에 일행이 있다고 대답하며 사루토비가 있는 쪽으로 갔다. 사루토비의 건너편에 앉은 긴토키는 안주하나 없이 늘어져 있는 사케병들을 보며 말했다.


" 루비 씨, 이렇게 마셔도 괜찮아? "

" 사~루~토~비! 라니까! 아니면 아야메 쨩♡ 이라고 불러도 좋아. "


어서 술이나 먹으라는 듯 술이 채워진 잔을 긴토키에게 내민 사루토비는 종업원에게 손짓하며 술을 더 주문하기 시작했다.


" 나도 사실 이렇게까지 마실 기분은 아니었는데.. 긴토키 씨 보니까 안마실 수가 있어야지. "

" 그게 무슨 소리야? "

" 긴토키 씨 보면 생각난단 말야. 타츠미, 아니 오타에가 말이야. "


긴토키는 사루토비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씁쓸히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역시 자신을 술자리에 부른 이유는 이거였구나 라는 생각을 하면서.

오타에는 사루토비가 일하는 레드 걸즈에서 일하고 있었다. 자신이 사루토비와 친해진 것도 오타에를 통해서였다. 사실 긴토키는 오타에가 행방불명이 되고나서 레드 걸즈의 일은 되도록이면 피해서 하고 있었다. 괜히 레드 걸즈에서 일하게 되면 게으른 마담이 그대로 놔둔 캐비닛이라던가, 스케쥴 표를 보며 오타에가 떠오르곤 했기 때문이다. 

사루토비는 점원이 가져다 준 술을 잔에 따르지도 않고 아예 병 째로 마시며 말을 이었다.


" 그 바보 여자, 남자 때문에 도망이나 치고. 나한테 말했으면 도와주기라도 했을텐데. "


어느새 뺨까지 붉힌 채로 울적한 목소리로 말하는 사루토비를 보며 긴토키는 완악한 듯 책상을 살짝 치며 상체를 빼들었다.


" 남자 때문이라니? "

" 어머, 긴토키 씨. 몰랐어? 그 계집애, 무슨 남자 돈 대신 갚아주려고 도망친거잖아. "

" …그럴리가… "

" 아냐,아냐. 맞아. 나 그 남자 본 적도 있는걸? 이름은 까먹었는데 뭔가 인상에 남아서 기억하고 있어. "


무언가 기억을 다시 되살려보려는 듯 사루토비가 두 손가락으로 제 뺨을 톡톡 두드렸다. 긴토키는 그런 사루토비의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몰랐다, 오타에가 행방불명된 이유가 남자때문이었다니. 남자 때문에 신파치를 버린거였다니.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오타에는 그럴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애초에 오타에가 캬바쿠라에서 일하는 이유도 부모대신 신파치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 아! 나 그 남자 이름 기억났다! "


사루토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 곤도, 곤도 이사오였어. 긴토키 씨는 본 적 없어? "


사루토비의 말에 긴토키는 들은 적 없는 이름이라 그저 고개를 내저었다.



<<Second Role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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