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적 안동민 시점





입사 후 연수를 거친 나는 선배와 같은 N번째 전성기 팀에 배정받았다. 선배는 대체 왜 네가 우리 팀에 왔냐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게 선배의 진심이 아니란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YGN 예능국의 모든 신기록을 갈아치운 N번째 전성기가 선배의 단독 아이디어였기 때문에, 이미 선배는 회사에서도 꽤나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나 같으면 어깨에 힘이 팍 들어갔을 것 같은데, 선배는 튀는 행동 없이 한결같았다. 홍 선배나, 작가들에게도 선배는 동아리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태도를 유지했다. 재미없는 놈 소릴 들어도 제가 원래 재미는 좀 없죠, 하며 가볍게 받아넘기고 마는 편이었다.

짬이라고는 없는 신입인 내가 선배들에게 사회생활 한답시고 열심히 너스레를 떠는 것과는 다르게, 선배는 늘 적당한 인사와 적당한 예의를 유지했다. 

형의 탁월한 기획력이 프로그램에 잘 반영되는 건, 어쩌면 그 부분에서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할 말은 하는 태도 때문일지도 몰랐다.



"뭐든 까봐야 알죠."


은모래와 윤란주의 대결이 성사된 날, 나를 포함한 제작진 모두가 은모래의 압승을 예상하며 신나게 떠들고 있을 때 선배는 그 한마디만 툭 던지고 회의실을 나갔다. 

그때만 해도 사실 뭐 틀린 말도 아니고, 선배야 이런 들썩대는 시끌거림에 동참하는 사람도 아닌 걸 알아서 가볍게 넘겼는데,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홍 선배 맹장 터졌다고 연락을 받았을 때, 선배는 놀라긴 했어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근데 이건 예상 가능했다. 내가 선배를 본 세월이 몇 년인데. 동아리 활동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선배는 무슨 일이 나도 의연하고 침착하게 대처할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녹화 당일 시사실에서 양쪽 아티스트와 매니저를 모아놓고 냅다 라이브 대결로 간다고 폭탄을 터뜨려버린 선배는 어딘가 이상했다. 마치 그 폭탄을 오랜 시간 정성스레 만들어놓고선 언제 터뜨릴지 기회만 노리고 있던 사람처럼 모든 걸 망설임 없이 착착 진행시켰다. 


아니, 그보다 윤란주가 서목하 목소리에 립싱크했던 건 언제부터 어떻게 안 거냐고. 

미리 알려줬으면 몇 시간 전에 대본 새로 쓰느라 뒤집어질 일은 없었잖아!



녹화가 있기 몇 주 전부터 선배는 LED 소스 선정에 적지 않은 시간을 소요했다. 

회의날 선배가 바다 컨셉을 제안했을 때, 홍 선배를 포함한 우리는 모두 큰 이견 없이 동의했다. 그 전에 썼던 소스랑 겹치지도 않고 노래가 스케일도 있고 하니 파랗게 확 펼쳐지는 바다 이미지는 나쁘지 않으니까.


소스는 내 선에서 몇 가지 리스트업해서 선배가 최종 셀렉과 컨펌만 하도록 해도 되는데, 선배는 이번만큼은 내게 맡기지 않았다.

왜 꼭 바다여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다 비슷비슷한 것 같은데. 뭘 생각하는 건지 이건 이래서 별로, 저건 저래서 별로라며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한 가지를 택했다. 하여간 까다로운 인간이라니까.



서목하 씨가 아직 무인도 봉사활동을 하냐고 물었을 때, 별 생각 없이 당연하다고 해놓고선 다시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최근엔 간 적이 없었다. 서목하씨를 찾은 뒤부터는. 늘 선배가 다음에 갈 무인도와 일정을 정해서 알려 주곤 했는데, 마치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처럼 선배는 더 이상 무인도에 가지 않고 있었다.

물론,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좀 더 나중에 알았지만.



이날 서목하 씨는 말 그대로 변신을 해버려서 하마터면 나도 못 알아볼 뻔했다. 선배는 어느 녹화날이든 기회가 되면 바로 들어갈 수 있게 메이크업과 의상까지 준비를 해둔 모양이었다.


다른 제작진들이야 윤란주씨 매니저로 따라온 서목하 씨만 기억하겠지만, 난 무인도에서 15년을 산 그 원시인 같은 상태의 서목하 씨를 내 눈으로 본 사람이니 시각적 충격이 더 크게 올 수밖에.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사람이 달라지니까 내 취향이라 당황스럽기도 했다. 그 태초 인간 같은 모습이랑 저 모습이 동일인이라고?

그렇다면 나의 이 쇼크를 이해해 줄 사람은 여기엔 한 사람밖에 없었다.


"서목하 씨 예쁘죠? 저러고 꾸미고 나니까 완-전 내 취향."

"죽을래?"

"아뇨, 왜요?"


이때 아주 사알짝 묘한 느낌이 왔다. 

동아리에 누구 괜찮더라, 연예인 누구 예쁘더라 해도 누구? 그런가? 하고 그다지 관심도 없던 선배인걸 내가 잘 아는데. 여자 사람의 얘기에 이렇게 반응한 건 살면서 처음 봤다.

아니, 내가 왜 죽을래 소리를 듣냐고. 내가 뭐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왜요오."

"..떨어져."


그러면서도 선배는 심혈을 기울여 고른 LED 소스를 또 한 번 매의 눈으로 훑었다.


"바다가 한 번에 느껴지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될까?"


내가 보기에는 그냥 지금도 완전 괜찮은데, 역시 총 책임자의 시각은 남다른 건지 뭔지. 선배가 진짜 메인으로 입봉하면 이렇게 늘 깐깐한 사람이려나. 조금 걱정이 됐다.


서목하 씨의 첫 무대 화제성은 무대 직후부터 엄청났다. 일단 최다 투표수를 경신했고, 온갖 온라인 사이트에 실시간으로 서목하 이슈가 핫하게 올라오고 있었으며, 그간 서목하 씨의 목소리로 불렀던 윤란주의 N번째 전성기 클립도 조회수가 빠르게 오르고 있었다. 

문득 큐카드를 한 장 챙겨서 사인을 받아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인도에서 돌아온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데뷔 준비중인 연습생도 아니니 제대로 된 사인도 없겠지만 그러니까 더 희소성이 엄청날 게 분명했다. 마이클 조던의 첫 사인카드가 32억이라는데, 서목하 씨가 어디까지 대박이 날진 몰라도 어쨌든 이게 엄청 레어템이 될 건 맞잖아? 잔뜩 신이 나 있었던 그 타이밍에 선배가 불쑥 나타났다.

"저도 한 장만요."

 어라, 이 형 뭐 하는 거지 하고 쳐다보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선배는 큐카드를 손에 들고서 쌩하니 부조를 나가 버렸다. 선배가 떠넘기듯 주고 간 태블릿을 안고서 생각했다. 잠깐, 그럼 난 언제 받으라는 거야? 이렇게 후배의 기회를 강탈해도 되는 건가. 애초에 나 아니었으면 선배는 사인 받는 거 생각도 못 했을 거면서!




신분도용 뉴스가 터지고, 선배가 사직서를 제출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소문만 떠돌 때도 설마 했는데. 그리고 방송과 건너건너 들은 이야기로 알게 된 선배의 어린 시절은 말 그대로 참혹했다.


선배가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러 들른 날, 선배도 안 우는데 주책맞게 내가 눈물을 쏟았다. 선배가 그런 사연을 속에 품고 살았다는 게, 나름 오랜 시간 선배랑 알고 지냈음에도 그걸 몰랐다는 게, 솔직히 자기 잘못도 아닌 일로 떠나는 게 미안하고 속상해서. 선배도 그날만큼은 나를 밀어내지 않고 가만히 토닥여주었다.




선배가 떠나고, 그 빈 자리는 꽤 컸다. 홍 선배를 포함해 우리 모두의 부담이 조금씩 늘었다. 그리고 그 부담의 무게는 다른 팀 사람들의 눈에도 보인 모양이었다.


"홍 피디, N번째 전성기 팀 요새 좀 힘들지 않아? 위에다 인력 추가배치해 달라고 요청해야 되는 거 아냐?"

"그러게. 이 팀이면 오겠다는 피디들 줄을 설 텐데."


어느 날 구내식당 줄을 섰다가 들은 영 반갑지 않은 안부 인사였다. 홍 선배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내가 얼른 끼어들었다.


"아뇨. 저희 완-전 괜찮습니다. 증원 필요없어요. 좀 있으면 강 선배 돌아올 건데요, 뭐."

"강 피디? 아무리 그래도..."

"아, 선배님. 뉴스 보셨잖아요. 그게 강 선배 잘못이에요? 강 선배가 나쁜 짓 하려고 신분세탁 했냐고요. 살려고 그런 건데. 복잡한 거 다 끝나면 선배 돌아올 겁니다. 그래야 되고요."


홍 선배가 내 어깨를 잡아 자기 뒤로 세웠다.


"아유, 동민이가 강 피디 워낙 좋아했잖아요. 퇴사한지 얼마나 됐다고 금방 인력 충원하는 것도 좀 그러네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아!"

"..저놈은 강보걸이 옆에 찰싹 붙어다니더니 아주 강보걸이 대변인이 다 됐네."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물론 선배의 자리를 비워둔 대가로 돌아온 건 더 많은 편집과 더더 많은 야근이었지만.




얼마 후, 선배의 복직이 처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름과 주민등록번호까지 싹 다 바뀌어버려서 절차가 좀 복잡한 것 같았지만, 아무튼, 알맹이는 똑같으니.


이제는 강보걸이 아닌 이기호.

도저히 입에 붙지 않는 이름의 사원증을 받아든 선배는 이전보다 조금은 편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전지적 안동민 시점 下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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