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미님- 이피게네이아 01 




인안나는 언제나 사람을 싫어하는 법을 모르는 천치처럼 굴었다. 7살 적 인안나의 뺨을 때린 동갑 여자애는 그 나이대의 아이가 할 만한 가장 심한 욕설을 퍼부었으나 인안나는 그걸 들으면서도 웃었다. 그리고 다음 날, 빨갛게 부은 얼굴을 하고 마치 어제의 일은 잊은 마냥 물었다. 좋은 아침, 너도 우유 마실 거니? 그 여자애는 인안나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근처의 어른들이 와서 울며불며 악을 쓰는 아이를 말릴 때까지도 인안나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렇게 소리치면 목 상해, 오늘은 목에 좋은 꿀차를 마시고 잠드는 게 좋겠어. 어른들은 여자애의 잘못을 타이르면서도, 똑같이 바락바락 싸우지 않는 인안나를 걱정 반 대견함 반의 얼굴로 쳐다보았다. 친구를 걱정하는 건 당연하잖아요. 인안나는 늘 그랬다.


인안나의 가정환경에 특별한 문제가 있던 건 아니었다. 인안나는 마나밀레에서도 제법 유복한 편이었고, 부모님은 인안나에게 엄하고도 자애로웠다. 어쩌면 태평할 정도로 여유로운 성정이 거기서 왔다고 한다면 인안나는 부정하지 않을 터다. 나라 안팍으로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인안나는 부족함 없이 컸고, 그건 그 시대에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성장 배경은 아니었다. 물론 많은 이들이 인안나가 증오심을 타고 나질 않았다고 여기기도 했다.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 자라든 보통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안나가 모두를 공평히 사랑하는 것은 어디에서 왔는가? 그건 반쯤은 어머니의 교육방침에서 왔다. 사람은 모두 평등하단다. 모두가 존귀하고 존엄한 존재로서 인권을 가지지. 그러니 너 역시 모두를 한 명의 사람으로 대해주렴. 어릴 때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말이었다. 인안나는 아무 저항 없이 어머니의 가르침을 수용했다. 다만 언제나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청자가 이해하는 바가 같은 것은 아니다. 어머니가 한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라는 의미로 말했다면, 인안나는 그것을 모두에게 동등한 감정을 품으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어린 인안나는 아직 세상을 이분법으로밖에 구분할 줄 몰랐다. 사랑하지 않으면 미워하는 것이고 미워하지 않으면 사랑하는 것이다. 인안나는 앞서 말했듯이 누구도 싫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두를 평등히 사랑하기로 했다. 그게 나머지 반이었다.


으레 평범한 아이들이라면 사고방식이 다소 어긋나더라도 사회화를 거쳐 결국은 보통의 사람으로 성장하는 법이다. 인안나는 그러지 못했다. 모자람 없이 자란 인안나의 유일한 결핍은 증오심이었고, 누군가를 증오하지 않는 ‘착한 아이’를 어른들은 교정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모두에게 다정한 아이. 모두에게 친절한 아이. 모두에게 예의 바른 아이. 그게 인안나가 얻은 타이틀이었다. 그러나 속내를 까보자면 인안나는 부모님이나, 어릴 적부터 같이 놀던 친구나, 두어 번 본 사람이나,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나, 동일하게 많은 양의 사랑을 줄 뿐이었다. 인안나는 그게 되는 사람이었다.


모두가 특별했기에 아무도 특별하지 않았다. 주변인들이 이에 위화감을 느낄 즈음, 인안나가 각성했다. 그건 치유의 힘으로 보였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것’에 가까웠다. 오로지 사람에게만 적용 가능했기에 치유로 보였을 뿐이다. (물론 애초에 되돌릴 것이 없는 선천적 병은 치유가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1990년 12월 28일, 생일이 지나고 며칠 후에 인안나는 크시슈토프 학교로 전학 갔다. 부모님은 이 치유의 이능력자를 숨기고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거기서 인안나는 이피게네이아를 만났다. 동일한 년도에 태어나 동일한 년도에 입학한 친구. 둘 다 이름이 I로 시작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두 사람은 기숙사가 옆 방으로 배정될 수밖에 없었다. 오전에는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함께 이능력을 다루는 수업을 했으며, 밤에는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잠을 잤다. 인안나는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이피게네이아에게 다정했고, 이피게네이아는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인안나에게 무심했다. 애초에 두 사람은 상성이 맞지 않는 타입이었다. 얼음이 태양과 친할 수 없듯이. 그럼에도 인안나는 이피게네이아에게 다가갔다. 안녕, 좋은 아침, 오늘 밥 같이 먹을래, 수업 힘들었다, 잘자, 이피.


인안나는 이피게네이아가 자신에게 쌀쌀맞건 아니건 상관없었다. 하얗고 창백한 동갑내기 여자애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좋아했고, 좋아하기에 상냥하게 굴었다. 애초에 인안나의 애정은 타인과 자신의 친밀도와는 상관이 없었다. 그러므로 인안나는 처음 음악 시간에 이피게네이아가 노래를 불렀을 때 바로 앞줄에서 손뼉을 치며 말했다. 이피 정말 잘한다! 지금 당장 가수를 할 수도 있겠어. 인안나는 유일하게 학교에서 이피게네이아를 애칭으로 부르는 사람이었다. 이피라고 불러도 되냐는 세 번의 물음에 이피게네이아는 포기하듯이 마음대로 하라고 답변했었다.


이피게네이아 역시 인안나를 안느라는 애칭으로 부른 건 1992년이 오기 약 8일 전의 이야기였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모두가 들떠있던 무렵, 시한폭탄과 같은 어린 이능력자들을 보호하고 감시하던 선생님들의 시선도 제법 느슨해져 있었다. 오후 이능력 조절 훈련의 마지막 시간이었다. 이피게네이아가 이미 눈꽃이 핀 나무에 봄꽃을 피우지 않게 하기 위해 세밀히 흐름을 조절하던 때에, 누군가 이피게네이아를 밀쳤다. 고의는 아니었다. 서로 자기들끼리 장난을 치던 중에 일어난 사고였다. 이피게네이아의 이능력은 그 애에게로 퍼졌다. 이피게네이아와 닿은 아이는 빠르게 늙었다가 다시 어려지기를 반복했다. 그 현상이 어디에서 어떻게 멈출지 이피게네이아도 알 수 없었다.


장내는 소란에 빠졌다. 언제나 이렇게 되지 않도록 이능력을 특별히 주의해야 하는 아이들은 따로 관리하지만,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앞두고 느슨하게 자유시간을 준 게 문제였다. 이능력자만 모인 곳에서도 더욱 강력하고 통제할 수 없는 이능력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누군가는 이피게네이아를 소름 끼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선생님들이 급하게 달려오던 때에 이피게네이아를 잡는 손길이 있었다. 괜찮아. 내가 되돌릴 수 있어. 인안나는 겁에 질린 아이들 모두를 향해 말했다.


어느새 여든 살 노인처럼 자글자글한 주름이 생긴 아이를 인안나가 끌어안았다. 다정한 온기가 아이에게 전해지고, 어느새 잠든 아이는 이미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인안나의 치유는 그런 것이었다. 여느 때처럼 상냥하게 웃은 인안나가 말했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내가 있으니까. 그건 다른 아이들에게 말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피게네이아에게 말한 것이기도 했다. 너의 능력을 두려워하지 마. 잘못되는 건 모두 내가 되돌릴게. 그러니까 괜찮아, 이피. 짧게 자른 인안나의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고, 인안나는 다시 주춤거리는 이피게네이아의 손을 잡았다.


그날 밤의 기숙사, 방에 들어가기 전 문 앞에서 이피게네이아가 인안나를 붙잡았다. 저기, 인안나… 인안나는 들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이피게네이아를 바라보았다. 방긋 웃은 인안나는 뜬금없는 말을 했다. 안느라고 부를래? 인안나는 너무 멀어보이잖아, 우린 친구인데. 그건 인안나가 이피게네이아에게 자주 하는 말이었고, 이피게네이아는 대꾸하지 않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피게네이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안나가 이피게네이아를 끌어안았다. 잘 자, 이피. …잘 자, 안느.


이후에도 이전과 다름없는 일상이 흘러갔다. 오전에는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함께 이능력을 다루는 수업을 했으며, 밤에는 얇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잠을 잤다. 인안나는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이피게네이아에게 다정했고, 이피게네이아는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인안나에게 무심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종종 이피게네이아는 인안나와 밥을 함께 먹고, 도서관에 함께 가고, 음악실에서 함께 피아노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인안나가 이피게네이아에게 특별한 어떤 사람이 된건 당연한 순서였다. 비록 이피게네이아는 인안나에게 특별해질 수 없다 하더라도. 인안나는 이피게네이아와 어울리는 만큼 다른 이들과 어울렸고, 똑같이 그 아이들에게도 말하곤 했다.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똑같이 웃으며 손을 잡고 포옹했다.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흘러 크시슈토프 학교에서의 7년이 지나갔다.


인안나는 마나밀레의 의대로 진학했다. 치유의 능력을 갖춘 것과 상관없이 기왕이라면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게 좋잖아? 하는 이유였다. 이피게네이아와는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졌다. 하지만 인안나의 심리적 거리는 멀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안나에게 이피게네이아은 한자리에 있었다. 인안나는 많으면 달에 한 번, 적으면 반년에 한 번 이피게네이아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의 말머리는 언제나 사랑하는 이피게네이아, 로 시작했다.


그리고 인안나가 대학을 졸업을 준비할 무렵 이피게네이아에게서 편지가 왔다. 크시슈토프 학교의 교사가 되었다는 편지였다. 진로를 고민하던 인안나는 그걸 보며 충동적으로 결정했다. 모교에서 보건 교사나 할까. 기왕이면 사람을 살리는 게 좋잖아, 하고 말했으나 사실 인안나에게 사람 목숨은 평등하게 귀하여 되레 평등하게 무가치했다. 그러므로 아무래도 좋았다. 병원에서 의사가 되어 백 명의 사람을 살리든, 모교의 보건 교사가 되어 백 명의 사람을 살리지 않든. 이듬해 오월에 인안나는 크시슈토프 학교의 보건 교사가 되었다.


안녕, 이피. 잘 지냈어? 인안나는 마치 어제 본 것처럼 이피게네이아에게 다정히 인사했다. 같은 나이의 두 여교사가 교사용 숙소의 한 방으로 배정된 건 어릴 때와 마찬가지로 필연적이었다. 이피게네이아는 크시슈토프에서 음악을 가르쳤고 인안나는 다친 아이들을 치료했다. 이피게네이아의 일은 오전에 치중되어있었고 인안나의 보건실은 이능력 훈련을 시행하는 오후에 분주했다. 두 사람은 같은 학교 내에서도 마주칠 일이 적었으나, 밤에는 언제나 한 방 한 침대에서 잠들었다. 인안나는 옛날과 다름없게 스스럼없이 이피게네이아를 끌어안았다.


크시슈토프 학교에서의 평화로운 나날은 이어졌다.


*


언제나 자애로운 인안나 아르바니티스는 한결같은 웃음을 짓는다. 그 웃음은 이따금 신의 것과 닮아있었다. 모두에게 평등히 상냥하기에 모두에게 평등히 잔인한 신. 누구에게든 구원의 손길을 뻗기에 누구에게든 지옥으로 손짓할 수 있는 신. 아무도 미워하지 않기에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신. 인안나는 말한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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