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취향과 드림관계성 낭낭한 글. 자세한 사항은 레네 프로필에 있습니다.

*취향타는 소재입니다 ~WARNING~








-있잖아. 내가 죽거든.



그녀가 죽었다. 끝나가는 겨울이 마지막 발악으로 눈보라를 쳐대던 날이었다. 전장에서 피를 뒤집어쓰고 개죽음당하는 것보다는 나은 죽음이었을까? 모험가답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그녀는 따뜻한 방 안에서 파리한 입술을 굳게 다물고 새하얀 시트에 싸여 눈을 감았다.

언제부턴가 그녀는 병을 앓았다. 알피노는 검은장막숲 햇빛 사이에서 푹 고꾸라지던 그녀를 기억했다. 해바라기를 하며 눕는 건 그녀가 곧잘 하는 취미였기 때문에 알피노는 여느 때처럼 옆에서 그녀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저녁해가 지고 어둠이 질 때까지 그녀가 깨지 않자 그제야 그는 뭔가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가뭄에 비쩍 마르는 나무처럼 눈에 띄게 생기를 잃어갔다. 원인은 알 수 없었으나 무언가가 빠르게 그녀를 좀먹어가고 있다는 것은 명확했다. 야슈톨라는 그녀의 에테르가 어디론가로 빠져나가고 있다고 했다. 특별히 향하는 장소도 없이, 그저 자연으로 돌아가듯이.

그녀는 동료들이 곁을 지킨 지 한 달여쯤 됐을 무렵 깨어났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알 수 없는 얘기를 했다.


-꽃밭을 만들어줘. 꽃밭 한가운데는 비우고… 그곳이 내 무덤이 될 거야.


풍성한 꽃잎을 가진 붉고 검은 올드로즈. 새하얀 니메이아 백합. 노란 꽃들이 총총히 박힌 입금화. 진한 향기를 뿜어내는 라벤더. 우리 같이 본 적 있었지, 정말로 아름다웠어……. 한참 동안 작은 소리로 중얼대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알피노는 소리죽여 울었다. 같은 쌍둥이인 알리제는 그처럼 울지 않았으나 그녀가 다시 잠에 빠져들고 날이 바뀔 때까지 그녀 옆을 지켰다.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나 그녀는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녀가 누운 흰 관은 검은장막숲 열두신 대성당 근처 어딘가에 묻혔다. 시기상 봄이라 하기엔 조금 멀었던지라 유언 격이었던 꽃밭은 차차 조성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허나 어디서 얘기를 들었는지 그녀를 조문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새하얀 꽃이 아니라 땅에 묻어 주위를 꾸며줄 씨앗과 모종들을 가져왔다. 오는 사람마다 무덤 주위에 꽃을 심으며 예를 올리는 장례식은 대단히 기묘한 광경이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여러 달이 지났다. 무덤가 꽃밭은 화려하고 매혹적인 빛깔과 향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꽃에 이끌려 온 많은 사람이 이름도 모르는 모험가를 위해 꽃을 심었다. 르베유르 쌍둥이와 그녀의 옛 동료들은 넓어져 가는 꽃밭을 보고 잠시 머리를 비웠다. 먹먹히 물에 젖은 솜뭉치를 멀리 치우고 향기로운 공기가 가슴을 채웠다.








몇 년이 지났다.

그리다니아는 동부삼림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주로 대성당 주위에서 참배자나 모험가는 물론이고, 귀곡부대의 정예도 실종되거나 시체로 발견되는 일이 일어났다. 워낙 은밀하고 순식간인 탓에 사람이 벌인 일인지 혹은 재해의 징조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정령들조차 겁을 먹고 도통 예언을 주지 않았다.

알피노는 레네의 무덤을 걱정했다. 무덤을 찾는 사람들도 걱정되었다. 커진 걱정은 알피노를 열두 신 대성당으로 이끌었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길에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고, 잠깐 보고 오는 것뿐이니, 딱히 일행은 없었다.

대성당에서 레네의 무덤으로 가는 길은 최근에 손을 봤는지 정돈이 잘 되어있었다. 간혹 모험가들이 들러 봐주기 때문이리라. 그중에는 알피노와 알리제를 비롯해 새벽의 혈맹과 노아의 사람들도 있었지만, 요사이엔 일이 바빠 찾질 못했다.

해가 지고 있었다. 황금이 뿌려졌다가 주홍색으로 다시 물드는 하늘을 언젠가 오래도록 바라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옆에는 레네가 있었다. 레네는 해가 지는 하늘을 퍽 좋아했다. 알피노는 상념에 젖어 들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슬슬 달이 보이었다.

꽃밭에 발을 들이자 기묘한 기운이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기분 탓이다. 알피노는 그대로 몇 걸음을 더 내디뎠다. 꽃밭은 생기로 만연했다. 꽃들 너머로 보이는 묘비도 그대로였다. 레네를 찾아온 거로 보이는 모험가도 두어 명 있었다. 모험가들이 알피노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늦었는데, 도련님. 벌써 저녁이라고."

"그렇긴 하지. 일을 처리하고 오느라 시간이 이렇게 되었다네."

"뭐, 마침 잘 왔습니다. 여기 일로 '새벽'에 말할 게 있었거든요."


루가딘족 모험가가 말했다.


"무엇을 말인가? 근방의 실종사건?"

"아, 혹시 그 사건을 조사하러 온 거야? 사람이 실종되고, 가끔 발견되는 시체는 에테르를 쪽쪽 빨려서 말라비틀어졌다던."

"그 얘기는 아닙니다. 다름이 아니라 무덤 얘긴데… 여기 좀 보십시오."


모험가들은 알피노가 잘 볼 수 있게 자리를 조금 비켜주었다. 그들이 가리키는 곳은 관이 묻혔던 자리였다.


"보이십니까? 풀이 자란 자리가 좀 이상합니다."

"우리도 장례식에 왔었으니까. 관을 묻고 흙으로 덮은 다음, 잔디를 심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그런데 이거 봐… 몇 년이나 흘렀는데 특정 부분은 풀이 나질 않아. 게다가 이 모양, 어쩐지 동심원이 퍼져나간다는 느낌이야. 비술서의 술식처럼."


로브를 쓴 라라펠족 모험가가 말했다. 알피노 역시 비술을 공부한지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는 무덤 주변과 꽃밭을 살폈다.


"흠… 이쪽도 풀이 비정상적으로 누워 있네. 확신은 못 하겠지만, 좀 더 높은 곳에서 본다면 달리 보이려나 싶군."


알피노가 뒤를 돌아 모험가들을 보았다.


"……자네들?"


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알피노는 당황했다. 묘비 근처에 숨기라도 한 걸까? 라라펠이면 모를까, 루가딘족 모험가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새 주변에 무슨 일이 생겨서 급히 가야 했다든가, 는 어떨까… 좋게 생각해보려 해도 느낌이 안 좋았다. 그러다 알피노는 무심코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아니?!"


모험가들이 지적했던 풀의 뒤틀림에서, 척 봐도 기분 나쁜 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중 일부는 이미 알피노의 발목께에서 떠다니고 있었다. 이건 위험하다, 벗어나지 않으면 큰일 날 것이다, 그간의 경험으로 단련된 본능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알피노는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것 역시 알피노가 물러선 만큼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생각보다 빠르게, 그의 몸을 타고 올랐다.


"눈 감아!"


요사스러운 핏빛 암운이 그를 감싸려 할 때,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세찬 바람이 불었다. 누군가가 알피노를 급하게 잡아당겼다. 알피노는 자신의 팔을 잡아끄는 손을 따라 무덤에서, 꽃밭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를 구한 사람은 처음 보는 엘레젠족 남성이었다. 반대쪽 손에는 나이트가 사용할법한 검이 들려 있었다. 좀 전에는 검으로 바람을 일으켜 암운을 흐트러뜨린 듯했다.


"저 무덤은 저주받았어. 절대 다가가지 마라."

"…갑자기 무슨 말이지? 우선 본인이 누군지 밝히게!"


생명의 은인이긴 해도, 대뜸 수상한 말을 내뱉은 사람이었다. 알피노는 즉각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끔찍하게 밝은 달빛 아래에서 남자가 성큼성큼 알피노에게 다가왔다. 붉은 숱이 많은 검은 머리칼은 한쪽 눈을 덮었다. 버릇인지 눈가와 콧등을 찌푸린 인상이 무척 어두웠지만, 단단하고도 기이한 바위와 같은 분위기다.

알피노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당신, 레네를 알고 있나?"

"아주 오랜 지인이다."

"지인이라고?"

"후우, 도련님. 그건 그렇다 치고."


남자는 답 대신 꽃밭을 가리켰다.


"저 구름이 보여? 보이드의 요마들이 가진 기운과 비슷한 것이다. 방금도 두 녀석이 잡혀들어갔어."

"뭐?"

"언제, 어떤 식으로,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간 일어난 실종사건에 보이드의 존재가 연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것도 레네의 시체를 이용해서. 살아있는 생명의… 에테르를 빨아들이는 것 같다."

"지금 그 말을 믿으란 건가?"

"…이상하지 않나? 그녀는 건강하던 와중에 돌연 에테르를 소모하고 죽었다. 그리고 요즘 나타나는 시체들은 에테르가 전혀 없는 텅 빈 껍데기들이지."


알피노는 그에 전혀 반박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한 마지막 말을 기억해봐. 넌 들었지?"


마지막 말? 남자의 말에 기억을 되짚은 알피노의 얼굴이 일순간 차갑게 굳었다. 죽어가는 레네가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말은 알피노에게 깊은 슬픔을 주었다. 후에 알리제에게 그 말을 전했을 때, 그 짧은 문장은 장례식에서도 울지 않았던 알리제의 굳은 얼굴을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사람을 잃는다는 건 그랬다. 아지스 라가 얼마나 하늘 높이 떠 있든, 대미궁 끝 구속함에서 몇 얄름을 더 파고 들어가든, 그들이 느끼는 슬픔보다는 얕았으리라.

그러나 지금. 한차례 섬뜩한 일을 겪고 나자 그 말이 참으로 복잡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그렇다면 지금 레네는… 대체 무엇이지?"

"말하자면… 덫이다."


그 이상의 설명은 붙지 않았으나 알피노도 알 수 있었다. 조문 온 사람들을 끌어들여, 더 많은 생명 에테르를 끌어모으려는 수작이었다.

남자의 입이 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그러고 조금 뒤에, 그는 표정을 풀고 알피노의 얼굴께로 손을 가져갔다.


"그녀의 마지막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고 생각지는 않아. 그걸 이용하는 존재가 우리를 며칠 더 울게 하는 것이지. …허나 알피노, 이대로 있다간 우리는 더 오랜 세월을 울게 될 것이다."


알피노는 다시금 흘러내리는 눈물을 문질러 닦았다. 그의 얼굴에 결연함이 떠올랐다.


"맞네. 동료들을 불러모아야겠어."


알피노는 무덤 쪽을 한 번 흘긋 바라보았다. 그녀가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속삭인 말이 머릿속을 울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 함께 살자.








"이상한 곳이야."


알리제가 말했다. 옆에서 알피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일이라고 동료 중 하나가 맞장구쳤다. 그들은 일찍이 그녀와 함께 노아의 조사원으로 어둠의 세계를 다녀왔고, 아발라시아 하늘도적들과 보이드의 방주에 올라탔던, 보이드 세계에 관해서라면 베테랑인 모험가들이었다. 무덤에서 흘러나온 기운은 알피노를 구해준 남자가 말한 대로 보이드의 것이었고, 이 세계에 들어오는 문도 이전 보이드를 오갔을 때와 같은 방식이었다. 그러나 막상 펼쳐진 공간은 그들에게도 이상하리만치 보이드 세계와는 전혀 달랐다. 앞길을 가로막는 적들도 보이드의 존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적보라색 황혼이 지는 황량한 눈밭을 지나 검고 붉은 올드로즈가 만개한 꽃밭을 걸어 낡아빠진 고성에 들어왔다. 낡은 고성에는 어디서 본 적 있는 하얗고 검은 기사 말과 기계 인형들이 가득했다.


"허상이다."


검붉은 머리칼의 엘레젠족 남자가 단언했다. 그 남자는 적들을 베어 넘기고 망설임 없이 고성 내부로 계속 파고들었다. 길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막연히 그녀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말할 뿐이었다. 

알리제는 그가 수상하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놓고 수상하게 굴고 있었다. 그는 이쪽 세계로 가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어떤 이야기도 꺼낸 적이 없다. 어쩌면 그야말로, 모험가들을 한꺼번에 끌어들이기 위해 있는 미끼나 하수인이 아닐까. 지당한 의심이었다. 그러나 그를 따라가는 것 말고 다른 길이나 방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에테르 계측기도 그가 가는 방향대로 에테르가 모여들고 있다 하였다. 사실상 그들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절대로 방심하지 말라는 말 외에는.

적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성이 무너져도 개의치 않는 것처럼 사방을 부숴대더니 바닥을 무너뜨렸다. 동료 대부분이 꺼진 바닥 아래로 사라졌다. 그들은 비명과 함께 점점 아래로, 아래로, 가늠할 수 없는 곳으로 집어 삼켜졌다. 잔해 언저리에 서서 알피노는 무심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그를 남자가 붙들었다. 남자는 그들이 사라진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그러나 마찬가지로 지하 어딘가로 이어지는 길로 남은 사람들을 이끌었다.

주위는 그들을 제외하면 깜깜한 어둠뿐이었다. 마법으로 빛을 밝히자 돌로 된 나선계단을 계속해서 내려가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떠한 적도 없었고, 어떠한 함정도 없었다. 그저 내려가고만 있었다. 내려간다는 행위를 오래 반복하면서, 차원의 경계가 흐려지다 못해 옅어지는 듯한 감각이 온몸을 죄었다.

참다못한 알리제가 소리쳤다.


"이봐, 당신! 이렇게 가는 게 맞는 거야? 어디 이상한 곳으로 끌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갑작스러운 소란에도 다들 침묵했다. 알리제의 말에 동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안전한 루트다."


남자가 짤막하게 말했다. 알리제는 기가 차서 노성을 질렀다.


"일이 이 지경까지 됐는데 도저히 믿을 수가 있어야지. 우린 여기가 어떤지도 모르고,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뭔가 알고 있다면 얘기를 해주면 되잖아?"

"맞네. 당신을 의심하고 싶지 않지만, 아무 말도 없는 건 의심을 더할 뿐이야. 당신은 레네가 에테르를 빨아들이기 위한 '덫'이라고 했지. 만일 우리에게 장난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알피노가 알리제를 거들었다. 남자는 곤란하다는 듯 머리칼에 가려지지 않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장난친 적 없어."

"그렇다면 말하게. 숨길 필요가 있나?"

"말할 필요가 없다는 쪽은, 생각해보지 않은 건가?"

"정말로 필요 없는 쪽인가? 레네가 이용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녀를 구하고 싶네. 당신을 믿고 따라온 것도 그런 이유야. 그걸 위해서라도 이 상황의 진상도 명확하게 알고 싶어."

"그래! 말 잘하는걸, 알피노. 그리고 하나 더. 당신은 누구지?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말하는 게 좋을걸. 함부로 레네의 이름을 파는 거짓부렁이라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거야 원. 아가씨나 도련님이나."


어느새 술식으로 통로를 막은 알피노와 세검으로 삿대질을 하는 알리제를 바라보며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이곳은 안식의 극장. 장미꽃과 눈으로 덮은 요람에서 함께 잠드는 막연함을 꿈꾸기에 적절한 곳이지."

"시라도 읊는 거야?"

"비유.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남자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어 섰다.


"꿈은 곧 허상이며, 허상은 존재하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나타났던 눈밭도, 꽃밭도, 성도, 적도, 지금 있는 이 공간도 그런 것들이야. 레네에게 들러붙은 보이드의 요마가 그녀의 기억과 바람을 덧씌워 만들어낸 거짓이지. 보이드가 아니라 원초 세계를 닮은 건 당연한 일이다."


알피노가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라면, 이곳의 모습은 혹시 레네의 마지막 바람을 반영한단 말인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평화롭게 잠드는 나날이 오리란 꿈 말이지."


남자의 말에 알피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들었을 때는 막연하게 상상만 했었다. 그리고 때는 늦었다는 생각이, 진작 하지 않았음에 후회가 들었었다. 그녀는 알피노와 알리제를 가족인 마냥 대했고, 쌍둥이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을 함께 여행했는데 같이 살고 일상을 공유하는 게 뭐 그리 힘든 일이었을까? 막연하게 상상만 해서는 이렇게 늦고 만다.


"물론 요마가 그걸 반영해야겠다고 판단해서지, 엄밀히 말하면 그녀의 의지는 아니다. 정말 그 의지대로 작용하고 있다면 적따윈 나타나지도 않았을걸."


남자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레네에게 붙어있는 요마는 형체도, 힘도, 자아랄 것도 없다. 그저 숙주로 삼은 것의 에테르를 빼내 죽이고, 숙주의 모든 것을 차지한다. 이후에는 죽은 숙주를 미끼 삼아 다른 생명의 에테르를 빨아들이는 본능만이 있어. 그 수법이 전략적이란 것에선, 어떤 면으로는 지능적이기도 하겠군."

"그 말은 즉… 이미 레네와 요마는 융화되었다……."

"그래. 요마를 죽인다는 건 곧 레네를 다시 죽이는 거다. 이미 죽은 사람을 죽인다고 표현하는 건 좀 우스운가?"

"이봐!"

"…뭐, 달리 말하자면 그녀의 힘을 지니게 된 요마이기도 해. 그만한 요마를 죽이려면 그만한 사람들이 필요하고, 필연적으로 그녀 같은 레벨의 모험가들이나 특수한 힘을 가진 자가 되겠지. ……인간 중에서는 말이야. 어쩌다 덫에 걸린 어중이떠중이로는 무리였다."

"잠깐, 그래서 당신은 일부러 알피노 앞에 나타난 거야? 알피노를 부르면, 알피노가 자연히 적절한 상황을 만들어줄 테니까? 우리 손으로 그 사람을 끝장내라고?"

"그렇게 되겠지."

"허……."


알피노가 신음했다. 남자는 쏟아지는 날 선 시선들을 냉정하게 받아냈다.


"아직 말 안 끝났어, 도련님. 다른 이유는, 레네가 바라기 때문이다."


순간 알피노와 알리제는 제 귀를 의심했다.


"레네가 그걸 바란다?"

"그렇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알리제의 물음에 남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을 고르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 아가씨. 믿기 어렵겠지만, 이게 레네의 바람이라는 말에 어떤 거짓도 없다고 맹세할 수 있다. 내 얘기를 믿고 끝까지 들어줄 거라면 내막을 말하겠어."


쌍둥이는 한참 허공을 노려보다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둘의 얼굴에 고민이 가득했다.


"……알피노 너는 어떻게 생각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 게다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저자를 보면 묘하게 위화감이 들어."

"나도 같은 생각이야. 뭐라고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사람에게 친가족이 있다면 저런 사람일지도 모르겠어. 그런 느낌이네."


둘은 한동안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더니, 이내 결심을 마치고 말했다.


"좋아. 이야기를 끝까지 듣도록 하지."


단호한 목소리였다. 역시, 마음에 드는군.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네는 살아있을 적부터 그런 생각을 해왔다. 자신이 죽는다면 어떤 방식으로 죽게 될 건지. 모두가 배웅하는 가운데 보드라운 침대에 싸여 평화롭게 죽는 것, 모험가답게 모험을 하다가 미지의 위협에 스러지는 것, 혹은 전장에서 적의 칼을 맞아 숨이 멎는 것. 마지막에는 더 다양한 경우가 있겠지. 혹시라도 아군의 배신으로 죽을 수도 있고, 아군을 지키다 죽을 수도 있다."


어떻게 최후를 맞는가,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누구나 한 번쯤 하는 생각이다. 특히 목숨이 경각에 달린 모험가라면 더욱.


"그런데 그 가운데서도 자신이 아군을 배신하게 되는 경우는 어떨까? 그 녀석은 많은 경우를 생각한 만큼 이 경우 자신의 최후도 수백, 수천 번 그려보았다. 그리고 만일 최후를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죽음이 좋을지도 생각해놨지."

"그것이 지금이라는 건가."

"맞아. 이 선택은 그녀가 예상했던 무수한 시나리오 중 하나이고, 실제로 이런 상황이 되자 스스로 여태껏 마음의 준비를 해둔 선택을 한 것뿐이다. 레네의 무의식은 너희를 부르면서도, 너희들이 이 모두를 전부 알게 되면 혹시라도 머뭇거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너희가 그런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그녀 자신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아무리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거창한 이유가 붙었을지라도 아끼는 이를 기꺼이 죽일 수 있는 모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아니, 그만큼 모진 녀석이지. 이깟 세계보다 제 사람이 우선이거든."


그의 말이 맞다. 그런 사람이었지, 알리제가 씁쓸하게 웃었다.


"한편으론 너희를 우선하기 때문에 너희가 사는 이 세계를 사랑해. 너희가 살아가기 위해서 기꺼이 사라질 것이다. 다만 스스로는 그럴 수 없으니 가능하다면 자신의 끝은 너희가 매듭짓기를 바라."

"그런……."

"더 웃기는 점은… 요마는 너희 손에 죽겠다는 레네의 바람까지 덮어씌웠어. 생존이 위협받는다는 걸 모르는 건지, 오히려 상황을 역이용해서 한꺼번에 양질의 에테르를 모으려는 건지는 모른다."


남자가 자신을 가리켰다. 일순간 주변의 모든 것이 멎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런 바람을 이루어주기 위한 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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