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썩-


침대에 떨어져 몇 번 반동으로 흔들린 아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씨발."


그냥 욕이 나왔다. 방 한구석에 같이 딸려온 물자를 확인한다. 하나, 둘, 셋.. 방 문을 열고 저 바깥에 빠져나온 물자들까지 확인한 아이든 헌터는 책상에 앉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코코?"

-아이든?-

"당장 루시안 데리고 내 방으로 튀어와."

-엥? 알았어.-


일지와 일기를 가볍게 확인하고, 물자를 기록한 여분의 종이를 확인한다. 아슬아슬, 그래도.


가능해. 아이든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포레스터는 뉴욕과 뉴저지 일대를 지배하는 세력이지만, 그 전체를 지배하지만 못한다. 당연하다. 뉴욕 땅은 더럽게 크고, 포레스터는 이제 막 2년 정도 밖에 정착하지 않은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연히, 그들보다 먼저 자리잡은 세력들이 몇 있었다. 포레스터는 아이든 헌터와 세와 아폴라비의 무력에 힘입어 그들을 깡그리 밀어버리거나 흡수, 동맹하는 등, 그 지대를 완전히 장악했으나 딱 한 세력만은 밀어버리지 않았다.


못했다.


의사협회, 뉴저지 주 안에 있는 도시 뉴어크를 완전히 장악한 협회. 장악력으로 따지면 듬성듬성한 포레스터보다 더욱 뛰어난 세력.


일찍히 멸망이 시작된 이래로 그들은 그 도시에서 움직이지 않고 세력을 긁어모아 기술을 보존했다. 그 주변의 수많은 세력들과 복잡하게 얽힌 허브이자 그들의 위에서 군림하는 일종의 방관자.


그들 모두의 목숨이 바로 이 '의사협회'의 손에 달려있다.




포레스터는 일찍이 이 의사협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 중앙의 의사 우 즈후이가 이곳 출신이기도 하거니, 아이든의 지인이 이 의사협회의 유망주인 덕이다.






그리고 아이든 헌터가 물자를 가져온지 3일, 의사협회가 거래에 응해왔다.


"세와, 오셨습니까."

"그래, 아이든. 건강해 보이는구나?"

"저는 뭐, 항상 건강하죠."


아이든이 눈을 굴리다 말했다. 세와는 미소를 지으며 아이든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이게 정말 가능할 지는 몰랐는데, 수고했다."


아이든이 서 있는 뒤쪽에 나무 상자가 가득 쌓여있다. 아이든이 넘겨준 표에 물자 목록이 빼곡히 적혀있다.


"이 정도면, 일시적으로나마 뉴메니의 사람들을 먹여살릴 수 있을 겁니다. ..극단적으로 아껴야 하겠지만.."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아이든. 이렇게 까지 성의를 보였는데, 나라고 가만 있을 순 없겠어."


이제 정말 겨울이다. 곧 눈이 내리고 나면, 뉴메니의 난민은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쿠퍼는 엉망이지만, 복구가 상당히 진행 중이지."

"네, 이번에 경비대의 일부를 차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그곳이 조금 더 나아지고 나면, 임시적으로 천막을 치고 뉴메니의 사람들을 그곳에 받아들이자."

"네...!"


아이든의 얼굴빛이 조금은 밝아졌다. 세와는 픽 웃으며 아이든의 양 뺨을 꾹 눌렀다.


"으븝."

"열심히 했구나, 잘했어!"

"..윽, 세와. 놔주세요.."


아이든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 세와는 흘긋 웃고 아이든을 놔주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의 약한 모습에 저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부락민 몇몇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저 사람들이.."

"네, 제가 인신매매 현장에서 구출한 이들입니다. 이제 곳 의사협회로 이동해서 재활 치료를 받을 예정이구요."


세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 의사협회. 아이든의 부락과 포레스터는 재활이 필요한 환자들을 감당할 만한 여력이 없다. 그래서 생각한 차선책이 바로 이것이다.


일정 이상의 물자를 의사협회에 공급하고, 그 대가로 환자와 부상자들을 의사협회로 옮길 것. 이번 겨울동안은 그렇게 버틸 예정이었다. 겨울이 되면 사람을 부양하기 힘들어진다. 대다수의 세력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의사협회는 그런 이들에게 물자를 받고 겨울동안의 요양소를 운영한다. 

사실, 포레스터는 이미 한번에 보낼 수 있는 환자들을 아슬아슬하게 채워 보낸 이후였다. 그런 주제에 새로 사람들을 요양시킬 수 있는 건 아이든 헌터가 가져온 각종 위생용품과 의료물품의 덕이 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가 포레스터의 리더인 세와 아폴라비에요. 아이든의 보스죠. 세와가 사람들에게 살갑게 인사를 한다. 아이든은 그 동안 부락의 입구에 서서 저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든!"

"왜, 코코."


코코의 주황색 머리카락이 아이든의 시야에 뿅 하고 나타났다. 아이든이 질색을 하며 코코를 밀어냈다.


"안 추워?"

"안 추워."


아이든이 대답했다. 코코의 양 뺨이 얼어서 빨갛다. 허나 아이든은 여전히 창백했다. 몸 속의 과다한 기백이 몸의 온도를 조절하고 있는 탓이다.


"들어가지, 그래? 아직 오려면 한참 남았는데.."

"아니, 기다릴 거야."


아이든이 코코의 말을 거절했다. 코코의 입술이 삐죽이 튀어나왔다. 아이든 헌터는 지금, 의사협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의사협회를 대표하여 나올 사람을.

코코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덜컹- 순간 코코가 고개를 돌렸다. 아이든만큼은 아니더라도 부락에서 두번째로 강한 인물인지라, 그 날카로운 감각에서 자동차 엔진 소리가 잡혔다. 그 말인 즉 아이든은 진즉부터 자동차가 오고 있음을 알았으리라.


"토비 불러와."

"...알았어."


코코가 입술을 비죽이다 토비를 부르러 털레털레 떠났다. 그는 저 구석에서 아이들을 마지막으로 진찰하고, 명단을 수정하고 있을 것이다. 역시 마음에 안 들어!


허나 코코의 표정과는 반대로, 아이든의 얼굴은 조금씩 화색이 돌고 있었다.



저 멀리서 큼직한 트럭이 달려왔다. 버스는 요즘 같은 도로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세와가 아이든의 곁으로 다가오고, 토비가 그 뒤를 따랐다.


"그러고보니 오랜만에 아이삭을 보겠구나, 아이든?"

"그래."


세와의 물음에 아이든 헌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털털거리는 엔진 소리와 함께 다가온 트럭이 끼익- 소리를 내며 멈춘다.

아이든이 서둘러 입구로 걸어갔다. 찬 바람이 얼굴을 마구잡이로 때린다.


덜컹, 곧 낡은 차 문이 열린다. 가죽 냄새와 먼지 냄새가 물씬 풍기며 녹슨 철제 계단을 따라 누군가 내린다. 긴 흑발, 새빨간 눈동자를 가진 수려한 외관의 청년이 아이든을 보며 화색을 띄었다.


"아이든!"


아이삭, 18세, 흑발적안에 노르웨이 혼혈. 의사협회의 유망주. 그리고..


"아이삭."

"나 기다렸어?"

"..그래."


아이든 헌터와 유년기를 공유한 청년. 아이삭이 아이든을 와락 안아주었고, 아이든은 순순히 그 품에 안겼다. 토비와 세와가 눈을 마주치고 어깨를 으쓱였다. 미소 띈 얼굴이다.


"다친 곳은?"

"없어."

"아픈 곳은?"

"없어."

"다행이다.. 건강해서 다행이야."


아이삭이 말갛게 웃는다. 아이든은 무심코 따라 웃었다. 소녀는 이내 그를 툭툭 치며 품에서 벗어났다. 아이삭이 아쉬운 표정으로 아이든을 놔주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나도 부락에서 이미지 관리를 해야 한다고."

"포레스터는 어린 애들도 일 시키는게 참 그렇단 말이지."

"나 들으라고 하는 말이니, 그거?"


세와가 옆에서 픽 웃으며 참견했다. 아이삭이 세와를 보다가 안 그래도 날렵한 눈꼬리를 치켜떴다.


"그런데요?"

"이거 참, 반박할 말도 없고.."

[역시 아이든, 오빠랑 같이 의사협회로 가자.]


아이삭이 한국어로 말했다. 알아듣지 못한 코코가 얼굴을 찡그리든 말든, 아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내가 포레스터에서 널 지지하는 편이 의사협회에 유리해.]

[끄응...]


반박할 수가 없네. 아이삭이 피식 웃더니 주머니를 뒤적였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작은 초콜릿을 꺼낸 그가 아이든의 입에 초콜릿을 물려주었다.


[자, 단거 좋아하지?]

[응.]

[오빠가 너 주려고 챙겨왔다. 또 있는데, 그건 이따가 줄게.]

[그냥 환자들한테 주지.]

[너 생각나서 그래.]


아이삭이 말갛게 웃었다. 눈이 부시다. 아이든은 구김살 없는 그를 보며 흐리게 웃었다.


문득 빛 아래 어둠이 너무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분들이 협회 가실 환자분들?]

"영어 써."

"아, 맞다. 토비!"

"네, 아이삭."

"저 분들 맞죠? 환자분들."


네, 잠시만요. 명단 드릴게요. 토비가 파일철을 넘겨 종이를 몇개 팔락이는 동안, 아이든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아이든!"

"아, 노아."

"오랜만이야!"


노아, 의사 협회의 정신과 담당이자 초능력자다. 새카만 흑발에 보라색 눈동자가 동글동글하다. 옆에선 대화를 나누던 세와가 웃고 있었다.


"아이삭이랑은 대화 잘 했어?"

"응. 뭐, 잘 했어."

"아이삭이 초콜릿은 줬고?"

"응.."


아이든이 고개를 끄덕이며 저를 위해 허리를 굽혀주는 노아를 만류했다. 허리 펴.


"..한번 치료 받으러 와."

"됐어, 프리즈도 있고 즈후이도 있는데 뭐."

"그래도. 기기나 설비는 우리 쪽에 못 미치잖아?"

"내가 꼭 너희보다 좋은 기기 찾아낸다."


아이든이 피식 웃었다. 노아는 웃으며 아이든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노아와 아이삭은 친구다. 파트너이기도 하고. 의사협회에 소속된 두 사람은 온갖 곳을 돌아다니며 실력을 쌓는 중이었다.

노아가 수술집도까지 가능한 유능한 의사라면 아이삭은 아직까지 간호사 일을 하며 노아를 보조하는 중이었지만 말이다.


"세와씨도 한번 진찰 받으러 오세요."

"으음, 난 우리 포레스터의 의사들을 믿는걸?"

"그래도요."


노아가 유순하게 웃었다. 세와도 마주 웃었다. 뉴욕과 뉴저지 일대 가장 강력한 초능력자로 손꼽히는 이들의 미소에 토비가 피식 웃었다.


"아이삭, 환자분들은 내가 데려갈 테니 넌 물자들을 옮겨줄래?"

"아, 알았어."

"내가 도와줄게."

"안 도와줘도 되는데."


해줄때 감사합니다 해. 아이든이 아이삭을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아이삭은 킥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든은 고개를 끄덕이며 코코에게 말했다.


"코코, 넌 노아를 돕도록 해."

"엑? 나도 물자-"

"코코."

"...."


코코는 말 없이 입술만 삐죽이다 흥 하고 돌아섰다. 아이삭이 얼굴을 찡그렸다.


[쟤는 너보다 나이도 많으면서 하는게 뭐니?]

[냅둬, 밥값은 하니까.]


아이든이 아이삭을 앞서가며 손짓했다.


[뭐해? 빨리 와.]

[아이, 오빠 좀 기다려주지.]

[...으엑..]


아이든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삭은 피식피식 웃으며 아이든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아이든은 당연하다는 듯 그 손을 잡고, 그를 계단으로 끌어올려주었다.


[아이든.]

[응.]

[정말 의사협회로 오면 안돼?]

[..안돼.]


아이든이 단호하게 말했다. 아이삭의 눈꼬리와 눈썹이 축 늘어졌지만 아이든은 넘어가지 않았다. 현 의사협회의 회장이 직접 부탁한 일이었다.


'아이삭을 위한다면, 그 애를 포레스터에서 지지해줄래? 그래야 그 애가 무슨 일이 생겼을 때에도 도망갈 곳이 되어줄 수 있잖니.'

'..그 말은.'

'포레스터에서 아이삭을 지지해주렴. 큰 힘이 될 거야.'

'...네.'


아이든은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다시 닫았다. 굳이 말할 거리는 아니었다.


[난 포레스터니까.. 그리고 내 부락도 있고..]

[하지만..]

[내가 포레스터에서 어떤 위치인지 알잖아.]


아이든이 모퉁이를 돌며 말했다.


[그러니까 의사협회로 가는 건 무리야,]

[아이든.. 아."


그리고 멈칫, 뒤따라오던 아이삭이 의아한 듯 따라 걸어온다. 그리고 멈칫.

아이든의 어깨 너머, 아이삭의 새빨간 눈동자가 누군가와 마주쳤다.


"루시안."

"..그, 혹시 모르니까. 물자 명단 좀 확인하고 있었어."


루시안이었다. 빛나는 금발에 새파란 눈동자, 아이삭과는 완벽하게 대비되는 색깔. 수려한 외관, 화려한 미모. 포레스터의 루시안과 의사협회의 아이삭.


"오랜,만이네요. 아이삭."

"아아, 오랜만이네요? 루시안."


순간 굳었던 두 청년의 얼굴이 금새 풀어졌다. 애써 웃는 루시안과, 무언가 맘에 안 드는 얼굴의 아이삭. 아이든 헌터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다물었다.


"아이삭, 가자. 물자가,"

"아이든, 잠깐만. 오랜만에 만났는데 인사나 해야지."


아이삭이 싱긋 웃으며 아이든의 뺨을 살짝 쓸어주고 몸을 돌렸다.


"루시안은, 멀쩡해 보이네요?"

"네, 뭐.."


루시안이 새파란 눈을 옆으로 굴렸다. 의도적으로 피하는 시선이었다. 하아, 아이든이 한숨을 쉬었다. 아이삭은 조금 봐달라는 얼굴로 아이든을 향해 웃었다. 새빨간 눈동자가 아이든을 향했다가 다시 루시안을 향한다.


"코코도 아이든 옆에 있었는데, 루시안은 여기 있었던 거에요?"

"...네, 물자 수량을 체크하려고요."

"하하, 그건 미리 해놓으셨어야지.."


아이삭이 피식 웃었다. 루시안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아이든은 흠칫 아이삭을 쳐다보았다.


"참, 예의가 없으시네요.. 저희가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고."

"네, 친한 사이요? 뭐, 물론 아니죠. 친한 사이."

"하하..."

"저희가 무슨 친한 사이에요? 재밌는 이야기 하시네."

"의사협회 대표로 오셨으면서 너무 무례하신 거 아닌가요?"

"어? 그래요? 그럼 제가 사과하죠 뭐."

"...."


루시안이 무어라 입을 열려는 순간, 아이든 헌터가 주먹으로 벽을 쿵! 하고 쳤다.


"둘 다 그만. 지금 사이좋게 내 체면 깍아먹는거 알고는 있나?"

"...."

"미안, 아이든."


루시안은 묵묵부답이다. 아이삭이 재빨리 사과했다. 하아, 아이든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루시안, 너는 내려가서 코코랑 같이 사람 통솔해."

"...응, 미안."

"사과는 됐어."

"...알았어."

"아이삭, 너는 따라와. 괜히 시비걸지 말고."

"....뭐."


아이삭이 어깨를 으쓱했다. 아이든이 두 사람을 지나쳐 가버리고, 아이삭이 루시안을 스쳐지나가며 말했다.


[재수없는 새끼.]

"지금 뭐라고.."

"아뇨, 그냥 혼잣말."


아이삭이 빙글 웃었다. 어차피 이제 루시안은 아이든 헌터의 모국어를 이해할 수 없으니까.


"....."


루시안은, 그대로 사라져가는 아이삭을 바라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짜증이 치솟았다. 새빨간 눈의 잔상이 가슴에 남았다.


지구가 망해도 밥은 먹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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