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그의 당혹스러움을 이해한다. 종종 난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어쩌면 이게 소설을 쓰는 재능이라 불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당혹스러움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모종의 즐거움을 느끼면서 나는 천천히 말했다.

“네가 말했잖아. 긴 거리를 짧게 만들 수는 있어도 짧은 거리를 길게 늘릴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그 말을 듣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 어떤 사람과 또 다른 사람이 있을 때 둘 사이의 거리가 멀면 가까워지는 일은 가능해. 무슨 말인지 알지. 하지만 두 사람이 가까우면 두 사람을 멀리 떨어뜨려 놓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야. 왜냐하면 이미 가까운 사이에 있는 사람이 서로 멀어지기 위해서는 특별한 사건이 있어야 하고, 그런 사건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게 굉장히 드문 일이잖아. 바꿔 말해서 렌즈가 카메라와 가까워지는 게 가능한 것처럼, 사람도 멀리 떨어져 있으면 가까워질 수는 있지만 그 역은 불가능하다는 말. 최근에 배운 표현을 사용해서 말하면 바이스 버사.”

“영어 안다고 자랑하는 거야?”

웃으면서 그가 한 마디 보탰다. 나도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아냐. 한국어에서 그 역도 동일하다는 표현은 정확히 딱 떨어지는 표현이 없거든. 그런데 영어에서는 바이스 버사라고 하면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는 의미를 가져. 이런 걸 보면 언제나, 서로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얼마나 표현의 범위가 달라질 수 있는지 싶은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한국어도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딱 떨어진 표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

“한국어가 표현하는 의미나, 잘 모르겠지만, 상황은 한국인들이 경험하는 상황을 잘 표현하는 언어가 아닐까?”

그의 흥미로운 물음에 나는 역으로 이렇게 질문하였다.

“그런데 20년 전의 한국인과 지금 한국인은 다르잖아. 한국인이 달라진다면 경험하는 사태나 상황도 변하고 있단 말이 되고, 그러면 한국어도 그에 맞춰서 변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질문에 그의 얼굴은 복잡한 표정을 띠기 시작했다. 내가 한 말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 같았다.

"네가 우리 고등학교에 온 이유가 뭐였어? 정부의 통지가 보통 중학생 때 온다면 너도 아마, 비슷한 시기에 통지를 받아서 고등학교에 가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은데. 그러면 너는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그 이전부터 하고 있었던 거야? 아니면, 정부에서 사람이 왔을 때야 작가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거야?"

"잘 모르겠어. 애초에 내 꿈은 작가가 아니라 스튜어디스였거든. 외항사라고 알지? 외국 항공사에서 스튜어디스로 일하면서 취미로 글을 쓰는 게 꿈이라서, 어릴 때부터 작가가 되겠다는 마음을 품고 글을 써 왔던 게 아니야. 아직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데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온 건 정말이지 우연에 가까워."

"그래?"

"응.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이야기하면 좋으려나. 중학교 3학년 여름에, 학교에서 글짓기 행사가 열렸어. 과제 도서로 주어지는 책을 읽고 A4용지 세 장 분량의 글을 쓰는 건데 의무적으로 참여할 뿐, 다른 아이들은 서평 쓰기에 별다른 열의를 보이지 않았어. 그 와중에 나는 서평을 쓰고 싶다는 생각보다 어떻게 하면 남들의 눈에 띨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음, 그거 알아? 보르헤스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책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그걸 단편소설로 만들었는데 내가 하고 싶었던 게 바로 그거야. 읽어야 하는 지루한 책이 아니라 내가 상상한 근미래 게임 판타지 소설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소설 제목도 정했어. "이세계에서 만난 남자가 소꿉친구라니?""

"뭐야 그게. 이세계라면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설정 아냐?"

"당시에 일본에서 쓴 이세계 소설이 한국에 번역되고 있었거든. 아무튼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단편 소설을 쓴 다음에 반장에게 제출했어. 반마다 반장이 서평을 모아서 담임 선생님에게 일괄해서 제출하는 게 가장 쉬웠으니까. 그런데 정작 반장은 내가 쓴 글을 보고서도 별 말이 없는데 옆에 앉아 있던,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던 부반장이 나보고 뭐라고 그러는 거야. 서평을 왜 이상하게 쓰느냐고."

"진짜로?"

"황당해서 그 순간에는 말이 안 나왔는데, 내가 서평을 이상하게 쓴 것도 사실이고. 그래서 난 이렇게 대답했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라는 작가는—1986년에 죽었거든—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책을 상상해서 그 책에 서평을 달아서 그걸 단편소설로 만든 사람이야. 이번에 읽은 책에 대해서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도 모르겠고, 이왕이면 재미있는 편이 좋잖아?'

그랬더니 부반장이 하는 말.

‘야. 그건 니 블로그에서나 할 수 있는 거지. 학교에서 제출하는 글은 공적인 글이잖아. 왜 마음대로 재단해서 글을 쓰는 건데. 그러면 좋냐? 즐거워? 예전부터 그랬어도 제정신이 아니다 진짜.’

열이 받아서 그만 필통에 들어 있던 스위스 나이프를 휘둘러서 부반장을 위협한 거야. '미친년아!'라고 소리를 치면서. 칼이 피부에 닿지는 않았고 머리카락을 단지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라서 정확한 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긴머리였던 부반장의 머리카락이 조금 잘렸어. 이렇게 몸이 뒤로 움직이면 관성의 법칙으로 머리카락은 앞에서 붕 떠 있는 상태가 되잖아. (실제로 머리카락이 뜨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머리카락이 수영장 물로 젖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다.) 붕 떠서 머리카락이 움직이면 그 사이로 들고 있던 칼날이 긴 호를 그리면서 움직이거든. 여하튼 머리카락이 잘린 부반장은 애기처럼 앙앙 울면서 선생님에게 달려갔고 반장도 딱한 표정으로 칼을 들고 씩씩거리고 있는 나를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어.

이윽고 담임 선생님이 교실에 찾아오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본 뒤에 반장이 실은 이러저러한 일이 있고 나서 내가 나이프를 휘두르게 되었다는 설명을 아주 잘 했어. 그러자 선생님은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한번 손을 이마에 짚으면서 고개를 흔든 뒤에, 문제의 원인이었던 서평을 반장에게 건네받아서 읽은 거야. 그리고 나를 보고는 이렇게 말하더라고.

'잘 썼어. 하지만 다음부터는 읽은 책에 대한 서평을 쓰도록 해라. 읽어야 할 책에 대한 서평을 쓰는 게 아니라.'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딱히 내가 잘못한 점이 있는 것 같지도 않고, 학교에서 벌을 받지도 않았으니까 큰 문제는 아니고 그래서 부모님도 별 말이 없으셨는데, 저녁을 먹고 내 방에 들어와서 벽면에 붙어 있는 스튜어디스 포스터를 보고 있자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드는 거야. 내가 앞으로 평탄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제주도에 간 것을 제외하면 비행기를 타 본 적은 없지만 승객들이 클레임을 걸거나 시비를 걸면 과연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침대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눈물이 흘렀어.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조용하게 흐르는 눈물. 침대에 앉아서 30분 동안 눈물을 흘리는 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해. 다음 날에 정부에서 멋진 여자가 와서 나를 보고 이렇게 말하더라.

'세상에는 너 같은 사람들이 많단다. 언니가 그런 곳을 알고 있거든.'

그리고 다음부터는 뻔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 고등학교 입학 원서를 넣고, 학교는 빨리 졸업하고 10월부터 우리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예비과정을 거치고 3월에 입학하게 된 거야. 재미 없지?”

"아냐! 아냐. 재미있어. 내가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 재미없게 들릴 텐데 너가 그렇게 이야기를 맛깔나게 해 주니까 마치 풍경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아. 음, 그러면 다툼이 벌어진 부반장은 이후에 어떻게 되었어?"

"나도 잘 몰라. 듣기로는 일반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애초에 여기로 들어오게 된 이상 중학교 친구들하고 계속 연락을 하는 것도 어려우니까. 반장하고는 이후로도 친하게 지내고 있어. 걔는 고등학교 유학을 생각하고 있대. 미국이나, 아니면 호주로."

"대단하다. 생각해 보니까 정부가 직업을 결정해 주는 나라가 지금까지는 3개 나라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사실이야? 한국, 일본 그리고..."

나는 어깨를 으쓱하였다.

"핀란드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어. 그런데 핀란드 사람들이 과연 정부가 말하는 대로 직업을 선택할지는 의문이야. 한국이니까 가능한 거지. 과학적이라고 말만 하면 뭐든지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니까."

"앗. 벌써 11시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버스 막차 타고 가면 되겠어."

"잠깐만. 화장실에서 옷만 갈아입고 바로 올게. 정문에서 보자!"

정문에서 우리는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천천히 걸어갔다. 축제에서 해야 될 일을 이야기하고, 남자친구의 반에서 재미있는 컨셉의 카페가 열린다고 해서 거기로 놀러 간다는 약속을 했다. 듣기로는 집사 카페라고 했는데 집사 복장을 한 남자 고등학생들이 분주하게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는 모습이라 내 취향은 아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제 대부분은 기억나지 않는다. 세계를 정확한 모습으로 저장하는 슈퍼컴퓨터가 아닌 두뇌는 기억을 취사선택해서 저장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보르헤스의 진짜 의미는, 우리가 서평을 쓰는 것도 실은 존재하고 있는 책이 아니라 머릿속에 있는 책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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