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6살, 17살


가을은 중학교 졸업앨범 사진 촬영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려 졸업앨범인데! 사진 찍는 곳이 겨우 어렸을 때부터 제집 드나들듯 드나들었던 우송박물관이라니. 가을의 중학교 근방에서 제일 경관이 뛰어난 곳이라는 것은 알겠다만 조금은 더 특별한 곳에서 찍어도 되지 않느냐며 한참을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잔디가 가을의 팔을 잡아끌었다.


“왜?”

“이 분수 기억나?”


잔디가 가을을 잡아서 데리고 간 곳은 분수대 앞이었다. 가을이 초등학교에 가기 전에 자주 놀았던 분수대.


“당연히 기억나지…. 맨날 놀러 왔었는데.”

“나 우송박물관 거의 5년 만에 오는 것 같아.”

“5년이면 양호하네. 난 거의 9년? 아니, 10년이구나!”


6살 때 정말 자주 왔었다. 거의 매일 출근도장을 찍는 정도로 왔었는데, 갑자기 돈을 내고 들어와야 한다기에 -원래 박물관 내부 견학만 유료였다- 아예 오지 않고 근처 놀이터에서 놀았던 것 같다.


“어때? 10년 만에 찾아온 우송 박물관은?”

“음, 그대로네. 어쩜 변한 게 없어.”


가을이 가장 좋아했던 분수대는 그대로였다. 아직 날씨가 춥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가동하고 있진 않지만, 지금까지 가을이 보았던 그 어떤 분수대보다 이곳의 분수대가 제일 예뻤었다.


“아, 이 분수대에 동전 던져서 소원도 빌었는데…….”

“지금은 못하겠네. 물이 하나도 없어.”


바짝 마른 분수대의 바닥이 낯설었다. 늘 물이 찰랑이게 있었던 것 같은데……. 바닥에 동전도 늘 한가득 쌓여 있었고…….


“아, 기억났다. 나 어렸을 때 여기서 무슨 소원 빌었는지 알아?”

“무슨 소원 빌었는데?”

“동생 생기게 해달라고 빌었어. 근데 진짜 생겼잖아, 금강산. 그땐 소원 이루어졌다고 엄청 좋아했는데, 생각해보니깐 아무래도 그날 바로 엄마하고 아빠하고 작업 들어갔던 거 같아.”

“뭐? 푸하하하하”


잔디의 동생인 강산이가 생긴 비화에 한바탕 크게 웃은 가을은, 자신이 어렸을 때 여기다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넌 무슨 소원 빌었어?”

“음, 잘은 기억 안 나는데...”

“기억 안 나?”

“엄마한테 칭찬받았던 거 기억나. 다른 사람을 위한 소원이라고. 착하다고…….”

“다른 사람을 위한 소원?”

“응. 나 어렸을 때도 무지하게 오지랖 넓었거든.”


풋- 하고, 가볍게 웃은 잔디와 가을은 다시 사진 촬영하는 곳으로 돌아갔다. 어렸을 적 빌었던 소원이 생각 안 나서 아쉽지만, 뭐 별로 중요한 소원이 아니었나 보다 하고 가벼이 넘기는 가을이었다.


**


이정은 텅 빈 작업장을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런 식으로 형이 가버릴 줄은 몰랐다. 박물관과 도예 작업실을 붙여 놓은 것도 형의 의견이었고, 무료 개방하던 박물관 외부 정원을 유료화한 것도 다 일현의 도예공부에 혹시나 방해될까 조처를 한 것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자기 식대로 꾸며 놓고는, 일현은 이정에게 모든 것을 떠맡긴 채 일주일 전, 우송을 떠났다.

형의 갑작스러운 가출에 우송박물관은 비상이 걸렸고, 어른들은 이정을 들들 볶기 시작했다. 형이 있는 곳을 빨리 말하라며 이정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했지만 이정도 형이 어디로 가버린 지는 전혀 몰랐다. 다만 형이 떠날 때 어떤 눈을 가지고 떠났는지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쳤지만, 새로운 세상에 대한 묘한 호기심이 반짝이던 눈동자, 이정에 대한 안타까움과 부러움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던 눈빛.


웃긴 건, 아버지의 태도였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것처럼, 제 발로 떠난 자식은 필요 없다며 이정을 후계자감으로 은근히 밀고 있으신 것이었다. 물론 보수적인 할아버지는 표면적으론 반대하고 계셨지만, 이정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사실은 할아버지도, 일현보단 이정의 도예를 더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외모, 성격, 학업, 모든 면에서 이정보다 뛰어났던 형이지만, 도예 명가 소씨 가문의 당주가 되기 위한 단 하나의 조건, 도예는, 이정이 일현보다 한 수 위였다.


이정은 형이 떠나버린 작업실을 훑어보다 답답한 마음에 밖으로 나와 무작정 걸었다. 후계자 자리를 받아야 할까? 형이 떠나고부터 계속 머릿속을 맴돌던 고민이었다. 아니면 형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해야 하나? 만약 후계자 자리를 받아들였는데 형이 온다면? 그때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머릿속을 가득 채운, 해결되지 않을 고민들.

이정은 그 고민들을 안고 마냥 걸었다. 넓디넓은 우송박물관의 대지를 걷고 또 걸었다. 해결되지 않을 고민들인걸 알지만,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가 없다. 결국엔 할아버지, 아버지가 결정하신 대로 따르고 있을 텐데, 그가 아무리 고민해봤자, 그의 의견이 반영되지는 않을 것인데도 멈출 수 없는 고민이었다.

분명 정처 없이 걷던 걸음이었는데, 어느 곳에 도착하자 이정의 발걸음이 목적지에 도착한 듯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든 곳에는 분수대가 있었다. 10년 전, 이정이 소원을 빌기 위해 동전을 던졌던 분수대.

이정이 멍하니 분수대를 바라보다 4시에 분수대 시험 가동을 할 거라는 얘기를 들은 기억에 손목을 들어 시계를 쳐다보았다. 날씨가 아주 따뜻해져서 내일부터 정상가동을 하기 위해 한 시간 정도 시험가동을 할 거라고, 흘러가는 소리로 잠깐 들었던 것 같다. 3시 50분. 좀 있으면 저 분수대로 물이 뿜어져 나올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분수대는 오랜만이다. 10년 전, 형과 같이 와서 소원을 빈 뒤로 몇 번 오긴 했으나 잠시 지나치는 정도여서 이렇게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은 10년 만이었다. 중앙에 도자기 모양의 조각상들이 오랜만인데다 바싹 말라있어서 그런지 약간은 낯설었다.

이정은 그 낯선 분수대로 다가갔다. 10년 전 빌었던 소원을 기억하려 애쓰면서……. 기억력이 그리 나쁘다 생각하진 않았지만, 역시 10년 전 어렸을 적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단편적이며 단순한 기억들만이 남아있을 뿐. 형에게 동전을 받아서, 쉽게는 주지 않았던 것 같다. 소원을 말하라 했던가? 난 뭐라고 답했지? 자신의 대답을 기억하려 애씀과 동시에 또 다른 기억이 떠오르고 있다. 자신의 눈을 빤히 바라보던 갈색 눈동자. ‘위로해 줄게!’ 라 외치는 아이의 목소리……. 기억이 날듯 말 듯하다.


“어디 갔지?”


한참 기억을 찾고 있는 이정의 귀에 갑자기 다급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건 무언가를 찾는 듯, 다급한 표정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긴 생머리의 여학생. 이 근방 공립중학교의 남색 교복이 그녀의 신분을 말해주고 있었다.

너무도 다급해 보이는 그 모습에 이정은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훑었고, 자신의 옆에 있는, 분수대 곁에 앉을 수 있도록 마련해 놓은 의자 위에 놓여있는 분홍색의 휴대폰을 발견하였다. 전혀 그곳에 덩그러니 놓여있을 이유가 없는 물건. 분홍색. 여자 중학생. 애타게 찾을 만큼 중요한 것. 이정이 피식 웃었다.


**


“저기.”

“엄마! 깜짝야!”


갑작스레 들린 남자의 음성에 가을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고, 소리가 들린 곳을 돌아보자 가을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올린 채 서 있었다. 교복을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아직 풋풋한 외모가 가을과 비슷한 나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찾고 있는 게 이거 같은데?”


가을은 왠지 삐딱하게 들리는 그 말에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다, 그 남자가 내미는 것을 보곤 완전히 안심하는 표정으로 바뀌어선 그 남자에게 외쳤다.


“아! 맞아요! 감사합니다!”


남자가 건네는 휴대폰을 받자마자 가을은 다른 쪽에서 자신의 휴대폰을 찾고 있을 잔디에게 전화를 걸었다.


“잔디! 휴대폰 찾았어! 분수대에서 흘렸나 봐. 응. 그래. 금방 갈게!”


간단히 통화를 마친 가을은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를 향해 다시 한 번 감사하다 말하며 고개를 꾸벅였다. 잘생겼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어딘가 익숙하단 생각도 드는 남자. 새까만 머리카락이 왠지 눈에 익는다. 하지만 저렇게 잘생긴 사람을 잊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뒤돌아서는 순간, 남자의 목소리가 가을을 잡았다.


“부탁이 있는데,”

“네?”

“혹시 동전 좀, 빌려줄 수 있어?”


동전…? 하고 되물으며 가을이 고개를 갸우뚱, 하는 동작을 취하자 남자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재차 되물었다.


“네, 뭐…….”

“고마워.”


가을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며 방금 그가 한 말을 곱씹었다. 동전 좀 빌려줄 수 있어? 갑자기 웬 동전? 어따 쓰게? 잠깐, 근데 왜 초면에 반말이야? 가을은, 살짝 기분이 나빠졌다.


“근데 왜 초면에 반말이세요?”


가을이 남자의 손에 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건네주며 물었다. 최대한 불만이 가득 차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행동과는 반대되는 표정이어서 꽤 우스꽝스러웠지만, 가을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쪽 교복, 중학교 교복 아닌가?”

“맞는데요.”

“난 고등학생이거든.”


남자의 까만 눈을 마주친 가을은 할 말을 잃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서 반말했다는데……. 말문이 막힌 가을은 그냥 여기서 예, 하며 뒤돌아서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쩐지 반항심이 들었다. 분명히 내가 잘못한 거라서 혼나는 건데도 괜히 울컥하는 반항심. 그런 반항심을 꾹꾹 눌러 삼켜야 일이 커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꼭 한마디 더 던지고 싶다. 그래서 가을은, 한마디를 더 했다.


“근데 왜 갑자기 초면에 동전을 빌려요?”

“휴대폰을 찾아 줬는데 그 정도도 못 해주나?”

“뜨, 뜬금없으니깐! 여기서 동전을 어따 쓸려구요?”


가을은 약간 얼굴이 빨개져서 외쳤다. 역시 쓸데없는 반항심을 참아야 했었다. 더 민망한 꼴만 되고……. 가을이 한참 속으로 자신을 자책하고 있는데, 남자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들렸다.


“소원 빌려고.”

“…네?”

“소원. 저 분수대에.”


물 한 방울 고여 있지 않은 저 분수에 무슨 소원을 빈다는 건지……. 가을은 남자를 한번 쳐다보고, 분수를 한번 쳐다보고, 다시 남자를 한번 쳐다보았다. 남자는 그런 가을을 향해 씨익 웃어주곤, 손목을 들어 시계를 쳐다보았다.


“앞으로… 10초.”

“10초…?”

“10, 9, 8, 7, 6, 5, 4, 3, 2, 1!”


1에 이어 발사! 하는 남자의 명랑한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분수에서 맑은 물이 뿜어져 나왔다. 메말랐던 분수는 금방 촉촉이 젖어들었고, 약간은 낯선 듯했던 분수대가 다시금 가을에게 친숙한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맑은 물이 뿜어져 나오는 분수대. 정말 동전을 던지면 이루어질 것 같은 신비로움. 왠지 모를 온화함.

가을의 입이 약간 벌어졌다. 그래, 이거였어. 내가 이 분수대를 좋아한 이유.


“와…….”

“분수 처음 본 사람처럼…….”


옆의 남자가 중얼거리다 픽 웃었다. 비꼬는 내용이었지만 말투에 진심으로 깔보는 기색이 들어있지도 않았고, 사실 지금 자신의 반응이 그렇게 보일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가을은 무시하기로 했다. 동심으로 돌아간 것 같아. 아, 어쩐지 10년 전에 빌었던 소원이 생각날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알았어요?”

“뭘?”

“이 분수 재가동할 거란 걸.”

“아…….”


남자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오랫동안 이어지는 침묵에 가을이 살짝 남자를 돌아보자, 그제야 남자는 대답을 했다.


“뭐……. 관계자라고 해두지.”

“고등학생이라면서요?”

“고등학생은 관계자 하면 안 되나?”

“아, 알바에요?”

“뭐? 푸하하.”


웃기지도 않은 말이고 농담도 아닌데 남자가 시원하게 웃어 젖혔다. 뭐야? 왜 웃어? 진심인데?


“뭐가 웃겨서…….”


라고 말을 꺼내며 남자를 쳐다보자, 잘못 짚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스프라이트 면티에 청바지, 베이지색 코트. 나이대에 맞는 평상복차림이었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고급 캐주얼 브랜드의 화보 속에서나 접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절대 아르바이트를 할 거라는 생각이 어울리지 않는 그런 분위기. 웃을 만하다. 완전히 잘못 짚었네. 박물관 주인 아들쯤이면 모를까…….


“알바소리는 처음 들어보네.”


남자는 가벼이 대답하곤 손에 들린 동전을 만지작거렸다. 새것인지 얼굴도 비칠 수 있겠다 싶을 만큼 반짝거렸다. 동전을 가지고 손장난을 치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가을은 지갑에서 동전을 하나 더 꺼냈다. 나도 빌어야지. 오랜만에.


“가을양도 소원 빌게?”

“네. 네? 제 이름 어떻게 아세요?”

“명찰.”


가벼운 그의 대꾸에 가을은 자신의 가슴팍에서 빛나고 있는 노란 색 명찰을 바라보았다. 아 바보……. 평소에 다닐 땐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데 사진을 찍는다고 꺼내놓고 있었다. 가을은 서둘러 명찰을 주머니에 넣어 이름을 가렸다.


“이름 이쁘네. 추가을.”

“아, 뭐. 감사합니다.”


분수대에 물은 반 정도 차있었고, 수위는 점점 올라갔다. 수위가 올라갈수록, 묘하게, 긴장되며 마음이 설렜다. 고여 있는 물에 소원을 비는 걸 처음 하는 것도 아닌데……. 10년 전에 소원을 빈 분수에 또다시 소원을 비는 건 처음이기 때문일까? 나만 이런 걸까, 옆에 있는 남자도 그럴까 궁금해하며 가을이 옆을 돌아보았지만 남자는, 먼저 소원을 빈다는 말을 꺼낸 사람치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영 어두웠다.


“그런데요…….”

“응?”

“그쪽 무슨 소원 빌 건지 물어봐도 돼요?”


또 오지랖 병의 시작이었다. 이 질문이 도를 넘은 물음이고 쓸데없는 호기심인 건 알지만, 저 남자의 어두운 표정 속에 들어있는 생각이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길래 지나가는 사람의 동전을 빌려서까지 소원을 빌고자 했을까?


“안 된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역시나 쉽게 말해주진 않겠지……. 가을이 고개를 끄덕이며 분수대로 눈을 돌렸다. 3/4쯤 찬 분수대.


“음……. 집안 문제야. 형 때문에 일이 많이 복잡해졌거든.”


갑자기 들리는 말에 분수를 향하던 가을의 고개가 남자를 향해 휙, 돌아갔다. 말 안 할 것처럼 하더니 그는 의외로 쉽게 입을 열고 있었다.


“형이 떠나서, 나한테 오는 부담이 커졌거든……. 근데 웃긴 건 내 마음인 거야. 형이 돌아 와줬으면 하는 마음 반, 내가 그 형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마음 반…….”


무슨 소리인지 통… 알 수 없는 말들이었지만 가을은 다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도 쓸쓸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느라 그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길을 가다가 추위에 오돌오돌 떨고 있는 강아지를 만난 기분이 이럴까? 만약 이 남자가 강아지였다면 아마 가을은 그 강아지를 꼭 껴안아 주고 먹을 것을 사주고, 집에 데려와 주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사람이니깐, 가을은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고 말했다.


“그래서요? 형이 오기를 비는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럼요?”


그의 눈이 가을을 향해 돌아갔다.


“비밀.”

“에?”

“소원을 말하면 안 되지.”


그의 장난스러운 미소에 가을도 피식 웃었다.


“뭐야, 다 말해놓고……. 좀 알려주면 안 돼요?”

“안된다니깐? 예전에 빌었던 소원은 비밀로 안 해서 안 이뤄진 거 같아.”

“그쪽도 예전에 여기에다 소원 빈 적 있어요?”

“어. 10년 전에.”


가을의 눈이 살짝 동그래졌다. 동질감인가? 그를 바라보는데, 뭔가 이상한 감정도 생겨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까만색 머리카락……. 익숙하다.


“나돈데! 뭐 빌었는지 기억나요? 난 사실 기억이 안 나거든요.”

“나도 기억 안 나. 기억 안 나는 거 보면 소원이 안 이뤄진 거 같아.”


그의 말에 가을은 나도 그런가 싶어 분수대를 쳐다보았다. 나도 엄마한테 말하고 안 이뤄져서, 그래서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어, 물 다 찼다.”


고민하는 새에 분수대에 물은 다 찼고, 위쪽의 조각상에는 물이 힘차게 뻗어 나오고 있었다. 소원을 이뤄줄 수 있을 만큼 힘차게, 빠르게, 아름답게. 가을은 옆의 남자를 쳐다보았고, 그 남자도 가을을 쳐다보았다. 가을의 갈색 눈동자와 그의 까만색 눈동자가 마주했다. 그의 눈동자도 머리카락 못지않게 까맣게 빛나고 있었다. 렌즈를 꼈나 의심이 될 정도로.


“던질까?”


그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가을은 네- 하고 대답했다. 그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면 렌즈 꼈느냐는, 또 무례한 질문을 던질 뻔했다 생각하며 분수대를 향해 힘껏 동전을 던졌다.

두 개의 동전이 맑은소리를 내며 분수대 안으로 들어갔고, 둘은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고 소원을 빌었다. 아니, 빌려고 했다. 했는데…….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옛날의 기억. 박물관에서 울고 있던 까만 머리카락의 소년과 웃으며 위로해주던 갈색 눈동자의 소녀, 짧은 만남 이후로 분수대 앞에서 서로를 향해 빌었던 소원, 옆에서 꼭 이뤄질 거라고 말하던 가족들, 간절했던 어린 날의 감정들까지. 모두다.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그 기억들 덕에 둘은 소원을 빌지 못하고 눈을 떴다. 그리곤 자신의 옆에 있는 그와 그녀를 바라보았다. 까맣게 빛나는 머리카락. 투명한 갈색 눈동자. 맞아. 그래.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기억 속에 있는 그 어린아이가 지금 자신의 옆에 있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설마 그, 울보…?”

“오지랖?”


농담처럼 내뱉는 그 말에, 둘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곤, 하하-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


잔디에게 조금 늦을 것 같다고, 먼저 가라고 말해놓고는 이정과 같이 벤치에 앉아 얘기를 나눈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가을은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10년 전에 한번 만났던 사이라지만, 아주 어렸을 적 10분 남짓한 시간이었고 사실 생판 남이라 해도 모자랄 것이 없는 사이인데 마치 몇 년을 사귄 친구처럼 수다 삼매경이라니.


“소울메이트? 여자들은 그래서 안 돼……. 정말로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해?”

“있죠! 당연히 있죠.”


정확히 말하자면 가을은 조잘조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열심히 떠들고 이정은 중간중간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빈정대는 꼴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소통되고 있는 느낌이라 가을은 충실히 이정이 대답하고 질문하는 대로 반응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을양은 만났나? 그 영혼의 짝.”

“아직 이요. 하지만 나타나면 절대로 안 놔줄 거에요. 그런 사람, 놓쳐버리면 평생 후회할 테니깐…….”


가을의 눈이 꿈을 꾸듯 빛났다. 손까지 다소곳이 무릎 위에 모으고 다 져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소울메이트 운운하는 소녀의 모습은 도예가, 예술가의 본능에 불을 지피기 충분한 모습이었다.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그 느낌. 이정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그 느낌이다. 무겁게 일렁거리며 어지러운……. 어렸을 땐 미처 원인을 알지 못했었던 그 느낌과 감정. 하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안다. 이 느낌은, 운명과도 같은 것을 접할 때에나 겪게 된다는 것을.

운명? 이 소녀가? 아버지의 청자처럼, 그 동전들처럼, 어쩌면.


“그러니깐 그쪽도 원하는 거, 망설이는 거, 놓치지 마요. 진짜 평생 후회할지도 모르니깐.”

“응?”

“아까 소원 빌 때, 뭐, 잘은 모르겠지만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면서요. 놓치지 마세요.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단, 해보고 후회하는 게 더 낫다고 누가 그러더라구요.”


이정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가을의 그 올곧은 눈빛에 이정 안에서 느껴지던 그 일렁이는 느낌이 더 심해졌다. 마치 이 소녀의 말이, 눈빛이 이정의 운명이라도 된다는 듯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추가을….”

“네?”

“중명중학교. 3학년. 추가을.”

“에?”


운명? 그런 것 절대 믿는 성격은 아니지만, 지금 자신의 안에서 이렇게나 요동치고 있는 이 느낌이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다. 이 소녀가, 10년 전 위로라는 걸 해 주었던 그 소녀가 어쩌면 운명, 소울메이트일지도 모른다고. 무섭도록, 어지럽도록 말해주고 있었다.


“부탁이 있는데.”


만약에, 진짜 운명이라면, 한번 걸어 보는 수밖에. 저따위 동전이나, 소원, 기도 같은 것에 걸어 볼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소이정의 진짜 운명에게 걸어 보는 수밖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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