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iring: 클락켄트(슈퍼맨)/브루스 웨인(배트맨)

Rating: PG-13

Warning : 임신공 리퀘의 결과물입니다.



툭. 투둑.
하늘을 날던 슈퍼맨은 뱃속에서 뛰노는 태동을 느끼고 움찔했다. 태아의 조그만 발이 그의 배를 힘차게 걷어차고 있었다. 보통사람이라면 그대로 복부가 터져 나갔을 정도로 강력한 발차기였지만 슈퍼맨에게는 그저 살가운 인사에 불과하다. 그는 따사로운 미소를 지으며 볼록한 배를 쓰다듬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발길질 하던 꼬마숙녀가 엄마(?)의 손길을 받고 잠잠해졌다. 슈퍼맨은 초자연적 청력으로 뱃속의 아이가 기분좋게 한숨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잠이라도 재우려는 것처럼 배 위를 다독이며 비행 속도를 늦췄다.
임신한 지 벌써 육개월. 눈썰미가 나쁜 사람이 봐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오른 배는 완벽하던 그의 체형을 망가트렸다. 오개월 때까지는 그래도 복부비만이라고 우길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러지도 못할 정도로 배만 커졌다. 더러운 크립토니안이 무슨 복부비만이냐며 비웃던 친구들이지만 지금 상태를 보면 더이상 웃지도 못할 터였다. 그러기는 커녕 무슨 병이라도 생긴게 아니냐고 호들갑을 떨며 그를 의료실로 밀어넣으려고 할 게 분명하다.
하지만 슈퍼맨은 그런 식으로 일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직 한 명 빼곤 아무도 없었다. 저스티스 리그의 상징이며 지구 최고의 히어로이기도 한 그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사회적으로 어떤 파장이 일어날지 짐작하기도 힘들었다. 새 생명의 탄생에 불필요한 소동을 덧붙이고 싶지 않았던 그는 이 일을 대외적으로 공표할 생각이 아예 없었다. 당분간 워치타워는 물론이고 공식적인 석상에 나서는 일도 없을 것이다. 한시적으로 히어로 활동도 접을 생각이다. 세상도 소중했지만 지금 이 순간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뱃속의 아이였다. 뱃속에 있는 아이는 몇 년에 걸쳐 애원하고 부탁해서 겨우 얻은 새생명이고, 슈퍼맨은 이 아이를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낳을 생각이었다.

'아이를 갖고 싶어 브루스. 우리 둘의 아이를.'

이 모든 축복이 시작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육개월 전이었다. 그 날 클락은 정사를 끝내고 자리에 누운 브루스의 등을 뒤에서 껴안고 있다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브루스가 그 말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정말로 아이를 원했다.

'헛소리 하지마 클락. 또 그 소린가?'

까탈스러운 브루스 웨인이 정사를 끝낸 후에도 몸을 맡기는 것은 정말 흔치 않다. 몇 번에 걸친 사정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탓에 노곤해져 있던 브루스는, 자기가 만들어 놓은 키스 마크 위를 조심스럽게 쓰다듬고 있는 손을 쳐내며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허리 힘이 빠져서 일어날 수도 없을 정도로 해대놓고 이딴 소리를 하는 건 남녀간에도 반칙이다. 하지만 클락은 끈질겼고 한 술 더 떠 진지하기까지 했다.

'헛소리가 아니야 브루스. 말 했잖아. 크립톤의 기술을 사용하면 가능한 일이라니까?'

진보된 문명, 위대한 크립톤. 클락 켄트의 고향 행성인 크립톤은 지구보다 훨씬 더 발전된 사회였다. 크립톤에서는 이성간의 결혼은 물론이고 동성간의 결혼도 허용되었으며 그들이 생물학적인 후손을 낳는 일에도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되었다. 클락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용하던 기술도 알고 있었다. 모두가 사려 깊은 아버지 조-엘의 안배 덕분이었다.

'자식이 더 필요해? 나는 이미 아들이 넷이나 있고, 네게도 하나 있잖아.'

'물론 나도 그 애들을 사랑해 브루스. 콘 뿐만이 아니라 작은 울새들도 모두 내 자식처럼 사랑하고 있어. 하지만 그와 별개로 너와 내 사이의 자식도 가지고 싶어. 형제가 많은 건 애들에게도 나쁜 일이 아니잖아. 나는 언제나 형제많은 집안이 부러웠다고.'

고집스럽게 아이를 원하는 클락의 태도에 브루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대체 클락이 왜 이렇게까지 아이에 집착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일에 있어서 확고한 파트너였고, 사적으론 누구보다 절친한 친구였으며 이제는 애인이기까지 했다. 그들의 관계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이다. 하지만 클락은 그보다 더 깊고 강한 결합을 원했다. 브루스는 그런 클락을 이해할 수 없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클락. 내가 네 아이를 가지면 살아 남지 못해.'

지금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고 또 다른 것을 요구하는 클락의 태도는 브루스에게 의외의 상처를 남겼다. 본인으로서는 지극히 만족하고 있는 이 관계를, 클락은 부족하게 느끼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는데 서툰 브루스는 그런 속내를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위인이 못됐다. 그는 솔직하게 말하는 대신 심술궂은 대답을 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반쪽이라고 해도 크립토니안이야. 애가 뱃속에서 태동이라도 하는 날엔 배가 그대로 터져 나갈 걸. 내가 그 앨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암살을 시도하고 싶었다면 좀 더 은밀한 방법을 권하고 싶군.'

붙잡으려는 듯 황급히 잡아오는 손을 쳐낸 브루스는 냉담한 태도로 옷을 챙겨 입으며 서늘하게 덧붙였다.

'농담으로라도 그렇게 험악한 소린 하지마. 소름끼치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소름끼칠 이야길 왜 하는 거지?'

'처음부터 너한테 임신을 시킬 생각은 아니었어. 임신을 한다면 내가 하는 게 나아. 너보다는 내 쪽이 더 버티기 쉬울 테니까.'

아기를 가지고 싶다는 클락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는 미리부터 진지하게 임신과 육아에 대해 공부했고, 그 결과 임신을 한다면 자신이 하는게 낫겠다는 결론도 미리 도출해 놓은 상태였다. 어차피 인공수정인데 자기보다 체력이 약한 사람에게 그런 고행을 떠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브루스보다는 클락 자신이 더 건강했고 버티기도 더 잘버틸 터다.
클락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지만 브루스에겐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삐딱하게 노려보던 브루스는 차갑게 혀를 차며 그를 외면했다.

'아. 그래? 네가 할 거란 말이지? 그런 거라면 상관없겠군. 가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그는 냉소적으로 빈정거리더니 케이프를 뒤집어 쓰고 그의 아파트를 떠나갔다. 클락이 데려다주겠다고 나섰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는 엄청나게 화가 나 있었고, 마지막으로 했던 말 또한 승락이 아니라 조롱에 불과했다. 하지만 클락은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일을 감행했다. 브루스가 얼마나 화를 낼지 알면서도 감수한 일이었다.

'...과연, 어마 어마했지. 그 냉정한 친구가 화산처럼 폭팔하는 건 처음 봤으니까.'

과거를 회상하던 클락이 쓴웃음을 지으며 배를 쓰다듬었다. 그의 감정이 동요되는 것을 느꼈는지 뱃속의 아이가 불안하게 꿈틀거렸다. 아니다 아가. 너를 탓하는 게 아니야. 클락은 혼잣말을 하며 다독 다독 아이를 달랬다. 그의 다독임에 안심한 듯 아이가 요동을 멈췄다. 클락은 제 아비(?)를 닮아 섬세하기 짝이 없는 아이를 기특하게 생각하며 베란다로 내려앉았다.
그렇게 헤어진지 삼개월 만에, 클락은 자신의 임신사실을 브루스에게 고백했다. 그리고 예상했던 대로 무시무시한 불벼락을 뒤집어 썼다.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브루스는 화를 냈다. 생각없는 머저리에 미친 별종에 혈통주의자에, 또 뭐랬더라? 관계집착증? 기어코 임신을 감행했다는 클락의 고백에 브루스는 상대를 상처입히도록 냉정하게 계산된 말을 퍼부으며 무자비하게 그를 후벼팠다. 연약한 인간 산모였다면 그 기세에 유산했을 지도 모를만큼 지독하기 짝이없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클락은 그런 브루스의 반응을 이해했다. 그는 자신의 연인이 얼마나 솔직하지 못한지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얼마나 겁이 많은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기실 그는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두려운 거였다. 잃는 게 두려워 얻는 것조차 거부하는 사람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클락은 브루스가 자신을 연인으로 택한 것과 완전히 같은 이유로 이번 일에 화를 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또 다시 잃을지도 모르는 소중한 존재가 생기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네 아버지가 얼마나 더 화를 낼까? 한 달? 두 달? 그래도 너무 늦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너의 탄생이 완전한 축복이기만을 바라고 있거든.'

브루스와는 반대로 클락은, 그를 사랑하는 존재가 하나라도 더 늘어나기를 원했다. 겉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브루스의 내면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사람을 지탱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인 법이다. 그의 친구들, 그의 동료들, 그리고 그의 아이들... 클락은 그를 둘러싼 울타리를 더욱 강건하게 엮어 주고 싶었다. 브루스의 사랑이 칼날처럼 냉엄한 자비라면 클락의 사랑은 지키고자 하는 의지였다. 그의 의지는 일반 사람들과 세상을 향해만 열려 있는게 아니라 연인에게도 그러했다. 사람의 본질이란 결국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매연 가스에 더럽혀진 망토를 털고 베란다 안으로 들어가려던 클락은 문득 방안에서 풍겨 나오는 낯선 오렌지의 향을 맡고 빙그레 미소지었다.
아무래도 그의 기다림은 예상보다 짧게 끝날 모양이었다.

 

- fin -

가늘고 길게 덕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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