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작은 성당은 마을에 터전 잡고 산지 어언 3대가 넘어가는 사람들에게나 물어봐야 겨우 기원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한자리를 지켜왔다.

흐른 세월만큼이나 성당을 지키는 신부도 많이 바뀌었는데, 대개 은퇴를 앞둔 신부들이 온 탓이다. 종교라는 게 으레 그렇듯 주민들은 마음에 평안을 위해 성당을 다니고 기도를 드렸으며 농사가 풍년을 만나 유독 수입이 짭짤한 날엔 성당 사람들을 불러와 마을 잔치를 벌였다.



“얌마, 최준호. 똑바로 못하냐? 저기, 저기도 잡초 있잖아.”


“신부님도 보고만 계시지 말고 도우십쇼! 왜 저만 합니까?”


“야. 나는 그거 하다가 관절 나간다. 하여튼 새파란 놈이 노인 공경이라는 게 없어요. 쯧쯧.”


“아이구, 오늘도 작은 신부님께서 고생 많으십니다.”


“하하, 예, 제가 고생이 많죠.”



새로운 신부 두 명이 성당에 온 날. 마을은 온통 작은 신부님, 준호에게 쏠렸다. 시골에서 보기 드문 젊은 청년이기도 했거니와, 사는 동안 만나기 힘든 미남이었기 때문이다. 종종 휴일을 맞아 내려오는 자식들과 손주들도 잘생긴 신부님 보러 성당에 들를 정도로 최준호는 어느새 마을 명물이 됐다.

그러나 내면 가장 깊숙한 죄를 끄집어내는 작은 고해소에선 큰 신부님 인기가 더 많았다. 고스란히 드러난 삶의 흔적은 실제 신에게 용서를 받는 착각을 들게 해, 죄를 고하다 울음을 터뜨리는 이도 여럿이었다.



“안녕하세요 신부님.”



자꾸 뒤돌아보지 말고 잡초나 제대로 뽑으라며 잔소리를 하던 범신은 익숙한 목소리에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해가 쨍쨍한 11시 40분. 평소보다 이른 시각이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일찍 오셨습니다.”


“시간이 비어 일찍 찾아왔는데. 많이 바쁘시다면 나중에,”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먼저 들어가 계시죠. 곧 가겠습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친한 듯 친하지 않은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손을 멈추고 상대만 빤히 쳐다본 준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가 하면 안 됩니까? 왜 맨날 저 사람은 신부님께만 고해성사 드리는 겁니까?”


“핏덩이가 까분다. 허튼 생각 말고 나 올 때까지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잡초 다 뽑아 놓고 있어.”


“신부님!”



손 흔들며 멀어지는 범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예민하다. 남자가 찾아온 날 밤마다 범신은 잠들지 못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경건한 성호 끝에 늘 가지고 다니는 묵주를 쥔다. 무사히 사제 서품식을 마친 아가토가 제게 준 묵주였다. 자신이 신부님 묵주를 가져갔으니 공평하게 자신도 드리는 거라 툴툴댔지만 속뜻을 알아 귀엽게 볼 수밖에 없었다.



“고해한 지 2주가 지났습니다. 그동안 두 인간의 피를 취했습니다.”



나무로 이루어진 작은 고해소가 감옥처럼 죄어온다. 눈을 감아 묵주의 감촉을 일일이 느낀다.



“둘 다 실형을 선고받은 죄수였었지요. 그들은 제가 살았던 동굴 가장 깊숙한 수중에 묻혔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주님, 전능하신 당신 손을 드높으시고, 강인한 당신 팔을 펼쳐 드시어 영혼과 육신의 보호자인 평화와 힘의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의 모상을 방문하시고 도우러 오소서.



“이밖에 알아내지 못한 죄도 모두 용서를 구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 칼날보다 더 날카롭다고 하셨습니다. 아직 마음 다해 말씀을 새기지 못했으니 일주일 동안 루가복음 15장을 아침마다 읽도록 하십시오.”



근 두 달 넘게 내린 보속이 빛을 발하지 않더라도 사제는 마음 다해 고해성사를 들어주어야 한다.



“인자하신 천주 성부께서 당신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시고 죄를 용서하시려고 성령을 보내 주셨으니 교회를 통하여 몸소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고해성사는 끝났다. 그런데도 남자는 여전히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범신은 행동의 저의를 알아 침묵을 지켰다. 첫 고해 성사 때 겪어보지 않았나.



“제가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계절이 뭔지 아십니까?”


“….”


“여름입니다. 살갗을 뚫고 나와 피 냄새가 가장 짙어지는 여름.”



처음엔 악령에 씌웠다 생각했고 나중에는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나 태연히 성수를 찍어 바르며 성호를 긋는 모습에 범신은 첫 구마보다 더한 소름을 느꼈다.



“새까만 여름밤은 특히 많은 게 날뛰기 좋죠. 조심하세요, 신부님.”



허리를 굽혀 문을 넘는다. 노신부 손길이 닿지 않는 부분이 없는 고해소 밖 내부에선 짙은 향취가 여전했다. 눈을 감아 깊숙이 숨을 들이마신다. 손끝까지 모든 걸 각인시키고서야 밝힌 시야에 입구에 서서 저를 향해 한껏 날을 세운 신부가 들어왔다.

인자한 미소 대신 피어있는 불신은 언젠가 본 적 있는 뿔 달린 악마를 처단하는 천사의 그것과 닮았다. 직접적인 위해는 가하지 않았어도 위험성을 감지한 신부 곁을 지나치며 심심한 경고를 건넨다.



“세상도 흉흉한데. 신부님 혼자만 두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


작은 불을 켜놓고 앞쪽 신자석에 앉아 있던 범신은 인기척에 눈 떴다.



“안 주무시고 뭐 하십니까.”


“그러는 너는 여기서 뭐 하는데.”


“밤에 드리는 기도가 집중이 잘 돼서 왔습니다.”


“이게 이제 장소 안 가리고 구라를….”


“죄송합니다.”



거짓말에 영 재능이 없는 준호는 빠른 사과를 택했다.

흘깃 내려다본 시선에 자신이 드렸던 묵주가 보인다. 정작 받으실 때는 이런 거 말고 올바른 신앙심이나 키우라 타박해놓고선 매일 가지고 다니시는 게 내심 기분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묵주를 쥔 이유가 탐탁지 않다.



“…혹시 그 사람, 부마자입니까?”


“부마자가 멀쩡히 성수에 손 담그는 거 봤냐.”


“그럼 뭡니까? 왜 맨날 그 사람만 오면 이러시는 건데요, 예?”



선을 넘었다 말 한 이후부터 한배를 탔다 여겼다. 비밀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적어도 잠들지 못하는 이유가 믿음과 관련된 부분이라면 조금은 털어놓을 법했다. 실제로 신부님께서는 제가 꾸는 악몽의 이유를 잘 알고 계셨다. 저 역시 신부님의 악몽을 알 권리가 있었다.



“고해성사의 비밀 봉인은 불가침이다. 이건 사제들 사이에서도 적용되는 법이야.”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그냥 다음부터 만나지 마세요. 마을 사람도 아닌데 굳이 여기까지 찾아오는 것부터가 이상했습니다.”


“어쭈. 네가 신이야? 아주 막 나가네.”


“이게 다 신부님 걱정돼서 하는 소리 아닙니까!”



카랑카랑 내지르는 목소리에 버석한 웃음꽃을 피운 범신이 마른세수를 했다.

저 예민함은 나이가 들수록 더 해 갔다. 그래도 제법 큰 범이 됐다고 걱정 운운하는 게 기특하다.



“걱정해줘서 고맙다.”



옅은 불빛 아래에서 보일 정도로 튀어나온 입술은 여전한 불만을 나타낸다.

툭하면 나이 꺼내면서 온갖 잡일 부려 먹는 건 김 신부님인데 주름이 하나씩 늘어가는 것도 김 신부님이셨다. 잃은 후에야 범신을 제 생각보다 훨씬 의지하고 있었다는 걸 알지도 모르지만,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다랬기에 준호는 범신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부리 집어넣고 가서 자. 괜히 날밤 새워서 내일 못 일어나겠다 징징대면 밥 없다.”


“약속하면 갈게요.”


“약속은 무슨.”


“그 남자 오면 그냥 숨어계십쇼. 나머지는 제가 다 하겠습니다.”


“허 이거 오늘 되게 예민하네. 야, 아가토.”



도통 물러날 길 없어 보이는 고집은 가끔 범신도 꺾지 못했다. 정말 계속 옆에 붙어있을 기세인 준호에 범신은 마지못해 고갤 끄덕였다.



“알았다, 알았어. 네가 이겼다.”


“이겼다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그럼 약속하셨습니다. 무르기 없어요.”



얼굴 가득 미소가 지어진다. 십자가를 향해 성호를 긋고 공손히 범신에게 인사를 마친 표정은 한결 후련해 보였다.



“사춘기 십 대도 아니고….”



순식간에 바뀐 감정 기복에 멍하니 뒷모습을 구경한 범신은 문 닫히는 소리에 다시 앞을 봤다.



“하-”



악령은 빈틈을 놓치지 않는다. 남자가 찾아와 정신을 흐려놓은 날엔 기어이 잡스러운 사령들이 기어와 온통 꿈자리를 헤집어 놨다.



“성 미카엘 대천사님, 싸움 중에 있는 저희를 보호하소서. 사탄의 악의와 간계에 대한 저희의 보호자가 되소서.”



꿈속에서 저는 까만 밤 한가운데 버려져 있다. 무엇을 바라는지 모른 채 걷다 보면 한 사람이 보였다. 몹시 반가운 기색보다는 위화감에 걸음을 뒤로 물러서면 상대는 뒤돌았다. 새빨간 입술만큼이나 붉은 피를 입가에 묻힌 남자가 제게 달려든다. 저는 어찌할 바 모르고 저항한다. 남자는 목덜미에 코를 박는다. 그리고 지껄인다.

맛있는 냄새가 나는군. 하나하나 씹어먹고 싶을 정도로.

입은 옷이 갈가리 찢기고 나서야 꿈은 끝난다.



“오, 하느님. 겸손되이 하느님께 청하오니 사탄을 감금하소서.”



꿈에 나타난 남자는 익히 아는 사람이다.

아가토만큼 큰 키에 날카로운 콧대처럼 서늘한 인상을 주는 남자. 항상 입고 있는 정갈한 정장과 달리 고해는 어떤 이보다 끔찍한 남자.



“천상 군대의 영도자시여,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사탄과, 모든 악령들을 지옥으로 쫓아버리소서. 아멘.”



기도는 떠오르는 해를 맞으며 자연스레 멈췄다. 무사히 지나간 하룻밤에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


“이거 조만간 보수 공사해야겠다.”


“그러게요.”



일주일 내내 비를 쏟던 하늘이 맑게 개자마자 소리가 심상치 않던 성당 천장 구석구석을 살핀다. 여름에는 습기와 싸우고 겨울에는 추위와 싸운 탓에 건물은 낡은 티를 냈다. 함께 사는 수녀님도 걱정하실 정도라 더 늦기 전에 사람을 부르기로 한다.



“아, 영신이가 보낸 편지 보셨어요? 여행 다닌다더니 거기서 보낸 편지 같던데.”


“못 봤는데 지금 가지고 있어?”


“아니요. 식탁에 뒀습니다. 사진도 보냈더라고요. 성가대 할 때보다 훨씬 좋아 보였습니다.”



영신이 성가대에 들어갔다는 편지를 보내고 며칠 지나지 않아 범신과 준호는 직접 영신을 보러 갔었다. 제법 잘 부르다가도 약간 음이 높아진다 싶으면 찡긋 구겨지는 미간을 보면서 둘은 손바닥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기 바빴다.

지금은 어느새 대학생이 되어 휴학 신청을 하더니 세계 여행을 하느라 바쁜 영신은 종종 편지를 보내왔다. 신문명 사회에서 아날로그를 고집하는 이유는 나이가 든 범신과 젊은 꼰대 준호에게 현대 문명은 맞지 않다는 걸 몸소 터득했기 때문이다.



“난 나가서 외벽도 살펴봐야,”



일어서 나가려는데 손목이 붙잡힌다. 영문 모르는 행동에 준호를 쳐다봤다가 바깥에서 들리는 낯선 엔진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왔습니다. 그 사람. 신부님은 잠깐 방에 가 계세요.”



앞쪽에 난 문으로 미는 강한 힘에 무어라 하려다가도 이내 잠자코 상대를 따른다. 사제관으로 이어진 문을 닫고 커튼을 치자마자 빛이 쏟아졌다.



“안녕하세요 신부님. 오늘은 혼자 계시네요.”



눈부셔 돌린 고개가 구두 소리에 다시 자리를 찾는다.



“베드로 신부님께서는 일이 있으셔서 나갔습니다.”


“아. …아무래도 타이밍이 어긋났나 보군요.”



찬찬히 움직이던 눈동자 끝은 커튼이 숨긴 문이다. 그러나 남자는 구태여 진실을 파고들지 않았다.



“…고양이가 범 노릇을 하려니 많이 힘드시겠습니다.”



그나마 짓던 웃음마저 거둔 표정은 첫 만남부터 상처를 들쑤시기 바빴던 범신을 대할 적과 비슷하다.



“고해성사. 필요하십니까?”


“괜찮습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뵙도록 하죠”


“……다음은.”



문 바로 앞에서 걸음 멈춰 이야기를 듣는다.



“없을 겁니다. 앞으로도 계속.”



호기로운 기개에 몸을 돌려세운 남자는 한쪽 입꼬리만 길게 찢어 웃었다.



“얼마나 잘 지켜질지 기대하겠습니다. 인간의 약속은 마음만큼이나 나약하니 말입니다.”



문에 기대어 되뇌는 범신의 기도 속에 피 냄새가 짙었다.


*


그렇게 비를 쏟고도 남았는지 하늘은 일주일이라는 기나긴 장마를 데려왔다.

동생 기일을 맞아 서울에 올라가야 했던 준호는 믿었던 수녀님마저 일이 생겨 광주에 가야 한다는 말에 돌연 가지 않겠다 떼쓰기 시작했다. 트라우마를 마주한 해부터 동생한테 꼬박꼬박 잘 찾아갔던 놈이 갑자기 그러는 이유를 알만해 범신은 징징거리는 준호의 이마를 밀었다.



“자주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일 년에 고작 한 번이다. 후회하지 말고 다녀와.”


“차라리 수녀님 오시고 다음 날,”


“최준호 아가토.”


“…네 여기 있습니다.”


“구마 사제의 기본 소양은 지혜와 용기야. 지금 네 행동은 도망과 진배없어.”



결국 돌아오는 날 아침 첫차와 1시간마다 생존 문자로 합의점을 찾은 준호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뗐다.

겨우 하루면서 온 걱정을 짊어진 준호에 꼰대라 혀를 찬 범신은 새로 보수한 천장을 살폈다. 밤이 찾아와 거세진 빗줄기에 걱정된 까닭이었다. 문제없어 보이는 천장에 마지막으로 성당 내부를 확인하던 범신이 낯선 소음에 몸을 굳힌다.



“혼자 두지 말라 그렇게 일렀는데.”


“…….”



늘 입고 있는 정장 대신 가볍게 걸친 검은 도포 차림의 남자가 공기를 뒤튼다.

이건 꿈인가.



“조심성 많은 고양이도 과분한 비유였나 봅니다”


“……당신은 악입니까.”



단정한 질문이다. 어떠한 놀람도 비명도 담기지 않은 순수한 질문 자체에 남자는 한 발자국 가까이 들어섰다. 비 내리는 밤이 닫혀 온전한 어둠뿐이다.



“악이라. 혹자는 날 그렇게도 부르곤 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날 ‘귀’라 부르더군요.”


“귀…?”


“피를 빨아먹는 잔혹한 흡혈귀…. 세월이 흘러 많은 게 변해도 이 말은 왜 변하지 않는지.”



그리 말하는 남자의 말투에 아쉬움보다는 비소가 서려 있다.



“참으로 우스운 꼴 아닙니까? 이리 향취를 풍기는 먹이를 눈앞에 두고도 몇 달간 공들인 모습이.”



죽이면 그만일 인간을 오래 지켜본 일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기회가 있음에도 손대지 않는 이유를 깊이 고민해보아도 답은 쉽지 않았다.



“한 백 년쯤 고민하면 이러한 행동의 이유를 알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영생을 사는 제게 일 년은 1분처럼 짧은 시간이다. 그러나 신부는 인간이기에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 짧았다.



“이에 비해 인간의 생명은 턱없이 짧다는 게 어찌나 안타까운지.”



뚝뚝 젖은 옷을 따라 바닥에 물자욱이 새겨진다.

범신이 한 걸음 물러서면 상대는 걸음을 멈췄고, 범신이 멈춰서면 상대는 걸음을 뗐다. 남자는 범신의 두려움을 가지고 놀았다.

그리고 마침내 뒤꿈치가 제단 턱에 닿아 엉덩방아를 찧는 찰나, 순식간에 위를 점령당했다.



“하여, 그대와 나의 시간을 맞추려 합니다.”



공포로 홉뜬 눈에 아찔한 감각이 정신을 도륙한다. 빗물이 흘러 번뜩이는 눈동자가 제대 위 거룩한 십자가를 쳐다본다.



“저런 쓸모없는 신 따위보다야 내 옆이 낫지 않겠습니까?”



기다란 손가락이 로만 칼라를 느릿하게 잡아 빼낸다.

옷자락에 겨우 버티던 끝이 툭 떨어질 때 있는 힘껏 한쪽 발을 들어차 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엎드려 기어가던 몸은 맥없이 아래로 끌려갔다.



“어디 한 번 맘껏 기도해 보시죠. 그토록 부르짖는 종의 울음에도 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터이니.”


“흐읍-!!”



검은 수단 위 하얀 나신이 제단에 바쳐진다. 툭 튀어나온 목뼈부터 허리 가장 아래까지 훑은 남자는 향이 짙은 목덜미에 코끝을 문댔다.



“제, 발, 흐으, 아아…!””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앞으로 그대의 신은 내가 될 것입니다.”



여름밤에 들러붙은 비는 유달리 끈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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