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같이 가. 나랑 같이 가. 응? 나랑 같이 가....”


귓가에 메아리치듯 울려오는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머리가 지끈지끈 울려왔다. 좁은 침대 주변을 돌아다니며 사뿐사뿐 춤을 추는 여자아이는 계속 끊임 없이 반복해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자신과 같이 가자고. 나는 나쁜 꿈이라고 생각하며 무시하고 다시 자려고 했다. 하지만 계속 해서 들려오는 여자아이의 목소리, 그리고 발걸음소리가 신경 쓰이고 두려워 다시 잠들 수 없었다. 아이의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오면 뒷목에 소름이 쭈뼛 서며 숨쉬는 것이 힘들 만큼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랑 같이 가. 응?”


내 귓가 바로 옆에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침대 곁에 있는 듯 말이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이대로는 심장마비로 죽을 것 만 같았다. 나는 움직이지 않는 손을 꾹 움켜쥐고 소리쳤다.


“시, 싫어!”

“그래?”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바로 들려왔다. 그리고 한동안의 정적 나는 아이가 떠났나 싶어서 슬쩍 눈을 떴다. 그리고 흡- 숨을 들이마셨다.


아이의 얼굴이 내 얼굴 바로 위에 떠있었다.


몸은 여전히 사뿐사뿐 내 침대 주위를 돌며 춤을 춘다. 그저 머리만 내 얼굴 위에 떠있다. 그리고 그 까만 눈은 나를 보고 있었고, 입은 이상하게 뒤틀려 웃고 있었다. 괴기한 표정, 웃는 것 같지만 확연하게 웃는 것이 아닌 표정.


“그럼 억지로 데리고 가야겠네.”

“으아아악!!”


깔깔깔 웃는 아이의 웃음소리, 그리고 상하좌우로 마구 움직이는 아이의 눈동자. 나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꽉 감았다.


[쾅쾅쾅-]

“이봐요! 나와요!”


여전히 여자 아이의 머리는 는 눈알을 마구 굴리며 내 얼굴앞에 떠있는데,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귓가지 찢어진 듯 활짝 벌어진 입으로 연신 깔깔깔 웃는 소리를 내는 아이의 소리에 잘 묻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소리는 점점 분명하게 들려왔고, 나에게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사, 살려..!”

“나와요! 당장 나와요!”


하지만 난 겨우 눈을 다시 떴을 때, 여전히 나의 위에 있는 여자 아이의 얼굴을 보고 움직일 수 없었다.


“죽을 거에요?! 그대로 죽을 거예요?! 당장 나와요!”


하지만 밖의 목소리는 계속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게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을 떨쳐 낼 수 없었다. 움직이면 죽을 것 같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죽을 것이다. 나는 그 두 개의 상충하는 공포 속에서 잠시간 고민했다. 하지만 더는 이 괴기한 머리를 마주하고 있을 자신이 없었고, 다시 눈을 질끈 감은 채, 원룸 문을 향해 돌진했다. 몸은 다행히 내 뜻대로 움직여주었다.


“으아아아! 으아아아!”


문으로 달려가는 길 여전히 춤을 추고 있는 여자아이의 몸과 부딪쳤다. 나는 순간 혼이 나간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마구 팔을 휘둘렀고, 겨우 문손잡이가 손에 잡혔다. 나는 필사적이었고, 발을 붙잡아 오는 몸을 마구 걷어차면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여는 그 순간 하얀 팔이 쑥 들어와 내 몸을 밖으로 끌어냈다.


“으아악! 저, 저리가!”

“이봐요! 정신 차려요!”

“저리가! 사, 살려줘! 살려줘!”

“정신 좀 차려 봐요! 괜찮아요?”


나는 내 팔을 붙잡는 그 손을 마구 떼어냈다. 하지만 그 손은 계속 나를 붙잡았고, 나를 달래려는 듯 내 팔을 쓰다듬었고, 내가 계속 발광하자 나를 끌어안아 주었다. 작았지만 제법 단단한 품속에 안기자, 불 위에 물이 뿌려진 것처럼 내 공포들이 쑤욱 줄어들어 내려가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거친 숨을 쉬지만, 그래도 많이 진정된 모습으로 나를 안고 있는 이를 밀어 냈다. 뒤늦게 낯선 사람 앞에서 보인 추태에 부끄러워진다.


“괜찮아요?”

“네...”


약간 얼굴을 붉히고 시선을 피하자 그는 환하게 웃어 주며 내 손을 잡아 온다.


“와.. 진짜 위험했었는데, 다행이네요.”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그대로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나의 앞에, 나를 보고 웃어 주고 있는 사내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흰 피부, 곱상한 얼굴, 검고 이상한 옷차림. 치렁치렁한 한복 같기도 한 비단옷. 경황이 없었기에 미쳐 옷차림을 보지 못했던 나는 그 특이한 옷차림에 다시 슬쩍 안 좋은 생각이 들었다. 이 것도 또 귀신인가 싶어 잡혀 있는 손을 빼냈다. 그는 내 경계를 이해하는 것처럼 따뜻하게 웃어 주었다. 무언가 사람을 안심시키는 듯한 웃음이었다.


“근데... 누구세요? 아니 저 씨발 건 뭐예요? 저거랑 당신이랑 관계있습니까?”

“아, 저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건네주는 명함을 받아 들었다. 검은 바탕에 흰색 글씨와, 붉은 글씨가 써있는 이상한 명함이었다.


“퇴마, 제령, 굿...? 무당입니까?”

“음.. 뭐 그렇죠.”

“그 점보고 부적 쓰고 그러는...?”

“부적은 자주 쓰지만, 점은 주가 아니라서. 그래도 가끔 원하시는 분들이 계시면 봐드리기도 해요.”


나는 그의 명함을 든 채로 그와 그의 옷차림, 그리고 부적을 번갈아 보았다. 미신 같은 것은 잘 믿는 편은 아니었으나, 무당이라니 조금 안심 되었다. 이런 상황에 가장 필요한 존재 아닌가. 게다가 조금 전 상황 때문에 나는 이 무당, 그러니까 명함에 써있는 이름을 본다면 난묘향이라는 이름의 사내에 대한 막연한 믿음 같은 것이 생겨났다. 무엇보다 실질적으로 나를 구해 주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지나가는 길에 이 집에서 위험한 느낌이 나서요. 그래서 급하게 뛰어 들어왔더니...”


그는 집 안쪽 문을 잠시 지긋이 바라본다. 나는 그 쪽을 바라보는 것조차 두려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묘향은 그 안을 살피듯 한참을 그 안을 바라보았는데, 나는 그의 그런 행위 만으로도 왠지 두려움을 느꼈다.


“그럼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겁니까? 저 미친 것을 쫓아 줄 수 있어요?”

“지금은 안돼요. 시간도 위험하고, 저것도 화가 단단히 나서. 해가 떠야 들어가 볼 수 있겠네요.”


나는 조금 전의 그 얼굴과 웃음이 생각나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팔다리에 힘이 없고 자꾸 주저앉을 것 만 같았다. 나는 염치 불구하고 그에게 부축을 부탁했다.


“괜찮으세요? 저놈이 무슨 짓을 했나요?”

“무슨 짓이라니.. 주변을 돌면서 춤을 추고... 눈앞에서 웃고.. 으으...”


나는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핑 돌았다. 방금 그 일이 꿈이 아닌 건가. 다시 손발이 떨려오자, 그는 급히 내 손을 주물러 준다.


“큰일 날 뻔했어요.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며칠 동안 호되게 아플 수 있습니다. 어디 가 있을 곳이 있나요?”

“여관이라도...”

“안돼요.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그런 곳은 사념도 많고, 잡귀도 많아서. 지금 당신 몸 상태로는 못 버텨요. 친구 집이나, 친지들이 사는 집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고아였고, 고아원을 나온 것도 벌써 이십년이 다 되어 갔다. 친구들은 전부 결혼해 가정이 있어 쳐들어 갈 수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갈 곳이 없었다. 그는 곤란한 표정을 했고, 나는 낯선 나를 위해 그렇게까지 신경써주는 그가 고마웠지만, 더는 신세를 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냥 돌아가시죠.”

“안돼요.”

“네? 어째서..”

“저런 걸 봤는데 어떻게 그냥 가요. 저거는 그쪽이... 아, 이름이 뭐죠?”

“허태문, 허태문이라고 합니다.”

“태문씨, 그러니까 저거는 태문씨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위험한 물건이에요. 몰랐다면 모르지만, 안 이상 그냥 모르는 척 할 수는 없어요. 갈 곳이 없다고 했죠. 그럼 일단 오늘은 우리 집에라도 와계세요. 무당집 괜찮죠?”

“그렇게까지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얼마든지요.”


실은 그를 보내기가 무서웠다. 무당이라면 이쪽 분야에서 전문가였고, 나는 전혀 모르는 저 미지의 것이 두려운 상태였다. 자신이 거절해도 실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참았을 뿐이다. 바짓단이라도 붙잡고 매달리고 싶은 걸 억지로 억누르면서 말이다.


“집은 여기 근처니까. 조금만 가면 돼요. 움직일 수 있죠?”

“네.”


나는 여전히 벌벌 떨리고 힘이 없는 다리를 겨우 떼어냈다. 그리고 그 순간 쾅-! 소리와 함께 낡은 원룸 문이 흔들렸다. 마치 안쪽에서 누군가 내리친 것처럼 말이다. 나는 으악 비명을 질렀고, 그는 나의 팔을 꽉 붙잡고 내가 넘어지지 않도록 부축해 주었다.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저러는 거예요. 안심하세요.”


그는 계속 불안해하며 거친 숨을 겨우 훅훅 내 뱉는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리고 천천히 계단을 향해 갔다. 복도 불들이 불안하게 깜박거리고, 곧 요란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참지 못하고 눈을 꽉 감았고, 그런 나의 손을 잡아준 것은 그였다. 나에게는 그의 손이 유일한 희망이었고, 나는 그 손을 꽉 움켜주었다.


-


“차 마실래요?”


묘향은 태문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온 뒤 그에게 이불과 담요를 잔뜩 덮어주었다. 아직 한여름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이불을 둘둘 감으면 답답하고 더울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태문은 더운 것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더 춥고 오한이 들어서 묘향이 덮어준 이불을 바짝 당겼다.


“감사합니다.”


태문은 기묘한 그림과 장식들이 가득한 묘향의 집의 낯선 분위기를 어색해 하면서도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사실 사람의 온기가 너무 필요했다. 자신도 자신이 이해가 안갈 정도로 사람의 온기를 원했다.

귀신에게 홀리고 난 뒤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람의 온기다. 죽은 것이 아닌 산 것의 기운은 그 사람 몸에 붙은 죽은 것의 기운을 흩어준다. 태문은 본능적으로 지금 가장 가까이 있는 묘향의 기운을 갈구 하고 있었고, 그 상태를 잘 알고 있는 묘향은 태문의 그런 뻔뻔함을 이해해 주었다.


“이 집안에서는 이 방하고 저 쪽 주방 외에는 웬만하면 들어가지 마세요. 어른들이 계시니까요. 그리고 오늘은 이 방에서 저와 함께 주무셔야 할 거에요. 괜찮죠?”

“네.”


묘향이 웃으며 태문을 침대로 이끌었다. 태문은 이불에 둘둘 감긴 채로 묘향을 따라서 침대에 앉는다. 꽤 넓고 좋은 침대였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몸을 감싸자 태문은몸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감싸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사람의 심을 편하게 해주는 부적이 여러 장 붙어있는 침대였다. 특히 귀신에 홀리고 난 태문의 안정에는 도움이 많이 될 부적들이었다.


“오늘은 걱정 없이 푹 자요. 그래야 내일 몸이 조금이라도 괜찮을 거예요.”

“진짜 고맙습니다. 일면식도 없는데...”


태문은 놀란 던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침대의 기운에 파묻혀 조금씩 정신이 아득해져 간다. 말을 이어가면서도 가물가물 정신이 점점 멀어지고, 묘향의 얼굴이 이상하게 가깝다고 느꼈을 때는 그는 이미 잠이 들어 있었다.


잠든 태문의 이마에 살짝 입 맞춘 묘향은 자신의 뒤에 서있는 노인을 돌아보았다.


“이녁, 마침내 찾아왔군.”

“예, 때마침 좋을 때 찾아갔습니다.”


태문을 바라보는 묘향의 눈빛이 그가 깨어있을 때 그를 보던 눈빛보다 한층 더 다정해졌다.


-


태문은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났다. 그 생에 가장 푹 잔 잠이었다. 그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낯선 천장을 보고 이 곳이 어딘지를 고민한다. 무슨 일이 있었고 여기가 어딘지, 그는 왠지 몽롱하고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애써 기억을 되짚어 간다. 그리고 불현 듯 떠오르는 어제의 기억에 놀라 몸을 확 일으켰다. 이상하게 웃으며 기괴하게 눈을 굴리던 여자아이의 머리, 주변을 춤추듯 돌아다니던 목 없는 몽뚱아리. 끔찍한 기억이 마치 현실처럼 눈앞에 펼쳐지고, 곧 묘향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태문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제 보았던 대로 기이한 모습을 한 장식품들이 보인다. 하지만 방의 주인인 묘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눈앞을 맴도는 어제의 기억 때문에 태문은 혼자 있다는 것이 무서워졌다. 당장이라도 눈앞에 그 아이의 모습이 나타날 것 같았다. 그래서 묘향을 찾아라도 보려고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고 몸에 힘이 없었다.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어제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또다시 그 아이가 내 주변을 돌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는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그리고 때마침 문이 열리고 묘향이 방안으로 들어온다.


태문은 잔뜩 긴장하고 있던 것을 탁 풀었다. 묘향의 모습을 보자마자 안도감이 밀려들어오고 그는 풀썩 침대에 누웠다. 씻고 나왔는지 약간 젖은 갈색의 복슬복슬한 파마 머리가 꼭 강아지 털 같아 보이는 묘향이 크고 예쁘게 쌍꺼풀 진 눈을 곱게 휘며 태문을 바라보았다.


“일어나셨어요?”

“아.. 네.”


자신이 누워 있는 옆에 앉아오는 묘향 때문에 태문이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며 묘향을 바라보았다. 묘향은 그 시선을 자연스럽게 받아 주고, 웃어 준 뒤 일어나 방안을 돌아다닌다. 스킨을 바르고 머리를 말리고, 옷을 찾아 입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묘향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태문이 입을 열었다.


“저, 근데 몸이...”

“무겁죠?”

“아.. 네.”

“당분간은 그럴 거예요. 그래도 건강하셔서 다행이에요. 크게 앓는 사람도 많거든요.”


태문은 침대 곁으로 다시 다가와 자신을 다시 눕히는 묘향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누웠다. 묘향이 있는 이 집은 편안하고 어제의 그 끔찍한 일에서 자신을 지켜줄 것만 같았다. 아니 묘향이 자신을 지켜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떠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었다.


“근데.... 제가 어제 본 게 귀신입니까?”

“음... 네. 귀신이죠. 아주 나쁜. 많이 나빠서 태문씨가 위험했을 정도로요.”


마치 위험함을 표현하겠다는 듯 낮게 말하며 몸을 기울여오는 묘향은, 위험하기 보다는 귀여워 보인다. 하지만 이미 겁을 먹은 태문은 묘향의 행동보다는 위험했었다는 그 내용이 더 신경 쓰인다.


“그.. 그건 계속 저희 집에 있는 겁니까?”

“글쎄요. 없애보려고 하겠지만 쉬울지는 모르겠어요.”


태문은 입을 다물고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묘향을 슬쩍 바라본다. 무당이라면 이런 일을 돈을 받고 하겠지? 그는 그 걱정을 하고 있었다.

사실 묘향에게 줄 돈이 없었다. 그런 것이 있는 집에는 다시 돌아갈 용기는 없었지만, 그 월세 집이 그의 유일한 재산이었기에 묘향이 그것을 해주지 못해도 자신은 돌아가야 했다. 적금도 타려면 아직 멀었다. 지금 이렇게 누워서 일을 나가지 못하는 상황도 걱정 되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가면 죽을 것 같고, 그렇다고 줄 돈도 없으니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공짜로 해달라고 할 만큼 염치가 없진 않았다.

묘향은 입을 다물어 버린 태문을 한참 바라본다.


“돈 걱정은 하지 말아요.”

“예?”

“돈 걱정은 말라구요.”


무당이라더니 독심술도 하나 하는 얼굴로 태문이 바라보자 묘향이 풋 웃어 버렸다. 웃는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이런 일을 한다기 보다는 대학 캠퍼스를 거닐 것 같은 모습이었다. 태문은 문득 묘향이 몇 살일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냥 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당분간은 우리 집에서 쉬어요.”

“그,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까지 합니까... 묘향씨는 저랑 일면식도 없는 분이고..”

“제가 그 위험한 때에 태문씨 집 앞을 지나간 것도 전부 인연이라 생각하고, 이렇게 하룻밤 같이 방을 쓴 것도 인연이라 생각하고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도....”

“그리고 저 생각보다 비싼 무당이예요. 아주아주 비싸요. 그러니까 무료로 해준다고 할 때 덥석 받으세요.”


그리고 묘향은 아주 다정한 손길로 태문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어색하기 보다는 어머니가 해주는 그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고 편안한 손길이었다. 태문은 그런 묘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깊이 자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잠이 오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고, 그래야 몸이 빨리 나으니까.”


-


“저.. 묘향씨?”


태문은 조심히 방문을 열었다. 자다 깨서 혼자 누워 있자니 주변에 있는 불상이 내려다보는 모습이 괜히 무서워서 묘향을 찾으러 나온 참이었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겠지만, 배도 출출하고 화장실도 가고 싶었다. 어쨌든 신세를 지기로 했으니 밥 정도는 얻어먹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를 불렀는데, 거실에서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 방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 방 밖으로 나온 태문은 자세히 보지 못했던 집안의 풍경을 그제야 살핀다. 간혹 보이는 무슨 용도인지 모를 물건들, 무쇠 가위, 불상, 병풍 같은 것들이 낯설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통 가정집처럼 보이는 집이었다. 그렇게 자기 원룸 크기만 한 거실을 한 바퀴 빙 둘러보고 난 뒤에 태문은 다시 묘향을 찾으며 부엌으로 향했다.


“어디 나갔나...”


어른들이 계시다고 했는데, 괜히 마주치면 민망할 것도 같았지만, 배가 너무 고파 참을 수 없었던 태문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꽤 커다랗고 좋아 보이는 양문 냉장고를 잠시 감탄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난 뒤, 그 문을 열자 아주 잘 정돈 된 반찬 통들이 가지런히 모습을 드러낸다. 꼭 TV 속 CF에 나올 것처럼 잘 정돈 돼있어서, 차마 손을 댈 수 없었다. 대신 태문은 가장 아래 칸에 있는 바나나 하나를 따서 들어 올렸다. 바로 껍질을 까서 입에 밀어 넣듯 하나를 다 먹고, 이번에는 화장실을 찾았다. 근데 묘향이 들어가지 말라고 했으니 문을 열어 보기도 그래서 그냥 여기저기 기웃기웃. 괜히 열었다가 민망한 상황이 될까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거실만 계속 배회했다. 그러다 방금 전 바나나를 먹은 것이 문제였는지 꾸르륵꾸르륵 배가 살살 아파왔다. 묘향이 올 때까지 참을 까 했다가 이러다가는 그냥 쌀 것 같아서 태문은 하는 수 없이 가장 구석에 있는 방부터 방문을 훅 열었다.


“으왁!”


그리고 저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았다. 창고로 사용하는 방인지, 먼지가 쌓인 물건들이 이리저리 쌓여 있는 방안에는 웬 사내 하나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흰 옷을 입고, 머리를 산발을 한 사내는 눈 밑이 퀑하고, 낯빛이 푸르딩딩 했는데, 쪼그려 앉아서 무언가를 갉아 먹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태문을 돌아보았다. 순간 돌아보는 그 눈빛이 얼마나 섬뜩한지 눈빛만으로도 태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게다가 그 사람 손에는 아무 것도 들려있지 않았고, 제 손 끝을 갉아먹기라도 했는지 손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배.. 고파...”


그 사람은 고개를 기울였다. 점점 더, 점점 더, 이마와 턱 위치가 바뀔 만큼 완전히 고개를 기울이고 나서는 천천히 태문에게로 다가온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리고 혀를 낼름 거리며 연신 배고프다는 소리를 반복했다. 그 자가 문지방 가까이 다가왔고, 태문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굳어서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숨 쉬는 것이 힘들어 겨우 큭큭 소리를 내며 내뱉었다.


“묘... 향 씨...”


목을 긁어내듯 겨우 낸 소리는 묘향의 이름이었다. 태문이 지금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을 불렀다. 하지만 묘향은 나타나지 않았고, 그자는 점점 다가왔다.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은 순간 그 자가 문지방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 때-


“네 이놈! 어딜 기어 나오는 것이냐!”


천둥 같은 외침에 태문이 화들짝 놀라 옆을 바라보자, 언제부터 있었던 것인지 백발이 성성하고, 흰 수염을 늘어트린 할아버지 한분이 태문의 곁에 서있었다. 그 사내는 그 노인의 외침에 놀란 것인지, 아니면 노인이 무서운 것인지 문지방에 두었던 손을 거두고 얼른 방안으로 숨어든다. 하지만 고개는 여전히 비튼 채, 눈만은 여전히 태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태문은 안도와 공포 속에서 눈을 꽉 감았다. 노인은 못마땅한 듯 그 사내를 보며 혀를 쯧쯧 찬다. 그리고 방문을 대신 쾅 소리가 나게 닫아 주고는, 태문을 슬쩍 보고 그대로 한쪽에 방으로 향한다. 태문은 도와주신 것도 감사하고, 어른을 보고 인사도 안 드릴 수는 없어서 힘이 없는 다리로 얼른 일어섰다. 그는 그 노인이 묘향 처럼 무당 일을 하는 어른이라 생각했다.


“저, 저 어르신...?”


태문이 부르자 노인이 휙 태문을 돌아보았다. 부드러운 움직임이었지만, 꽤 놀란 듯 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태문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네.. 내가 보이나?”

“예?”

“내가 보이냔 말일세.”

“아... 예. 다, 당연히...”


태문이 왜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듯 노인을 바라보자 노인은 허허허 웃어버린다. 그리고 현관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태문도 노인의 시선을 따라 현관문을 바라보았고, 현관 문고리를 돌리며 집안으로 들어오는 묘향을 보았다.


“어? 태문씨 일어났나요?”


묘향은 마치 노인이 보이지 않는 다는 것처럼, 바로 태문에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노인에게 살짝 눈인사를 건네는 것을 태문은 놓치지 않았다. 만약 노인이 그곳에 서있는 것을 몰랐다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행동이지만, 묘향은 분명 그 노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태문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자신이 보이냐고 물었던 노인의 물음도 묘향의 이 행동도 마치 태문이 이 노인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듯했다.


“묘향씨?”

“네?”

“저.. 이 어른신이...”

“네?!”

“아니.. 저.. 이 어르신이 방금 저를 도와주셔서.. 그래서..”

“어르신이 보입니까?!”

“아.. 네. 당연히..”


묘향이 노인을 바라보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노인은 그대로 방으로 향해, 문을 열지 않고 통과한다. 태문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모습에 놀라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방금 노인이 사라진 문을 멍하니 바라본다.


“귀, 귀신...”

“제가 모시는 어르신들 중에 한분이세요.”

“모시는....?”

“무당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태문은 평생 귀신이라고는 비슷한 것도 본적 없이 살아온 태문에게 지금 일어나는 일들은 너무 현실감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오히려 더 받아들이는 것에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너무 비현실적이라 오히려 믿는 것이 쉬운...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 그럼 저 방에 있는 그 사람도 묘향씨가 모시는...?”

“저 방문을 여셨어요?!”

“아... 네...”

“아무 방에나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화장실을 찾다가...”

“저긴 잡귀들을 성불시키기 전에 가둬 놓는 곳이라 함부로 들어가시면 진짜 큰일 나는 방이에요. 무슨 일은 없으셨어요?”

“아.. 네.. 그, 귀신, 아니 어르신이 도와주셨습니다.”

“다행이네요. 이리와요. 잠깐만 봐야겠어요.”


묘향은 그렇게 태문을 다시 방으로 끌고 들어갔다. 화장실이 가고 싶었지만, 태문은 참고 묘향을 따라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묘향이 이끄는 대로 침대에 앉았고, 묘향은 태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태문은 진지한 눈빛의 묘향 때문에 괜히 긴장이 되어서 침을 삼키고, 묘향이 시키는 대로 그의 눈을 바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태문은 점점 묘향의 눈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신묘한 느낌. 마치 육체를 벗어나 영혼이 되어가는 것 같은 가벼운 기분. 하지만 두려운 것이 아니라 너무 따뜻한 기분... 그리고 아주 그립고, 애틋한 기분.. 태문은 점점 묘향에게 빨려 들어간다.


“됐어요. 괜찮네요.”


그리고 그런 태문의 기분을 일깨우는 것은 묘향의 목소리였다. 태문은 제가 묘향의 눈을 바라보는 사이 제 몸이 너무 묘향에게 기울였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서 떨어져 나왔다. 하지만 묘향은 별로 기분 나쁘지 않았다는 듯 웃어 주었다.


“근데 저희 어르신은 어떻게 보신 거죠?”

“글쎄요... 그냥 보였는데...”

“흠.. 보일 리가 없는데..”


묘향이 이상하다는 듯 고래를 갸우뚱하자, 태문은 혹시 제가 무슨 잘 못이라도 한 것 마냥 가슴이 쿵쾅거렸다. 심장이 너무 거세게 뛰었다. 두려운 것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혹시 전에도 령 같은 것을 본적 있나요?”

“귀신 말입니까?”

“음, 어제 보신 귀신같은 것도 뿐만 아니라, 사람처럼 흔들리는 그림자나, 벽을 통과 하는 동물 같은 것 암튼 조금이라도 영혼처럼 보이는 것들이요.”

“아뇨. 그 여자 아이를 본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그전에는 그런 비슷한 것도 본 적 없어요.”

“근데 어르신도 보이고, 그 창고의 령도 보였다는 거죠?”

“네... 혹시 저한테 뭐 문제가 생긴 겁니까?”


태문이 불안한 듯 물었다. 하지만 묘향은 잠시 멈칫 했다가, 빙그레 웃음을 지을 뿐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태문의 얼굴에 불안감과 공포가 보인다. 묘향은 그런 태문의 어깨를 단단한 손으로 꼭 붙잡아 주었다.


“아무 걱정하지 말아요. 괜찮아 질 거예요.”

“문제가 있는 건 맞습니까?”

“아주 사소한 문제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요.”


묘향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태문을 진정시켜 주었다. 그리고 ‘아직도 몸이 무겁죠?’ 라고 되물으며 태문을 침대에 눕히려 했다. 귀신에 홀려 약해진 몸에 잠만한 보약은 더 없었다. 게다가 묘향의 침대에는 그런 잡령을 약하게 만드는 부적도 붙어 있으니, 지금 태문이 몸을 회복하려면 계속 자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아까부터 계속 화장실을 가고 싶었던 것을 참은 태문이 자신을 눕히는 묘향의 손을 붙잡았다.


“왜요?”

“저... 화장실이...”

“아...”


묘향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슬쩍 뺨을 긁었다. 그리고 거실 밖을 잠깐 바라보았다가, 다시 태문을 바라본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듯 하다 조심히 입을 열었다.


“화장실이 조금 사용하기 곤란할 수 있어요.”

“네? 왜요?”

“음.. 따라와 보세요.”


태문은 묘향이 이끄는 대로 일어서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묘향의 뒤를 따라서 그 창고 방 옆의 다른 문 앞으로 향했다. 묘향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똑똑 문을 두드리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누군가 화장실에 있는 건가? 근데 왜 문을 여는 거지? 태문이 의구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화장실 안을 들여다보자, 그 안에는 웬 아가씨 한명이 창가 아래 앉아 있었다. 태문이 그녀를 보자 바로 생각한 것은 그 여인이 산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긴 머리를 내리고 붉은 입술로 기묘하게 웃고 있는 여인은 아름다웠지만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놀란 태문이 묘향의 팔을 잡자, 묘향은 그런 태문의 손을 덧잡고 토닥여 주었다.


“걱정 말아요. 측신이세요.”

“측신이요?”

“네, 화장실에 사시는 신이라고 보시면 돼요.”


그렇게 말하고는 묘향은 태문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악신이시구요.’ 라고 덧붙였다.

악신이라 하지만, 위험했던 것은 예전에나 있던 일이었고, 사실 보이지 않는 다면 현대의 화장실에서는 크게 신경쓸만한 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 모습이 보이니 신경이 안 쓰일 수 없는 법. 측신이 워낙 성격이 포악하고 사납다 보니 보이는 것을 이용해 겁을 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신이 하는 일인데 가볍지 않을 터, 잘 못해서 놀라기라고 하다가는 심신에 탈이 날 수 있었다. 일단 묘향은 측신을 달래고 태문을 소개 시켜 괜한 불상사를 막고자 했다.


“측신은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놀라는 것을 싫어하시니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노크 하시고, 일을 본 뒤에는 꼭 깨끗하게 씻고, 화장실을 청결히 하세요. 그럼 딱히 크게 위험하지 않을 겁니다.”

“안 지키면 위험하구요?”

“음.... 만약 측신께서 노하시면...”


묘향은 뒷말은 작게 ‘부엌으로 도망치세요.’ 라고 말했다. 주왕신과 사이가 좋지 않으니 측신이 부엌까지는 오지 않을 것이다. 병을 씌우는 측신이라 도망치는 것이 최선이었다. 측신이 내린 병은 굿을 해도 잘 낫지 않는 법이었다. 여차하면 저나 어르신이 도우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묘향의 얼굴을 보는 태문의 표정은 아주 심각했다. 그에게는 귀신이 무서운 것 말고도 다른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신이라지만... 젊은 여자 모습을 한 사람 앞에서 일을 보라구요?”

“....예? 모습만 그렇지 그냥 신이십니다.”

“그냥.. 다른 화장실은 없어요?”

“이 집에는 다른 화장실은 없어요. 저 혼자 사는 집인 걸요. 그리고 보통 주택에 있는 집에는 측신이 거의 계셔서... 공공 화장실에는 잡귀가 많고...”


귀신이 보인다면 적응하라는 뜻이었다. 보통 귀신이 보여도 보이고자 하는 욕망이 강한 귀신이 아니면 잘 보지 못하는 법인데, 악하지 않은, 무당이 모시는 신령을 볼 정도면 태문은 그냥 흘러가는 잡귀마저 전부 모일 정도의 신안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태문씨가 보이는 눈을 가지게 되었다면.. 일단은 적응 하시는 게 좋아요.”


태문은 다시 화장실을 들여다보았다. 측신이 태문을 빤히 바라보며 웃는다. 아무래도 새로운 사람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창백한 낯빛에 초점을 알 수 없는 눈동자, 게다가 찢어지게 웃는 붉은 입술에 무릎에 닿을 듯 기른 긴 머리라니... 해가 쨍쨍할 때 봐도 오금이 저릴 모습이었다. 그리고 저런 여자 앞에서 볼일을 보라니... 그냥 거실 바닥에 싸지르는 것이 나을 것 같을 정도였다. 물론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럼.... 문 앞에 있어주세요.”

“그정도는 당연히 해드려야죠. 적응 될 때까지는 문열어 놓고 하셔도 괜찮아요.”

“아, 아니요.. 그건 됐구요. 그냥 문 앞에 서 계셔주세요.”


묘향은 웃으며 얼른 들어가라며 태문은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문을 완전히 닫는 대신 살짝 틈이 있게 닫아 놓았다. 화장실에 혼자 떠밀려 들어간 태문은 잠시 침을 삼켰다. 눈앞의 측신이 히죽히죽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조심이 그가 변기로 다가가자, 손에 쥐고 있던 제 머리를 놓고 일어서 태문에게로 천천히 다가온다.


“저, 저.. 묘향씨?”

“네? 왜 그러세요.”

“저, 저 그냥 문 열고 쌀게요....”


눈앞까지 다가온 측신 덕분에 그대로 오줌을 지릴 뻔한 태문이 겨우 말했다 공포는 인간의 존엄성을 쉽게 버리게 만들었다.


-


태문은 묘향과 함께 밖을 나왔다. 저의 집에 간다는 묘향을 고집 부려 따라가는 중이었다. 어차피 당장 갈아입을 옷이 필요해 한 번은 집에 가야 했다. 묘향의 옷은 작아서 입을 수 없었고, 나중에 따로 가서 가져나오기에는 용기가 없었다. 차라리 묘향이 갈 때 따라나서겠노라 했지만, 막상 그 집을 향해 다시 가고 있다니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냥 길을 걷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걱정 말아요. 무서우면 절 붙잡으시면 돼요.”


저보다 덩치도 작은 묘향이 그렇게 말하는데, 창피하기 보다는 의지가 되는 것은 아마 태문이 지금 처한 상황 때문일 것이다. 가는 길 내내 보이는 저 잡귀들 말이다. 자신이 살던 세상이 아닌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것인 듯, 태문은 가는 길 곳곳 마다 보이는 령의 모습들에 정신이 다 아득할 지경이었다. 묘향도 놀랄 정도였다. 이제 막 태어나, 묘향도 기운이나 겨우 느낄만한 작은 정령들마저도 태문은 볼 수 있었다.


“저런 것들은 무해해요. 유해한 악령들은 분위기부터 다르죠.”


자신의 앞에서 야옹야옹 우는 새끼 고양이 령 때문에 앞으로 나가질 못하는 태문의 팔을 잡아끌면서 묘향이 말했다.


“그리고 보여도 보이는 척 하지 마세요. 안 보이는 척 모르는 척 하시는 게 좋아요. 마주 치면 자길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아서 계속 따라오거든요. 쫓아내는 재주가 없다면 큰 일 나요. 아무리 작은 잡귀라고 해도 사람에게 붙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거든요.”


보이는데 어떻게 모른 척을 하라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태문인 지금까지 세 번 째 자신에게 달라붙은 귀신을 때어주는 묘향을 보면서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그의 덩치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지만, 묘향은 함께 아주 안타까운 표정을 해준다. ‘적응 되면 괜찮아 질 거예요.’ 애써 태문을 달래면서 나름 귀신을 피하는 방법 몇 가지를 알려준다. 눈이 마주치면 그 너머를 본다고 생각하고 시선을 흐려라, 갑자기 놀라 시선을 피하면 더 반응한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는 게 중요하다 등등. 계속 태문에게 붙는 귀신들을 쫓아주며 묘향은 귀찮지도 않은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것 까지 지켜보게 했던 게 안 그래도 미안했는데, 이렇게 까지 신경 쓰게 하는 게 미안했던 태문은 점점 말수가 줄어들었다. 하지만 묘향은 전혀 개의치 말라는 듯 가볍게 손을 휘저어 보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태문의 집까지 이십 분정도 걷는 동안 태문은 지쳐 버렸다. 하지만 그 집 앞에 서자 느껴지는 섬뜩한 기분에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원룸텔 전체를 감싸는 어두운 기운이 느껴진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아주 강한 것이 보이는 듯 한 기분. 태문은 따라나온 것을 후회햇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 묘향과 떨어져 집으로 돌아갈 자신도 없었다. 슬쩍 묘향을 바라보자, 언제나 유들유들 웃어주던 묘향의 표정에 긴장이 보인다.


“음기가 강한 집이네요. 습하고...”


음기가 가장 약해야 할 정오임에도 불구하고 원룸텔은 기기묘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태문은 풀벌레조차 울지 않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앞장서 들어가는 묘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얼른 그 뒤를 따랐다.


“안에 들어가서 무언가 보이면, 바로 저를 붙잡으세요. 아셨죠?”


묘향은 그렇게 말하고, 가방에서 방울을 꺼내 들고, 허리에는 의식용 칼을 찬다. 그리고는 잠시 태문이 며칠 전까지 지냈던 원룸 문을 바라보았다. 안에서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태문이 온 것을 느낀 것인지 귀신이 흥분해서 날 뛰는 듯 했다. 그리고 묘향이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잡고 돌리자, 방금 전까지 났던 쿵쿵 소리는 거짓말이었다는 듯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무언가 쑤욱 둘의 몸을 끌어당기는 것 같았고, 둘은 그 힘에 저항하지 않고 원룸 안으로 들어섰다.


한눈에 보이는 원룸 안의 모습은 태문이 떠나기 전과 전혀 바뀌지 않았다. 아무것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대신 그들이 들어온 현관문에 무수한 붉은 손자국이 찍혀 있었다. 태문은 두렵고 무서워 주저앉은 것 같았지만, 애써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묘향의 뒤를 쫓았다.


“짐 챙기세요.”


태문은 고개를 끄덕이고, 얼른 짐을 챙기고 나가고 싶은 마음에 얼른 장롱 옆에 있던 큰 가방을 들어 옷장을 열고 물건을 마구 쑤셔 넣기 시작했다. 묘향은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는 아이의 령을 찾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서랍, 저 서랍을 뒤지며 령의 근원이 되는 물건을 찾아본다. 그리고 그때 그의 눈에 침대 옆 협탁에 있는 작은 서랍 속 가위가 눈에 들어왔다. 아주 낡고 오래 되어 보이는 실타례에 감겨 있는 붉은 실, 그리고 그 붉은 실에 엉켜 있는 가위. 묘향은 이것이 그 아이 령의 근원임을 알아 차렸다. 그리고 그것을 주워 들려는 순간, 쿵- 소리와 함께 태문이 뒤로 넘어가 버린다.


“태문씨!”

“데리고 갈 거야!”

“어찌 죽은 것이 산자의 육체를 탐하느냐!”


어느새 나타났는지 눈앞에 나타난 아이의 머리가 묘향의 눈앞에 둥둥 떠있다. 그리고 곁에 쓰러져 누워 자리를 뻣뻣하게 굳히고 있는 태문의 배위에서 그 아이의 몸이 방방 뛰며 춤을 춘다. 태문은 마치 죽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고, 아이의 몸은 연신 그런 태문의 몸 위에서 춤을 춘다. 묘향의 마음이 급박해졌다.


“데리고 갈꺼야! 함께 갈꺼야!”


깔깔깔깔 웃어제끼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묘향은 일단 가위에 얽혀있는 붉은 실을 풀어낸다. 뜯어지지 않게 조심스럽지만 빠른 손놀림으로 풀어내지만, 단단하게 얽혀 잘 풀리지 않았다. 묘향의 마음이 더욱 다급해지고, 자꾸 누워있는 태문을 돌아보았다.


태문은 옷을 꺼내는 중에 옷장 구석에 있는 아이의 머리를 보았다. 그 아이는 태문과 시선이 마주치자 바로 태문에게 달려들었다. 태문이 놀라 얼른 묘향을 붙잡으러 고개를 들었을 때는 방안에 아무도 없었다.


“묘, 묘향씨...?”

“나랑 같이가? 응?”


아이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소름이 쭈뼛 돋아 난다. 태문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 방안을 어지럽게 살피며 묘향을 찾았지만, 아이의 머리와 언제 나타났는지 주변을 도는 몸 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망쳐야해, 그래야 살아. 태문의 머릿속에는 그말만 떠다닌다. 묘향이 보이지 않자 패닉에 빠졌고, 자신이 지금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묘향 또한 귀신이고 자신이 홀린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식은 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었고, 심장이 너무 거세게 뛰어 숨쉬기가 곤란했다. 그는 현관문쪽으로 달렸다. 하지만, 그 곳에는 문이 없었다.


“무, 문이.. 문이...”


원래 문이 있어야 하는 벽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그 자리에는 단단한 벽이 있을 뿐이다. 즐겁다는 듯, 약올리는 것처럼 깔깔깔 웃는 아이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안돼! 사, 살려줘! 묘향씨! 묘향씨!”


태문은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아 버렸다.



-


“놔둬! 데려갈 거야!”


아이가 입을 크게 벌리고 겁을 주려는 듯 눈알을 굴리며 묘향의 앞까지 다가왔다. 묘향은 긴장으로 손에 땀이 차는 것을 느끼며 그 아이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아이의 몸은 여전히 사지를 떨며 태문의 몸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방안이 강한 귀기에 쿵쿵 울린다. 묘향은 힐끔힐끔 태문의 상태를 살피면서도 필사적으로 엉킨 실이 끊기지 않게 가위에서 풀어낸다.


“하지마! 하지마!”

“읏..”


아이의 영혼이 묘향의 정신을 파고들 듯 그의 머릿속을 뒤흔든다. 묘향의 몸이 휘청거린다. 하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실을 풀었다. 하지만 점점 눈앞이 두 개, 세 개로 보인다. 손이 조금만 미끄러져도 실이 끊어질 것 같아 묘향이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어?”

“이녁.”

“어, 어르신?”

“혼자 지키고 싶은 것은 아나, 그대의 몸은 인간의 몸이오.”


순간 몸이 편안해 진다 생각했더니 곁에 노인이 와있었다. 묘향이 불러낸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아온 터라 귀신과 싸워주지는 못하나 정신을 지켜주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노인의 그런 힘은 묘향까지가 한계일 뿐 태문에게는 닿지 않았다.

아이는 묘향과 자신 사이에 노인의 령이 끼어들자, 끼륵끼륵 이상한 소리를 내며 이를 간다. 그리고는 묘향의 주변을 빙 돌더니, 노인의 힘이 태문에게 닿지 않는 것을 확인한 것인지 묘향에게서 떨어져 태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기절해 누워 있는 태문의 얼굴 위에 제 얼굴을 둥둥 띄운 채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중얼 거린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태문은 제 귓가를 울리는 소리를 막아 보려고 제 귀를 틈 없이 틀어막아 보지만 소리는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 계속 됐다. 이대 가다간 여기서 죽을 것 같았다. 그날 자신을 구해줬던 것처럼, 다시 묘향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는 않을까 그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여전히 묘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이의 몸은 콩콩 뛰며 방 가운데서 춤을 추고 있었고, 그가 고개를 든 그 앞에 아이의 머리가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태문은 눈을 꽉 감았다가 이를 악물고 다시 떴다. 이대로는 죽을 수 없었다. 다시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문이 없었다.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도 없었다. 어느새 방 안은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 되어 버렸다. 나갈 곳이 없었다. 도망칠 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어떤 절망감을 주는지, 그 아득한 감각은 겪어 보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태문은 그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만 싶어졌다. 그리고 그 절망의 틈 사이로 아이의 목소가 멈추지 않고 들려온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하, 하지마! 제발! 으으윽.. 으으.. 묘, 묘향씨...”


태문은 아이를 밀어 내듯 마구 팔을 흔들며 묘향을 불렀다. 죽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정말로 그 간절함이 닿은 것인지 어쩐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묘향의 기운이 느껴진다 싶더니, 일어서 있던 제가 어느새 방 한 가운데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안고, 땀에 흠뻑 젖은 묘향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나 어리둥절한 태문이 눈을 깜박였다.


“묘향씨...?”


묘향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털썩 힘이 풀린 듯 쓰러진다. 태문은 놀라 그런 묘향을 받아 안으며 주변을 살폈다. 방은 그대로였다. 문도 있었고, 창도 있었다. 그리고 묘향의 집에서 보았던 그 노인도 보였다. 그리고 정작 그 아이 귀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태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묘향을 보았다. 정말로 귀신의 홀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묘향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웃으며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곧 태문의 시선이 느껴지는지 눈을 떴다.


“끝났어요.”

“끝났어요?”

“네, 다 끝났어요. 갔어요. 아이도.”

“바, 방금 전까지 눈앞에 있었는데.. 문도 없어지고, 창문도 없어지고....”

“그 아이 령에게 홀렸던 거예요. 큰 일 날 뻔 했지만, 이제는 괜찮아요. 끝났으니까.”


묘향은 정말 기쁜 듯 웃으며 손에 쥐고 있는 실타래를 태문에게 건네주었다. 태문은 아주 낡고 오래된, 언제나 제 방 안 어딘가에 굴러다니던 그 실타래를 받아 들었다. 익숙한 듯 낯설기도 한 실타래. 생각해 보면 언제나 자신이 어디 살든 집에 있었다. 별생각 없이 반짇고리 속에 항상 넣어 놨던 실타래. 묘향 전해주는 실타래를 보며 태문은 잠시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묘향은 그런 태문을 보며 웃었다.


묘향은 결국 실과 가위가 엉킨 것을 풀어냈고, 풀어내자마자 제도(祭刀)를 꺼내 가위를 내리쳤다. 아이는 끔찍한 비명을 질렀고, 묘향은 반복해서 그 가위를 내리치며 아이의 영혼을 달래는 주문을 계속 외웠다. 아이가 마지막으로 발버둥을 치는지 아이의 영혼을 묶어 주문을 외우는 것만으로도 묘향의 힘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하지만 묘향은 포기하지 않았고, 아이의 혼이 태문을 포기하고 떠날 때까지 주문을 반복했다. 반복했다. 작은 령이었던 아이의 영혼이 원한이 커진 근원이었던 실타래와의 연결이 끊긴 터라 아이는 얼마 가지 못해 지쳤고, 곧 검은 것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방안을 한 바퀴 돌고, 태문과 묘향과 노인이 냄새를 맡아 보더니 곧 아이의 영혼을 데리고 사라졌다. 태문의 위에서 뛰던 몸도, 그에게 끊임없이 중얼거리던 머리도 모두 사라졌다. 실타래에 엮인 동안 계속 그 힘을 빼서 몸집을 키웠는지 생각보다 훨씬 힘이 강했기에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 했었다. 아마 며칠만 더 시간을 끌었어도 묘향이 감당하지 못 할 뻔 했다. 묘향은 지쳤지만, 그래도 개운한 표정으로 그 실타래를 바라보았다.


“여기에 귀신이 씌어있었습니까?”

“아니요. 저기 가위에 있었어요. 아무래도 저 가위에 찔려 죽은 아이 같았습니다.”


묘향은 마지막 흩어지는 파편 사이로 아이가 흩어 놓고 간 아이의 기억을 받아 들였다. 그것은 영혼을 사계로 이끄는 저승사자를 부리는 무당의 업이었다.


영혼이 끌려가는 마지막 순간, 아이가 죽었을 때 느꼈던 공포, 괴로움, 고통 같은 것들이 한 번에 밀려 들어왔다. 언제나 엄마를 때리던 아빠, 그런 아빠를 증오하는 엄마, 언제나 방구석에 숨어 있던 할머니, 떨고 있던 저와 동생. 그리고 어느 날 밤, 돌변해 아빠와 할머니, 자신과 동생을 죽인 엄마. 차가운 가위가 가슴을 파고드는 고통, 바로 죽지 못하고 하루를 헐떡이며 괴로워했고, 제발 살려달라며 애원했던 기억들.. 그것들이 아이의 령을 이 곳에 잡아 두었고, 그 아이의 한이 되었다. 진득한 한 만큼이나 매캐한 기억들이었다. 하지만 묘향은 그 기억들 속에서도 웃을 수 있었다. 태문을 구해냈고, 빨간 실타래도 멀쩡했다.


묘향은 힘들게 일어섰다. 그리고 태문을 마주보고 앉았다. 태문은 방금까지만 해도 도망갈 곳이 없던 끔찍했던 이 방에서 얼른 나가고 싶었지만, 진지해 보이는 묘향의 행동에 선뜻 일어서지 못했다.

묘향은 태문의 손에 쥐어져 있는 실타래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끊겨 있는 그 끝을 바라보았다.


“저 가위로 이 실을 잘랐죠?”

“네, 잘 안 잘려서 고생했죠.”

“이 실은 잘라서 쓰는 실이 아니니까요.”

“네?”

“이 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 맞죠?”

“아.. 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한 묘향의 말에 무당은 무당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태문은 그 익숙한 실타래를 바라보았다.


“이건 인연을 잇는 실이에요. 옷감을 꿰매는 실이 아니죠.”

“...예?”

“하하, 아무나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이들이 가지고 태어나는 거죠. 태문씨는 운명으로 정해진 짝이 있고, 이 실을 잘 보관하면 만날 수 있어요.”

“아... 모르겠네요.”

“이해가 잘 안가죠? 그냥 그렇다고 받아들이세요. 가지고 태어난 건 아주 운이 좋은 거고, 이 나이 때까지 잃어버리지 않는 것도 아주 운이 좋은 거니까요. 근데 그런 실을, 약하지만 귀신이 붙어 있는 가위로 자르려 하셔서 탈이 난 거에요. 인연의 실은 사람의 연을 잇는 실이다 보니 그 힘이 아주 강하고, 가위에 붙은 아이가 그 연을 먹고 컸어요.”


실을 자르면 연이 약해진다. 그리고 그 약해진 만큼 가위가 그 흩어지는 힘을 흡수했다. 게다가 얽혀있는 동안 계속 빼먹으러 아등바등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약간 이상한 일이 일어나는 정도였겠지만, 점점 힘을 흡수하는 것에 가속도가 붙었을 것이고, 아이는 금방 스스로도 힘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자라 태문까지 삼키려했다. 원래 연의 주인을 삼키면 자신이 이 힘을 전부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욕심 때문에 말이다.


“그럼.. 제 잘 못인 거네요?”

“잘못이라기보다는 실수죠. 아무래도 태문씨가 령을 보게 된 것도 인연이 잘려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어요. 저도 사실 실을 잃어버린 건 봤지만, 실을 끊은 경우는 본적이 없어서...”


무의식적으로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이 붉은 실은 쓰지 않으려 하는 것이 맞았다. 태문이 왜 갑작스럽게 그 실을 끊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분명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엔 실도 찾고 귀신도 쫓았지만, 묘향이 제때 발견하지 않았다면, 태문은 정말로 영혼이 통째로 아이의 영혼에 삼켜질 뻔 했던 것이다. 게다가 령을 못 보던 사람이 보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고, 묘향은 그 둘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찌 됐든 이제 나가죠.”

“짐은 다 챙겼어요?”

“네. 다 챙겼습니다.”


묘향은 가위와 실타래를 들고 일어섰다. 가위는 집으로 가져가 제령 굿을 한 번 더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일단 귀신이 씌었던 물건이라 함부로 굴렸다가는 사람이 다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나가기 전에 집안에 잡귀가 다시 들지 않도록 소금을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당분간은 아무 잡귀도 들지 않을 것이다. 원룸텔 전체가 음기가 강해서 언젠가는 다시 잡귀가 끼겠지만, 그리 큰 령은 아닐 것이다.


-


“당분간만 신세를 지겠습니다.”

“나한테 말해서 뭐해. 그놈이 불러들였으면 끝인 거지.”


측신은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어쨌든 이 집에 있게 됐으니 악신이라는 화장실 신과 좀 친해지는 건 어떤가 싶어서 묘향에게 부탁해 떡을 가지고 화장실로 들어왔다. 이 여자 귀신 때문에 화장실 올 때마다 묘향에게 부탁해 문을 열어 놓고 변을 보는 것이 꽤 민망했던 터였다.


“그래도 이 곳을 지키는 신이시지 않습니까. 잘 좀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요즘 화장실은 다 깨끗해서. 내가 잘 봐주고 말고 할 게 없어. 옛날에 비하면 천국이지.”


그녀는 과거의 화장실을 떠올리듯 잠시 눈을 굴리다가 부르르 몸을 떤다. 태문은 귀신에게도 참 사람다운 표정이 나오는구나 하면서 슬쩍 떡을 그녀 앞으로 밀었다. 그녀는 싫지는 않았는지 그것을 은근슬쩍 받아 든다. 그리고는 떡 하나를 집어 야금야금 먹어치운다. 입이 움직이는 것 같지 않은데 떡을 밀어 넣으면 사라진다. 그 모습이 꽤 소름끼쳐서 태문은 일단 시선을 돌렸다.


“그, 그럼 전...”


그리고 후다닥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앞으로도 당분간은 화장실 갈 때마다 묘향의 신세를 져야 할 것 같았다. 태문은 한숨을 쉬고 묘향이 들어간 ‘사당’을 바라보았다.

그 사당 안은 태문이 슬쩍 봤을 때, 그 노인보다 훨씬 무서워 보이는 무언가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노인도 그곳에는 들어가지 않았고, 묘향도 태문에게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했다. 그곳은 보통의 가정집처럼 밝은 다른 방들과는 다르게 아주 어두웠고, 향로도, 병풍도 검은 색이었다. 일단의 사당과는 너무 달랐기에 태문 묘향이 등을 떠민다고 해도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저긴 뭐하는 곳입니까?”


이틀 째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노인에게 물으니 노인은 태문을 한심한 표정으로 쓱 바라보고는 저번의 그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머쓱해진 태문이 좀 대답해주면 어떠냐 꿍얼거리다가 다시 그 ‘사당’을 바라보았다. 그 안으로 들어서는 묘향의 표정도 별로 좋지 못했던 것이 떠올랐다. 아주 무서운 신인가... 그렇다면 묘향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안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신세를 지고 있는데, 그런 것에까지 오지랖을 부릴 수 없어서 조용히 있지만, 조금만 사이가 가까웠더라도 태문은 묘향을 말렸을 것이다. 그렇게 묘향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geHTM.��扡


1차벨/떡대수/미인공/미인공떡대수/히잉 소비러 하구 싶다 잉잉/@ghdud0127

아노르이실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