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


월요일. 영인은 주말에 답지 않게 무리를 한 대가를 호되게 치르고 있었다. 꾸벅꾸벅 졸다가 옆자리 미혜 씨가 찔러서 깬 게 3번이었고, 원래 두 잔 이상 안 마시는 커피를 세 잔이나 마셨지만 결국 회사가 언제부터 놀이방이 돼서 낮잠 시간이 있냐며 과장의 비꼼을 들었다(물론 "네 원장 선생님. 간식은 안 주시나요?" 맞대거리를 했다가 더 혼났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후달리는 체력 덕에 업무만으로도 바빠서 잡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이었다. 

'인간은 왜 이렇게 나약한가'

그러나 동료들에게 인사를 하고 짐을 챙기자마자 바로 생각의 화살표는 희수에게로 향했다. 당연히 기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조희수는 가장 솔직하고 진솔하지만, 또 저다운 예쁜 말로 골라서 마음을 밝혔다. 육두문자 섞은 비난조의 공영인의 고백과는 차원이 다른 무언가였다. 

영인은 어제 희수가 제 손을 쥐었을 때부터 자신의 노력이 아마도 무용지물이 될 거라는 걸 직감했다. 그보다도 제가 그런 피곤한 고민을 하기 싫다고 해서 희수에게 불필요한 밀당을 시키는 것 또한 도리가 아니었다. 


그래도 여러 가지로 겁이 나긴 했다. 지금이야 너무 좋지만, 실제로 사귀면서 결혼도 무엇도 할 수 없는 이성 간의 연애에 비해 불안하기 짝이 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영인은 선주와의 연애에서 뼈저리게 느꼈다. 영원의 맹세는 언제든 서류의 한 줄만도 못한 것이 되기 십상이었다. 

물론 희수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자신 역시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만 착한 희수였기에 마음이 변해도 불행을 감내할까 걱정이 됐다. 조카를 그렇게 예뻐하던데, 지금은 무섭다 한들 언젠가 아이를 가지고 싶어진다면. 

감정의 동요가 큰 폭은 아니었지만 또 관성이 강한 영인이었다. 사귄 건 아니어도 함께한 시간이 9년이었다. 만약 헤어지면 얼마나 힘들지 가늠도 안 섰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그런 걱정과 합리성은 압도적인 감정 앞에서는 그저 휴짓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회사 로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희수를 본 순간 빨라지는 발걸음에 영인은 자신이 봐도 언행불일치가 따로 없다 생각했다. 


"여기는 무슨 일로…. 라기엔 뭐 목적은 나밖에 없겠구나."

"응. 진짜 가깝다. 회사. 30분은 걸릴 줄 알고 출발했는데."

"기다렸단 얘기 돌려하네."

"…들켰어? 히. 고생했어. 피곤했지?"


학원에 갈 때보다 가벼운 옷차림이 마음에 들었다. 맵시도 좋았고 옷에 관심이 많은 만큼 옷도 잘 입는 희수였다. 오늘도 하늘색 린넨 원피스 위에 하얀색 네트 니트를 입은 옷이 찰떡으로 어울렸다. 


"예쁘네."

"웬일로 솔직한 소리를~?"

"팩트니까. 근데 정말 왜 굳이? 집 가면 곧 보는데."

"15분이긴 해도 빨리 보고 싶어서."

"허……."

"꼬시려면 일단 오래 보고 봐야지!"

"…."


오만상을 쓰는 얼굴이 마음에 들었는지 희수는 가방을 들고 있지 않은 영인의 손을 끌어와 팔짱을 끼며 웃었다. 영인의 미간의 주름이 더 깊어졌다. 


"미간 펴. 누가 보면 무슨 내가 떼인 돈 받으러 온 사람인 줄 알겠어."

"무슨 15분 빨리 보자고…. 무지 더운데."

"우리 시원한 거 먹자. 나 맛집 데려가 줘."

"…소바가 좋아? 냉면이 좋아?"

"음………. 음."

"둘 다 좋아?"

"…냉면은 무슨 냉면?"

"평양냉면도 있고, 국물 빨간 물냉도 있어."

"많이 매워?"

"아니. 다대기 좀 빼면 괜찮아. 거기 갈래?"

"응!"


자신이 오늘 민소매 니트를 입어서 그런지 살이 맞닿는 부분이 많았다. 네트 니트 아래로 환히 드러나는 하얀 피부에, 영인은 분명 자신이 더 살이 많이 드러났는데 왠지 희수가 더 야한 것 같다고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희수는 이제 8월이라 그런지 저녁인데도 꽤 덥다면서도 팔을 놔 줄 생각을 안 했다. 영인 역시 여름이 그럼 덥지 춥겠냐고 핀잔을 주면서도 빠르게 냉면 집으로 걸었다. 


"사실."

"응?"

"지수가 이번엔 너네 회사 앞으로 찾아가는 거 아닐까 싶어서. 걱정돼서 온 것도 있어."

"차단 풀었어?"

"아니…."

"잘했어. 걔 그리고 안 올걸."

"그래? 집까지 왔었는데?"

"지금 온다고 얻을 게 없으니까."


그래. 그랬다. 영인은 떠올렸다. 조희수와 채지수의 가장 큰 차이는 거기에 있었다. 

조금 빨리 얼굴을 보고 싶다고, 혹은 조금이라도 불안하다고 더운 여름날에 예쁘게 차려 입고 한 걸음에 회사 앞에 오는, 나쁘게 말해 맹목적이고 좋게 말해 아낌없는 사람. 

반드시 억지를 부려서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을 때 타이밍에만 움직이는, 좋게 말해 효율적이고 나쁘게 말해 기회주의적인 사람. 

무엇이 공영인이라는 사람에게 잘 맞는지는 정해져 있었다. 이런 거 보면 진짜 잘 맞는다니까…. 영인은 마른 세수를 했고 희수는 덥냐며 얼음물을 컵 가득 따라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운 냉면이 둘 앞에 놓였다.


"식초, 넣어?"

"아, 응!"

"이 정도?"

"조금만 더!"

"응."


영인이 식초를 넣어 줬고 희수는 양념장을 조금만 남기고 덜어 놓고 국물을 맛 보았다. 열대야에 먹는 살얼음 동동 냉면은 끝내 주게 시원했다. 허름한 식당이었음에도 맛은 결코 허름하지 않았다. 


"진짜 시원해! 맛있다."

"여기 면도 여기서 다 뽑아."

"그렇구나. 쫄깃쫄깃하다."

"이 근처에선 여기가 제일 낫더라고."

"응. 맛있다. 다대기도 많이 안 매운 것 같아."

"응. 조금 더 넣어도 괜찮을걸?"

"그럴까? 겨자도 좀 넣어야지. 줄까?"

"아, 겨자. 응. 새끼손톱만큼만. 오키."


겨자까지 넣고선 후루룩 후루룩 냉면은 먹으며 맛있다고 웃는 희수에 영인은 충만감을 느꼈다. 글렀네. 작심삼일이라더니 금요일 밤에 다짐한 게 72시간이 지나기 전에 깨질 것 같았다. 그리곤  하얀 네트 니트를 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먹다 말고 자리를 뜨는 영인에 토끼눈이 된 희수 앞에 내밀어진 건 소주 광고가 적힌 앞치마였다. 


"자."

"아. 고마워!"

"이게 은근 국물이 튄단 말이지. 면치기 하는 것도 아니데…."

"영인이는 상냥하네."

"오바야. 내 거 가지러 가면서 겸사겸사 갖고 온 거야."

"응~ 겸사겸사~."

"알아 들은 거 맞아?"


영인이 그다지 앞치마를 안 한다는 건 같이 살며 빨래를 몇 번이나 해 본 희수는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매번 퐁퐁이나 얼룩제거제로 지웠는지 앞섶이 흠뻑 젖은 티셔츠나 블라우스들이 빨래통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세심한 점이 얼마나 장점이 되는지 본인은 알는지. 희수는 알면 유죄고 몰라도 유죄라고 판결을 내리며 앞치마를 하곤 다시 냉면을 먹었다. 



29.2.


"배불러어……."

"반도 안 먹고서?"

"반이나 먹은 거지. 너는 왜케 애가 부정적이야!"

"그럼 한 그릇 다 먹은 나는 배가 터져야겠어."

"그러게. 으 배불러. 기운 빠져어."


종이인형처럼 흐느적거리는 모습에 희수는 먹는 걸 좋아하면서도 저러니 살이 찌려야 찔 수 없겠다며 혀를 찼다. 


"너는 모처럼 휴간데 나랑 냉면이나 먹냐. 아깝게."

"왜, 맛있었는데. 그리고 네가 어때서 내가 좋…."

"아. 그, 그만."

"아하하."


희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영인의 어깨를 쿡 찌르면서 웃었다.


"친구야 주말에도 만날 수 있고 맛집도 주말에 갈 수 있지만, 이건 오늘밖에 못하잖아."

"뭐를? 나랑 냉면? 주말에도 먹고 싶으면 와 줄게."

"으으응. 너 퇴근하는 거 마중 나가는 거."

"아……."

"단수 됐을 때 네가 나 기다려 준 거 되게 기뻤거든. 근데 나는 보통 네 퇴근 때는 학원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오늘밖에 못하는 하고 싶은 일을 한 거야 하며 어깨를 으쓱하는 희수에 영인은 두 눈을 꾹 감았다. 뭔데. 이거. 진짜…. 


"다음에 너 퇴근할 때 오게 회사에서 야근 한번 해야겠네…."

"배보다 배꼽이 큰 거 아니야?"

"…나도 가끔 갈게. 거기 맛있는 것도 많고."

"운동도 하고?"

"그건 쫌."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영인을 보며 희수는 너 정말 운동해야 해 이 종이쪼가리 인간아 하며 잔소리를 했다.


"아. 알았어. 알았어. 그럼 좀 걸을까?"

"기운 빠진다며. 괜찮겠어? 꽤 더운데."

"의사한테 혼날 수도 있으니 최소한은 해야지."

"으휴."

"잔소리 금지! 더 할 거면 돈 내고 해."

"얼마 내야 하는데?"

"진짜 돈 내면서까지 뭐라고 하게?"


영인은 여기 근처에 공원 괜찮다며 따라오라는 듯 손짓을 했다. 체력이 없는 게 운동을 안 해서라면 당장 좀 피곤해도 운동하는 게 낫긴 하겠다 싶어 희수는 영인을 따라 공원으로 향했다. 




여름이라 그런지 월요일인데도 공원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영인은 조금 걷더니 사람이 아주 많지는 않은 벤치에 추욱 늘어지듯 앉았다. 그럼 그럴 줄 알았다며 희수는 옆에 나란히 앉았다.


"뭘했다고 벌써 해가 지려고 하냐."

"그러게. 요새 많이 짧아졌지."

"그니까. 하지가 언제였지?"

"언제더라 7월 초인가?"

"6월 말이었네."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한 영인의 말에 희수는 끄덕였다. 그리곤 영인의 핸드폰 잠금화면에 "아!" 하며 감탄했다.


"제주도네?"

"어. 잘나왔길래."

"응. 예쁘다. 톡 프로필 사진도 바꿨지?"

"어. 너도 바꿨더만."

"응. 나도 이 사진 잠금화면으로 해야지!"

"뭐야. 왜 따라해?"

"좋아서."

"……."


다시 굳는 영인의 표정에 희수는 살짝 눈꼬리를 내렸다. 그리고는 다정하게 영인에게 말했다.


"미안. 너무 부담스러워?"

"…아니. 뭐."

"…서둘러 말 안 해 줘도 괜찮아."


땅만 보던 영인은 뜻밖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희수를 바라보았다. 자상한 미소를 띤 희수는 어스름이 깔리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불안해서, 신중해서 그런 거 아니까. 어제는 내가 좀 마음이 급했던 것 같아서. 네 말대로…. 나는 예전에 남자만 만났었고. 네 입장에서는 충분히 불안할 것 같아."

"…음."

"그래서 나 천천히 여유 가지고 기다리려고!"

"기다린다고?"

"…물론 좀 꼬시기는 하겠지만."


잔망스레 웃으며 희수는 영인의 손등을 톡톡 쳤다. 영인은 어떤 말도 못하고 깊은 숨을 내쉬곤 손바닥을 위로 했다. 제 마른 손바닥 위에 얹어진 손에는 땀이 흥건했다. 더워서 그렇다기엔 해가 지고 공원에는 꽤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하하. 그, 그래서 이말 하려고 오늘 나왔어…! 보고 싶던 것도 맞고 지수가 걱정도 됐지만."

"하아."

"한숨 쉬지 마아."

"어떻게 안 쉬어…."

"그래도 좋아한다고는 말해도 돼? 뭔가…. 네 불안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 싶어."

"너는 정말…."

"나 오늘 온 거, 부담스러웠어? 


이걸 어떻게 당해내. 이걸 어떻게 부담스럽다고 말해. 이렇게까지 다정하고 착하고 예쁘게 말하는 너를 내가 어떻게. 


"좋았어."

"다행이다."

"꽤 예전부터 그런 거 같아."

"…응?"


좋았다는 대상이, 자신의 방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캐치한 희수는 맞잡은 손을 꼭 쥐었다. 영인 역시 단단히 붙들고선 희수를 바라보았다. 


"내가 한심해서 한숨이 나왔어."

"네가 뭐가 한심해…."

"네가 이렇게 나한테 올곧게 마음을 보여 주는데, 나는 겁쟁이여서 숨기만 하고, 뻔히 보이는 걸 아니라고 우기기만 하고."

"영인아…."

"온갖 걱정도 불안도."

"응."

"그냥. 아 모르겠다. 나 말 원래 잘하는데. 왜 이러지."

"잘하고 있어. 나한테는 너무 잘 전달되고 있어."

"제일 중요한 말도 아직 안 했는데 뭘 잘 전달돼."


영인은 피식 웃으면서 올망올망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희수를 바라보며 엄지손가락으로 희수의 손등을 쓸며 말했다.


"사랑해. 희수야. 내가 좋은 친구로만 지내기엔 너를 너무 사랑하네."

"아……."

"표절은 창작의 어머니니까."

"으으, 나도 사랑해!"

"그래. 알아."


그새 거만한 듯 웃는 영인이 얄미울 법도 했지만, 오늘이 될 거라 기대하지 않은 1일에 희수는 세상을 다 가진 듯 웃느라 그럴 틈이 없었다. 



29.3.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인 건가아?!"

"푸흡. 콜록. 무슨 귀여운 소리를 하고 있어."


여러 의미로 얼굴이 화끈해진 두 사람은 자판기에서 캔음료를 하나씩 마시며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마땅히 긍정의 대답이 나와야 하는데 창피함에 딴소리를 하는 영인에게 희수는 또 1일이 취소당할 순 없다며 되물었다.


"아니야?!"

"맞긴 하다만…."

"하긴 영인이 기념일 잘 못 챙길 것 같기는 해."

"와. 사귀자마자 디스하는 거 봐."

"아니야?"

"아니거든? 완전 잘챙기거든? 날 뭘로 보고."

"내 애인!"

"아하?"

"응. 이제 친구 아니라 애인 하기로 한 거잖아. 우리."

"아니야."


예상치 못한 부정에 억장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희수를 보며 영인은 의기양양한(왜?) 웃음을 지었다.


"친구이자 애인이지."

"아? 말장난 하네. 공영인."

"아니. 진짜루. 나는 욕심이 많거든. 우리가 서로 좋아한다고 친구가 아닌 건 아니니까."

"그런가아?"

"그렇다아."


제 맘버릇을 따라하며 뭐가 재밌는지 낄낄 웃는 영인을 보며 희수는 가끔 보면 정말 애가 따로 없다며 어이없어했다. 공원에서 옥신각신이라 쓰고 알콩달콩이라고 읽는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영인이 모기 4방 물렸다며 팔을 벅벅 긁으며 집에 가자고 해서 귀가를 했다. 

막 사귀기로 했는데 동거를 하는 게 어색할 법도 했지만 같이 집으로 돌아오는 게 오늘 하루 그 어떤 것보다 자연스러웠다. 그래도 대망의 1일이 가는 게 아쉬워 희수는 영인의 곁에 찰딱 붙어 있었다. 영인 역시 그게 싫지 않았는지 한 팔로 어깨를 감싸고선 머릴 마주 기대며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한참을 그렇게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희수는 거실 테이블에 올려둔 영인의 스마트폰 화면 가득 뜬 [채지수]라는 이름에 흠칫했다. 받지 않을 걸 알았어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영인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폰을 보다가 희수를 보고 웃으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지수가 악다구니를 쓰고 있는지 놀라 토끼눈이 된 희수에게도 소음이 전해졌다. 


"뭐하느라 전화를 안 받냐고? 데이트 중인데. 누구랑? 몰라서 묻냐."


뭐라고 떼를 쓰는 것 같았지만 영인은 듣지 않겠다는 듯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선 손바닥으로 스피커를 막고 희수를 바라보며 이상한 미소를 지었다.


"궁금하면 바꿔 줄게."

"뭐?! 나? 아니…. 괜찮은데?"


영인은 그냥 듣지 말고 네 할말만 하라며 통화음량은 최소로 줄여놓고 희수에게 폰을 넘겼다. 희수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어떤 준비도 하지 않은지라 영인에게 입모양으로 뭐? 무슨 말을 하라고? 하며 묻자 영인은 생각해 둔 말이 있었는지 씨익 웃으며 "전해."라며 입모양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희수는 엉겁결에 말을 옮기게 되었다.


"채지수…. 안녕. 영인이가. 응? 아, 어! 내 여자친구가…!

넷이 만나서 노래방 갈 거면 만나겠대. 어? 그리고…

꼭 네가 노래방에서 엄정화 <하늘만 허락한 사랑>이랑 <흔들린 우정> 불러야 한다고. 아, 그거 싫으면 <세 사람>이랑 <축가>도 괜찮대. 김연우.

아. 뭐라고? 아, 내가 <잘못된 만남> 불러도 되냐고도…. 끊어졌네…."


속이 시원한 듯 웃고 있는 영인에 희수는 아무리 지수가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긴 했어도 조금 질린다는 바라보았다.


"못 됐다. 공영인."

"아 뭐. 염장 떤 것도 아니고."

"어쨌든 차인 거잖아…. 안 됐는데."

"고백도 안 한 건 차였다고 안 해. 평생 안 했을걸. 얘 나 좋아하는 거 아니라니까. 괜히 못 가지니까 지랄맞게 구는 거지."

"그래도."

"얘가 너한테 한 걸 생각하면 새발의 피야."

"되게 냉정해졌어…."

"시달렸거든. 그리고 난 애인 눈에서 눈물 엄청 쏟게 한 사람 안 봐 줘."


아마도 자신의 성격상 그 일로 지수에게 시원하게 뭐라고 못했을 게 뻔하다고 생각한 게 분명했다. 그러나 희수 생각에는 정도는 다르지만 분명 지수가 영인에게 품고 있던 건 애정이었다. 승자로서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는데. 희수는 속으로 조금 꼬시다고 생각하는 스스로를 반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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