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마지막 왕자]

"왕자님, 왕자님! 일어나세요, 어서요!"


꽤나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것 같은 목소리가, 평소의 나긋한 어조가 아닌 다급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왕자님!"


다시 한 번 조급하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눈을 떴다.


"어서 일어나십쇼. 궁에서 일 초라도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어서요!"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아이도 그녀의 말을 거든다.


"왕자님,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우선 이곳에서 나가야 해요!"


그들의 여유 없는 목소리에 나는 현재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지 않은 그녀의 다른 손을 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아이와 내 손을 잡고 뛰고 또 뛰었다. 뛰면서 본 광경은 너무나도 생경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늘에 떠 있던 노을이 성을 삼킨 것처럼 뜨거운 불길이 느껴졌고, 항상 사람들의 말소리로 가득했던 복도에는 차갑고 검붉은 피만이 그러한 나날은 이제 끝이라 고하는 듯했다. 숨이 막힐 듯 가빠왔지만, 두 다리는 멈출 수가 없었다.


마침내 건물에서 나와 정원을 가로지르는데, 두 명의 사내가 우리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멈추시게.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칼을 뽑겠네."


그들을 허망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곧 입을 열었다.


"제발... 제발 아이들을 살려주십쇼. 그저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들일 뿐입니다. 제 목숨은 거두어가도 좋으니 아이들은.. 아이들만은 살려주세요."


그리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는 듯했고, 마주 잡은 손은 놓치지 않으려는 듯 더욱 굳세어졌다.


"어떡할까요, 부단장님? 그저 어린 아이 둘과 그 어미인 듯한데... 보내주어도 되지 않을까요?"

"..."

"예? 불쌍하잖습니까."

"... 궁의 모든 이들을 끌고 오라는 황태자 전하의 명령이다. 내가 섣불리 결정할 일이 아니야. 황태자 전하께 데리고 가도록 하지."


두 사내는 잠시 대화를 주고받았고, 그 말을 들은 그녀는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은 얼굴을 했다.


"아... 안 돼.."


그러고는 작게 중얼거린다.


"란. 내가 손을 놓으면 둘이 함께 동문을 향해 뛰어라.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

"어머니..."


아이는 큰 결심을 한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이를 본 그녀는 아이와 나의 손을 꼭 쥐더니 이내 아이의 손에 내 손을 쥐여 주고는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이는 이제까지보다 빠르게, 더 빠르게 달렸다.


"아아아악-"


뒤에서 그녀의 언뜻 비명처럼 들리는 처절한 기합 소리가 들렸다.


"이거 놔. 이 여자가 미쳤나."

"어서 아이들을 잡으러 가게."


뒤이어 두 사내의 당황한 듯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뜨거운 액체가 내 볼에 닿았다.


아이의 눈물이었다.


계속해서 들려오던 그녀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아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두 사내의 모습 역시 보이지 않았다.


다시 앞을 보았다.


우리는 계속해서 달렸다.


뜨거운 액체가 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

.

.

.

.


"-님. -련님."


익숙하면서 반가운 목소리가, 평소와 같이 나를 부른다.


"도련님, 일어나십쇼!"

"으웅.."

"어서요. 오늘은 혼인식 날이라구요. 안 그래도 준비할 시간이 촉박하니 어서 일어나세요!"

"응.."

"매번 말씀만 그렇게 하시고 정말이지..."

"응, 일어났어.. 란."


꿈속에서 보았던 것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모습으로 아이가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도련님. 우셨습니까?"


란의 말에 눈가를 만져 보니 촉촉했다.


"아.."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란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니, 그냥 악몽을 좀 꿨나 봐."

"또 그 꿈입니까..?"


란의 물음에 나는 그저 말 없이 웃었다.


"오늘은 도련님이 최고로 아름다워야 하는데 말이에요."

"응."

"어서 세수하고 준비하자구요. 눈에 붓기 가라앉히려면 오래 걸리니까요."

"응."


그래, 오늘은 나의 혼인식 날이다. 그리고 그 상대는, 3년 전 레일 왕국을 쑥대밭으로 만든 주범, 세이나이트 아트로스 카이탄. 제국의 황태자이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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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일 왕국이 세상에서 사라진 날, 나와 란은 유모의 희생으로 제국군으로부터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을 피해 우리는 슬럼가를 전전하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성의 아주 작은방이 얼마나 큰 행복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는 나날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날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슬럼가에서 지낸 지 보름은 지났을까? 제국의 쿠흐 백작이라는 자가 나에게 제국으로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권하였다. 조국을 멸망시킨 자들의 나라로 간다는 것이 석연치 않았지만, 란도 함께 데려가 주겠다는 그의 말에,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 후, 쿠흐 백작은 나를 백작가의 양자로 들였고, 나는 쿠흐 백작가의 삼남으로 3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나에게는 아주 좋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3개월 전, 내가 오메가로 발현한 그날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날 나는 갑자기 몸 상태가 나빠져 의원의 진료를 받았고,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 히트 사이클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그렇게 내가 방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갇혀 있는 사이, 쿠흐 백작은 황태자와 나 사이의 결혼을 체결해버렸다.


레일 왕국과는 달리, 카이탄 제국에서 오메가는 꽤나 고귀한 존재라고 한다. 제국의 황제들 중 오메가 비를 맞이하지 않은 이가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하니 말 다했다. 그러나 이번 대의 황태자와 나이대가 맞는 귀족 오메가는 없었고, 그런 때에 마침 내가 오메가로 발현하게 된 것이다. 쿠흐 백작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을 테고, 황실의 입장에서도 황태자비가 필요했던 상황에 때맞춰 적절한 상대가 나타나 주었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제국의 백성들도 그들의 전쟁 영웅인 황태자에게 좋은 정비가 생겼으니, 모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황이었다. 나만 제외하고 말이다.


정략 결혼이 싫다거나 상대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내가 레일 왕국의 마지막 남은 왕족이고, 황태자는 그 레일 왕국을 멸망시킨 장본인이라는 점이다.


그래, 나는 레일 왕국의 마지막 남은 왕족이다.


보잘 것 없는 숨겨진 왕자였을지라도 나는 레일 왕국의 왕족으로서 백성들을 보살필 의무가 있다. 그날로부터 3년이나 지났음에도 매일같이 레일 왕국의 전역에서 제국을 향한 반란 운동의 소식이 들려온다. 그중에는 레일 왕국의 마지막 왕자를 찾는 목소리도 섞여 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그들을 위해서.


황태자비의 신분으로 황성에 들어가게 되면, 왕국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왕국으로 가자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당장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다짐했다. 황성에 들어가 왕국을, 백성들을,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길러 돌아가겠다고.





등장인물 프로필

하임 쿠흐 (오메가), 1332년 3월 25일생.
: 레일 왕국의 숨겨진 왕자. 그의 신원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 다른 왕족들과는 달리 제국군의 눈을 피해 달아날 수 있었다. 도망치는 모습을 제국군에게 들켜 끌려갈 위기에 처했으나, 유모의 희생으로 그녀의 아들인 시종 란과 함께 그들로부터 벗어났다. 그렇게 성에서 빠져나와 슬럼가를 전전하던 중 제국의 쿠흐 백작의 눈에 들어 쿠흐 백작가의 양자로 들어간다. 현재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은 그의 시종 란뿐이다.



안녕하세요! 미숙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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