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화장실 세면대에 서서 손을 씻으니, 바로 옆에서 들려왔던 시끄러운 응원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왔다. 현장 속에 있을 땐 이렇게 시끄러운지 몰랐는데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로만 따지면 전쟁이라도 난 것 같은 소리였다. 저 소란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단 이대로 교실에 들어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솔의 달리기는 빠른 편이라 본의 아니게 체육대회에 출전하는 종목이 꽤 있었다. 나가지 않겠다고 못 박기엔 솔의 승부욕이 가만있지 않았다. 체육대회의 순위가 성적에 포함되는 건 아니었지만, 성적이 아니더라도 솔은, 솔이 속해있는 반은 최고가 되어야 했다.






학교 건물을 나서는데 건물의 뒤편, 인적이 드문 쪽에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인원 체크가 느슨한 체육대회 날이니 땡땡이치는 학생들은 간혹 있기 마련이었다. 평소의 솔이라면 무시하고 지나쳤겠지만, 방금 기침 소리는 익숙한 누군가의 기침 소리처럼 들렸다. 솔은 그 사람을 확인하기 위해 학교 뒤편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역시나, 건물 뒤편 그늘진 곳엔 서지호가 앉아있었다. 다리 위엔 책이 펼쳐져 있었고, 왼손으론 펜을 들고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서지호는 다른 남자아이들과는 다르게 체육활동에 크게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체육대회를 위한 학급 회의에서도 다른 회의에 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더니, 당일이 되어서도 몰래 숨어 공부하고 있었다.








지호가 다가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평소와 달리 머리를 위로 올려묶은 솔의 얼굴이 보였다. 솔은 땡땡이 치지 않고 운동장에 계속 앉아있었는지, 볼이 약간 상기된 상태였다. 공부 외엔 무심한 것 같이 보이는 솔이었지만, 승부욕이 있어서 체육대회에 꽤 열심히 참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뭐 해?"

"공부. 스포츠는 취향이 아니라."

"이런다고 1등 하진 못할 텐데."





저런 도발에 진짜 화를 내면 지는 거란 걸 지호도 잘 알고 있었지만, 지호는 화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2주 전에 끝난 중간고사의 성적표가 어제 배부되었고, 역시나 지호는 2등이었다. 1학년 때부터 변치 않는 그 숫자에 이미 짜증이 쌓여있었고, 전교적으로 만년 2등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마당에 전교 1등에게 저런 말을 들으니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말문이 막혀있는 사이, 솔은 벌써 뒤돌아서 운동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내가 기말고사는 진짜 1등 한다. 마음을 독하게 먹은 지호가 다시 책에 시선을 돌렸다.









체육대회가 끝나고, 하나 둘 씩 교실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체육대회의 마지막 순서인 계주에서 우승한 덕에 흥분한 분위기가 교실에 가득했다. 대회를 제대로 보지 않은 지호조차 우승했다는 말에 묘한 뿌듯함을 느끼다가, 강솔 진짜 잘 뛰더라. 역전승할줄은 몰랐어, 라며 같은 반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입술을 삐죽였다. 낮에 저를 무시했던 솔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 강솔은 운동까지 잘하는 걸까.





"어? 내 지갑!!"





소란스러운 분위기인 와중에, 이질적인 외침이 교실에 울려 퍼졌다. 평소 지호와 사이가 좋지 않던 경민의 목소리였다. 왜? 뭔데? 내 지갑이 안 보여! 경민이 부산스럽게 지갑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흥분이 가득했던 교실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어수선해졌다. 그러게 잘 챙기지. 속으로 중얼거린 지호가 본인의 자리에 앉아 가방을 챙기려는데, 갑작스레 어깨를 붙잡혔다.





"서지호, 너지? 네가 훔쳤지?"





말도 안 되는 억지에 지호가 눈을 찌푸렸지만, 경민은 이미 분노에 휩싸여서 지호를 도둑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너 오늘 내내 안 보였잖아. 마지막에 폐회식 할 때나 겨우 나타났고. 그동안 뭐 했어?"

"내가 왜 네 지갑을 훔쳐?"





지호가 어깨를 붙잡은 경민의 손을 떼어놓으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로 자신을 도둑으로 모는 것이 불쾌했다. 지호는 경민의 지갑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랐다.







"왜긴 왜야, 법무부 기자단 너는 똑 떨어지고 나랑 강솔만 되니까 엄청 기분 나빠했잖아. 좋은 말 할 때 내놔."

"내가 안 훔쳤는데 어떻게 내놔?"






법무부 기자단에 지호만 떨어져 기분이 나빴던 건 사실이지만, 그 분노를 경민이나 강솔에게 돌릴 만큼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다. 설사 지호가 정말 그 일로 화가 났다 하더라도 지갑으로 복수한단 것엔 개연성이 없었다. 하지만 지호가 지갑을 훔쳤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민은 이미 지호를 범인으로 두고 소설을 쓰고 있었다.




반장의 말에 의하면, 오전에는 교실 문을 잠그는 것을 깜빡하였고 점심을 먹고 난 이후에 교실 문을 잠가놨었다. 그래서 경민은 오전 내내 보이지 않았던 지호를 더욱 의심했다. 오전에 자리를 비웠던 사람들 중, 알리바이 입증이 유일하게 안 되는 인물이 지호였다.







"교실 문 잠긴 줄 알고 들어오지도 않았어. 학교 뒤뜰에서 공부하고 있었다고 몇 번을 말해?"

"아무도 본 사람 없잖아. 다들 너 못 봤다고만 말하는데 거짓말인지 어떻게 알아?"






지호는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유일하게 지호의 알리바이를 입증해 줄 수 있는 솔은 어디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호는 솔이 보고 싶었다.






"어? 강솔 왔다."





경민과 지호의 신경전으로 어수선한 교실에, 강솔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세수를 하기라도 했는지 얼굴 주변의 머리카락엔 물기가 묻어있었다. 유독 말간 얼굴로 교실로 들어오는 솔의 그 얼굴이, 지호는 그 어느때보다 반가웠다. 심상치 않은 교실의 분위기와 웅성대는 친구들의 목소리에도 유지되는 솔의 포커페이스가, 평소엔 재수없다고 생각했던 그 포커페이스조차 반가웠다. 






"강솔, 도와줘."




지호가 솔의 앞으로 다가왔다. 솔은 지호의 진지한 표정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서지호가 솔에게 도움을 요청할 날이 올 줄이야.






"너는 날 증명해 줄 수 있잖아."





내가? 너의 뭐를? 지호의 그 진지한 도움을 바라는 눈빛이 낯설어 솔이 지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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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4회차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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