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오브 히어로즈 하드 스토리 시점으로, 사르디나까지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날조하고 창작한 설정이 다소 포함됩니다.

※로잔나와 헬가의 관계성은 읽어주시는 분의 임의대로 해석해주셔도 무방합니다.




로잔나 데 메디치는 악몽따위 꾸지 않는다. 그가 꾸는 꿈에는 언제나 죽은 사람이 나왔다. 망자는 말이 없고 그렇기에 그 역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누군가는 이름을 잊었고 누군가는 아직 기억하고 있으나 어쩌다가 죽었는지를 몰랐다. 이백 년이 넘는 시간을 살아온 만큼 그의 생을 스치고 간 사람은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그들을 전부 기억하기에는, 불사를 감당한다 하여도 로잔나 데 메디치는 아직 인간에 불과했다. 애석하게도, 혹은 다행이게도 그는 매 순간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실감한다. 인어의 심장을 삼키고 죽음을 등진 주제에. 미안하구나. 꿈이 끝나갈 무렵이 되면 로잔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끝내 그렇게 말하고야 마는 것이다. 나는 너희를 전부 기억하지 못해.

그건 그가 절대로, 과거에 머무를 수는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럴 수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로잔나가 걸어온 길은 그 자체로 증명이고 상징이었다. 메디치 가문의 외동딸이었기에 후계가 될 수 없었던 로잔나 데 메디치는 바다를 손에 쥐고 당당히 가문을 이었으며, 차근차근 모든 차별과 편견을 짓밟으며 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선택한 길은 늘 옳아야했기에 옳았다. 그는 끝끝내 살아남았고, 승리를 거머쥐었으며, 적의 머리뼈를 밟고 가장 높은 곳에 다다랐다. 로잔나라는 돛을 단 사르디나라는 배는 순조롭게 항해했으므로, 이제는 그 누구도 그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았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 로잔나는 사르디나의 번영을 대가로 절대적인 권력을 쥐었다. 차츰 부피를 늘린 그의 권력은 이제 사르디나의 곳곳에 뿌리를 내려, 없어서는 안 되는 수준이었다. 사르디나 내부에서는 그를 칭송했으나 그가 지닌 권력은 양날의 검이었다. 사르디나를 영원히 번영시킬 종신 통령, 혹은 견제할 이 없는 권력을 구축한 독재자. 어느 쪽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는 그 자체로 권력이었으며 필요악이었다.

그러나 다른 누구도 아닌 로잔나는, 그것이 아주 오래된 맹약이라는 것을 안다. 다른 날은 모두 잊어도 그 날만큼은 잊을 수 없겠지. 꿈의 끝은 언제나 이 장면이다.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뒤집혀, 바다에 삼켜진 날. 기꺼이 폭풍우를 집어삼킨 날. 아버지에게 나는 왜 후계자가 될 수 없냐며 대들었다가 뺨을 맞고 뛰쳐나와, 베로니카를 찾았던 밤…….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불합리해.

 

차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베로니카는 손을 뻗어 로잔나의 뺨을 감쌌다. 베로니카는 인어 중에서도 유독 인간에게 관심이 많았고 그 중에서도 로잔나를 귀하게 여겼다. 언젠가 운명처럼 베로니카를 만난 이후, 로잔나는 점차 성장하고 많은 것을 깨우쳤으나 베로니카는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듯 변하지 않았다. 로잔나는 그 불변을 사랑했다.

언젠가 이유를 묻자 아주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웃으면서, ‘인어는 아주 오래 사니까.’라는 답을 돌려주었더랬다. 인어의 생에 비하면 인간의 생은 단지 찰나에 불과하다고…… 그러니 인간에게 정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그러나 베로니카는 그의 인간을 마음 깊이 사랑했다. 로잔나 역시 자신의 인어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달빛을 닮은 머리카락에 바다를 옮긴 눈동자를 한 나의 인어, 베로니카.

로잔나 데 메디치는 운명을 믿지 않았으나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베로니카를 만난 것이야말로 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이지만 인어는 불멸의 존재와 같으니, 적어도 자신의 생에 있어서 평생을 그와 함께 할 수 있으리라고…… 그러나 생은 언제나 생각한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내가 이 가문의 유일한 혈육인데도, 나는 메디치 가문을 잇지도, 피렌체의 영주가 되지도 못해…… 단지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나보다 못한 머저리를 남편으로 삼으라더군. 그 말을 한 작자의 머리를 쏴버려야했는데.

로잔나, 나의 친구. 내가 너에게 무얼 해줄 수 있을까?

나는 네게 무언가를 바란 적이 없는걸.

너도 알다시피 내게는 시간이 얼마 없어….

 

베로니카는 그의 손에 얼굴을 묻고 작게 웃었으나, 로잔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즈음의 베로니카는 늘 파리한 안색이었으므로 영민한 로잔나는 익히 직감하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예상하는 것과 그것이 사실로 판명되는 것은 실로 다른 문제라, 당사자에게 그 말을 들으니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 했다. 길지 않은 생이었으나 정을 준 것은 베로니카가 전부였다. 왜 그런 말을 해? 속삭이는 목소리에 베로니카는 로잔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로잔나.

 

베로니카는 다시 한 번 그의 이름을 불렀다. 파도 소리에 실려 흔들리는 목소리는 늘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숨을 죽이고 파도마저 잠잠했다.

 

기억하니? 인간의 생은 단지 찰나에 가까워, 인어는 그에 비하면 영생을 사는 것 같다고…… 내가 말했었지.

…기억해. 그래서 내가 인간도 영생을 살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잖아.

너는 내가 아는 인간 중에 제일 영리해. 그래, 그래서 내가 인어의 심장을 먹으면 된다고 말했고…….

 

그때 어떤 생각을 했더라…… 다만 그때의 로잔나는 분노에 눈이 멀었고 자신의 인어를 너무나도 사랑했다. 베로니카가 그의 인간을 사랑했던 것처럼. 대답하지 못하는 로잔나를 두고, 베로니카는 손을 뻗어 그의 것과는 정반대인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었다. 이미 오랫동안 준비한 듯 목소리는 침착했고 거리낌이 없었다.

 

그럼 바다가 너의 것이 될 거야. 적어도 바다를 알고 두려워 할 줄 아는 이라면 너를 업신 여기지 못할 테지… 오래 산 인어라면 더더욱 그 힘이 강할 테고, 어쩌면 인간은 가질 수 없는 불멸을 살게 될지도 몰라.

…베로니카.

이제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야. 내 심장을 먹을 자격이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건 너밖에 없을 거야…….

 

베로니카는 자신이 아주 오래 살았다고, 단지 찰나에 가까운 순간이라도 저를 만나는 것이 무척이나 기뻤다고 속삭였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목소리여도 로잔나는 그것이 온전한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다. 차마 그럴 수 없다고 말하지 못하는 건 오로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이기심이다. 베로니카는 그런 인간의 이기심을 깊이 사랑했다.

 

하지만 나는 불사를 얻고 불행해지는 인간을 너무나 많이 보았어.

…….

그러니 내게 말해주렴, 로잔나. 너는 그러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 불행하지 않겠다고….

 

눈가에 닿았던 싸늘한 손길.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떨어지던 소리. 잔잔한 바다 위에는 흰 달이 떠 있었고, 지척은 잠잠하였으나 어렴풋한 파도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생에 있어 단 하나 밖에 없는 인어는, 그 순간만큼은 오로지 바다였다.

 

나는 그러지 않을 거야.

 

망설임 없이 잇따르는 목소리는 이후의 생에 대한 선언이었다. 로잔나는 그 모든 것을 뇌리에 각인시키듯 기억했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베로니카.

이 모든 차별이 지긋지긋해.

차라리 누구보다도 오래 살아서, 다 죽고 난 다음에도 나 혼자 살아남아, 모든 불행을 삼켜버리겠어. 그렇게 살고 말 거야. 너와 함께.

 

베로니카는 로잔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거면 충분해, 나의 로잔나.

 

 

연달아 세 개의 회의를 몰아치듯 끝내고 집무실에 돌아오자 뒤늦게 피로가 몰려왔다. 잠시 눈을 감고 쉰다는 것을 깜빡 잠에 들었는지, 뻐근한 몸과 함께 눈을 뜨자 주변이 온통 어둠이었다. 통령의 집무실에 허락도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으므로 그를 깨울 사람 역시 없다고 보아도 좋았다. 방해 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으나 이런 순간 만큼은 조금은 낭패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평소와 같은 꿈을 몰아내고 제 눈가를 눌렀다. 테이블 위의 등잔불을 켜자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로잔나는 놀란 기색도 없이 입을 열었다.

 

“들어오지 왜 그러고 있어?”

“외부인이 어찌 관저 안에 들어가우? 통령도 참.”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가벼운 목소리는 무게 없이 종적을 감추었으나 헬가는 더 이상 기척을 숨기지 않았다. 창가에 앉아 반은 바깥을 향하고, 반은 안을 향한 것이 영락없는 침입자였다. 마뜩찮은 얼굴로 혀를 차자 그 얼굴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낮은 웃음 소리가 이어졌다.

 

“그 꼬맹이가 죽을 상을 하고 찾아오기에 잠시 와봤는데 멀쩡한가보네.”

“발터 그 놈은 겁이 너무 많아. 하나 같이 멍청한 소리들만 하기에 역정을 냈기로서니,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치는 꼴이란…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건지.”

 

맹랑하다 못해 정신을 놓아버린 줄 알았던 아발론의 군주에게 헬가 슈미트와 발터 베른하르트를 보내기로 한 것이 이틀 전의 일이다. 당연히 내부의 반발과 염려가 쏟아졌으나 로잔나는 그들의 자의적 선택이며 타국에 대한 감시라는 선언으로 그 모든 불만을 일축했다. 그것이 통령의 판단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간 크게 반발할 이도 많지 않았다(정확히는, 그럴 만한 이들은 대부분 죽었다). 애초 이런 것이 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고 썩 납득하지 못할 판단도 아니었으므로 불만은 차츰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성적인 판단과 별개로 로잔나의 불쾌함은 여전히 남아있던 모양이다. 아랫것들을 들볶으니 발터는 눈치껏 헬가에게 말을 남겼고, 용의 흔적을 좇는다며 도통 자리에 있질 못하는 헬가가 몸소 관저에까지 찾아왔다. 못마땅한 듯 투덜거리긴 했으나 썩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기약한 날짜가 한 달 뒤였던가…… 로잔나는 몸을 뒤로 젖히고 눈을 감았다. 바람이 거센 건지 파도소리가 드높았다.

 

“헬가 슈미트.”

“듣고 있수다.”

“나는 너를 보내는 게 아니야. 그 미련한 것에게 잠시 빌려주는 것뿐이지. 잊지 마라. 너네는 내 것이고, 언젠가는 내 옆에 돌아와야 한다는 걸. 죽더라도 내 옆에서 죽으라는 소리다.”

“거참, 험악한 소리를.”

“불만이니?”

 

헬가는 소리 없이 웃으며 어느 순간 몸을 돌려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로잔나를 마주 보았다. 여전히 비스듬한 자세로,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채 헬가는 습관적으로 기척을 죽인다. 사냥꾼은 늘 소리가 없어야한다.

 

“통령, 전쟁이 끝날 때를 기억해?”

“잊을 리가 있나.”

“그때 용의 피를 뒤집어 쓰고 온 나를 받아준 건 당신이 유일했지.”

 

느닷없는 화제에도 로잔나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렸다. 헬가는 눈을 가느스름 뜨고 말을 이었다.

 

“그때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하나?”

“이 세상에 인어의 심장을 먹은 것보다 더 지독한 짓이 딱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용을 죽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멍청한 것아.”

“흠, 멍청한 사람이 둘이구만.”

“나나 되니까 너를 받아주는 거야.”

 

그 말은 반쯤 농담이었으나 온전히 진실이기도 했다. 용이 타의에 의해 죽었을 시, 용의 마력은 그 자체로 저주가 되어 용을 죽인 자를 집어삼킨다. 용을 죽이고도 버젓이 살 수 있는 건 용 밖에 없다. 그것이야말로 용이 한때 절대자로 군림할 수 있는 이유였고,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살 수 있는 이유였다. 그리고 헬가 슈미트는 수많은 용의 피를 뒤집어썼다. 어색하지 않은 침묵 속에서 그는 또 다시 과거에 잠긴다.

고고하고 드높아 미물에 불과한 인간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던 용이, 그들 중 하나가 인간과 최초의 계약을 맺었을 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 놀라지 않은 것이 있기나 했을까. 그러므로 헬가 슈미트는 그것을 감히 운명이라 불렀다. 그것이 운명이 아니라면 무엇이 운명이겠느냐고 자신했던 것 같기도 하다. 서로의 영혼이 공명하고 모든 순간을 함께 할 나의 동반자, 나의 용, 크메르사트. 인간이 어찌 용을 이해할 수 있고 용이 어찌 인간을 이해하겠냐마는, 그럼에도 크메르사트와 헬가 슈미트는 서로의 존재를 필연이라 여겼다……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부술 수 없으리라 자신했으니, 돌이켜 생각하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자만이었다. 그는 수많은 용의 피를 묻힌 창을 매만지며 생각한다. 비극의 시작은 그의 용조차도 그 오만함을 믿었으며, 하나뿐인 제 계약자를 지극히도 사랑했다는 것이다.

제 영혼을 나눈 존재의 숨이 꺼져가는데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러나 죽음조차도 그를 거부할 때 인간은 비로소 삶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헬가는 검은 피를 뒤집어 쓴 채 사지가 갈갈이 찢기는 듯한 고통에도 슬픔을 감내하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맹약의 증거인 창이, 그 창에 남은 용의 사념이 울부짖었으므로, 삶이 뒤집히고 유일한 목적만이 그를 숨 쉬게 했다. 가당찮은 자비를 베풀며 하늘을 유영하는 용들에게 창을 겨누며 한 말은 그 자체로 헬가 슈미트를 옭아맸다. 그는 피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나는 기필코 너희의 날개를 찢어발기고, 이 창으로 심장을 꿰뚫어 나의 용을 추모할 것이다.

너희는 내 용이 그러했듯 죽어가면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것이고, 누가 너희를 죽였는지 똑똑히 기억하게 되리라.

 

의지할 것은 용의 사념이 깃든 제 창 밖에 없었으나 맹렬히 타오르는 복수심이 그를 이끌었다. 저주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생이야말로 저주일 것이다. 시간이 흘러 본래의 모습을 잃은 맹목적인 마음만을 품고, 무너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며 잊힌 채 살아가는 것. 세간에서는 마도대전의 영웅인 헬가 슈미트는 차츰 사라지고 암암리에 용을 사냥하는 자가 있다는 소문만이 돌았다. 헬가는 제 입을 가리고 다시 한 번 웃었다. 이런 기구한 운명을 가진 이를 받아줄 사람이 그리 많겠는가. 죽어가는 인어의 심장을 씹어삼키고 불사를 자처한 사르디나의 종신 통령이 아니고서야.

 

“그래, 내 돌아올 곳은 여기밖에 없지. 금방 다녀오겠수.”

“그래.”

“뭐, 죽더라도 시체는 돌아올테니….”

“뚫린 입이라고 말하면 다인 줄 아니? 험악한 소리는 네가 더해.”

 

농담 섞인 말에 로잔나는 진심 어린 짜증을 돌려주며 몸을 팩 돌렸다. 헬가는 소리 내어 웃은 뒤 비로소 관저 안으로 몸을 들였다. 로잔나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보고서를 들춰보았다. 테이블에 걸터앉은 다음에도 마찬가지다. 익숙한 정적, 침묵, 그리고 어둠. 헬가는 언제나 과거에 살았고 로잔나는 과거에 머무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제 손에 쥔 것을 포기하지 않도록, 어떤 것도 부숴지지 않고 손에 쥘 수 있게 자기가 가진 것을 가두고 공간을 넓혀간다.

비가 쏟아지던 밤, 용의 피보다도 검디 검은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번뜩이는 통령의 눈동자를 본 순간 헬가 슈미트는 그가 영원히 이곳에 복속되리라는 걸 알았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저주일 것이다. 폭풍 속에서 좌초된 배는 영원히 바다 속을 떠돈다.

 

“나는 욕심이 많아. 그걸 타협하거나 포기하는 것따위 배운 적도 없어.”

 

그러나 로잔나 데 메디치가 그렇듯 헬가 슈미트 역시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기꺼이 폭풍을 맞이했다. 헬가 슈미트는 그 안에서만 숨을 쉴 수 있다. 그리고 헬가를 위해 로잔나 데 메디치는 더없이 완벽한 어둠을 만들어줄 것이다. 그것이 그가 과거에 머무를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바다를 움켜쥐고 어둠을 발 밑에 둔 자는, 언제나 그랬듯 용의 피를 뒤집어 쓴 사냥꾼 위에 닉스의 장막을 펼치며 말했다.

 

“그러니 완벽하게,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내 옆에 돌아와. 알았니?”

“흐, 이거야 원…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겠군.”

 

헬가 슈미트는 기꺼이 로잔나의 머리카락 끝에 입을 맞추었다. 그 이상의 대답은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았다.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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