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과 같은 퇴근길이었다. 해는 서산 너머로 고개를 기 울이고 있었고, 시간이 시간인지라 조금은 서늘한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피곤에 절은 몸을 이끌고 지하철에서 나왔다. 어제도, 오늘도, 심지어 내일도 출구를 찾아 개찰구를 빠져나 오고, 이어 301번 버스로 12분, 도보로 약 7분을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다니는 것을 반복할 것이다. 반복적인 루틴 을 통해 집으로 오던 중, 나는 골목길에서 한 소년과 마주쳤다.


 소년은 7살에서 9살 정도로 보였다. 키는 130을 웃도는 듯했 고, 덩치는 키에 비해 많이 왜소한 편이었다. 밤하늘을 연상 시키는 칠흑빛의 머리카락과, 해안에 부딪히는 파도를 연상시 키는 백옥같은 흰 피부를 가진 그 소년은 전봇대 밑에서 가 만히, 그저 가만히 쪼그려 앉아 그의 작고 하이얀 주먹으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겨우 막아내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동정심인지 연민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냥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천천히 그에게 다 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나아가 울고 있는 아이의 앞에 멈 춰섰다.


 땅거미가 내려앉아 잠시 온 도시가 어둑해졌다. 급격히 변한 환경에 적응하려 눈을 몇 번 끔벅였다. 이내 눈이 어둠에 적 응하기라도 한 듯 희미하게 보이던 형상이 뚜렷하게 들어오 자, 나는 아이를 다시금 내려다보았다. 그는 흐느껴 울다가 가끔 숨을 들이쉬는 꺽꺽 소리를 내었고, 이내 서럽도록 눈물 을 흘리다가도 목이 매였는지 켁켁거리는 기침 소리를 내었다. 나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저 눈물을 흘릴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으니 어째서 인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스스로 자신 의 것이 아닌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 것이 아닌 분노가 원동력이 되기라도 한 듯 나는 내가 들고 있던 서류 가방을 높게 치켜 올렸다. 이어 단숨에 그의 머리를 내리쳤 다. 퍽, 하는 소리가 잔잔하게 골목을 올렸다. 아이는 나에게 맞고서도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냥 쭈그려 앉아 울고만 있을 뿐이었다. 순간, 그에게서 소름돋게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뱀이 나무를 타고 기어 올라오듯 내 몸을 감았다. 그 뱀 같은 기운은 나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분노로 바뀌어 표출되었다.


 나는 그를 걷어 차 눕혔다. 그가 앉아있던 자리에 놓여있는 벽돌을 발견한 것은 아이가 쓰러진 다음 순간이었다. 그것을 주워 있는 힘껏 던졌다. 이는 다시 일어나려 하는 그의 어깨에 상처를 주었고, 그를 다시 쓰러지게 만들었다. 나는 마치 미치광이처럼 그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내 앞에 쓰러져있는 그것을 주먹으로, 발길질로 내리쳤다. 타격음만이 내 귀에 들리었다. 그렇게 한참을, 나는 아이에게 내가 느끼는 분노를 표출하는 것 외에는 어디에도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 아이의 덩치는 나보다 더 커졌다. 누워있 지만 키는 2m를 웃돌았으며, 왜소했던 골격은 두 팔로 감싸 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늘어나 있었다. 기분 탓인가? 아니, 분명 처음 보았을 때는 작은 아이의 체구였다. 하지만 지금은 몸이 나보다 커져 주먹이 나의 머리보다 큰 것 같았다. 그 손 에 머리를 붙잡힌다면 아이 아니, 그 생명체에 의해 두부가 완전히 으깨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는 뒤로 물러났다. 덩치가 커진 아이는 전봇대 옆에 쓰러져 있었다. 멈출 줄 모르던 울음소리는 어느새 멈추었다. 뱀같은 차가운 기운이 다시 내 온몸을 휘감았다. 어느샌가 분노가 가 시고 막연한 두려움만이 내 뇌리를 가득 채웠다. 심장의 쿵쾅 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내 귀에까지 들리는 작은 떨림이 마치 군악대의 행진을 연상시킬 정도로 크게 울리었다. 쿵쾅거리는 소리와는 다른 박자로 다리는 하염없이 떨리었고, 자리를 벗 어난다 하여도 도망칠 수 있을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잔뜩 겁을 먹고서, 다시 크기를 키운 생명체 쪽을 바라봄과 동시에 그가 미세하게 몸을 움직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막대한 공포 가 느껴져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하는 소리가 들리었다. 둔부에 충격이 가해졌다.


 나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작게, 아주 작게 입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낮은 소리로 몇 번을 중얼거렸다. 처 음에는 듣지 못했지만, 같은 문구가 반복되어 점차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옛날에는 사랑을 받았는데, 이제는 모두가 나를 싫어해.”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하는 말이 의미하는 바를, 나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다. 이유를 물어보기도 전에 반복 이 멈추었고, 나를 쳐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너도 내가 밉지?”

 어찌 대답하여야 할까, 순간 몸이 얼어붙기라도 한 듯한 느 낌이 들었다. 소름이 등을 타고 올랐다. 무겁게 내려앉은 공 기가 나의 목구멍을 막아 대답은커녕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는 누운 상태로 내게 말했다.


 “ 대답해. ”

 낮은 목소리였으나 나의 고막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증오가 가득한 음성에 공기는 더욱 무겁게 내려앉았으며,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지만 말이 나오지 않고, 또 무어라 대답 을 하여야 할지에 대한 답 또한 생각해내지 못하였기에 그저 잠자코, 그의 다음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외에는 없었다.


 그의 몸체가 꿈틀거렸다.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한 것일까, 불안한 마음에 앉은 상태로 바닥을 발로 밀어 조금씩 뒤로 이동하였다. 내가 던진 벽돌에 맞은 어깨를 손으로 몇 번 쓸 더니 이내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거대한 몸을 힘겹게 일으 켜 세운 그는 느릿하게 나에게로 다가왔다. 등에 닿은 담장이 내게 도망갈 수 없다고 말하듯 뒤로 가던 나의 진로를 방해 했다. 그의 걸음은 조용했다. 바람과 같이, 어떠한 소리도 내 지 않고 나에게로 다가왔다. 앉아있는 내 앞에 허리를 숙이고 서, 검은 빛의 눈동자를 보이며 내게 속삭였다.


 “너도 똑같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는 주먹을 들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 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었다. 저 거대한 주먹이 내 머리를 가 격하는 것은 한순간이겠지. 그 찰나 이후에 내 두부는 완전히 으깨질 것이다. 라고 생각한 순간 눈꺼풀을 뚫고 들어올 정도 로 밝은 빛이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눈을 떴을 때는 주먹이 사라져있었다. 전봇대의 불이 들어와 주변을 비추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빛에 적응하려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피었 다. 나를 위협하던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짧지만은 않 았던 그 생명체와의 조우가 한순간의 꿈이었다고, 주위를 밝 히던 전봇대는 그리 말하듯 빛을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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