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둘 밖에 안나오는 원테이크





원래 사랑에 빠지면 답이 없다. 나도 모르게 미친 짓을 하기도 하고 그러는 게 사랑이라고 누가 그랬다. (는 내 엄마) 그리고 나는 대표적인 특징으로 영화가 '노트북'이라고 생각한다. 노트북에서 남자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사거리 횡단 보도에 대 자로 눕는 행동. 난 그걸 이해 못했다. 같이 본 친구들은 입 틀어 막고 보던데 나는 꽤 심각하게 봤던 기억이 난다. 왜 저런 미친 짓을 하지. 


"헐."


그리고 오늘 그 미친 짓을 하고야 말았다. 사거리 횡단 보도에 눕지는 않았지만 그 또로롱 눈물 흘리는 김정우 보자마자 내가 알던 애가 맞다는 안도감과 함께 얘 눈물을 다른 사람이 봐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그만.


"..."


김정우가 입고 있던 후드티 뒤에 달린 모자를 냅다 씌웠다. 조금 넉넉한 핏 덕분인지 아님 얘가 워낙 얼굴이 작아서 인지 정확히 눈만 딱 가렸다. 호에에엑 입구멍 콧구멍 개방하는 사람들과 직원들 사이에서 김정우와 나는 웹드라마 하나 찍은 것 같았다. 뒤늦게 쏟아지는 시선에 내가 먼저 김정우 옷 소매를 잡고 가게를 나왔지만 둘이 남으니 이건 이거대로 미칠 노릇이었다. 더 쪽팔린 건 제법 멋지게 걔 끌고 가는 길에 속이 너무 울렁거려서 옆 골목길로 들어가 하수구 앞에서 헛구역질 했다. 하수구 특유의 썩은 내 덕분에 획까닥 도는 줄 알았다. 진짜 오진상 미친놈. 내가 비틀거리면서 정신을 못 차리니 김정우는 옆에서 안절부절 날 잡을지 말지 허공에서 손만 허둥 대더니 이내 잠깐 기다리라는 말 과 함께 골목을 빠져나가 옆 지에스24에서 숙취 해소 음료와 생수를 바리바리 사 왔다. 취한 건 나 하난데 숙취 해소제가 10개나 있었다. 숙취 해소제가 가득 담긴 봉지를 내게 내밀면서 김정우는 절대 나를 똑바로 보지 않았다. 코는 물론이거니와 특히 눈가가 무척이나 빨갰다. 보나 마나 지 눈물 감추려고 박박 닦은 게 틀림 없다. 이미 다 봤는데ㅋ


"...여기."

"...."

"...."

"미안."


숙취 해소 두 개를 원샷하고 생수 500mL 반 정도를 단숨에 넘기니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왔다. 이리저리 흔들려 넘실거리는 생수병을 만지작만지작 대며 중얼거렸다. 여자친구도 있는 애한테 뭐한 거냐. 골목길 어귀 벽에 쪼그려 앉아서는 그리 사과하니 우뚝 솟은 나무 같이 서 있던 김정우가 고개를 내 반대편으로 돌린 채 말하더라.


"..뭐가?"


목소리가 이상한 게 또 우는 것 같았다. 자기 우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내게 얼굴을 보이지 않는 모습이 너무 존나 매우 몹시. 귀여웠다. 


"내가 너무 많이 마셔서..."


밖에는 사람들과 불빛들로 시끌벅적한데 김정우랑 나만 이 어둡고 조용한 골목 어귀에 있으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얘랑 나를 힐끔힐끔 보는 사람들 눈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계속 김정우 뒤통수만 올려다봤다. 귀가 새빨갰다. 그리고 김정우는 침 한번 크게 삼키더니.


"..그게, 다야?"


내게 기회를 주는 거다. 내 답을 기다리면서 슬금슬금 고개를 내 쪽으로 트는 게 보였다. 김정우는 내가 백번의 기회를 차면 백한 번 다시 기회를 줄 인간이다. 미안했다고 내 진심이 아니었다고 정말 후회 했다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앞의 김정우가 꿈 같아서... 감상하느라. 얘는 변한 게 하나 없었다. 김정우는 미안하다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는 게 또 서러웠는지 상처 받은 표정을 하고는 내 눈을 마주한 채 눈물을 한 방울 툭 떨어뜨렸다. 얘 진짜 충무로 보내야 하는거 아닌가. 


"진짜 나한테, 할 말... 없어?"


거봐 김정우는 백하고도 한 번의 기회를 더 준다니까. 다 컸음에도 그때 엉엉 울던 앳된 얼굴이 남아있었다. 그 얼굴을 보며 말했다. 그때 열다섯 너에게, 또 현재 스무살의 너에게.


"...미안해."

"...."

"내가 잘못했어."

"...."

"그렇게 말해서, 너한테 상처 줘서 미안해. 진심 아니었어. 나 정말,"


정말 많이 후회했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별안간 김정우가 뿌앵 울음을 터뜨렸다. 나와 같이 쪼그려 앉아서는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흐엉엉 하고 오열을 하는 게 아닌가. 덕분에 김정우와 나를 힐끔거리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갔지만 김정우는 신경 안 쓰는지 못 쓰는지 펑펑 울었다. 뭔가 익숙하면서도 오랜만인 이 상황에 김정우한테 한 걸음 다가가서는 눈물이라도 닦아줄 심산으로 입은 긴 팔 소매를 쭉 끌어 다가갔다.


"...여주야."


여전한 코맹맹이 소리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낮은 목소리로 김정우는 내 이름을 웅얼거렸다. 응. 닦아주려던 손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김정우는 얼굴을 보이지 않고 그대로 무릎에 제 눈을 꾹 누른 채 말해왔다.


"끅, 잘... 지냈어?"


나는 그 5년 동안 김정우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 얘가 내뱉은 말로 어렴풋 확인 할 수 있는 건 김정우는 5년 동안 나 없이 잘 먹고 잘살지 못했다는 것. 나를 잊지 않았다는 것. 저가 말하고도 부끄러운지 아니면 아직도 운걸 보이기 싫어서 그런 건지 김정우는 도통 얼굴을 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얼굴 보여주면 말해줄게."

"...못생겼어."


얘가 대형 폭탄 망언을 하네? 못생겼다면서 고개를 젓는 김정우를 보며 아까 술자리에서 지한테만 말 거는 여자애들은 뭐냐고 묻고 싶었다. 네가 못생기면 이 세상에 잘생긴 놈은 없어. 예전 같았으면 좋은 말로 할 때 고개 들어. 라면서 휴지로 눈물 박박 닦고 코나 풀어줬겠지만 지금은 그때 걔가 아니니까.


"야, 김정우."

"...."

"정우야."


어렸을 때 김정우는 내가 제 이름을 부르는 걸 좋아했다. 맨날 김정우 김정우 성만 붙이다가 엄마 아빠나 얘 부모님 앞에서는 정우야- 라면서 살뜰히 챙겼다. 어린 아이가 영악하다고 생각할 순 있는데 그래야 돈이 들어왔다. 퇴계 이황 선생님만 보다가 세종 대왕님 본 심정을 너네가 알아? 물론 그 돈은 대부분 내 돼지 저금통에 착착 적립 됐지만 드문드문 김정우와 놀곤 했다. 몰래 매운 맛 5단계 떡볶이를 시키고 우는 김정우를 아이스크림으로 달래고 같이 오락실 가서 일부러 져주고. 내가 지 이름을 부르면 내가 저랑 놀아주는 줄 알고.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에 낯선 건 나도 마찬가지다. 약간 오글거리는 것 같기도 한데. 김정우가 지 이름이 들리자 움찔 거리는게 보여서 오글거리는 거 참고 한 번 더 불렀다.


"..정우야."

"...웅..."


어느새 양쪽 귀는 금방이라도 팡 하고 터질 듯 붉게 물들었다. 이런 애가 여자친구가 있다고. 개쓰레기 아니면 거짓말쟁이 둘 중 하나일 텐데 나는 당연히 김정우를 후자로 확신했다. 왜 여자친구가 있다는 거짓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김정우는 자기 이름을 불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다소 발칙한(?) 바디랭귀지를 펼쳤다. 


"너. 여자친구 있잖아."

"...."

"우리 이러면 안 돼. 내가 네 이름 부르는 것도 안 되고 이렇게 얘기 하는 것도 안 돼."


움찔거리면서 고개를 들랑 말랑 하는 게 보이니까 더 자극하고 싶어졌다. 너랑 나는 이렇게 얘기도 못해. 홍길동이야, 이름도 못 불러. 우린 여기서 끝이야. 오버 조금 더해서 단호하게 말했다. 충격을 받은 건지 아니면 받아칠 말을 생각 하는지 아무 말 없던 김정우를 슬쩍 보고 굽혔던 무릎을 폈다. 이제 곧 클라이맥스다. 온다... 온다... 온다...


"거짓말이야..!!"


한 발 나아가지도 못하고 막혔다. 제법 어깨가 넓은 김정우 덕에 골목 어귀로 들어오던 거리의 불빛들 또한 막혔다. 우두커니 앞을 막은 김정우 얼굴을 올려다봤다. 얘는 또 뭐가 이렇게 서러울까. 빨갛지 않은 곳이 없었다. 비빈 눈가 하며, 새빨개진 코 끝, 붉게 익은 볼 하며 홍익인간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김정우의 얼굴은 새빨갰다. 그리고 변한 것 하나 없이 그 올망한 눈으로 내게 진실을 고하기 시작했다.


"뭐가?"

"...나 여자친구 없어!"

"아 그래?"

"응...! 그러니까 우리 이름도 부르고 이렇게 얘기 해도 되는 거지..."


그러데이션으로 점점 작아지는 소리에 가까스로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여기서 웃으면 끝이다. 그동안 왜 내 연락을 피했는지 캐물어야한다. 괘씸해. 내가 먼저 다가갔는데 어떻게 그렇게 밀어내? 남몰래 허벅지 안쪽 살을 찝었다.


"내 연락 피했잖아."

"그건..."


팔짱을 끼고 핵심을 찌르니 김정우의 입술이 우물쭈물. 열렸다 닫혔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끙. 조용한 골목에 김정우가 끙끙 거리는 소리만 울렸다. 이걸 말해야 하나 말해야 하나. 우물쭈물 거리는 김정우 모습에 손을 저었다. 됐어. 말 하기 싫음 말하지 마. 괜히 또 맘과는 다르게 날을 세워봤다. 


"이게 밀당이래서..."

"뭐?"


김정우는 내 모습에 또 다급하게 내 옷 소매를 꾹 잡고 말했다. 밀당? 아니 밀당? 누가 밀당을 5년 동안 해? 뭐 이런.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으니 김정우가 먼저 술술 불어주었다. 아니이... 친구가 전화 오면 받지 말라고... 다섯 번만 받지 말라고... 그래서... 그러면... 뒷말은 하지 않은 채 소매를 두 손으로 꼬옥 잡은 채 바들바들 떨리는데 그걸 보니 화가 났다가도 금세 풀렸다. 그래 5년 동안 밀었다 치자.


"그럼 언제 당기려고 했는데. 나한테 연락 아예 안 하려고 했어?"

"하려고 했는데... 또 너한테 징징 거리고 울까 봐..."


김정우가 5년 동안 바보 같이 밀기만 하다가 나를 놓친 건 어떻게 보면 내가 한 말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또 미안해져서 나 또한 김정우 반응을 자세히 살폈다. 

아니 근데 내가 김정우한테 다섯번 밖에 전화를 안 했단 말이야? 문득 의구심이 들어 물었다. 나 너한테 전화 다섯번 밖에 안 했어? 그러니 김정우는 고개를 더 숙이고 입술은 더 삐죽 내민 채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전화는 3월 26일에 했고 두 번째는 4월 2일에... 세 번째는 4월 20일, 네 번째는,"

"거기까지."


5년이나 지났는데 그걸 하나하나 기억한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손바닥을 보이며 그만하라고 하자 김정우는 끙끙 거리며 시동을 걸어왔다. 여주야. 옷 소매를 잡은 손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오른손으로 내 오른 옷 소매를 동아줄 마냥 잡고 있는 게 안쓰러워 손을 잡아주려했는데.


"나 또 너 앞에서 울어버렸어."

"...."

"난 왜 맨날 너 앞에서만 울까..."


울음을 삼키는 소리에 저절로 진지해졌다. 내가 한 말이 얘한테는 엄청난 상처였다는 걸 모르지 않았지만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그 말이 마음속에 남아 짙은 상처로 자리 잡았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내 옷 소매를 잡으며 내 앞에서만 운다며 자책하는 김정우의 손의 힘이 점점 풀렸다. 여기서 떨어지면 얘는 나한테 오지 않을 거란 걸. 5년 동안 내 연락(6번째)만 기다렸다는 건데 이걸 지고지순하다고 해야 하는지 바보 같다고 해야 하는지. 밀당도 못하고. 


"나한테 징징거려도 돼."

"...."

"내 앞에서는 맘껏 울어도 돼."

"...."

"너는 그래도 돼."


떨어져 나가기 직전 내가 먼저 김정우 손가락 하나를 잡았다. 역시나 예쁜 손가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그 크고 예쁜 눈으로 눈만 깜빡이면서 나를 바라봤다. 좀 오글거리나? 반응이 없으니 괜스레 부끄러워 볼을 긁적이며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나는 괜찮다고... 너 우는,"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커다란 품이 집어삼킬 듯 다가오더니만 폭삭 뒤통수를 잡고 그대로 안으로 밀어당겼다. 따뜻하다. 어렸을 때는 나보다 작았고 중학생 때는 나랑 비슷했는데 언제 이렇게 컸지. 김정우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그러니 잠깐 또 어색하게 나를 안은 손길이 움찔 거리더니 이내 꽈악, 세게 안아왔다. 있잖아... 바로 귓가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잔뜩 젖은 목소리. 하지만 울지 않으려 아등바등. 


"나 진짜로.. 여주, 보고 싶었어어엉..."


그렇지만 결국은 엉엉 울고 만다. 언제나, 내 앞에서만.



















본편 끝. 마지막으로 정우 시점만 나오면 내 앞울(내 앞에서만 울어) 끝!

정우 시점 꼭...!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여주를 향한 김정우의 애절하고 또 절절한... 많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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