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가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지태와 지민이 동시에 돌아보았다. 여주는 티 나지 않게 품속에 숨겨 둔 봉투를 팔로 꾹 누르고 애써 미소를 띠었다. 너무 긴장해서 입꼬리가 살짝 경직되었지만 알아차릴 정도는 아니었다.


“일은 다 봤어?”


지민이 일어나며 물었다. 그렇게 다가오려고 하니, 여주가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잠깐 갔다 올 데가 있어. 여기서 좀 기다려.”

“같이 가.”

“아냐. 나 혼자.”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여주의 모습에 지민은 다가가려다 말고 멈칫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다녀와.”


답하는 지민의 목소리에 어쩐지 힘이 없었다. 지태는 말 대신 살짝 고개만 숙여 보였다. 똑같이 묵례로 화답한 여주가 곧장 문을 열고 사무실을 나섰다.


“후….”


문을 닫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릴 뻔한 여주는 벽에 지탱하고 서서 차분히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행여 놓칠세라 품 안의 것을 꼭 쥐고 목적지만을 향해 달렸다. 흩날리는 머리칼은 계속해서 뒤를 향하고, 여주의 걸음은 지체 없이 앞을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대신 비상구 문을 열어젖힌 여주가 빠른 속도로 계단을 하나둘 오르기 시작했다.






지민은 잠이 오는 듯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떴다 했다. 잠들기 직전에 뛰어나온 데다 술까지 마신 터라 점점 버티기 힘들어졌다. 지민이 그렇게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슬슬 잠에 빠지려는 그 순간, 지태의 주머니에서 지잉 지잉 진동이 울렸다. 지민은 순간적으로 잠이 확 깨서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반면에 지민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지태가 천천히 핸드폰을 꺼내 곧장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할머니.”


지민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지만 귀만은 쫑긋 세워 지태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듣지 않으려고 해도 사무실 내부가 너무 조용해서 말 하나하나가 강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시간이 몇 신데 아직 안 자. 또 악몽 꾼 거야?”


지태의 말에 지민은 볼을 긁적였다. 덩달아 제 할머니가 떠올라 잠시 상념에 빠졌다가, 커피 한 잔을 마시러 걸음을 옮겼다.


“뭐가 뜨거워. 방바닥이 뜨거워? 아주머니 깨워서 보일러 좀 낮춰 달라고 해.”

“….”

“미안해. 금방 또 갈게.”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책상 위에 내려놓은 지민이 뭐 할 게 없나 사무실을 둘러봤다. 그래 봤자 죄다 일과 관련된 것뿐이라 자연스레 정국 팀의 공간으로 시선을 옮겼다. 운동 기구도 있고, 좀 사람 사는 데 같았다. 지민은 그걸 보며 입맛을 다시다가 사무실 한편의 캐비닛 앞으로 다가갔다.


“모레는 꼭 들어갈 거야. 좀만 참아. 알았지?”


삐거덕 들리는 낡은 캐비닛 여는 소리에, 지태는 통화하다 말고 순간 미간을 구겼다. 쭈그려 앉아 그 안을 뒤지기 시작한 지민의 뒷모습을 빤히 보다가, 들려오는 할머니의 목소리에 곧장 알겠다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핸드폰 화면을 보니 어느새 새벽 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작은 한숨과 함께 팔짱을 낀 지태가 여전히 꼼지락거리는 지민을 무신경하게 바라보았다. 지민은 낑낑대며 박스 하나를 밖으로 끌어내더니,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먼지를 탈탈 털었다.


“이게 작동하려나.”


탁 내려놓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 유심히 보니 새빨간 RC카였다. 오랫동안 작동시키지 않은 듯 이것저것 조심히 만져 보던 지민이 긴장한 표정으로 조종기를 잡았다. 위이잉, 순간 급발진한 RC카가 지태의 발에 부딪쳐 멈춰 섰다. 지태는 뭐 하는 짓이냐는 표정으로 지민을 빤히 봤다. 지민은 멋쩍게 웃으며 쪼르르 달려가 재빨리 RC카를 집어 들었다.


“미안해요. 조작이 서툴러서.”


지민의 말에 지태가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재미있습니까?”

“뭐가요.”

“이 상황이 재미있냐고요. 이쯤 되니 심각성이라는 건 하나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RC카를 내려놓고 다시 조종해 보려던 지민이 감정이 상하는 듯 인상을 썼다. 재미, 심각성 같은 단어가 신경을 거슬렀다. 장난감 하나 만졌다고 재미있냐고 물어보는 건 뭐고, 죽 쑤고 있을 건 또 뭐 있나 싶었다. 삐딱한 마음이 들어 고개를 살짝 꺾으니 지태도 지지 않고 눈을 맞췄다.


“재미있으면 안 돼요?”

“사람이 죽었잖아요. 아무리 앙숙이었다고 해도 같이 일하던 사람이 죽었어요. 그뿐입니까? 김선태가 생각보다 더 나쁜 새끼일지도 모른다는 말이 오가고, 유제국은 출마하겠다 시끄러워요. 이 상황에 장난감이 눈에 들어오냐는 뜻입니다, 나는.”

“사람 죽은 거 처음 보나. 그쪽은 인사팀장이 어떤 새낀지 잘 모르나 본데, 차라리 혼자 죽어서 다행입니다. 지 팔자 지가 꼬겠다는데 내가 나서서 추모라도 해야 합니까? 그리고 김선태든 유제국이든 별 지랄을 떨어도 난 하나도 상관없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잡을 거고 그게 안 되면 죽여 버릴 거니까.”

“….”

“근데 좀 어이없다. 사태를 심각하게 만든 게 누군지 잊었나 보네.”


지민은 이미 놀 마음이 사라져 버렸지만 그래도 억지로 조종기를 잡았다. 자신을 천하태평 꽃놀이나 온 사람 취급해서 기분이 나빴던 나머지 의미 없이 조종기를 죽 밀었다. 지태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시시각각 변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참을 수 없는 듯 말을 뱉었다. 등 뒤로 비수처럼 꽂히는 그 목소리에 지민이 지태를 휙 돌아보았다.


“그럼 같은 팀 사람 죽었을 때는, 그때는 어땠습니까. 진심으로 추모했어요?”

“….”

“지금 인사팀 분위기가 어떨지 관심도 없죠? 그쪽도 겪어 봤잖습니까. 모시던 팀장이 죽었는데,”


결국 참지 못하고 지태의 멱살을 잡은 지민이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다시 말해 봐, 새끼야. 같은 팀 사람이 죽었을 때는 어땠냐고? 미친 새끼가 할 소리가 따로 있지.”


지민의 악에 받친 소리에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 무신경하게 귀를 긁적이던 지태가 다시금 천천히 정면을 응시했다. 지태는 아무런 대응 없이 지민을 빤히 보기만 했다. 심지어 제 멱살을 잡은 지민의 손을 떨쳐 내지도 않고 픽 웃음 짓기까지 했다. 지태는 무언가 뒤틀린 눈빛으로 피하지 않고 말했다.


“세상만사 즐거워 보여서 아니꼬워. 넌 맨날 뭐가 그렇게 신이 나서 웃고 다녀?”

“….”

“은주만 철없이 구는 것처럼 말하지 마. 너도. 너도 인생 걸리는 거 하나 없이 잘 살잖아.”

“….”

“사람 죽은 거 처음 보냐고? 너무 많이 봐서 토 나와. 사람이 죽었는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잘 지내는 너희 보면 구역질이 나.”

“….”

“옆집 개가 죽어도 3일은 추모하겠지. 사람이라면.”


탁 소리 나게 지민의 손을 쳐 낸 지태는 흐트러진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한 번만 더 잡으면 그땐 나도 안 참아.”


화가 난 탓에 지태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잇는데도, 지민은 답 없이 팔을 툭 떨구기만 했다. 사무실 바깥으로 나가 버리려는 지태를 지민이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야.”


지태는 담뱃갑을 꺼내려다 말고 흘깃 고개만 돌려 지민을 바라보았다. 아주 천천히 지태와 눈을 맞춘 지민이 입술이 파르르 떨리게 억지 미소를 지었다.


“같은 팀 사람이 죽었을 때 어땠냐고?”

“….”

“처음에는 그렇게 만든 새끼 죽여 버리고 싶었고, 그다음엔 내가 죽고 싶었고, 이젠 죽지 못해 살아. 눈 감아도 볼 면목이 없어서 죽지 못해 산다고.”

“….”

“내가 세상만사 즐거워 보였다니 그나마 다행이네. 여주도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여주는 헉헉거리며 검사실 앞에 도착했다. 똑똑 노크하고 곧장 검사실 문을 연 여주가 생각보다 많은 직원을 보고는 조금 놀라 멈칫했다. 업무 시간을 훌쩍 넘겨 당직을 서는 직원이 한 명 정도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세 명이나 되는 직원들이 마스크를 쓰고 각자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바깥으로 나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여주는 품 안에 있는 봉투를 꺼내 조심스레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직원은 봉투 끝을 살짝 들춰 보고는 작성해야 하는 서류를 내밀었다.


“검사체가 뭔가요?”

“껌이요. 직접 보셔야 알 텐데 보존 상태가 그리 좋진 않아요.”

“아… 종이로 감쌌네요.”


빠른 속도로 서류를 작성하던 여주가 직원에게 한 번씩 시선을 주며 대답을 이어 갔다. 날짜를 적고 서명했을 때쯤엔 직원은 검사체를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장갑을 끼고 조심스레 드는 중이었다. 검사체를 캡슐 안으로 종이째 집어넣은 직원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여주에게 살며시 눈짓했다.


“다행인 건 그리 오래되진 않은 것 같아요. 해 봐야 알겠지만 껌 자체가 검사 성공 확률이 아주 높은 편은 아니고요. 그래도 상태만 좋으면 60% 이상의 성공률을 보일 거예요.”

“얼마나 걸릴까요?”

“저희가 지금 긴급 검사가 많이 잡혀 있어서 꽤 걸릴 것 같은데. 이 건은 긴급 도장 없는 거죠?”

“아… 네.”

“도장 받아 오시면 바로 뒤로 넣어드리고요.”


긴급 도장을 받기 위해서는 최소 부장 이상의 승인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누구에게든 이 상황을 전부 설명해야 하기에 여주의 고민이 이어졌다.

대충 살펴도 직원들이 바삐 움직이는 걸 보니 쌓여 있는 긴급 검사의 수가 상당할 터, 긴급으로 처리하지 않고 뒤로 밀려난다면 기본 며칠은 허비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장에게 사실을 알리는 건 께름칙했다. 사무실에 누가 들어왔는지, 왜 이런 짓을 해 놨는지, 전혀 갈피도 잡지 못한 상태라서 섣불리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그냥 일반으로 해 주세요.”


고민 끝에 내린 여주의 결론에 직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일반 도장을 찍었다. 3일? 4일? 아니면 일주일? 검사 결과가 언제 나올지 몰라 불안해진 여주가 자기도 모르게 손톱을 잘근거렸다. 그를 이상하게 본 직원이 눈썹을 한 번 추켜세우고 물었다.


“비교 샘플은 안 가져오셨네요?”

“네. 여기 있는 걸로 검사하고 싶어서요.”

“어떤….”


여주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검사체만 있고 비교 샘플이 없다는 걸 알아차린 직원이 서류 공백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대답을 기다리는데도, 여주는 지나치게 신중한 표정으로 입술을 물었다. 이내 작은 한숨과 함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직원과 눈을 맞추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이상하게 생각하실 거 잘 아는데요.”


본론이 나오기 전 낮게 깔린 여주의 목소리에 직원은 눈을 크게 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


“13, D6. DNA 프로필 있을 거예요.”

“네. 잠시만요. 13, D6….”

“폐기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네. 있네요. 근데….”

“그거랑 비교해 주세요.”

“팀장님. 이게….”

“네. 지우 프로필이에요.”


지우라는 말에 놀란 나머지, 직원은 마스크를 턱 밑으로 끌어 내리고 미간을 한껏 구겼다. 무언가 착각한 게 아니냐는 듯한 눈빛으로 여주의 정정을 기다렸다. 그런데도 여주는 직원 대신 서류에 손수 ‘13, D6’이라 적어 책상 위로 쓱 밀었다. 13, D6은 지우의 고유 번호였다. 

검사 과정에서 혹시라도 섞일지 모르는 직원의 DNA를 쉽게 분리하기 위해, 검사실은 한 건물 쓰는 전 인원의 데이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3년 전, 여주는 그 데이터의 도움을 받아 지우의 신원을 확인했다. 사건을 확실히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석진과 협의하여 데이터를 삭제하지 않고 남겨 두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13, D6의 프로필을 쓸 일은 없다. 한눈에 봐도 여주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직원의 눈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검사체 상태를 보니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데요.”

“네.”

“따라서 13, D6이랑 비교해 달라는 말이 납득 안 됩니다.”

“납득이 필요한가요? 그냥 검사만 해 주시면 돼요.”


이미 3년 전에 죽은 지우의 프로필을 따끈따끈한 검사체와 비교해 달라는 제안 자체가 말이 안 됐다. 그렇기에 직원은 몇 번이고 다시 물으며 정확히 지시 내린 게 맞는지 확인했다. 팀장이 미쳤다는 소문이 정녕 사실일까 생각하며 여주가 들고 온 껌 종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주는 그런 직원에게 애써 미소 띤 채 책상 위를 똑똑 두드렸다.


“보안 부탁드립니다.”

“….”

“부탁드려요.”

“…네. 결과 나오면 연락 드릴게요.”

“고맙습니다.”


‘보안 부탁드려요.’

입단속을 철저히 해 달라는 뜻이었다. 보안은 기본이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오늘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하기 전에 이 부탁을 한 번 더 생각해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강조했다. 팀장이 미쳤느니 삼년상을 치른다느니 그런 말은 개의치 않지만, 이것만은 가십으로 소비하지 말아 달라 부탁한 것이다.

여주는 가벼운 묵례와 함께 문을 열고 나와 검사실 앞 의자에 털썩 앉았다. 몸을 한껏 앞으로 숙여 팔로 허벅지 위를 짚은 채 눈을 감았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쓰레기통 방향이 바뀐 걸 알아차린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 빨라진 심장 박동이 좀처럼 제 속도를 찾지 못했다. 쓰레기통 뚜껑을 열고 그 안에 있는 껌 종이를 발견한 직후 주변의 것들이 온통 희미해지고 시야가 눈에 띄게 좁아졌다. 깊은 한숨과 함께 얼굴을 쓸어내리고 나니 어디선가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려 단번에 시선을 빼앗겼다.


“….”


민윤기였다. 민윤기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 헤친 채 정돈되지 않은 모양새로 안경을 추켜올렸다. 부스스한 머리칼을 넘기며 눈앞의 여주를 자세히 보려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는 여주가 지금 이 시간에 여기에 왜 있는 것인지 의아해서 오던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여주가 슬쩍 시선을 피하자마자, 민윤기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그대로 검사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슬리퍼를 직직 끄는 소리가 끝나고 검사실 문이 쾅 닫혔다. 여주는 깊은 한숨과 함께 벽에 살며시 기댔다가 사무실에 있는 지민과 지태가 생각나 눈을 질끈 감았다. 당장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걱정이었다. 정리하려고 시도조차 못 할 만큼 머릿속이 엉망이라 제대로 걷는 법까지 까먹을 지경이었다. 작은 결심과 함께 침을 꼴깍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검사실에 들어갔던 민윤기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야.”


아랑곳하지 않고 제 사무실로 향하는 여주에게 민윤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주는 흘깃 고개만 돌려 민윤기를 바라보았다.


“나랑 잠깐 얘기 좀 하자.”

“무슨 얘기. 너랑 할 이야기 없어.”

“내 거 맡기면서 네 거까지 긴급 도장 찍었어. 부장한테 걸리면 아마 엄청 털릴걸?”

“….”

“한 시간도 못 내주냐? 네 거 딱 한 시간 걸린다는데.”


몸을 완전히 돌린 여주가 민윤기의 눈을 빤히 봤다. 민윤기도 일이 있어서 이 시간까지 회사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아주 잠깐 여주의 머릿속을 스치고, 긴급 도장이라는 말에 제대로 꽂혀 버렸다. 여주는 검사실 직원이 다른 검사체를 민윤기의 긴급 사이에 끼워 줬다는 것이 이해 안 됐고, 민윤기가 왜 굳이 그런 친절을 베푸는 것인지 더 이해 안 됐다. 민윤기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고는 제 손목시계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띠꺼운 표정 봐라. 넌 왜 맨날 해 줘도 난리야.”

“….”

“싫으면 일주일 동안 똥줄 타면서 손톱이나 뜯고 있든가.”

“….”

“한 시간이면 돼.”

“야.”

“어.”

“알았으니까 반말하지 마.”


그 말과 함께 민윤기를 쓱 지나친 여주가 민윤기의 사무실을 향해 앞서 걸었다. 민윤기는 멍하게 서서 그런 여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머쓱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며 뒤따랐다.


“지도 반말하면서….”


짧은 불퉁거림이 메아리 한 번 없이 텅 빈 복도에 흩어지고, 좀 더 빠른 걸음으로 여주를 따라잡는 민윤기였다.






“김여주 너는 가만 보면 은근히 순진한 구석이 있어. 뭘 믿고 내 사무실까지 따라오냐.”

“너만 하겠어. 넌 뭘 믿고 내 샘플에 긴급 도장 찍었는데.”

“무슨 샘플인데.”

“네 머리카락.”

“별… 됐다.”


뜨거운 라떼 한 잔을 여주 앞에 놓아 주던 윤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정리되지 않은 제 책상을 정신없이 뒤적거리더니 서류철 하나를 들고 빠르게 펼쳐 보았다. 지저분한 사무실을 쓱 훑어본 여주가 언짢은 표정으로 라떼 한 모금을 마시는 순간, 윤기는 맞은편 자리에 털썩 앉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사팀장 죽인 놈 자수한 거 알지. 이게,”

“어디로 자수했어?”

“어? 뭔 소리야.”

“어디로 자수했냐고. 경찰이 조사 중인 사건도 아니고, 유가족한테 시신 인도도 안 했고. 누가 어떻게 알고 자수했는지 궁금해서.”

“경찰에 자수했고 경찰이 우리한테 인계했어. 경찰 쪽 지원팀에서 바로 콜해 줬으니까. 조사 끝내고 다시 경찰에 넘겨야 돼.”

“빠르다. 신고부터 인계에 심문까지 전부 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여주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하고 싶은 얘기 없어. 네가 나한테 할 말 있다며.”


시큰둥하게 이어지는 말에 윤기는 말할 마음이 사라진 듯 공갈 사탕을 물었다. 여주의 말투가 꼭 의심하는 것 같아 신경을 거스른 나머지 서류철로 책상을 툭툭 쳤다. 그런 윤기를 향해 여주가 픽 웃어 보였다.


“타이밍이 참 웃기다. 자연사로 결론 나서 인력 그렇게 많이 붙지도 않았을 텐데 어떻게 부검 끝나자마자 범인이 자수하냐. 민윤기는 운도 좋아.”

“자꾸 비꼬네.”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사람 찾아와서 속을 긁어? 그 새끼가 내 뒷조사했다는 말 듣고 단 한 순간도 찝찝하지 않은 적이 없어.”

“그럼 속여 줄 걸 그랬다. 너 찝찝하지 말라고.”

“이왕이면 그게 나을 뻔했지. 사는 동안 걱정이라도 없게.”


계속 톡톡 튀는 여주의 말투에 윤기는 뭔가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제야 여주의 표정을 자세히 보니, 눈빛에 초점이 없고 입술을 꼭 문 모양새가 어딘지 불안정했다. 손은 테이블 밑으로 감춰 버려 잘 볼 수 없지만 잔뜩 경직된 어깨가 심리를 대변했다.

‘사는 동안 걱정이라도 없게.’

여주 말을 찬찬히 곱씹던 윤기가 서류철 특정 페이지를 펼쳐 그 앞에 놓아 주었다. 윤기는 서류를 보지도 않고 눈을 맞춰 오는 여주에게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다음은 너 같아서 불안해?”

“나 같으면 불안하지도 않아.”

“….”

“내가 아닐까 봐 불안해. 내가 아니고 팀원들이….”


톡톡. 윤기는 말없이 서류를 두드렸다. 인사팀장을 죽이고 자수했다던 그 범인의 자백 내용이었다. 뒤늦게 서류로 시선을 옮긴 여주가 읽기 쉽도록 윤기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그어 가며 여주의 표정을 살폈다. 윤기의 손가락을 따라 한 자 한 자 읽어 가던 여주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눈을 맞췄다. 서류 내용이 민윤기의 입으로 한 번 더 정리되었다.


“제가 죽였습니다. 하는 짓이 재수 없어서요.”

“….”

“약물을 썼어요. 현장에서 거래해서 브로커의 정보는 알지 못합니다.”

“….”

“변호사는 선임하지 않겠습니다. 어떤 처벌이든 달게 받을게요.”

“….”

“전형적이야. 어떻게 이렇게 내가 원하는 답만 쏙쏙 골라서 뱉는지.”

“….”

“이걸 보는데 생각나는 사건이 하나… 야. 너 울어?”


여주는 멍한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무슨 뜻이냐는 듯 윤기를 바라보면, 윤기가 다급하게 휴지를 두어 장 뽑아 건넸다.


“울긴 누가 울어.”


부정하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물이 한 방울 톡 떨어졌다. 윤기보다 배는 더 당황한 여주가 황급히 눈물을 닦아 내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기가 왜 울고 있는지도 몰랐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잠재울 길이 없어 결국 등을 돌리고 말았다.


“미안. 나 가 볼게.”

“잠깐만.”


곧장 떠나려 하는 여주에게 다급한 윤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주는 등을 돌린 자세 그대로 뒤돌지 않고 가만히 신경을 집중했다.


“너도 알지. 인사팀장 유제국 반대편에 붙어먹었던 거. 근데 팽당한 것 같아. 선거 앞두고 국정원 직원이랑 내통하는 거 알려져서 좋을 거 없으니까.”

“….”

“그 길로 유제국을 찾아갔어. 유제국 수사에 대해 아는 것처럼 겁을 준 것 같아. 목적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겠어. 버림받은 것에 대한 복수심인지, 아니면 바로 다른 둥지를 찾은 건지. 근데….”

“….”

“네 이름을 팔았을지도 몰라. 그렇게까지 쓰레기는 아니라고 믿고 싶은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


아주 느린 속도로 뒤돌아본 여주가 민윤기의 말을 찬찬히 곱씹었다. 유제국 반대편에 서 있던 인사팀장이 선거를 앞두고 버림받았다. 그에 대한 복수심으로 유제국을 찾아가서, 그를 중심으로 수사하고 있다며 언질을 줬다. 자신을 버린 사람에 대한 복수이든, 혹은 또 다른 권력에 빌붙기 위한 시도이든, 뭐가 어찌 됐든 그 과정에서 여주를 언급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유제국 수사를 가장 적극적으로, 또 가장 오래 하는 게 여주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인사팀장을 죽인 건 유제국 쪽일까 아니면 반대쪽일까.’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여주가 뭔가 의아한 듯 민윤기를 향해 눈짓했다.


“부장님이 분명 사건 종결이라고 했는데.”

“아, 뭐…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니까.”

“독단적인 행동은 아닐 거 아니야.”

“이번 주 안으로 인사팀장 통화 기록, 메시지를 비롯한 사망 전 행적 전부 다 뒤질 거야. 그동안만 몸 좀 사리고 있어라.”

“독단적인 행동이냐고 묻잖아. 부장 승인 받고 움직이는 거야?”

“그게 뭐가 중요하냐. 그냥 너 몸조심하라고. 장난하는 거 아니니까.”


부장이 거짓말했거나, 민윤기가 부장을 무시하고 독단적인 행동을 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민윤기가 부장을 무시한 거라면 이유는 간단하다. 여주는 윤기가 가지고 있는 사명감에 대해 잘 알았다. 어떨 때는 정의의 사도처럼 굴 때가 종종 있어, 사람이 왜 저리 무모하냐며 혀를 찬 적도 있다. 민윤기는 대학생 때부터 줄곧 그랬다. 그러니 부장이 사건을 종결하라고 명령했어도 자신이 생각하기에 께름칙한 부분이 있다면 그대로 진행할 것이다.

만약 부장이 여주에게 거짓말한 거라면 이유는 뭘까. 왜 굳이 사건이 종결됐다고 거짓말한 것일까. 부장은 분명 그랬다. 수사는 계속하겠지만 위험한 일은 없을 거라고 못을 박았다. 왜? 여주를 안심시키려고? 아니면 여주를 믿지 못해서? 그것도 아니면 저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라 여주가 나서지 못하게 하려고? 뭐가 됐든 누구보다도 이 일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 게 여주이건만, 여주는 이상하게 자기만 빼놓고 일이 진행되는 것 같아 신경 쓰였다.

여주가 본격적으로 민윤기에게 따지려는 그 순간, 핸드폰 진동이 울리며 검사실에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윤기는 여주의 어깨를 한 번 토닥이며 제 할 말만 하고는, 먼저 사무실을 나섰다.


“부장님이든 나든, 누구든지 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런 거 생각할 시간에 네 앞가림이나 좀 잘해. 유제국 하나 털면서 꼬리가 몇 개나 붙은 거냐.”

“….”

“첫 작전에 네 팀원 죽었고, 너 가지고 저울질하던 인사팀장 죽었어. 다음은 너 아니란 법 있어?”






민윤기는 검사실 직원의 설명을 듣지도 않고 검사를 마친 샘플을 모조리 들고 사무실로 떠났다. 덕분에 검사실에 혼자 남아 좀 더 편히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된 여주가 긴장한 표정으로 손을 감쌌다. 그 순간 주머니에서 울린 진동에 여주는 고개만 살짝 숙여 핸드폰을 확인했다. 누군가 사무실에서 바깥으로 나간 듯했다. 대수롭지 않게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는 여주의 앞으로 직원은 긴급 도장 사이에서 따로 빼놓은 서류를 조심스레 내밀었다. 이내 눈을 맞춰 오는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민망하고 어색했다.


“팀장님. 13, D6은 아니에요. 당연하게도.”


지우가 아니라고 했다. 여주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럼, 그렇지.’ 생각하다가 순식간에 또다시 머리가 복잡해졌다.

정리를 하자면 이렇다. 누군가 사무실에 들어와 팀장실 잠금을 해제하고 책장에서 책을 한 장 찢은 후 그 안에 껌을 뱉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첫째로 사무실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여주 팀 다섯과 정국 팀 여섯, 총 열한 명. 둘째로 팀장실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여주 팀 다섯, 그리고 정국? 셋째로 그 책에 얽힌 사연에 대해 아는 사람은 지민 그리고 여주, 둘. 마지막으로 여주가 그 사연을 인지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 지민 그리고 여주, 둘. 당연히 여주는 아니니 남은 사람은 하나, 지민.

하지만 지민은 안가에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외출한 적 없다. 그렇다면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그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여주는 이상한 걸 알면서도 검사체를 지우의 프로필과 비교했다. 지우는 사무실에 들어올 수 있으며 팀장실 비밀번호를 알고 있고 책에 얽힌 사연의 주인공이다. 단 하나 걸리는 게 있다면, 여주가 그 사연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 지우는 그걸 알지 못한다. 지우가 죽고 나서 지민이 여주에게 해 준 이야기이니, 지우가 알 리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지우는 죽었다. 혼란스러워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여주에게 직원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렸다.


“근데 껌에서 혈액이 나왔어요. 이게 검사가 될까 했는데 혈액 덕분에 일이 좀 쉬웠죠.”

“혈액이요?”

“네. 입 안이 터지면 종종 소량 섞이기도 하거든요.”


입 안이 터진 사람, 셋. 지민, 기석 그리고 정국. 인사팀장이 죽은 그날 저녁, 은주가 폭탄 발언을 하기 불과 몇 시간 전인 그날 저녁, 지민과 기석이 다투는 걸 정국이 말리는 과정에서 세 사람은 나란히 입술이 터졌다. 물론 세 사람 다 안가에서 외출한 적 없고, 기석은 팀장실 비밀번호를 모르며, 정국과 기석은 책에 얽힌 사연에 대해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껌에서 혈액이 발견됐다면 한 가지 검사를 더 해 볼 만하다. 여주는 셋 중 하나인지 확인하고픈 마음도 있지만, 셋 중 누구도 아닌 것을 확인해야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복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여주가 용지를 하나 더 꺼내 새롭게 작성하기 시작했다.


“죄송한데, 검사 하나만 더 할게요. 검사체는 같은 걸로요.”

“비교 샘플은요?”


막힘없이 술술 써 내려가던 여주의 손이 순간 뚝 멈췄다. 비교 샘플을 찾는 직원의 말에 여주가 주춤하며 펜을 꼭 쥐었다. 기석, 지민, 정국, 세 사람을 콕 집어 검사해 달라 말할 자신이 없었다. 처음 샘플은 지우였고 그다음이 또 같은 팀원이라면 누구라도 이 상황을 이상하게 볼 것 같았다. 어차피 검사는 일주일 정도 걸릴 것이다. 아까처럼 민윤기가 긴급 도장을 찍어 주는 일 따윈 없을 테니 적어도 일주일은 참고 기다려야 한다. 만약 여주가 세 명을 콕 집어 검사를 요청한다면, 만약 일주일 내 검사실 바깥으로 말이 샌다면, 여주 혼자 특정하고 있는 이 사실을 남이 알게 될 수도 있다. 여주는 팀원들을 의심해도 남들은 팀원들을 의심해선 안 된다.

마지못해 13D, 13H를 적어 내는 여주를 보며 직원은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얼굴을 마구 구겼다. 13D는 여주의 팀 전체, 13H는 정국의 팀 전체였다. 여주는 손끝이 저리는 듯 살며시 잡았다 놓으며 태연한 척 눈을 깜빡였다.


“급한 일 아니니까 천천히 해 주세요. 물론 검사는 저까지 포함이고요.”

“아….”

“더 물어볼 게 있나요?”

“아니요. 연락 드릴게요.”

“네.”


여주가 이 새벽에 달려온 것을 보면 누구나 급한 일이라는 걸 뻔히 알겠지만, 여주는 그래도 별수 없이 태연한 척을 해야 했다. 게다가 굳이 검사에 본인을 포함한다고 이야기한 이유는,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검사하는 것이니 더 묻지 말라는 쪽에 가까웠다.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흥미를 보일 만한 주제라는 걸 잘 알았다. 부디 저 직원의 입이 무겁길 바라는 것만으로는 위험성이 줄어들지 않는 것도 잘 알았다. 그래도 정말 별수 없었다. 마치 봐 달라고 시위하는 듯이 전시해 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없었다. 그게 만약 자신의 팀원이라면 반드시 이유를 물어야 했고, 제삼자라면 어떻게 한 일인지 알아야 했고, 정말 만에 하나 지우라면….

‘아니야. 지우는 죽었어. 검사체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했어.’

단지 추측일 뿐인데도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한참 만에 사무실로 복귀한 여주를 지태가 혼자 앉아 맞이했다.


“지민이는요?”

“담배 피우러 간 것 같아요.”

“아… 네. 잠시만요. 저는 볼일이 좀 더 남아서요.”


지태에게 살짝 눈짓한 여주는 곧장 팀장실 잠금을 해제했다. 지태는 의자에 기대앉아 정면만 보다가 고개 숙여 제 손가락을 쓸었다. 생채기가 난 손가락이 붉게 부어올라 만질 때마다 따끔한 느낌이었다. 여주 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않는 지태의 뒤로, 급하게 팀장실 안으로 들어가는 여주가 보였다.


“….”


여주는 팀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을 나뒹구는 책들을 주워 하나씩 책장에 다시 꽂았다. 서두르다가 다 쏟아 버려 순서가 엉망이었지만, 다시 꽂기 시작하니 하나하나 원래의 자리를 찾았다. 마지막으로 옷소매를 죽 잡아당겨 문제의 책을 조심스레 감싼 여주가 앞뒷면을 번갈아 보며 입술을 물었다. 지문 같은 게 나오려나 잠시 고민하다가 그 책마저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았다. 나와 봤자 지민과 지우, 그리고 여주 지문밖에 더 있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원래라면 그게 맞는 거니까, 저 책에 손을 댄 건 세 사람이 전부여야 했다. 그마저도 얼마 전에 책장을 한번 다 뒤집어엎었기 때문에 지문이 제대로 나올지 의문이었다. 그래서 모든 건 껌 검사에 맡기기로 했다. 그것만큼 정확한 검사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나는 그 주인이 누구길 바라야 하지?’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질문이 여주를 계속해서 혼란에 빠지게 했다.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깊은 한숨을 내쉰 여주가 문제의 책과 두께와 생김새가 가장 비슷한 다른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기억을 더듬어 같은 페이지를 펼치고는 연달아 두 장을 찢어 냈다.


“내가 진짜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는데….”


여주는 생각했다. 수년 전 아무 책이나 골라잡아 찢었을 지민이 몇 년 만에 나타나 어떻게 단번에 같은 책을 집어 들었는지, 책장의 위치가 바뀌어 알아차리기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망설임 없이 딱 그 책을 잡았는지 말이다.

그래서 가정했다. 다른 조건 다 떼어 버리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지우와 지민과 본인 세 명이라는 전제하에, 꼭 그 책이어야만 했던 이유가 있는 것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아무거나 비슷한 책 하나 뽑아서 같은 페이지를 찢어도 알아차리지 못할지, 그러니까… 지민이 여전히 책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을지, 그걸 확인해 보고 싶었다.

찢긴 종이 두 장을 개인 금고 안에 넣는 순간 바깥이 소란스러워지며 지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여주의 주머니에서도 진동이 한 번 울렸다. 다급하게 책을 옆구리에 끼운 여주가 팀장실 문을 열고 나가니 지민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미소 지었다. 여주는 언제 온 것이냐 묻는 지민은 안중에도 없고, 자꾸만 지민 입가의 찢어진 상처에 시선을 빼앗겼다.


“책? 너 설마 책 가지러 온 거야?”

“….”

“야. 무슨 생각해?”


지민이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맞춰 여주의 정신이 돌아왔다. 여주는 자꾸만 다른 생각으로 빠져 버려서 한마디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지민은 여주 옆구리에 끼워 놓은 책을 빤히 보다가 이해 안 된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한 번 읽은 책 두 번은 안 읽잖아?”


지민의 물음에 여주는 한껏 예민해져 미간을 구겼다.


“읽은 책인 거 어떻게 알아?”

“저 방에서 가지고 나왔으니까.”

“….”

“저 방 책장에는 읽은 책만 꽂으니까.”

“….”

“까칠하긴.”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 같기는 한데 여주가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지우와 연관되어 있으니 냉정한 판단 자체가 안 됐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게 ‘설마 지우가 다녀간 거야?’ 생각했다가, 좀 진정되니 어떤 자식이 지우를 가지고 장난을 치나 화가 났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꾸만 이렇게 예민해지는 거다. 읽은 책 아니냐는 한마디에 기분이 나쁘고, 찢어진 상처가 불길했다. 눈을 질끈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쉰 여주가 미안하다 사과하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조금 늦게 여주를 따르는 지태와 지민의 얼굴에 각기 다른 표정이 떠올랐다.






안가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는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여주는 출발 직후부터 내내 그저 창밖만 바라보며 멍하게 상념에 빠졌다.

‘누가, 도대체 누가, 그리고 왜?’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여주가 핸드폰을 꺼내 출입 알림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확인했다. 평소에는 내내 꺼 두다가 퇴근할 때만 켜곤 하는데, 그동안은 알림 울릴 일이 거의 없었다. 가끔 울리더라도 팀원들에게 미리 연락을 받아 알고 있거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확인이 가능했다. 팀원들은 모두 이 알림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팀장님. 서류 하나 챙기러 왔어요. 놀라지 마세요.’라며 자발적인 메시지를 보내는 팀원도 있었다. CCTV로도 안심하지 못해서 고안한 방법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후에 사무실 앞의 CCTV를 떼어 달라 요구한 것도 이 장치 덕에 가능했다. 믿을 사람 없는 조직에서 몇 년 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다.

‘그럼 어떻게 알림 없이 사무실에 들어올 수 있었지? 그러려면 역설적으로 알림에 대해 알고 있어야만 하는 건가.’

여주의 깊은 한숨에 운전하던 지태가 흘깃 돌아보았다.


“….”


여주는 티 내고 싶지 않은데 자꾸 티가 났다. 지태와 지민은 여주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두 사람이 동시에 여주의 무릎 위에 놓인 책을 바라보았다가, 다시금 그의 뒤통수로 시선을 옮겼다. 뒤통수만 봐도 근심을 가득 안고 있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태는 상처 난 손가락으로 창문을 살짝 열어 줄까 하다가, 이내 손을 동그랗게 말아 주먹을 쥐었다.






안가에 돌아오자마자 지민과 지태는 잠을 자러 방으로 향했고, 여주는 제 방에 앉아 정확히 10분을 보내고는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곧장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정신없이 내달려 창고 바로 옆의 오래된 철문을 열었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니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윙윙 울렸다. 안가에서 사용하는 자그마한 상황실이었다.

조심스레 문을 닫고 곧장 상황실 컴퓨터 앞에 선 여주가 CCTV 날짜를 안가에 들어온 직후로 설정했다. 그 안에 누가 나가고 들어왔는지 확인해야 했다.


“첫째 날 나랑 지민이가 먼저 들어왔고, 그다음에 팀원들이 다 같이 들어왔어. 팀원들은 안가 오기 직전에 사무실에서 장비를 챙겼다고 했고.”

“….”

“그리고 다음 날 오후에 설비팀 사람들이 왔다 갔어.”

“….”

“셋째 날 오후에 현장팀 외근, 그리고 인사팀장 사건이 터진 후 민윤기 방문. 얼마 안 있다가 현장팀 사람들 복귀.”

“….”

“넷째 날은 오전에 나랑 오빠랑 병원에….”


여주의 기억은 CCTV 기록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CCTV를 빠른 배속으로 돌리며 제 기억과 맞춰 보던 여주가 넷째 날 영상을 보다 말고 멈칫하며 말을 끊었다. 기억대로라면 그날 오전 정국과 여주가 병원에 가기 전까지는 아무 외출 기록이 없어야 하는데, 새벽 3시쯤 누군가의 외출이 찍혀 있었다. 시간대로 보면 은주의 폭탄 발언 그 이후, 두 시간 후쯤 되는 것 같았다.

긴장되는 듯 침을 꼴깍 삼킨 여주가 영상 배속을 다시 원래대로 돌렸다. 숨도 쉬지 않고 빤히 집중하면, 주변 한번 돌아보지 않고 곧장 차에 올라타는 지태가 보였다.


“…어디 가?”


지태는 빠른 속도로 후진해 차를 돌리고는 곧바로 정문을 빠져나갔다. 세 대의 차가 있어야 할 자리에 두 대만 덜렁 남아 있는 화면 오른쪽 하단으로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여주는 떨리는 손으로 휙휙 다음 시간대로 넘겨 보았다. 세 시간 뒤쯤 다시 돌아온 지태를 확인하고는 이곳으로 올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계단을 올랐다. 차 키를 찾아야 했다. 지태가 타고 나간 저 차의 키를 찾아 블랙박스를 확인해야 했다.

정신없이 거실로 올라와 머리칼을 한 번 쓸어 넘기고는 가장 먼저 서랍부터 뒤졌다. 여주의 개인 차를 제외한 나머지 두 대의 작전 차량 키는 이곳에 두는 것 같았다. 아무리 뒤져 봐도 차 키가 보이지 않아 마음이 급해졌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멍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여주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흘깃 바라보았다. 지태 방에 들어가는 건 너무 큰 모험이었다. 근데 지금이 아니면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할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손톱만 잘근잘근 무는 그때, 닫혀 있던 방문이 스르르 열리며 정국이 걸어 나왔다.


“거기서 뭐 해?”


여주는 자연스럽게 서랍 문을 닫고 꿇어앉은 자세 그대로 정국을 올려다봤다. 목이 말라 잠에서 깼는지 빈 물병을 든 정국은 여주 곁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정국이 이 시간에 뭘 하는 것이냐는 표정으로 빤히 내려다보니, 여주가 침을 꼴깍 삼키며 정국의 손을 끌었다.


“자다 깼어.”

“왜?”

“…배고파서.”


배가 고프다는 여주의 말에 정국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잠이 덜 깨서 그런지 여주가 긴장하고 있는 걸 눈치채지 못하고 손을 살짝 잡아당겨 일으켰다. 여주는 표정을 들킬까 봐 걱정돼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곧장 정국의 허리를 껴안고 품에 얼굴을 묻었다. 무표정인 채로 눈만 끔뻑이니 따뜻한 품에서 정국의 향기가 진동했다.

아주 심플하게 정의 내린 명단에 느닷없이 지태가 끼어들었다.

‘그 시간에 왜 나갔지. 어딜 간 거지. 허락은 받은 건가?’

정국에게 물어볼까 살짝 고개만 추켰다가 이내 가만히 입술을 물었다. 여주는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구역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속이 울렁거렸다. 뭘 좀 해 줄까 묻는 정국에게 가만히 고개를 젓고는 입을 틀어막았다. 구토가 나올 것 같았다. 정말로.






신혼 전쟁



기상한 팀원들이 하나둘 식탁으로 모여들 때까지도 여주는 멍하게 자리에 앉아 벌써 삼십 분째 식빵 하나를 뜯어 먹고 있었다. 그 앞에 책을 펼쳐 놓고 천천히 한 장 한 장 넘기며 수도 없이 했던 생각들을 강박적으로 반복했다.

‘도대체 누구지?’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속이 울렁거려 먹던 식빵이 도로 나올 것 같았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내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러다 진짜 졸도하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손이 떨렸다. 왜인지 자꾸 눈물이 날 것 같아 꾹꾹 삼켜 내고 나면 또다시 속이 울렁거렸다.

의미 없이 읽어 내려간 페이지가 끝이 나니 습관적으로 한 장 더 넘겼다. 타이밍 좋게 찢어진 부분이 드러나며 팀원들의 시선을 끌었다. 문제의 책과 비슷한 책을 뽑아 아무렇게나 찢은 그것이었다. 연달아 두 장이 찢긴 책을 보며 여주의 팀원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찢어졌네요.”

“어? 응.”

“어쩌다가요?”

“아, 이거 그냥….”


반대편에 있던 지민이 시큰둥하게 손을 뻗어 책을 들춰 보았다. 책 표지를 확인하고는 의아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며 여주와 눈을 맞췄다.


“아, 난 또 그건 줄.”

“….”

“그러고 보니 이건 두 장이네. 착각했다.”


팀원들은 지민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뜻이냐며 물었지만 지민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여주는 지민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슬쩍 기석에게 시선을 옮겼다. 기석은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정국의 눈치를 보며 애꿎은 손톱만 뜯고 있었다. 다음으로 정국을 보니, 여주의 찢어진 책을 빤히 바라보며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여주가 정국의 표정을 좀 더 관찰하려는 그 순간, 옆에 있던 지태가 정국의 팔을 툭툭 쳤다. 정국은 곧장 고개를 돌려 지태를 봤다. 여주 또한 들고 있는 빵을 내려놓고 지태에게 시선을 옮겼다.


“형. 나 어제 새벽에 잠깐 외출했어.”

“어제? 이번 새벽 말하는 거야?”

“아니. 그 전날.”


의외의 말이 들려왔다. 마치 여주가 궁금해하고 있는 걸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지태는 묻지 않았는데도 자기가 먼저 외출한 사실을 밝혔다.


“왜 말도 없이 나가.”


정국이 정색하며 인상을 썼다.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한 와중에 지태마저 규칙을 어겼다고 하니 급격하게 화가 밀려왔다. 지태는 여주와 정국을 번갈아 보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 새벽에 갑자기 할머니가 아프다고 연락이 왔어. 급하게 전화가 와서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 미안해.”

“심각한 일이야?”

“아냐. 괜찮은 거 보고 바로 들어왔어. 부장님한테도 그날 아침에 바로 보고했고. 어제 하루 종일 형 컨디션 별로인 것 같아서 말할 기회를 놓쳤어.”

“….”

“김 팀장님, 죄송해요.”


상황 설명을 마친 지태가 여주에게 묵례해 보였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인 여주가 지태의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할머니가 아프셔서 외출했다고?’

CCTV를 볼 때도 조금 급하게 나간다 싶긴 했는데, 저 말이 과연 사실일지 의문이었다. 동시에 사실이길 바랐다. 이 안에 껌 종이의 주인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미치겠는데, 전혀 고려하지 않은 지태까지 의심하는 건 하고 싶지 않았다.

‘블랙박스. 블랙박스를 확인해야 돼. 어디로 갔는지만 보면, 지태 씨는 그만 의심해도 돼.’

여주가 그렇게 생각하며 물 한 모금을 마시는 순간 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정국은 여주에게 살며시 웃어 주고는 그릇을 정리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웬만한 카메라나 도청기는 양복집 입구에서 걸릴 거예요. 팀장님은 손님이라 확실하진 않지만, 어차피 옷을 벗어야 하기도 하고요.”

“괜찮아요. 몸만 들어갈게요.”

“아무래도 불안해서 구두에 위치 추적기 하나만 심을게요. 얘는 검문에서 안 걸리는 대신 배터리로 가는 게 아니라 지속력은 좀 짧아요. 가끔 지하로 들어가면 작동이 안 되기도 하고요.”


오후에 정국의 양복집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다. 여주 팀원이 손톱만 한 위치 추적기를 들어 보이며 멋쩍게 웃으니 정국은 괜찮다고 화답하며 미소를 띠었다.

여주는 그 옆에 앉아 손톱을 물었다. 좀처럼 일에 집중하지 못해 제 머리를 퍽퍽 때렸다가, 흘러내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정국이 걱정스레 보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여주가 이미 몇 번이나 읽은 서류를 의미 없이 넘기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옆으로 다가온 지현이 여주의 서류를 뺏어 들고는 고갯짓했다.


“팀장님. 계속 그러면 방해돼요. 아직 시간 남았으니까 눈 좀 붙이세요.”


지현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여주의 등을 밀어 밖으로 쫓아냈다. 힘없이 밀리면서도 대꾸 한 번 하지 않는 여주가 이상해서 지현이 미간을 구겼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정국은 여주의 상태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래서였나, 직원의 설명을 끝까지 꼼꼼하게 다 듣자마자 이만 나가 봐도 되겠냐며 웃어 보였다.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니 정국이 기다렸다는 듯 바깥으로 향해 여주를 찾았다.






방에 있을 것 같아 문을 열어 봤더니 미동도 없이 엎드려 누워 있는 여주가 보였다. 정국은 조심스레 다가가 침대에 걸터앉고는 여주의 머리칼을 살며시 쓸었다. 곧장 몸을 돌려 똑바로 누운 여주가 정국을 올려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도 정장으로 갈아입은 정국을 보며, 갑자기 여주 눈에 울컥 눈물이 맺혔다.


“왜 울어?”


당황한 정국이 여주를 일으켜 제 품에 안았다. 그게 도화선이라도 된 듯 여주가 정국의 목을 끌어안고 흐느꼈다. 정국은 가만히 여주의 등을 토닥이며 괜찮아, 괜찮아, 낮은 목소리를 냈다.

‘작전 나가는 날에 재수 없게 울면 안 되는데.’

여주는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생각과 반대로 자꾸만 눈물이 나 미칠 것 같았다. 사실은 내내 겁이 났다. 지난 새벽 쓰레기통을 들여다본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내내 겁이 나서 죽을 것 같았다. 다음은 너 아니란 법 있냐는 민윤기의 말이, 당연하게도 지우는 아니라는 검사실 직원의 말이, 차례차례 여주의 목을 졸랐다. 그것이 마치 엄청난 경고처럼 느껴졌다. 내가 너 하는 짓 다 지켜보고 있다 경고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주가 지우를 떠올리길 바라고 자연스레 겁을 먹길 바라는 것 같았다.

여주는 다음은 자신이 될까 무서운 게 아니라, 자기 때문에 또 누가 죽을까 봐 무서웠다. 이거 하나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해 또 누군가 다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정국을 내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꾹꾹 눌러 놓았던 겁이 한꺼번에 밀려와 결국 눈물이 났다.


“너무 무서워.”

“뭐가?”

“오늘 안 가면 안 되겠지?”


정국이 여주를 살며시 떼어 내 바라봤을 땐, 여주가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고 있었다. 별로 위험한 일 아니라고 달래 보아도 여주는 좀처럼 눈물을 멈추지 못해 휘청였다. 지금 이런 행동이 무엇보다도 정국을 가장 부담스럽게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입을 틀어막은 손이 덜덜 떨렸다. 정국은 여주의 볼을 손으로 쓸어 주며 걱정스레 눈짓했다. 여주가 정국의 터진 입가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그러면 그럴수록 점점 더 눈물을 그치기 힘들었다.

‘왜 오빠 입에 상처가 있어.’

여주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여주야. 무슨 일 있어?”

“불안해. 너무 불안해.”

“왜 그래.”

“오빠. 난 정말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 같아.”


정국은 심란한 표정으로 여주를 다시 끌어안았다. 작전 나가는 날 불길하게 눈물을 보여 불안하거나 짜증이 나는 게 아니라, 도대체 뭐 때문에 여주가 이렇게 감정 절제를 못 하는지 걱정됐다. 자격 운운하는 여주의 말을 곱씹으며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생각했다. 정국의 작전을 직접 살펴 주지 못해 이러는 건 아닐 테고,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알아차리기 힘들었다. 그저 가만히 여주의 머리를 몇 번이고 쓸어 주며, 괜찮다는 말을 수없이 반복했다. 작전까지 남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안은 자세 그대로 손목시계를 흘깃 바라본 정국이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지민의 대답이 들려왔다. 정국은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지민을 향해 고갯짓했다. 지민은 윗옷을 걸치다 말고 제 맨살을 손으로 쓸었다.


“형. 왜요?”


의아한 지민의 물음에 정국이 덤덤한 표정으로 눈을 맞췄다.


“나랑 잠깐 어디 좀 가자.”

“어디요? 오늘 작전 아니에요?”

“그전에 할 일이 있어. 내가 지금 우리 애들 얼굴 보기는 싫고, 너 데리고 나간다고 말해 놨어. 시간 없으니까 빨리 준비해.”


서두르라는 말에 지민은 허둥대며 옷을 걸쳤다.


“따로 챙길 거 있어요?”

“없어. 몸만 와.”


지민의 물음에 정국은 차 키를 손안에 굴리며 대답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정국의 뒤를 따르던 지민이 제 손을 살살 쓸었다.

‘어딜 가는 거지?’

목적지도 말해 주지 않고 무작정 따라오라 하는 정국에게 이상함을 느꼈다.






도착한 곳은 회사였다. 정국은 역시나 말 한마디 없이 걸음을 옮기기만 했다. 정국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니, 지민이 다급하게 손목을 잡으며 말했다.


“여기 들어가면 여주한테 알림 가는 거 알아요?”


정국은 지민과 빤히 눈 맞추며 대답도 고갯짓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 만에 대답했다.


“그게 왜. 문제 있어?”


지민은 지나치게 망설이는 표정으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불안해해요. 누가 사무실 들어오는 거, 강박 있을 정도예요. 미리 말해 주는 게 좋아요.”

“말하기 곤란한 상황인데. 사무실 간다는 말은 안 했거든.”

“그럼 어쩌게요?”

“나중에 말하려고 했지. 일 보고 나서.”


지민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비켜 보라는 듯 정국의 팔을 툭툭 치고는 조심스레 사무실 잠금을 해제했다. 삐리리, 경쾌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마자 지민은 몸을 한껏 숙여 허벅지 위에 팔을 얹었다. 뭘 하는 건지 몰라 정국이 미간을 구기니, 지민이 다시금 몸을 일으켜 멋쩍게 웃었다.


“이게 그냥 센서거든요. 거기만 살짝 피해서 들어가면 알림 안 가요.”

“….”

“센서가 위아래로 있어서 조금 추하긴 한데. 그래도 뭐.”


그 말과 함께 위로는 몸을 한껏 숙이고 아래로는 언덕을 넘듯 조심스레 발을 들인 지민이 날렵한 동작으로 순식간에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정국에게 똑같이 해 보라며 제 허벅지를 툭툭 쳤다. 정국은 문 앞에 우두커니 서서 지민을 빤히 바라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방법으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침묵이 찾아오니, 정국이 사무실 안을 쓱 둘러보며 낮게 말했다.


“많이 해 본 것 같네.”

“그래 봤자 헝가리 가기 전에 한두 번이요. 전 이 사무실 얼마 못 써서…. 옛날에 술 먹고 집에 가기 싫어서 여기에서 잤거든요.”

“혼자?”

“그건 왜요?”


반문하는 지민에게 정국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내 빠르게 걸음을 옮겨 팀장실 비밀번호를 꾹꾹 눌렀다. 379200. 망설임 없이 잠금을 해제하는 모습에 지민이 놀라 정국의 앞을 막았다.


“형. 지금 뭐 해요?”

“나 너한테 물어볼 거 있어.”

“뭔데요.”

“듣고 싶으면 지금부터 서류 하나 찾아.”


당황한 지민을 지나쳐 팀장실에 들어선 정국이 고민 없이 곧장 금고로 향했다.


“무슨 서류를 찾는데요? 그걸 왜 여기서 찾는데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지민의 질문에도 정국은 금고 앞에 서서 비밀번호가 무엇일지 골몰히 고민에 잠겼다.


“너 여기 비밀번호 알아?”


정국의 물음에 지민이 그건 알지 못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정국은 여섯 자리 숫자 조합을 떠올리며 미간을 구겼다.

‘비밀번호가 뭘까.’

금고에만 집중하며 결혼기념일을 눌렀다. 뒤이어 가족들의 생일, 차 번호, 여주와 처음 만나기 시작한 날 등등 떠오르는 대로 빠르게 하나씩 눌러 보기 시작했다.


“금고 비밀번호는 여주 말고 아무도 몰라요. 그거 열어서 뭐 하시게요.”

“….”

“형.”

“지우 기일이 언제야?”

“네?”

“언제냐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말에 무표정으로 지민을 가만히 보던 정국이 문득 첫 만남이 떠올라 고개를 살짝 꺾었다.

‘교동사거리. 거기에서 만난 게 언제였더라.’

아주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날짜를 기억해 내고는 하나하나 꾹꾹 힘을 줘 번호를 눌렀다. 그 순간 철컥, 열린 금고 문을 바라보며 지민이 놀란 마음과 불쾌한 마음이 반반 섞인 표정으로 미간을 구겼다. 정국은 허탈한 미소와 함께 금고 문을 손으로 쓸었다.

‘비밀번호가 이게 뭐야.’

정국이 잠시 입술을 물었다가, 망설일 시간이 없어 몸을 숙였다.


“….”


정국은 가장 위에 있는 찢긴 종이 두 장을 이상하게 한 번 보고는 금세 본론에 들어갔다. 금고 안의 수많은 보안 서류를 대충 손으로 훑으며 무언가를 찾는 정국의 모습에 지민이 어느새 한 발짝 물러났다. 지민은 정국이 도대체 왜 저러는 건지 이유를 몰라 의아하면서도, 자기를 여기 왜 데려온 것일까 궁금했다.

‘나한테 묻고 싶은 게 뭐지. 왜 허락 없이 여주 물건에 손을 대지. 싫어할 거 뻔히 알면서.’

지민이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꼭 쥐는데, 그 순간 원하는 걸 찾은 정국이 쓱 소리를 내며 서류철 하나를 꺼내 들었다.


“무조건 여기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

“여주가 그렇게 겁에 질릴 만한 이유는 이거 하나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

“오늘 아니면 언제 이걸 몰래 꺼내 보겠어.”


정국은 서류철을 열어 빠른 속도로 훑었다. 왜인지 긴장이 된 지민이 정국을 잔뜩 경계하며 다리에 힘을 주니, 정국이 그런 지민을 흘깃 바라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형. 진짜 왜 그래요?”


지민이 묻자, 정국이 대답했다.


“부장님한테 3년 전 지우 일에 대해 들었어. 그리고 그 후로 내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도대체 뭘요.”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갇히는 모양새가 됐다고 그랬지? 바깥에서부터 사냥감을 몰 듯이 그렇게.”

“….”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다고 했어. 맞아?”


지민은 답이 없었다. 그저 눈이 새빨개져서는 살며시 시선을 피했다. 정국은 서류철 안에서 사진 더미를 꺼내 들어 하나하나 천천히 넘겨 보았다. 쓱, 쓱, 사진 넘기는 소리가 견디기 힘들어 눈을 감는 지민이 보이지도 않는지, 정국이 조곤조곤 말했다.


“그게 참 이상하단 말이야.”

“….”

“아무도 못 들어간다는 말은, 아무도 못 나온다는 말하고 같거든.”

“….”

“그때 너 어디 있었어. 왜 안 들어갔어?”

“….”

“사람 하나 들어갈 구멍이 없었다면서 그 많은 놈들을 왜 한 명도 못 잡았어.”

“….”

“도대체 왜. 시체가 증발한 거냐.”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예요?”


지민이 한참 만에 정국과 눈을 맞췄다. 정국의 의도를 물으며 눈물을 뚝뚝 흘려 냈다. 정국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쉬지 않고 말했다.


“현장 검증 누가 들어갔어.”

“여주가요.”

“특이점 들은 거 있어?”

“보고서에 나와 있잖아요.”

“그거 말고, 여주한테 들은 거.”

“기억을 못 해요.”

“뭐?”

“여주가 기억을 못 한다고요.”


기억을 못 한다는 지민의 대답에 정국은 제 귀를 의심했다. 그 방대한 프로젝트를 통째로 다 외우면서, 현장 검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의아했다. 정국이 얼빠져 있으니 지민은 손등으로 눈물을 대충 닦으며 정국과 눈을 맞췄다.


“종종 그래요. 불안하거나 겁먹거나 화가 나면 기억을 잘 못 해요.”

“시신 검안은 누가 들어갔는데?”

“그것도 여주가요. 부장님이랑 같이. 물어보니까, 기억이 잘 안 난다고 했어요.”

“너는?”

“제가 뭘요.”

“너는 시신 한 번도 못 봤겠네.”


지민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정국은 사진 한 장을 지민 앞으로 내밀었다. 갑작스레 눈앞에 나타난 사진에 지민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느라 화분 하나를 깨트리고 말았다. 쨍그랑, 굉음이 울려 퍼졌다. 지민은 숨을 거칠게 쉬며 정국을 노려봤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지민의 물음에 정국은 지나치게 차분한 표정으로 더 자세히 보라는 듯 사진을 흔들었다.


“봐 봐. 이거 지우 맞아?”

“형. 제발….”

“똑바로 봐. 네가 안 보면 누가 봐.”

“….”

“지우가 맞는지 보라고. 너희끼리만 아는 신체 비밀 같은 거, 그런 거 없어?”

“그렇게 난도질당했는데 대체 뭘 보라고요.”


지민은 흐느껴 울었다. 지민의 애원하는 말에도 정국은 흔들림이 없었다.


“너무 괴로워요. 안 하면 안 돼요?”

“너희 팀에서 이거 할 수 있는 사람 누가 있을 거 같아? 너 아니면 이거 누가 하겠냐. 그러니까 똑바로 쳐다봐.”


계속되는 정국의 다그침에 지민은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사진을 바라봤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훼손된 사진 속 시신을 보며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그런 지민과 대조되는 정국의 담담한 얼굴에서, 그보다 더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항상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사진을 보니까 더 이상해. 이걸 보고도 아무도 의심 안 했다는 게 제일 이상해.”

“신원 확인만 다섯 번을 했어요. 우리도 믿고 싶지 않았는데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네가 바로 들어가기만 했다면, 아니면 그중 누구라도 한 명 잡았다면, 그것도 아니면 현장에서 시신을 발견하기라도 했다면. 그러면 아무도 의심 안 하지.”

“들어갔을 땐 이미 아무도 없었어요. 나도… 지우가 거기 있는 줄 몰랐어요. 알았다면 바로 들어갔을 거라고요.”


정국이 사진을 서류철 안에 모두 넣고 지민에게 건넸다. 지민이 의아해하며 품 안에 서류를 꼭 안으니, 정국은 손목시계를 한 번 바라봤다가 다시 눈을 맞췄다.


“나 양복집 갔다 오자마자 너 나랑 같이 이 현장 가는 거다.”

“….”

“내가 널 의심하지 않길 바란다면, 현장 가서 그날 있었던 일 하나도 빠짐없이 다 설명해야 할 거야.”

“….”

“그때까지 똑바로 좀 봐. 외면한다고 달라지는 거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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