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1)



201X년 8월 30일.

여전하게도 추적추적 비가 쏟아지는 여름의 끝자락. 오늘따라 문득 머리가 무거운 느낌에 눈을 뜨고도 한동안 누운 채로 멍하니 천장만 응시했다. 이런 현상은 또 처음인데. 기묘한 불안감에 박동이 불규칙적으로 내달린다. 지금껏 수많은 오늘을 겪어왔지만 단순한 기분 문제가 아닌 실제 두통을 느낀 적은 없었다. 또다시 루틴이 파괴되었다. 또.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없는 이변은 상황을 복잡하게만 만드는 탓에 그다지 좋아하지 않건만. 통제할 수 없는 현상은 껄끄럽다. 멋대로 휘둘리며 끌려다니는 상대는 한유진만으로 족했다. 아무나 쉽게 잡을 수 없는 목줄인데. 무슨 일이 또 일어나려는 걸까.

이게 무얼 의미하는지, 좋은 쪽일지 안 좋은 쪽일지는 상황이 닥쳐봐야 알 수 있을 터. 당장 확인할 수도 없는 일로 전전긍긍만 할 수는 없다. 꼬리를 물려 달려드는 생각을 애써 틀어막고 몸을 일으켰다. 시계 초침 돌아가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고요한 방안은 불안을 금세 진정시킨다. 모든 게 전부 변하더라도 이곳만은 나의 의지가 없는 한 변할 리 없으니. 여기에 있으면 안심이 되어 좋았다. 언제 어느 때고 똑같은 모습이 나에게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다. 온종일 틀어박힌 채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꼴인데도 그랬다. 객관성을 잃은 판단이래도.

“…아주 지극정성이야. 누구 말마따나.”

헛웃음 지으며 이마를 짚는다. 어떻게든 부정하고 외면하여 아등바등. 그래 봐야 내 작태가 한심하다는 사실에 변함은 없는데도 이게 뭐 하자는 짓인지 모르겠다. 대체 뭘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언젠가 한 번 유진과 크게 싸운 적이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싸웠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토라졌다는 쪽이 더 가까우려나. 어떻게든 달래고는 싶은데 도통 그 이유가 짐작도 가지 않아서. 어쩌면 좋을지 몰라 곤란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하다. 그러다가 결국 내 꼴을 보다 못한 유진이 먼저 백기를 들었었다. 본인이 화가 난 이유를 내게 설명하면서 단단히 주의 주는 것으로 마무리했었는데, 그때 격분하던 유진의 말이 그랬다. 나는 너무 자기중심적이라고.

‘진지하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요. 내가 볼 땐 성현제 씨 안에는 나보다 본인이 더 위에 있을 것 같아요.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당신 애인인데.’

‘유진아.’

‘다른 건 제가 양보할 테니까, 저랑 관련 있는 일에 한해서는 저를 먼저, 아니 저도 같이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삐…진 이유는 그거.’

그땐 제법 충격을 받았었나. 분명 시기상으로 그렇게나 멀지는 않은 과거일 텐데, 이상하게도 까마득히 먼 예전처럼 느껴진다. 열심히 불만을 토로하며 종알거리던 연인의 표정마저 기억 안 날 정도로. 사실 이건 아주 먼 옛날 일만 해당하는 건 아니었다. 오늘에서야 문득 깨달았다. 한유진의 얼굴이, 그의 표정 하나하나 사소한 부분들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거기에 뇌를 찌를 듯한 두통까지.

기어이 머리가 고장 나버렸나. 긴급 사태라면 긴급 사태였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언젠가는 이렇게 되리라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단지 올 일이 왔을 뿐이고 그게 지금인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아무렇지 않아질 수 있었다.

물론 나 자신이 아무렇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유진에게는 무조건 숨겨야 하지만.

“들켰다간 무슨 난리가 날지 모르니. 그 작은 몸으로 행동은 불도저가 따로 없어.”

한유진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난다. 사랑스러운 연인의 활기 넘치는 미소가 그리웠다. 하루 온종일 보고 있어도 지루하지 않을 텐데. 며칠씩이고 품에 끼고 살아도 질리지 않을 텐데.

계속해서 땅을 파고 들어가려는 생각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태평하게 자책이나 할 때인가. 자격 이야기를 몇 번을 더 해야 무의식도 그를 자각할 수 있을까. 헷갈려선 안 될 내 역할은 딱 하나였다. 8월 30일에 찾아오는 한유진에게 최선을 다해 잘해주는 것. 불필요한 걱정 따위를 그가 갖지 않도록 신경 써서 조심하는 것. 어렵지 않다.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반복해 온 일이기에 이쯤이야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침대 옆 협탁에서 찾은 핸드폰의 전원을 끈다. 눈두덩을 한번 가볍게 문질러주고 방을 나섰다. 오늘은 커피가 필요할 듯했다.

 

 

한유진이 나타나면 온 신경이 그에게만 집중되기 때문에, 그가 찾아오기 전 홀로 보내는 시간은 내가 유일하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평소라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무엇에도 전전긍긍하지 않고 머리를 비운 채 멍하니 창밖만 보거나 했을 텐데. 오늘은 어쩐지 마음이 자꾸만 수런거리는 탓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다. 좀처럼 한 생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한유진. 모든 사고에 그가 끼어든다.

커피를 내리기 위해 물을 끓이다가 사고를 낼 뻔한 건 보통이었다. 거실로 나오다가 낮은 탁상에 정강이를 박고, 있지도 않은 턱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하고. 손에서는 힘이 빠져 커피가 든 컵을 떨어뜨릴 뻔하기도 했다. 다행히 완전히 떨어뜨리지는 않았고 내용물도 거의 마신 상태여서 더 큰 사고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이쯤 되면 이제는 헛웃음까지 나는 것이다. 꼴이 말이 아닌 것에도 정도가 있을진대. 천하의 성현제가 이러고 있는 걸 알면 비웃는 걸 넘어서 진지하게 병원에 가보라고 걱정할 사람들이 몇몇 떠오른다. 언제 마지막으로 연락했는지도 까마득할 만치 오래된 연이었으나, 전부 친절한 이들이니. 아마 지금도 연락이 끊긴 내 걱정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 어쩌면 집 앞이나 회사까지도 찾아갔을지도 모르고. 소영이는 내 욕을 하고 있을까. 오늘도 내게 연락을 해 올 텐데.

가장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얼굴은 역시 한유진이었다. 바보 같은 한유진은 지금쯤.

“…아. 이런.”

소파에 앉은 채 생각을 이어가다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판도라는 열어서는 안 될 항아리를 열어 세상에 재앙을 퍼뜨린다. 내 손 안에 있는 것도 그와 같은 항아리였다. 여는 순간 퍼지게 될 재앙의 범위는 나 자신. 항아리가 열린대도 하늘은 놀라울 만치 평온할 테지만. 세상엔 외면 만큼 쉬운 일이 없기 때문에, 나 또한 나태하게도 외면을 택한다. 이미 몇 번이고 쌓은 흙 위로 또 한 번 새로운 흙을 퍼 올린다. 지치지도 않고 오로지 은닉에만 안간힘을 쓴다.

등받이에 머리를 묻으며 감은 눈 위를 손으로 지압한다. 이런 순간에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어떻게든 절박해지지 않으려는 나를 비웃듯이 참을 수 없는 욕망이 기어이 만조를 이룬다. 땅굴 전문인 거 티 좀 내지 말라며 장난스레 타박하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헤집었다. 장난인 척 본심을 숨긴 걱정이 좋아서 일부러 그런 척을 했던 것도 몇 번이었나. 그때마다 유진은 왈칵 화를 내면서도 안심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었다.

‘내가 당신 보면서 일희일비하는 게 그렇게 좋아요? 자꾸 그러다가 양치기 소년이 되는 거예요. 양치기 청년. 아니, 중년인가? 장년?’

그 말을 농담으로만 여길 게 아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이 떨어지기만 하는 생각을 가만 방관하고 있을 때였다. 나를 구원해줄 이가 마침내 철문을 열고 등장하시니.

“해피 버스데이! 와, 밖에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거 있죠? 우산이 이게 의미가 있나 싶었다니깐요.”

“…유진 군.”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현관 안쪽에 세워두던 유진이 샐쭉 웃더니 금세 표정을 굳힌다. 아아. 눈치 빠른 내 연인에겐 도저히 비밀을 만들 수가 없다. 신발을 벗자마자 빠르게 내게로 걸어온 유진은 망설임 없이 양 볼을 붙잡고는 걱정스레 시선을 맞췄다.

볼에 닿는 온기가 황홀해서 눈치채는 게 늦었다. 한유진이 나를 만졌다고. 통과되지 않는 진짜 손의 체온이 느껴진다는 게. 말이 되나? 어째서 벌써? 심장이 거칠게 덜컥거리는 걸 들킬까 봐 조마조마해졌다.

“어, 또 저기압이에요? 당신 생일인데 오늘은 좀 봐주지. 항상 생각하지만, 숙주한테 배려가 참 없어요.”

“하하. 내가 잘 말해두겠네.”

“따끔하게?”

“물론. 눈물을 아주 쏙 빼놓게.”

충분한 답변이었는지 한번 크게 고개를 끄덕인 유진이 그대로 손을 떼고 물러난다. 내게서 멀어지는 손을 붙잡을 뻔한 주먹을 말아쥐었다. 동요를 숨기는 것도 겨우라 얼굴을 마주 볼 수도 없었다. 이런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뭐라고 답해야 하지.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유진은 별 이상을 느끼지 못한 듯, 거실을 쏘다니다가 주방으로 쏙 들어갔다. 나도 심호흡 몇 번으로 숨을 고르고 그의 뒤를 쫓았다.

뭘 하려는 건지 활짝 열어놓은 찬장 앞에서 턱을 짚고 있는 유진에게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걸었다. 절대 좁지 않은 주방에 굳이 나란히 서면서도 그와 팔이 닿지 않도록 거리를 조심하는 내가 한심했다.

“커피 내려줄까?”

“어, 좋죠. 오늘은 날이 꿉꿉하니까 각설탕 세 개로 부탁해요, 마스터―.”

“이런, 각설탕이 다 떨어져서 다섯 개까지가 최대입니다만.”

“못 들었어요? 세 개라니까요?”

못 들은 척 물을 올려두고 각설탕 통을 꺼내니 기가 찬 지 연신 헛웃음을 터트린다. 달각달각 마른 컵에 각설탕이 떨어지는 소리에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작은 허밍이 뒤따른다. 흠음음, 꾹 다문 입술로 흘러나오는 귀여운 소리는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거무직직한 시선을 느낀 유진이 고개를 돌리니 눈이 마주치는 건 순식간이었다. 역시. 키스하고 싶은데. 해도 될까. 닿을 수 있을까. 아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시도 정도는 해볼 만하다. 자정까지 쭉 이어질 앞으로의 전개를 위해서도. 그리 결심을 내리고 실행에 옮기려던 찰나, 그의 얼굴에 배시시 웃음이 걸림과 동시에 요란하게 끓던 포트 소리가 뚝 그쳤다.

하마터면 손에 쥔 컵 손잡이를 깨뜨릴 뻔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입안이 괜히 쓴 느낌에 혀를 한번 차고 억지로 고개를 튼다.

“프림은 섞어 드릴까요, 손님?”

“아뇨, 그냥 주세요. 친절하시네요. 각설탕은 고집쟁이지만.”

쪼르르, 거름망을 지나 탁하게 쏟아지는 따뜻한 커피에 각설탕이 녹아드는 모습을 관조한다. 새까만 커피에는 항상 알 수 없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무엇이 섞이더라도 티 나지 않는 까만 물. 각설탕을 몇 개를 넣어도 아예 안 넣은 것과 구분하기는 힘들겠지. 이런 것에마저 일일이 상념이 밀려드는 걸 보면 확실히, 내가 많이 지치기는 한 듯싶다. 이제 슬슬 때가 온 건지도 모르겠다. 전부 내려놓고 안식에 들어야 할 때가.

“저희 다방의 시그니처라서. 이 점은 양보할 수 없거든요. 손님의 기호에 완벽하게 부합하리라 자신합니다. 드셔보시겠어요?”

“아, 고마워요. 얼마죠?”

“사실은 개업한 게 오늘이라서요. 당일 한정으로 특별히 무료로 커피를 제공해드리고 있습니다. 또 들러 주시라는 뇌물 차원에서요.”

“와, 친절하셔라. 많이 버실 거예요.”

호록, 컵을 들고 한 모금 들이켠 유진이 이내 방금 막 생각났다는 양 대수롭지 않은 투로 말을 이었다.

“근데 핸드폰은 왜 꺼놨어요?”

“……뭐?”

“여기 도착하기 전에 전화하려고 했는데 꺼져 있더라고요? 혹시 아침부터 오늘 유독 저기압이었어요? 예민하신 우리 성 회장님 생신날인데.”

“…….”

돌도끼에 머리를 맞은 듯 불시에 들어온 충격에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핸드폰이 꺼진 것 정도야 전화를 해 봤으면 누구든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유진은 아니었다. 그는 분명, 자정이 되면 사라져버리는 허상에 불과한 내 연인은 애초 나에게 전화할 수가 없을 텐데. 흘긋 확인한 그의 표정에선 한 치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둔 게 사실이니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 아니 그렇지만, 대체 어떻게, 그보다도 한유진에게 핸드폰이 있나? 있다면 어떻게 있는 거지?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한유현과 관련이 있나?

영문을 알 수 없는 변화는 숫제 공포였다. 지금이라도 당장 전화를 걸어 그의 동생에게 자초지종을 묻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눌렀다. 그에게 연락하는 건 최후의, 최후의 수단을 쓰고도 안 됐을 때의 가장 마지막 대책이다. 그 전에 번호부터 이미 바꾸었을 수도 있고. 처음부터 제 형과 만나는 나를 탐탁지 않아 하던 도련님이었으니 충분히 그것도 가능성 있었다. 이런 얘기를 꺼냈다간 친절하지 않은 목소리로 병원을 추천받고 차단만 될 터다.

한유진과 닮은 듯 닮지 않은 듯 불같은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패닉에 가깝게 공황하던 머릿속이 그제야 조금 차분해졌다. 조금 전 유진이 마지막으로 뭐라고 물었었지. 아, 핸드폰. 너무 오래 침묵한 건 아닐지 살짝 초조를 느끼며 고르고 골라낸 답을 신중하게 입에 올렸다.

“오늘은.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서.”

“누구에게도? 그거 혹시 저도 포함인 건?”

“그럴 리가 없잖은가.”

절대, 절대로. 지레 놀라 달려들며 부정하는 꼴이 웃겼는지 한유진은 키득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번 한 번은 그렇다고 쳐 주겠다는 듯한 태도였지만, 진실로 내 말을 믿고 있다는 것을 안다. 오랜 연인이기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연인의 지위를 이용해 그의 믿음을 산 것 같아서 어쩐지 목에 바늘이라도 걸린 듯 따끔한 기분이었다. 또 한편으론 헛된 희망인지 자조인지 모를 감정도 들었다. 한유진은 과연 자신이 현재 어떻게 된 상태인지,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지 모든 전말을 알고 난 뒤에도 지금과 똑같은 눈으로 나를 봐줄까.

“그나저나 비가 이렇게 계속 와서야 큰일이네요. 올 때도 고생했는데, 돌아갈 때까지 안 그치면 어떡하지.”

“자고 가면 되지 않나.”

“서비스가 후한 애인이라 좋죠?”

“황홀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군.”

솔직히 말해 나는 두려웠다. 한유진에게 모진 시선을 받을 준비 같은 게 되어 있을 리가. 그 하나를 못 해서 이렇게 돼버린 것인데. 겁에 질려 회피밖에 할 줄 모르는 한심한 인간인 걸 내 연인에게만은 끝까지 들키지 않았으면, 지켜질지 그러지 못할지도 모를 바람만 하루하루 또 늘어간다.

 

 

“오늘은 저녁 나가서 먹을까요?”

한유진이 외식 제안을 꺼낸 것은 시답잖은 얘기들도 세상에서 제일 흥미로운 화제인 마냥 농담 따먹듯 주고받던 도중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구겨질 뻔한 미간을 판판하게 유지하는 데에 안간힘을 썼다. 대체 오늘의 한유진은 내 심장을 몇 번이나 철렁이게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그토록 사랑하는 연인과의 한때인데 오늘따라 유독, 행여나 말실수라도 하진 않을까 신경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입안에서 몇 번이고 점검을 돌린 뒤에야 그나마 매끈하게 말이 나왔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뭐 어때요. 비 오는 날엔 드라이브하기도 좋죠. 운치 있잖아요?”

“운치라니……. 그러다 사고라도….”

사고라도 나버리면.

가슴에 돌이라도 얹힌 듯 답답증이 든다. 손의 떨림을 감추려 자연스러운 척 팔짱을 꼈다. 목소리가 떨리고 있지는 않을까. 시선이 부자연스럽지는. 나도 모르게 다리를 떨고 있지는 않나. 가볍게 자가점검을 한 후에야 다음으로 입에 올릴 말을 고를 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더라. 사고가, 그러니까 빗길이, 운전을, ―아. 드라이브. 외식을…하겠다고. 한유진이? 어째서?

“성현제 씨? …괜찮아요? 내가 괜한 말을 한 거면 굳이 들어주지 않아도…….”

“아니, 괜찮네. 외식. 외식이라. 나쁘지 않지. 좋아.”

골백번을 고뇌하고 고심해도 나는 한유진의 한마디에는 절대로 이기지 못했다. 괜한 말을 한 건 아닌지 울적하게 가라앉은 얼굴 앞에선 기껏 골라내던 거절도 쏙 들어가 버린다. 어떻게 안 된다고 할 수 있겠나. 네 부탁이라면 법이라도 바꿀 수 있거늘.

“억지로 그러지 않아도 돼요. 진짜로요, 전 진짜 괜찮아요.”

“아냐. 이젠 내가 나가고 싶어졌네. 마침 비도 오고, 말이지.”

“…마침 비도 오고.”

시선이 맞닿는다. 끄덕.

확답을 받듯 한 번 더 작게 읊조리고야 유진은 환한 미소를 돌려준다. 이 미소 하나에 나는 세상을 갖는다. 상실하는 두려움 앞에 무슨 짓도 가능케 했다.

“그럼 나갈 준비를…, 준비는 나만 하면 되겠군. 유진 씨는 저녁 메뉴를 생각해 주겠나?”

“분부대로 하죠!”

한유진을 홀로 거실에 두고 들어가기가 잠깐 망설여졌으나 마음을 다잡고 걸음을 재촉했다. 내가 얼른 해치우고 나오는 편이 나았다. 그러는 동안 차곡차곡 쌓일 불안도 밖에 나와 유진과 눈을 맞추면 순식간에 기화될 걸 안다. 나는 그런 식으로 설계됐으니까. 헛웃음이 나올 만큼 단순한 구조인지라 한유진 하나면 오류도 지연도 없다.





성현제 캐해석 대잔치... 저는 왜이렇게 부끄러울까요 진짜 왜그랬지...

쓰는 저는 재밌는데 읽는 분의 느낌은 어떠실지 정말 전혀 모르겠어요 ._.

뭐 어쨌든 지금은 즐거우니 마감까진 당장을 즐기는 걸로ㅎㅎ


판소처돌이 | 중독 유진른 문대른 | 리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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