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준다더니, 다니엘은 이전보다 마담뚜 노릇에 더 적극적으로 타올랐다.

이제 뭔 짓을 하면 다니엘이 사라질까, 성우는 말리고 싶었지만 활활 타오르는 녀석을 막기도 힘들어서 그냥 내버려뒀다.


그러나 도와준답시고 다니엘이 벌이는 일은 고등학생, 많이봐줘야 대학생 수준의 일들이라 어처구니가 없었다.


먼저, 여자들이 개를 좋아한데요! 하면서 애견사이트를 뒤지는 놈을 막았다.

우리집에 개는 너하나로 충분해. 라는 말에 삐진것 같았지만. 

그럼 동호회는 어떨까요, 하고 진지하게 물어와서 성우는 귀찮은건 싫어.라고 거절했다.


번번히 이어지는 거절과 핑계에 시들해질만도 한데, 뭐하나에 꽂히면 지지 않는 성격인지 다니엘은 멈추지 않고 여러가지를 들이밀었다.


그런 다니엘의 노력이 가상해서 성우는 수락은 하지않아도 말리진 않았다.

한편으론 녀석도 나쁘지 않은데, 어차피 돈은 남아나는 자신이 평생 얘를 이렇게 끼고 사는것도 괜찮지 않을까. 란 생각도 들었다.


그냥저냥 평온한 나날들이 지나갔다. 일어나면 같이 대충 차린 아침을 먹고, 심심하면 부자한량 답게 성우는 다니엘을 데리고 전시회나 콘서트를 가거나, 그도 아니면 집에서 뒹굴었다. 가끔씩 다니엘이 이상한 만남시나리오를 짜오면 거절하는게 다였다.


별일없이 지나가던 날, 성우의 집에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원래 집에 사람을 잘 부르지 않기도 하고 특별히 올 사람도 없어 누구지, 하고 현관으로 나간 성우는 인터폰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의 악우이자, 아버지의 비서인 민현이였다.

그동안 연락하는걸 대놓고 무시했더니 직접 찾아왔다.


주말도 아닌데 평일에 굳이 찾아온거보면 귀찮게 하려는게 틀림없어 성우는 짜증을 내며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가식적인 미소를 가득 띄운 민현이 성큼성큼 현관으로 들어왔다. 

번드르르 하게 고급수트를 차려입고, 언제나 외모만은 최고 잘난 악우가 반가운척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옹성우."

"왜 왔어."

"네가 연락을 받아야지 말이지."


성우의 박대에도 민현은 넉살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렇게 웃고있어도 아마 그동안 연락을 씹은거에 대해 벼르고 있을게 뻔했다.

 

성우는 속으로만 혀를 차는데 간만의 방문객이 누군지 궁금한지 다니엘이 뒤에서 기웃거린다.


"뒤에 있는 분은 누구야?"

"그냥 아는 동생. 지방에서 잠시 서울올일 있다길래 있으라고 했어."


한번 친 거짓말이라 술술 잘나온다. 성우의 거짓소개에 다니엘이 어색하게 안녕하세요, 인사했다.

겉으로 친화력 좋은척은 잘하는 민현이 제법 살갑게 네,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받아주고, 성우에게 비아냥댔다.


"너한테 그런 선심이 있는줄 몰랐다. 아는 동생한테 집까지 빌려주고. 옹성우 천사 다됬네."


천사란 말을 들으니 괜히 찔려, 성우가 짜증스레 말했다. 


"그래서, 왜왔어. 피차 서로 잘아는 사이에 본론부터 말해."

"네방 가서 말할까?"


별 반박없이 성우가 민현과 방으로 향했다.

오고갈 이야기가 뻔하고 짜증날거같아 다니엘에게 보여주고싶지 않았다.

눈치빠른 다니엘은 분위기를 읽고, 있는듯 없는 듯 조용히 거실로 빠져나갔다.


방문을 탁 닫고 들어오자마자 민현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냉혈하게 생긴 창백한 얼굴이, 안그래도 더 차가웠다.


"아버지가 시켜서 온거지."

"잘 아네, 옹성우. 이제 귀찮게 하지말고 좀 본가로 돌아가."

"난 안가. 아버지야말로 포기하라고 해."

"넌 진짜 왜그렇게, 철없이구냐."


진심으로 한심해하는 민현의 말에 울컥했지만 아무말하지 않았다.


성우가 돈많은 백수생활을 할 수 있는건 집안이 그냥 부자도 아니고 준재벌이기 때문이었다.

삼성급으로 큰 계열사는 아니어도 성우의 부친 이라는 자는 요식업계의 큰손이었다.

그리고 모든 재벌의 안좋은 이미지의 견본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여자관계가 너저분했던 부친의 불륜으로 자신이 태어났다.

그래도 아버지가 이 아버지일줄은 몰랐을땐, 편모가정에서 나름 부산에서 잘살았던거같다.

하지만 후계를 이을 아들이 없다는 명목아래 강제로 어머니와 생이별하고 친부의 집에 끌려오고나서부터, 한시도 마음이 편한적 없었다.


계모이자 아버지의 정처인 여자의 싸늘한 무관심이나, 자신을 대놓고 증오하는 이복누나가 그러했다.

아비의 관심은 오직 후계자로서의 자신이었다.


각종 경영수업을 강요하고 구식인 제왕학을 배우게 했으나 모두 고역이었다.

원래 하고싶은 일이있던 성우의 의사를 무시하고 강제로 경영학과로 보냈을때부터 성우는 자기의 인생을 모두 내려놨다.

별별 지랄을 다 해도 안내보내더니 여자남자 가리지 않고 집에다 끌어들이니 마침내 쫒아냈다.


그런 자신과 반대로, 민현은 자기네 집안과 커넥션이 깊은 집안에서 태어나 본인의 부친은 물론 제 부친의 기대까지 충족시키는 재원이었다.

비상한 머리, 안정적인 일처리와 냉철한 성품. 


재벌후계자같은건 민현이 더 어울렸지만, 이미 사업에 두각을 보이는 누나도 여자라고 안물려준다는데 자신에게 후계가 갈 리가 없으니, 성우를 이리 닦달하는 거다.

자기를 발판으로 후계를 흔들려는 민현의 속셈이 뻔히 보여 성우는 이가 갈렸다.

어릴때부터 그나마 맘붙이고 같이 지내는 녀석이었지만 이럴 땐 좋아할 수가 없다.


"누나 잘하잖아. 누나나 하라그래."

"넌 네 위치가 아깝지도 않냐? 네가 손만 뻗으면 뭐든지 다 네껀데. 

 한심하게 지금 하는 소꿉놀이는 또 뭔데? 아는 동생이라니, 웃기지도 않는다."


가만있는 다니엘까지 언급하니 화가 치민 성우가 정색을 하고 빈정거렸다.


"그래서, 지금 대대로 우리집안 개놀음 하는 너는 잘하는거고?"

그러자 민현의 표정이 더할나위없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마지막 남은 웃음기마저 지운 녀석의 얼굴은 사람같지 않았다. 민현은 이를 짓이기며 경멸하듯 말했다.


"...말똑바로 해 옹성우. 내가 알량한 의리때문에 오는거 아닌거 알지. 

 넌 네 아버지 아니면 이렇게 찾아올 가치도 없어."


살에 에일듯한 매서운 민현의 말에도 성우는 그냥 자조하는 것으로 넘어갔다.

어차피 말싸움으로 놈을 이길 재간도 없다.


"그래, 난 그런 새끼지."


한풀 꺽인 기세에 민현의 표정이 조금은 덜 사나워졌다. 

천하의 냉철한 개새끼지만, 그래도 민현은 아직 어버지와 다르게 성우가 약하게 나오면 물러지는 구석은 있었다.


"정신차려. 넌 충분히 잘할 수 있으면서 왜그래."

"빈말따위 하지마."


성우는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민현은 성우와의 대화가 피곤한지 침대옆에 놓여진 의자에 기대 앉았다.

어릴때는 나름 격없이 어울려 놀았던 것 같은데, 아버지의 비서가 된 이후부터 눈에 띄게 변해가는 민현이 낯설었다.


문득, 민현도 연애 아닌 사랑이라는걸 할까 성우는 궁금해졌다.


"황민현."

"왜."

"너도 사랑이란걸 하냐."


갑작스런 물음에 민현의 얼굴이 시시 때때 변해갔다. 

당황하는 것같기도 하고, 자기의 속셈이 뭔지 계산하는 표정이었다.


"징그럽게 왜이래. 죽을때 됬어?"

어리둥절해하는 민현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성우가 한번 더 물었다.


"있어?"

한번 더 물으니, 민현의 얼굴이 갑자기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찰나였지만 눈치빠른 성우가 놓칠리가 없었다.


나름 충격이었다. 나보다 더하면 더한 놈이라고 생각한 민현이 포커페이스를 무너트릴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

그 불쌍한 사람 누구야.


눈이 동그레지는 성우를 인식한듯, 빠르게 민현이 표정을 애써 정리하는게 눈에 보였다.

빨게졌던 얼굴이 제 색을 찾아가며, 민현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우리가, 이런거 이야기할 사이는 아니지."

"그래."

별로 궁금하던것도 아니라 쉽게 수긍했다.

완벽히 제 페이스로 돌아왔지만 여간 당황한듯 민현은 허둥지둥 나갈 채비를 했다.


이제 자기는 가보겠다는 말에 썩 꺼지라고 답변해줬다.

자신의 짐을 챙기고 구두를 발에 꿰차는 민현을 얼른 내보내려고 현관문까지 따라갔다.

허겁지겁 나가면서도, 민현이 한마디 덧붙였다.


"너 혹시, 약점 잡을 생각이면 죽을줄 알아. 누군지 알 생각도 하지마."

"뭐래, 내가 넌줄알아."


민현의 엄포에 성우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민현은 잘있어라,맘에도 없는 작별인사를 하고 빠르게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민현의 기우와 달리, 성우는 정말 추호도 악우의 불쌍한 상대따위 궁금하지도 않았다.

다만 민현이 누군가를 저렇게 티날정도로 사랑한다는게 충격으로 다가오기는 했다.


진짜 개나소나 연애 다하나.

지나치게 계산적이고, 타산적인 놈이다. 제 아빠보다 성우의 아버지를 더 따르는 걸 보면 말 다했다.

그런데 그런 민현도 사랑을 한다.


이 전세계에 나만 사랑하지 않는건가.

그래서 내 사랑의 천사란 놈은 저 꼴이 됬나.


성우는 손님갔어요? 하고 빼꼼 거실에서 나와, 자신에게 묻는 다니엘을 쳐다봤다.

평소같이 어리버리한 애샛키의 모습이라 더 짠했다.


하필이면 너도 나같은거한테 걸려서 불쌍하게 됐다.


성우가 툭 던지듯이 다니엘에게 물었다.


"도대체 사랑이 뭐냐."

"뭐냐고 물어도.."


곤란한듯 다니엘이 머리를 긁적였다. 


"말해봐. 정말 모르겠으니까."

성우가 한숨쉬듯 말하며 다니엘을 쳐다봤다.

다니엘은 우물쭈물 망설이다 입을 뗐다.


"음... 사랑은. 그러니까...

 누군가 너무 좋고..너무 절실해서....."


자기가 말하면서도 쑥스러워, 다니엘의 얼굴이 복숭아처럼 핑크빛으로 달아올랐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다니엘이 꿋꿋히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을 보고만 있어도 행복하고, 그 사람도 꼭 행복했으면 좋겠고. 절대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그런 마음이 사랑이에요."


점점 말하면서 확신에 차는지, 그렇게 말하는 다니엘의 두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스스로에게 확신으로 가득차 있는 다니엘이 순간 너무 빛나보여서, 성우는 외면해버렸다.


"그런게 사랑이라면, 난 사랑같은거 못해."

성우는 씁쓸하게 웃었다.


연애는 가볍고 재밌는게 좋았다. 

연애가 무거워지는 기미가 보이면 성우는 도망치듯 그 관계를 짓밟고, 회피했다.

그 과정에서 망가지는 상대방의 마음이나 행복은 헤아려본적이 없다.


이런 내가, 사랑할 수 있을까.


쓰게 웃는 성우를 바라보는 다니엘의 시선은, 그러나 여전히 곧고 당당했다.


"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내가 봐온 성우형은 사랑받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사랑할 수 있어."


한치도 거짓을 찾을 수 없는 순도 100%진심의 말이란걸 녀석의 맑은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사랑받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니. 26년 인생에서 처음 들었다.

사랑의 천사 교육과정에 껴있는 건가 의심이 들정도로 모범적인 말이다.


"네가 뭘보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지만...난 그런 사람이 아닐걸." 


한숨을 한번 쉬고, 성우가 참담한 심정으로 덧붙였다.

"난 나쁜 놈이야. 그럴 자격조차 없어."


"왜 그렇게 생각해요?"

다니엘이 평소와 달리 어른스럽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저런 얼굴 할 줄 알았던가.


"나는 형이 15살때부터 형의 천사였어요.

 형이 날 보지못하던 10년동안 난 계속 형을 봐왔는걸요. 그런 내가 장담해요. 사랑할 수 있다고."


세상에서 제일 낯간지러운 말을 하면서도 다니엘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재차 반복하는 다니엘의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 유치했다.

그런데도 가슴 근처가 간질간질, 이상했다.

10년동안 자신의 옆에서 쭉 지켜봐 왔다는 상대에 대한 존재감이 새삼스레 너무나 크게 다가왔다.

알수 없는 감정이 홍수난 강물처럼 턱끝까지 차올라, 울렁이는 느낌에 숨이 막혀 성우는 일부러 비꼬았다.


"너는 너가 없어질까봐...그러는거잖아. 말은 누가 그렇게 못해."

"또또. 형은 이 버릇좀 고쳐요. 부끄러우면 빈정거리는거.

  매번 이렇게 청개구리같으니까. 내가 그동안 얼마나 속터진줄 알아요. 

 기껏 착하고 좋은 사람 골라서 열심히 썸만들어주면 괜히 딴 상대로 가고. 

 형이란 말도 웃기네. 꼬맹이었으면서."


꼬맹이었으면서, 그 말 한마디가 성우의 마음 한가운데 파동을 일으키며 잔잔히 퍼져나갔다.


자신이 아이라도 되는 마냥 다정하게 바라보는 다니엘의 시선은, 마치 10여년 전 그때 그 시절의 꼬맹이 옹성우를 그리고있는듯했다. 

거의 십여년만에 받는 아이취급이 나쁘지 않아 이상했다.


오로지 선의와 따스함만 담긴 다니엘의 시선이 당황스런운데도, 성우는 정말 꼬맹이었던 시절로 돌아가 위로받는 것 같았다.

울고싶기도, 웃고싶기도 한 마음을 꾹 누르고 성우는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갑자기 애취급은, 까분다."


까분다는 말에 다니엘이 앞니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천사라기엔 너무나 천진한 녀석이, 입가에 움푹 음영을 만들며 햇살처럼 웃는 모습을 보고있으니 성우는 정말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는 기분이 조금 들었다.


차라리 다니엘이 조금 더 일찍 자신앞에 나타났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성우는 생각했다.






=====


성우의 첫키스는 16살 때였다.


지금은 살고싶은대로 막 살고있지만 16살의 성우는 나름대로 주어진 틀과 아버지의 기대에 맞춰 빡빡한 모범생 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중학교때 이미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외모, 타고나길 선천적으로 외향적인 성격과 그럴싸한 말빨덕에 성우의 학창생활은 겉만 보자면 풍요로웠다. 

하지만 그때부터 성우는 이미 인생이 지겨웠다. 냉랭하고 적대적인 가족아닌 가족들의 시선, 원하지 않는 공부, 그 모든 것들이 어린 성우에게 고통스러웠다.


그때 자신의 담임 선생이란 작자가 자신에게 접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다지 이쁘지도, 좋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누가봐도 얌전하고 평범한 젊은 여자 선생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는 성우를 유독 대놓고 편애했다. 그 편애가 나쁘지만은 않았다. 고만고만한 학우들 사이에서 성우가 알량하게 우월감을 얻을 수도 있었고 학교 생활도 편해졌기 때문이었다. 


학부모 방문의 날에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부모님을 대신해 위로해주기도 했다. 그렇게 선생님이란 위치를 방패로, 그녀는 성우의 모든 일상에 가랑비젖듯 젖어들었다.


그래서 그녀의 편애와 애정이 불손한 의도가 있다는 것을 성우는 예민하게 눈치 챘지만 피하지도 않았으며, 피할수도 없었다.


그 나이의 성우는 누군가 자신을 원한다는 감각 자체가 너무 고팠으니까.

같은 동갑내기 여자아이들의 가볍고 풋풋한 사랑은 성우에게는 너무 단내나는 종류였다.


자신을 파괴하는 처절한 종류의 욕망. 사춘기의 성우가 동갑내기와의 풋풋한 첫사랑 대신 선택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좋지 못했다. 몰래 자신에게 감시역을 심어둔 아버지에게 그 교사는 호되게 당해 교직에서 사라졌다.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도 못하고 이별 했는 데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이런 내가 이상한걸까. 라는 마음의 소리를 성우는 무시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만남은 있되 애정은 없는 연애만 줄곧 해오며 되는대로 살아왔다.

애정은 없어도 주로 몸뿐인 연애를 중독처럼 반복했다


그런 주제에, 밤에 혼자 잠드는건 참을 수 없었다.

혼자 자면 꼭 악몽을 꾸었다.


그래도 예전엔 쫌 뜸했는데 최근엔 유독 잦았다.

늘 반복되는 똑같은 내용의 악몽에 성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번쩍 떴다.


등 뒤는 축축히 젖어있고, 눈가가 습했다.

또 이 꿈이야. 우울하게 웅얼거린 성우는 어둠속에 낯익은 인영을 발견했다.

침대 옆에 놓여진 작은 의자에 다니엘이 몸을 구겨앉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눈동자에 다니엘의 모습이 어룽어룽 잡혔다.

잘못 본 줄 알았는데 다니엘이 체온이 낮은 길고 이쁜 손가락으로 성우의 머리칼을 넘겨줘 진짜란걸 알았다.


"...안자고 여기서 뭐해."

"형이 악몽 꾸는거 같아서."

"그런것도 알아?"

"천사니까."


전같으면 천사란 말을 먼저 비웃었을텐데, 이제는 왠지 안도가 됐다.

성우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다니엘의 손길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전혀 잔 기색이 없는 다니엘에 성우가 물었다.


"잠 한숨도 안잤지?"

"...음..사실 난 잠 안자요."

"정말? 그럼 그동안 밤에 뭐했어."

"그냥..뭐 이것저것. 원래 그랬으니까 신경안써도 되요."


녀석은 꼭 잠을 잘것처럼, 자기가 내어준 잠옷을 꼬박꼬박 갈아입고 쇼파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당연히 자기가 잠잘때 잠잘거라고 생각했는데. 

일부러 자신이 신경쓰지 않도록 하고 싶었던건가 싶어 짠했다.


"그럼 혹시....예전에 안보일때도 이렇게 내 옆에 있었어?"


다니엘은 그저 댕댕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전부터 자신의 이런 약한 모습을 봤다니, 부끄러운 마음에 성우가 모른 척 베게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런 성우의 머리를 다니엘이 다시 살살 쓰다듬었다.


"이거보다 힘이 있을땐... 악몽을 쫒아줬는데. 

  지금은 내가 힘이 없어서 못해요. 미안."


왜 이녀석을 쓸데없이 이렇게 착한걸까. 천사란 존재는 다 이런걸까.

여상하게 생각하며, 성우는 그냥 그러고 싶어 자신의 머리를 쓰담던 다니엘의 손을 꼭 잡았다.

흠칫 놀란 것 같지만, 다니엘이 가만히 마주잡아줬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 말없이 잡고 있다 성우가 물었다.


"이 자세로 손잡으면 안불편해?"

"아니, 별로..."

"내가 불편해. 옆에 누워."


말도안되는 어거지에도, 말잘듣는 다니엘은 이유를 묻지 않고 이불을 들춰 꼬물꼬물 침대로 들어왔다.

킹사이즈의 침대가 장신의 남자 둘로 가득 찼지만 오히려 편했다.

일반 사람보다 배는 체온이 낮은 녀석의 서늘한 손을 꼭잡고, 성우는 꾹꾹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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