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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날도 백현은 머리를 한 번 거친 후에야 알아듣는 적응 안 되는 낯선 외국어 사이에서 온 힘을 다 쓰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에도 피곤함에 몇 번이나 시야가 핑 돌았다. 시발, 내가 무슨 명예를 얻겠다고 이 머나먼 나라까지 와 있는 거지, 하고 제 스스로에게 물어보며 간신히 열쇠를 문고리에 끼워 넣었을 때였다. 언제나 쿵쾅거리는 소음에 가까운 음악이 새어나오는 윗집 문이 열린 건.


 예상과는 다르게 계단을 내려오던 윗집 사람은 이제야 갓 성인이 되었을 법 직한 동양인 남자였다. 매일 광란의 파티를 벌이는 것만 같은 소음에 배불뚝이 파티광 미국인을 생각했던 백현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힐끗 보았지만 제법 잘생겼고, 또 키도 컸다. 그리고 어딜 가는 지 제법 화려하게 꾸민 상태였다.



 “Guten Abend.”



 백현이 예의상 던진 말에 한껏 미소를 지은 남자는 이내 익숙하지만 또한 익숙하지 않은 언어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한국 사람이에요......?”
 “한국 출신 독일인이 정확할 걸요.”


 여전히 웃는 낯의 남자는 백현의 말을 정정하면서 한 계단을 내려와 손을 뻗으며 악수를 청했다. 오랜만에 보는 고향인이라 반가운 모양이다, 하고 섣부른 판단을 내리며 내민 백현의 손에 남자는 노골적으로 손가락을 얽었다. 끈적하고 농염한 손가락이었다. 후에 백현은 그 손을 그렇게 기억했다.



 “이게, 무슨 짓이죠.”



 여전히 산재해 있던 피곤함이 순식간에 도망이라도 간 듯, 백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그런 백현의 반응이 별 거 아니라는 듯 남자는 해맑게 웃으며 백현을 향해 아저씨, 나 아직 애기에요 애기. 말 편하게 해요. 라는 남들이 듣기엔 천진난만한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덧붙이는 말은 백현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아저씨, 스트레이트도 아니잖아요.


 이 녀석이 알 리가 없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스스로에게 암시처럼 중얼거렸지만 그렇다고 당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시금 몰려오는 피곤에 단정히 메어있던 넥타이를 조금 느슨하게 풀어낸 백현은 차분하게 내려와 있던 앞머리마저 쓸어넘겼다.



 “누가 그러든?”

 “첸이 말해줬는데. 아저씨가 첸한테 끼떨지 말라고 그랬다면서요.”



 아저씨, 하면서 눈을 접고 웃고 있는 남자는 어느새 두어 계단 정도로 폭을 줄인 채 안 그래도 큰 키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첸 그 녀석을 그냥...! 얼마 전에 들린 게이 바에서 말도 잘 통하고 같은 동양계라는 이유로 신나게 떠들었던 게 잘못이었다. 백현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저씨. 난 찬열이에요. 자주 봐요.”



 그 한숨을 신호로 여긴 것처럼 찬열이라는 남자는 손을 팔랑이며 자신을 지나쳐 내려가 버렸다. 이사를 가야하나. 백현은 피곤을 넘어 아파오는 머리 때문에 관자놀이를 연신 누르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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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현이 다시 찬열을 만난 것은 첫 만남으로부터 이주일이나 지난 이후였다. 반쯤 아웃팅 당한 꼴이 된 백현은 못내 찬열이 소문이라도 내지 않을까 전전긍긍했지만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첸을 만나자마자 멱살잡이를 한바탕 한 것 빼고는.


 그리고 오늘. 백현은 그 날처럼 퇴근을 하는 와중이었고 찬열은 어디 가볍게 나가려는 건지 속이 비치는 하얀 윈드브레이커에 살짝 루즈한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채였다. 이전 만남과는 다르게 자연스럽게 내려온 와인빛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찬열은 그 날처럼, 안녕! 하고 소리 높여 인사했고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백현도 눈을 마주치며 짧게 안녕. 하고 대답했다.


 그 대답에 누가 연애편지라도 건네준 것 마냥 볼이며 귀 끝이며 빨갛게 변하는 찬열을 보고는 문득 약속 없으면 우리 집에서 커피나 할래, 하고 꾀는 것 마냥 집에 들였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물론 앉으라고 한 쇼파에 엉덩이를 붙이고는 이 곳 저 곳 눈으로 훑어보는 찬열이 첫 만남과는 다르게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때문인지 한국에서 부모님이 맡아주고 계신 제 과일이(리트리버) 같고, 귀여워보였다는 건 더 큰 문제였다.



 “아저씨, Wohnen Sie allein?”

 “응. 혼자 산다.”



 흐응, 하고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이내 소파 앞 간이 테이블에 대충 던져놓았던 백현의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더듬더듬 한국어로 웅얼댔다. 그 목소리가 지독하게도 낮게 웅웅 거려서 백현은 미묘하게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며 커피를 쏟아 내리고 있는 커피머신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찬열에게 다가섰다. 그리고 그 커다란 눈망울이 자신의 눈을 바라보자마자 뭐에 홀린 것 마냥 키스했다. 이내 찬열의 윈드브레이커 안으로 백현의 손이 파고들었다. 비치는 하얀 윈드브레이커는 시각적으로도 촉각적으로도 백현의 어딘가를 자극했다.반투명한 유리창 너머를 훔쳐보는 기분이라서 그런가. 백현은 어딘지 모르게 핀트가 나간 채로 큰 키와는 다르게 마르고 가벼운 찬열을 소파에 가로 눕히며 그 위로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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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는 뒤가 없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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