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52 PM. 호텔 자드. ??? ?

앙겔라가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미색의 천장이었다. 병원, 이라고 순간 생각했지만 곧이어 자기가 누워 있는 침대가 병원의 것이라기엔 너무 부드럽다는 걸 깨달았다.

여긴 어디지? 마지막, 마지막에 뭘하고 있었더라?


"어. 일어나셨네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던 앙겔라는 갑자기 들린 말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돌리자 안쪽으로 연결된 방에서 여자가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제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여자는 틀어 올린 머리 위로 군모를 눌러썼다. 마치 앙겔라가 평범하게 잠을 자다 일어난 것 같은 어조와, 자연스러운 동작에 앙겔라는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거울을 보며 비죽 튀어나온 잔머리를 정리하던 여자는 아무 말 없는 앙겔라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호텔 등의 주홍이 섞여든, 갈빛의 눈동자.

'저기요. 괜찮으세요? …천천히 숨 쉬어요.'

그 눈을 보자 기억이 거꾸로 되감겼다. 맞아. 그 골목.

"괜찮,으신거 맞죠? 병원은 안된다고 계속 그러셔서, 일단 제 호텔 방으로 데려온 건데……."


역시 병원에 가시는 게. 여자가 띄엄띄엄 떠오르는 기억을 정리하는 앙겔라의 안색을 다시 살폈다.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정도 사태를 파악한 앙겔라가 그제야 손을 내저었다.


"아니, 괜찮아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러니까-,"
"하나에요. 송하나. 하나라고 부르세요."
"그래요, 하나. 안나 지겔이에요."


앙겔라는 태연하게 가짜 이름을 댔다. 컵에 물을 따른 하나가 생긋 웃었다. 눈이 곱게 휘어지는 게 예뻤다. 그 미소를 보며 컵을 받아들이는데 여기 저기 상처가 난 손이 보였다. 

사무직이 아닐거라 짐작은 했다. 그런데 군인이라 하기에는, 좀 어린 것 같았다. …하긴, 온 세계가 싸움터인 판에 무슨 대수겠어. 그러니 쓰러져 있던 저에게 어디가 아프냐고 묻질 않았던 거겠지. 앙겔라는 침대에서 내려오며 깨끗하게 호기심을 접었다.

떠날 시간이었으니까. 7시 쯤 옛날 동료를 만나기로 했었다. 시계를 확인한 앙겔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 없는 사이에도 앙겔라의 짐을 챙겨온 건지 코트가 그녀의 캐리어 위에 걸쳐져 있었다. 코트를 집어 들며 앙겔라는 하나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정말로요. 시간이 있다면 당신에게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지만, 둘 다 한가하진 않은 것 같네요. 그렇죠?"
"어, 지금 가시려고요?"
"네. 약속이 있어서요."


하나가 난처하게-적어도 앙겔라에겐 그렇게 보였다- 웃었다. 이번엔 앙겔라가 하나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조금 뜸을 들이던 하나가 결국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게, 지금은 못 나가세요.


"내일 아침까지는 이 호텔, 폐쇄될 예정이라서요."
"무슨 말이에요?"
"옴니움 대책 협의가 있거든요, 삼 일 동안. 공개 행사인데 참석자가 하나같이 높으신 분들이 많아서, 일정 시간 외에는 출입이 안 돼요."


호텔 전체가 비워졌다고, 그렇게 설명한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인다.


"게다가 음, 지겔씨가 눈에 띄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으신 것 같아서, 몰래 들어왔거든요. 지금 나가시면 붙잡혀서 취조당하실 것 같은데요…."
"……호텔 폐쇄까지 하는데 몰래 들어올 수가 있어요?"
"이미 체크인은 한 상태였고, 어, 약간의 편법과 내부의 소통자가 있다면요……. 짜잔?"


어색하게 손을 펼치는 하나가 규율이 강한 집단에 몸담고 있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고작 10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앙겔라는 이 여자의 대책 없음에 작은 걱정까지 느껴졌다. 자기가 나쁜 사람이었다면 어떡하려고.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내일 아침까지 여기에 발이 묶였다는 건 좀 짜증 나는 일이었다. 앙겔라가 한숨을 쉬며 침대에 걸터앉자 침대가 작게 출렁였다. 따지자면 그녀가 병원을 거부해서 일어난 일이므로 하나의 잘못은 없었지만, 앙겔라의 한숨에 지레 찔린 듯한 하나가 말을 이리저리 덧대었다.


"금방 일어나실 줄 알았거든요. 반나절 넘게 주무실 줄 몰랐어요. 아니, 탓하는 건 절대 아니고…. 아, 말이 왜 이렇게 꼬이지."


또다시 난처한 웃음. 그 사이 호텔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안도한게 뻔히 보이는 얼굴로 하나가 문쪽으로 빠르게 걷는다. ...다쳤네. 하나의 걷는 모양이 약간 어색했다. 습관처럼 진단을 내리려던 앙겔라가 쓰게 미소지었다. 습관은 무서운 거였다. 특히 그게 직업 때문이라면 더.


"아, 대현아."
"슬슬 내려가봐야해. 그 분은 일어나셨어?"
"어어, 안나 지겔씨?"
"뭐? 누구?"
"그 분 이름."


모르는 언어로 대화가 오가는 게 들렸다. 제 가짜 이름이 들리는 걸로 보아 저 남자도 자기가 여기 있는걸 아는 듯 했다. 몇 번 더 말이 오가더니 하나가 다른 사람과 함께 돌아왔다. 

하나의 옆에선, 순하게 생긴 남자는 앙겔라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하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음, 인사겠지 저건. 내밀던 손을 조용히 거두고는 그냥 따라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드는데 하나가 슬핏 미소짓는게 보였다.


"지겔씨, 이쪽은 대현이에요. 내일 저 아니면 얘가 밖으로 보내드릴거구요. 저희가 지금 일이 있어서 가봐야 하거든요. 나중에 룸서비스 시켜드릴테니까 지금은 배고프시면… 저거,라도…드실…래요…?"


차분하게 말하던 하나가 끝에 가서는 검은 비닐 봉지를 가르키며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못했다. 제 감정에 정말로 솔직한 애다. '애', 그 순간 앙겔라는 상대방에게 실례라고 생각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일텐데.


그러나 그 미안함은 비닐 봉지를 열어보고는 깨끗하게 지우기로 했다.


도리토스? 진짜로?


무심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본인도 민망한지 뒷목을 연신 쓸어내리고 있었다. 대현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제 방에서 샌드위치 하나 가져다 드릴게요. 송하나 얘가 그럼 그렇지."
"내가 이럴 줄 알았나 뭐…."


다시 뒷목을 쓸어내리던 하나가 앙겔라와 눈이 마주치자 밉지 않게 씩 웃는다.



6: 37 PM. 호텔 자드, 연회장.


"따라서 이번 회의에서는…."


"야, 너 치글러 박사님 진짜 그냥 보내게?"
"지금은 안나 지겔이시라잖아. 본인 이름을 숨기는 거 보면 일이 있으시겠지."


지리하게 이어지는 연설을 열심히 경청하는 척 하던 대현이 하나에게 작게 속삭였다. 마찬가지로 고개까지 흔들며 진중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하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으, 싸인이라도 부탁하고 싶었는데. 메르시잖아, 그 '메르시'."
"내가 해줘? 사랑을 담아. 'D.Va'."
"웩. 넌……좀."
"어쭈, 어투가 불순하다?"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속닥이던 둘은 주변의 호기심 섞인 시선이 돌아오자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 '메르시'라. 호텔로 데려올 때만 해도 그냥 PTSD를 겪는 사람인 줄 알았다. 병원은 한사코 거부하길래 거기서 무슨 일이라도 겪은 건가 싶었는데, 대현의 도움을 받아 호텔로 들어와 침대에 눕히면서 대현이 깜짝 놀랐고, 그녀가 앙겔라 치글러라는 걸 전해들었다.

호텔에 있기가 갑갑하기도 했고, 한국보다야 기자가 덜 달라 붙겠다 싶어 산책 겸 밖으로 나갔던 참이었다. 호텔 근처의 골목으로 비틀거리며 사라지는 여자, 그러니까 앙겔라를 쫓아갔던 것은 아니지만, 가던 길을 가다 보니 그 골목을 지나치게 되었다. 거기서 쓰러진 된 앙겔라를 일으키게 되었고.

널 보는 것 같았어? D.Va가 하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귀찮게 호텔까지 데려오고 말이야.  조용히 해. 하나가 대꾸했다.


…짜증나게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앙겔라를 일으키던 하나는 헐떡이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강렬한 색채의 회색안에 눈을 빼앗긴 것도 잠시. 양 팔을 붙들고 절박하게 속삭이는 앙겔라를 보며 하나는 도와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깨어난 앙겔라가 경계하는 걸 보고는, 부러 가볍게 굴었다. 하나는 제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의도가 먹혔는지 하나가 방을 떠날때는 좀 더 편안해진 모습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도와주려던 것이 결국 앙겔라를 불편하게 만들어 버리긴 했지만, 하나는 그 잠시라도 그녀가 편했으면 했다. 그게 그녀의 진심이었다.

대리 만족에 불과하잖아, 송하나. D.Va가 키득거렸다.
닥치라고 했지. 쏘아붙인 하나가 연설자를 보는 눈에 힘을 주었다.


"점점 진화해가는 놈들에 대항하여-"


연설의 막바지였다. 옴니움 대책 협의라 이름 붙이고 매년 만드는 자리지만 항상 제자리 걸음이라고, 이번 일의 책임자인 대령이 말했었다. 하기사 국가 단위로 시도한다 한들 성공 여부는 미지수인데다, 성공했다 쳐도 그 피해는 만만치 않을 거였다. 그러다가 다른 곳에서 옴닉이 쳐들어 오면 그땐 끝장이었고. 다른 나라의 후방지원이 필수라는 말이다. 저 살기 바쁜데 누가 선뜻 도와주겠냐마는.

오버워치가 있다면 그쪽에 지원 요청을 했을텐데. 대령이 그렇게 푸념을 늘어놓았었지. 결국 이 회의의 끝은 변화된 옴닉의 행태 보고와 효과적인 전술 교환으로 마무리 될 것이다. 그 전술 교환만이 목적인 하나는 빨리 이 연설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가 쉬었으면 했다.

맞다, 가기 전에 룸서비스 시켜가야지.  방에 있을 치글러 박사를 떠올린 하나가 스프랑 빵이면 될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불이, 갑자기 꺼졌다.


"뭐, 뭐야. 정전이야?"


어둠 속이었지만 대현이 허둥지둥 하는게 전부 느껴졌다. 대현만이 아니라 주변 전체가 소란스러웠다. 하나는 눈이 어둠에 적응되길 기다리며 옆쪽으로 팔을 내밀어 제 소꿉친구의 팔을 붙잡았다.


"야, 가만히 좀 있어. 금방 돌아오겠지."
"그렇겠지…?"


불이 다시 켜진 것은 10분 후였다.



7: 20 PM. 호텔 자드. 하나의 방.


앙겔라는 탁자 위에 널부러진 샌드위치의 포장을 한데 모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만나기로 했던 옛 동료에게는 문자로 사정이 생겨서 못 가게 되었다고 전했다. 그는 내일 아침이라도 괜찮다 했다. 사흘은 이 근방에서 지낸다고 해서, 알겠다고 답한 앙겔라가 한결 편한 마음으로 간단한 요기를 마쳤다.

샌드위치가 들어있던 봉지에는 콜라도 들어있었는데, 거기에 프린팅 된 홍보모델이 어딘가 익숙해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손가락으로 슥, 긴 머리를 가린 앙겔라는 그 모델이 이 방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토끼로고 아래 적힌 D.Va, 그리고 그 옆에 그려진 모델.

휴대폰으로 간단하게 서칭을 하니 스크롤이 끝도없이 내려간다. MEKA, 한국, 프로게이머. 그리고 21살. 대체 몇살 때 입대했단 말이야? 아연한 기분과 함께 앙겔라가 휴대폰을 탁자 위에 엎었다.

PTSD. 전장에 나섰던 군인이라면 드문 일은 아니었다. 앙겔라는 거기서 예외가 아니었던 것 뿐이다. 단지 이번 것은 좀 심각했다. 트리거가 되는 일을 보는 순간 어떻게 해서 사람이 없는 곳으로 들어갔지만,어쨌든 하나는 한창 플래시백이 일어나는 앙겔라를 보았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다시 말해 하나는 그게 뭔지 알고 있다는 거였다. 본인이 겪고 있든, 남이 겪는 걸 보았든지간에. 그래도 21살은 아니지. 아무리 불합리한 세상이라지만. 앙겔라가 한숨을 쉬었다.


초인종 소리가 짧게 방안을 울렸다. 누군가 싶어 일어나려던 앙겔라가 흠칫, 몸을 굳혔다.


'몰래 들어왔거든요.'


하나를 찾아온 사람? 하지만 일이 있다고 했다. 제복까지 갖춰 입은 걸 보면 공식적인 일. 그리고 지금 호텔은 관계자 외에는 폐쇄된 상태다. 아무도 없는 방에 누가 찾아온단 말이야.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재빨리 발을 옮긴 앙겔라는 자기 캐리어를 소리 없이 바닥에 눕혔다. 캐리어를 열고 안에서 권총을 꺼내 장전한다.

철컥.

손바닥에 달라붙는 금속이 무거웠다.  예전, 임무를 수행하던 때 처럼 유연한 몸놀림으로 호텔 문앞에 섰다. 조용히 방범 렌즈를 통해 밖을 살피려던 때였다.


"박사님, 저에요, 하나. 들어갈게요."


어떻다 대답하기도 전에 덜컥, 열리는 문. 그리고 마주친 갈빛의 눈.
다만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뒤로 선 험상궃은 양복 덩치들을 보며 앙겔라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혼란스러웠다. 하나가 슬며시 손을 뻗어 앙겔라의 손에 들린 권총을 내렸다.


"앙겔라 치글러 박사님?"
"네?"


당황한 나머지 반사적으로 대답하자마자 하나가 저를 박사님이라 부른데에 생각이 미쳤다. 휙 돌아보자 하나가 심각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살인 사건입니다. 잠시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양복을 입은 덩치의 입에서 난감한 문장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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