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가트가 돌아다닌다던데.”


비밀스런 소문은 아무리 막으려한들 학생들 사이에선 삽시간에 풀리기 마련이었다. 네 형제들 중 의외로 그런 소문에 가장 빠른 것은 제이슨으로, 그리핀도르의 학생들이 워낙에 그런 소문에 재빠른 것인지 어떻게든 말꼬리를 주워오는 것엔 탁월했다. 제이슨의 말에 팀은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책을 뒤적거렸다.


“보가트는 위험한데. 그런 게 돌아다닌다면 교수님들이 가만히 두겠어?”

“그러니까 소문인거지.”

“어디서 나온 소문인거야?”

“글쎄. 나도 알아보는 중.”


호그와트에 오기 전 그들을 담당했던 최고의 선생님은 모두 같았기에, 형제들의 사고방식은 제각각 반응이 틀릴지언정 결국 행동은 같았다. 둘은 호그와트 뒤뜰의 둔덕에 앉아 남들이 보면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는 것인 양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하고 있었으나, 그저 평범한 대화는 아니었다.


“디키버드는?”

“퀴디치, 연습, 이었어. 나랑.”


어느새 그들의 뒤편에 데미안이 경주용 빗자루를 들고 불퉁하게 서있었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과 몰아쉬는 숨소리를 보아하건데 이곳에 오기 전 까지 딕과 함께 신나게 하늘을 날아다녔던 모양이었다. 조금만 흐트러져도 쉬이 비어져 나올 거친 숨소리를 애써 감추는 꼴이 적어도 제이슨의 눈엔 훤히 보였다. 비글 꼬맹이가 또 신나게 졸랐나보군. 제이슨은 얼마 전 있었던 호그와트 퀴디치 시합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후플푸프의 딕 그레이슨과 슬리데린의 데미안 웨인의 대결이었다고 볼 수 있었던 ― 어린 신인 루키로 최연소 시커로 시합에 참가한 데미안이 후플푸프에게 무한한 행운을 가져다주는 파랑새 한 마리에게 무참히 쪼인 ― 아무튼, 참패했던 그날이었을까. 어쨌든 그랬다. 아무리 하늘 위를 날개달린 비글마냥 누비고 다녀도 아직 꼬마는 꼬마였는지 뭔지. 아무튼 참패한 그날의 시합 이후로 매일같이 딕에게 퀴디치 연습상대를 요구하던 데미안이었기에 제이슨은 납득했다.

데미안은 씩씩거리는 숨을 씨근거리며 짐짓 지치지 않은 척 제이슨의 옆에 털썩 주저 앉았다.


“보가트라고?”

“벌써 보가트를 알고 있어?”

“그딴 초급 어둠생물 이론은 이미 다 떼고 들어왔어, 드레이크.”


으르렁 거리는 말투에 드레이크는 허, 하듯 웃음으로 받아치면서도 별 다른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그레이슨은 이런 소문 들으면 밤에 몰래 잡으러 가자고 뛰어나갈 텐데.”

“딕? 장난삼아서 다루기엔 그래도 보가트인데…….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 그러고도 남나?”


제이슨은 그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팔베개를 하고 뒤로 벌렁 누워버렸다. 이마에는 그 나이 대 소년들답지 않게 깊게 패인 주름이 한가득 고여 있다. 설마 그 정도로 장난에 환장하진 않았을 걸. 그렇게 말하며 팀은 읽고 있던 책을 소리 나게 탁, 덮고 말했다.


“딕도 무서운 것 정도야 당연히 있겠지.”

“뭐, 있다 한들 알아내는 방법이나 있냐.”

“물어보면 말해줄 것 같기도 하고.”

“택도 없는 소리. 이 비글 꼬맹이가 무서워하는 건 하나 맞춰볼 순 있겠다.”


데미안을? 그거야 말로 불가능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당장에라도 제이슨을 눌러 덮칠 기세인 데미안을 한 팔로 막고 있는 팀에게, 제이슨은 손가락으로 콩 알만 한 동그라미를 만들어 내보이며 말했다.


“완두콩.”


픽,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린 듯 했다. 여전히 팔 뚝으로 데미안의 볼 반쪽 정도를 구기면서도 씰룩이며 숨긴 팀의 웃음소리였다. 그치지 않고 제이슨도 마주보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바람에 팀의 팔에서 벗어난 데미안이 악을 쓰며 제이슨에게 덤볐으나 몇 번을 풀밭에서 뒹굴고 숨만 몰아쉬는 소동이 있을 뿐이었다.




***




“보가트라고?”


어― 그래. 되묻는 딕의 목소리에 제이슨은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벤치 뒤로 벌렁 자빠졌다. 그러면서 올려본 딕의 얼굴엔 별 다른 반응도 없이 그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만이 떠올라 있다. 슬며시 불어오는 봄바람에 딕의 하얀 이마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조금 고개를 젖히며 저녁노을이 가라앉는 호그와트 성벽 너머를 바라보던 딕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금 웃어 보이는 듯하다가, 곧이어 살짝 이맛살을 찌푸리는 듯도 하다가, 그리곤 곧바로 무표정 ― 아주 잠시 동안이었다. ― 이었다가, 마침내 제이슨을 돌아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말이 없는 딕은 익숙하지 않았다. 아주 짧은 순간에 여러 표정을 삽시간에 얼굴위로 올리는 딕도 익숙하지 않았다. 비록 그 표정을 볼 수 있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 하더라도.

딕은 자신의 옆에 드러누운 제이슨을 내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설마 보가트를 잡으러 돌아다닐 생각은 아니지?”

“…….”


방금 그 똑같은 걱정을 네놈 동생들이 했는데? 뒷말은 굳이 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돌아오는 반응이 허탈했기에 제이슨은 그저 피식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왜. 껴줘?”

“그거 교칙 위반이야. 알지?”

“고작 어둠의 생물 하나 잡겠다는 게 무슨 교칙 위반이야.”

“밤에 돌아다닐 거잖아. 그리고 난 절대 그 일에 동참하지 않을 거고. 너희도 마찬가지야. 관둬.”

“얼씨구. 네 입에서 그런 소리 나오는 게 아주 기특할 정도다.”


대답대신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던 딕이 곧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였지만 딕은 분명히 힘을 주어 말하고 있었다.


“그래도 보가트는 안 돼. 팀이랑 데미안이 아무리 고집 부려도 이번엔 정말 붙잡아 두고 허락하지 않을 거야.”

“걔들은 오히려 네가 설칠까봐 걱정했다.”

“설마? 절대 안 하지.”

“어련하실까.”


밉살스럽게 툭툭 받아쳤지만 어쩐지 석연치가 않다. 가볍게 말하는 듯 해도 지금의 딕은 목소리는 어쩐지 딱딱하게 굳어 억지로 흘리는 것만 같다. 제이슨은 인상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똑바로 등을 펴고 앉으며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제이슨의 시선에서 딕은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들렸다. 이거 봐라?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에 제이슨이 딕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당긴 것도 거의 동시였다.


“야, 디키버드.”

“억, 제이!”


우악스럽게 잡아 젖히는 바람에 딕의 몸은 그대로 풀밭 위에 벌러덩 눕혀질 수밖에 없었다. 뭐야, 갑자기? 낄낄거리며 일어나려는 딕의 어깨를 꾹 잡아 눌렀다. 내려다보는 시선 안에 웃고 있는 딕이 가득 들어찼다. 일어나기 위해 버둥거리던 딕은 그 바람에 꼼짝도 못하고 제 위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제이슨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을 수밖에 없었다. 흰 얼굴위로 한사람분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딕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그 모습에 제이슨은 더욱 인상을 찡그렸다.


“너 뭐 숨기고 있지.”

“뭘?”


또, 또 이런 식이지. 제 아래 가족들의 일에 관해선 끈질기게 들러붙어 꼬치꼬치 캐묻는 건 득달같으면서도 정작 본인에 관해선 이런 식이었다. 많은 시간을 한 지붕 아래 — 그 지붕 아래라는 건 웨인 저택을 비롯하여 호그와트라는 점에서도 동일하다는 점에서 — 몇 년간을 지냈으면서도 제이슨은 아직까지 딕에 관해 어떠한 점을 잘 알고 모르는 것인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점이 있다면 그가 늘 동생들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부분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서로가 납득하는 범위라는 게 있단 것이었다. 왜 위험한지, 왜 걱정이 되는지, 무엇이 염려가 되고 어떠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조금 성가시긴 해도 함께 아우르고 함께 해결할 수 있는 일들에 관해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헤아려보고 염려하는 것. 같은 집에서 자라나 최고의 스승 아래 함께 배운 것들이니 별 수 없는 부분들이었다. 그러니, 조금 다른 부분도 모른 체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었다.


“너, 그거—”


보가트, 본적 있냐? 이어지는 말은 딕이 순식간에 제이슨의 손목을 잡아채며 뒤로 훌렁 몸채로 넘겨버리는 바람에 끊기고 말았다. 제이슨 보다 작은 체구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그에게 밀리는 법이 없던 딕이었기에 제이슨은 속수무책으로 그대로 뒤로 뒤집혀 처박히고 말았다. 이런 씨, 디키버드! 곧바로 튀어나오려던 욕지거리는 넘어가면서 깨문 혀 탓에 잇 사이로 씹혀버렸다.


“방심하지 말거라, 제이슨.”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 까지 낮게 내리 깐 채로 딕이 낄낄거렸다. 포즈며 턱짓을 흉내내는 게 제법 브루스를 떠올리게 하긴 했어도 누군가를 따라한 어설픈 흉내였다. 사람을 매다 꽂아놓고 도로 손을 내밀며 일으켜주는 것은 거부하지 않았지만, 무언가 분한 마음과 어딘지 찝찝한 생각은 끝까지 가시지 않는다. 이번에도 어물어물 넘어가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본인이 말하지 않고자 하는 것에 대해 쓸데없이 끈질긴 호기심을 내비치며 체력을 소모할 생각도 없었다. 찝찝함은 찝찝함으로 둔 채로 묻지 못했던 말들에 대해 스스로에게로 질문을 던질 뿐이었다. 한낮에 팀이 스치듯 던졌던 말이 생각났다. 딕도 무서워하는 것이 있을까?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딕은 어느샌가 풀밭 언덕 아래 저만치로 슬렁슬렁 내려가고 있었다. 검은 뒷통수가 휙 돌아보며 언덕위로 손을 흔든다. 평소와 같은 목소리였다.


“빨리 와, 제이슨! 연회장에 음식 다 털릴 거야! 티미랑 데미는 이미 가 있을거라고!”


만약, 혹시라도 만약 디키버드가 보가트를 보았다면…….

무엇이 되었건 상상은 되지 않았다. 디키버드가 두려워하는 것. 그건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 일까? 딕은 가족을 사랑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의형제와 같은 관계였지만 가족에 관해서 특히나 예민하다는 것을 제이슨은 알고 있었다. 가족, 그것은 그들의 공통된 화젯거리이며 마음 한 구석에 조금씩 쌓아두는 흠집의 근원지이기도 했다. 그들은 모두가 다 똑같은 경우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같은 것을 잃었고, 비슷한 슬픔을 알고, 그러한 과거를 안고 함께 모였다. 완벽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이야기. 가족, 그리고 보가트.

평소라면 동생들을 이끌고 솔선수범하여 밤의 복도를 누비던 그가 보가트는 쫓지 말라하며 정색하는 모습이 괜한 호기심에 불을 지폈다. 내면의 두려움을 보여준다고 하는 보가트를 서로가 있는 자리에서 마주한들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닐 터였다. 그럴 일만 생기지 않으면 되는 거겠지. 동생들이 보가트를 쫓을까 도리어 걱정하는 그를, 반대로 동생들 또한 같은 생각을 하며 걱정했으니 우려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도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마음속에 묻어있는 찝찝함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제이슨은 어두워져가는 언덕 아래를 향해 천천히 내려갔다.




***




저녁 연회장에서 웨인가의 셋째와 넷째를 찾을 수 없었던 딕의 표정이 별안간 굳어진 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일찍 먹고 기숙사로 돌아갔겠지. 그렇게 말하던 제이슨도 설마 싶은 생각에 표정을 풀지는 못했다. 기우일지도 모른다. 이런 일은 웨인가의 아들들에게 있어서 흔한 일이었다. 호그와트의 수많은 재학생들도 웨인 성을 달고 있는 어린 학생 둘이 저녁 식사에 제때 나타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별다른 특별한 이유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둘이라면 아주 가끔이라지만, 없던 일도 아니었으며, 분명 또 무언가를 하고 있겠거니. 물론 함께 사라진 조합이란 것이 팀과 데미안이라는 것이 특히나 드물다면 드물 일이었지만, 그게 뭐 어떻다고? 웨인이잖아. 대부분의 반응은 이랬다. 딕은 그런 학생들과 테이블 사이사이를 넘나들며 팀과 데미안에 대해 물었다. 오가는 대화들 속에 딕의 입술을 곱씹는 그 표정을 제이슨은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또 저 표정. 노을이 지던 언덕 위에서 아주 잠깐 스치고 말았던 그 표정을 상기시키며 제이슨은 낮게 혀를 찼다.


“딕. 다른 애들도 아니고 걔네 둘을 새삼 뭘 그렇게 걱정하고 그러는 거야?”

“제이슨. 낮에 애들이 보가트 이야기 했다고 그러지 않았어?”

“그건 그렇지만, 이야기를 했다고 해서 둘이 정말 보가트를―”

“젠장, 제이슨, 팀과 데미안은 보가트를 직접 본적이 없어.”


그건 나도 그런데. 제이슨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딕의 외침에 침묵했다. 드물게 상기되어 있는 딕은 초조하게 아랫입술을 깨물며 잠시 주먹을 쥐었다 풀었다.


“야, 진정해.”

“나는 괜찮아. 내가 걱정하는 건 팀과 데미안이…….”

“너 저어어어언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 오히려 걔들 둘이 보가트를 아주 손쉽게 물리칠 수도 있지. 그 뭐냐……. 서로 지기 싫어하잖아.”


뭐 내 입으로 말하긴 뭣하지만, 웨인가의 지붕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디 가서 실력 뒤쳐진단 소린 못 들었는데. 그렇게 말하는 제이슨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던 딕이 낮게 신음을 흘렸다.


“찾으러 가야겠어.”

“혼자 가려고?”


뒤돌아서는 딕의 등 뒤에 되고 불퉁하게 뱉은 말은 생각보다 딕의 얼굴에 꽤나 많은 표정들을 보이게 하고 있었다. 잠시 당황한 듯하다가, 놀란 듯도 하다가, 걱정이 섞여서 다시 되돌아온 표정엔 망설임이 있었다. 그 답지 않은 표정이다. 젠장, 디키버드. 이런 건 왜 혼자서 다 하려는데? 그놈의 책임감. 다 지고 가면 오늘 못 먹은 저녁밥 대신 배라도 부르나. 물어봐야 할 것들이 불쑥불쑥 마음속에 치솟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짜증인지 무엇인지 모를 것들을 꾸역꾸역 곱씹으며 제이슨은 바지 뒷주머니에 넣은 마법 지팡이를 만지작거렸다.


“뭐해, 조금 있으면 통금시간이야. 찾으려면 빨리 찾던가.”


뭐 알아서들 되돌아 가 있다면 다행이지만. 멍하니 서있는 딕을 지나치며 성큼성큼 걸어가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딕이 서둘러 뒤따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급하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제이슨, 잠깐만. 역시 나 혼자 가는 게 좋겠어.”


지팡이를 슬쩍 들어 올린 제이슨이 딕을 돌아보았다.


“리디큘러스.”


봐라, 손짓도 완벽하지? 지팡이를 휘휘 흔들어 보이는 제이슨의 모습에 딕은 입을 다문 채로 제이슨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하여간 사서 걱정하는 놈.


“호그와트 3학년을 제대로 보냈으면 다들 알아.”

“……그래.”

“팀은 물론이거니와 그 건방진 꼬맹이도 이미 알고 있는 주문이고. 물론 우리 막내 도련님은 아직 1학년이지만.”


도리어 제이슨의 눈엔 서둘러 복도로 나서는 딕의 뒷모습이 신경 쓰이는 참이었다. 매일같이 장난기 가득한 웃음만 지으며 가볍게 돌아다닌다지만 결코 보이는게 다가 아닌 것들을 가지고 있는 딕이, 어쩐지 호그와트 어딘가에서 쏘다니고 있을 동생들보다 더 신경이 쓰인다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너는 이쪽, 그리고 난 이쪽. 되도록 통금시간 전에 찾고, 못찾으면 다시 여기서 봐.”

“알았어.”


아무 일도 없을 터였다. 제발 그러기를 바라며 제이슨은 딕이 사라진 복도의 반대편으로 재빨리 내달리기 시작했다.




***




“리디큘러스!”


주저앉은 데미안과 그 뒤로 선 팀의 등 뒤에서 재빠르게 튀어나온 주문에 눈앞에서 변해있던 보가트는 순식간에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익숙한 억양과 익숙한 외침, 무엇보다 반가운 목소리였지만 되돌아 볼 수가 없었다.

놓쳤어.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로 서 있던 팀이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보가트가 도망가 버렸다. 쫓아야 하는데. 그러나 생각만 그렇게 떠올랐을 뿐 다리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팀! 데미안!”


딕……. 입을 뻐끔거리는 팀의 어깨를 등 뒤에서 붙잡아 돌린 딕이 그를 와락 껴안았다. 뒤이어 주저앉은 데미안의 어깨 아래로 손을 넣어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때 아닌 인물들의 등장에 그 때야 정신을 차린 듯 데미안은 파드득 뿌리치며 악을 썼다.


“이거 놔! 일어날 수 있어!”


그러나 바닥을 짚고 일어서는 손이 떨려왔다. 주저앉은 탓에 무릎이 바닥과 맞닿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대로 일어섰다면 아마 다리까지 후들거리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것 같다. 데미안은 입을 다물며 고개를 숙인 제이슨을 올려다보았다. 자존심 강한 꼬맹이의 눈치를 읽었는지, 제이슨은 곧바로 팀을 품에 끌어당겨 안고 있는 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팀의 얼굴은 여전히 파리했지만 곧 진정이 된 듯 했다.


“보가트가.”

“……됐어, 보가트는 신경 쓰지 마.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데미안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딕―”

“쉬도록 해. 너희는 나서지 말아야 했어. 내 말 알아듣겠어?”


딕은 다소 냉정하게 말을 내뱉고는 곧 품안에서 팀을 떼어냈다. 어쩐지 격앙된 모습에 그를 다시 불러보려던 팀도 입을 다물었다. 데미안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혀를 찼다. 쥐락펴락 차가워져있던 손을 몇 번 매만지자 긴장되어 있던 몸은 이내 곧 풀려가고 있었다. 놓쳐버린 보가트는 찝찝했지만, 딕의 말대로 오늘은 그저 되돌아가는 편이 맞았다. 벌써 통금시간이 지난 복도에서 언제 교수들을 만나 점수를 깎아먹을지는 알 수 없을 일이었다. 심지어 또 점수를 깎아 먹을 수는 없다는 깨달음이 뒤늦게야 스친다.

쯧. 가볍게 혀를 차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데미안을 뒤로하고 팀도 이내 정신을 차린 듯 딕을 바라보았다. 딕의 얼굴은 빛이 거의 들지 않는 복도에서 어둡게 그늘져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때 보다 씨근거리는 숨소리와, 하얗게 질려있는 얼굴은 달빛이 반만 들어찬 복도 한가운데에서도 훤히 알 수 있었다. 식은땀이 맺혀 있는 이마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팀이 딕에게 물었다.


“딕?”


한숨 같은 목소리가 곧바로 대답했다.


“기숙사로 돌아가. 다시는, 보가트를 쫓을 생각 하지 말고.”

“하지만 ―”

“돌아가!”


큰 소리가 복도에 울린다. 팀은 물론이거니와 데미안 또한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며 딕을 바라보았다. 그늘진 복도에 서 있는 딕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푸른 눈동자는 똑바로 제 형제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표정이 어떨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눈빛에 담겨있는 감정은 화를 내는 것과 다른 뒤죽박죽 섞인 것들이 마구잡이로 뒤엉켜 흔들리고 있었다.


“방금은, 미안해. 제이슨과 함께 돌아갈테니까 너희 먼저 기숙사로 들어가 있어.”


곧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돌리는 딕에게 팀과 데미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딕은 어두운 복도 끝에 홀로 서 있었다. 팀과 데미안이 각자의 기숙사로 돌아간 뒤에도 딕은 한참동안을 그 자리에 못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그를 똑같이 복도의 그늘에 물든 제이슨이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잇지 못하는 딕에게 제이슨 또한 아무 말도 없이 어두운 통로 한복판에 우두커니 선 그를 보고 있다. 이마를 짚다가 긁어내리듯 손을 옹송그려 몇 번을 쥐었다 폈다 반복하는 그의 손은 새하얗게 질린 채로 떨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지팡이를 쥐고 보가트를 물리친 손이라기엔 지나치게 흔들리고 있다. 으득, 이를 깨무는 소리가 입술 새로 잔뜩 먹혀 가라앉았다.


“하나 알려줄까? 디키버드.”


제이슨은 고성 너머 창가의 어둑한 밤 풍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그로서는 그리 달가울 수가 없는 달빛이 반쪽만 채워진 채 복도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놀란 듯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린 딕의 파란 눈동자가 경악에 물들어 있었다. 말도 안 돼. 새하얗게 질린 입술이 중얼거리자 비뚜름하게 선 제이슨이 웃었다.


“내가 죽는 걸 봤어.”


그 말에 숨을 멈추는 소리가 들린다. 제이슨은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별로 문제가 되는 건 아냐. 단지 정말 화가 나는 일일 뿐이거든.”


제이슨이 웃었다. 송곳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훤한 웃음이다. 하지만 결코 그 눈이 웃고 있지 않아 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뭘 그렇게 보나, 새삼. 어깨를 으쓱하며 제이슨이 말했다.


“나는 네 죽음도 봐. 핏줄이 섞이지 않은 내 가족의 죽음을 보지.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죽어가. 하지만, 거기까진 괜찮아. 나는 언제가 되었건 그게 항상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죽음을? 묻지 못하는 목소리가 뻐끔거렸다.


“하지만 내가……. 가장 분노하는 건 그걸 지켜보는 브루스지.”

“제이슨, 방금 본 건 진짜가 아니야. 알지? 브루스는,”

“알아, 디키버드. 그 빌어먹을 보가트가 보여주는 것들이 뭘 뜻하는 지.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건 말이지, 디키버드.”


제이슨의 고개가 삐뚜름하게 꺾였다. 어둠속에서 드러난 목덜미 아래에 붉게 흉이 진 짐승의 잇자국이 훤히 드러났다. 분명 흉터는 남아도 아문지 오래 된 상처가 더없이 썩어 문드러져 고약한 진물을 끊임없이 내 뿜고 있었다. 헛구역질이 올라올 만큼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듯 했다. 그러나 딕은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이 다가오는 제이슨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갑자기 궁금해 졌거든. 너는 뭘 봤어?”


내 죽음이야? 아니면 날 포함한 다른 동생들의 죽음이야? 브루스가 죽었어? 아니면,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 네가 죽었나? 그날 떨어진 건 네 부모님이 아니라 너였어? 나야? 팀이야? 데미안? 브루스? 아니면 우리 모두? 

그만해. 딕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 안에 먹혀들어간 한마디를 아프게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넌 제이슨이 아니잖아. 눈앞의 대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리디큘러스!”


피를 흘리고 있던 제이슨이 새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갔다. 디키버드! 주문을 외친 목소리가 복도 끝에서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며 달려오는 것을 들었지만 딕은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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