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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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물의 정석 

written by. 멜로우















그냥 너를 껴안고 자다 일어났던 어느 날, 문득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 튀어나온 부정적인 생각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바보같이 내가 부르면 바로바로 튀어나오는 네 모습이 한심했고, 나만을 바라보는 네가 조금 성가셨다. 꾸준히 오는 연락과 나만 바라보는 너에 숨이 막혔다. 그래서 바쁘다는 핑계로 약속을 미루고, 변한 것 같다는 너를 품에 안고 무의미한 사랑을 속삭였다. 싸우고 다투기를 수십 번 반복한 많은 밤들이 그렇게 지나갔다. 하지만 점차 그런 것조차 지겨웠다. 


언제부터인가 네 웃음소리가 짜증이 났다. 전부 내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네게 핑계를 돌리고 싶었다. 나를 답답하게 만든 건 너였잖아. 나는 원래 이런 놈이었으니까, 너도 그런 나를 아니까 괜찮잖아. 그런 생각을 하며 밤마다 다른 여자들을 만났다. 너에겐 스구루가 있었고 나는 너희 둘을 믿었으니까, 내가 조금 너를 외롭게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너와 스구루가 골목길에서 껴안고 있는 모습을 보자 화가 치솟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너는 여전히 스구루의 품 안에 안겨있었다. 


왜? 날 사랑하는 거 아니었어?


병신같이 나는 네 사랑을 의심했다. 변한 건 나였는데.

그래서였다. 스구루의 집에서 마주친 너에게 못된 말을 내뱉은 건. 


화조차 내지 않고 그만하자는 너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너는 아무 말도 안 해? 미친놈처럼 네 탓을 하는 나에게, 결국 너는 그만하자고 말했다. 답답한 마음과 홀가분한 마음이 공존했다. 지독히 이기적이었던 나는 멍청하게도 그렇게 너를 보내고 말았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너의 빈자리가 좋았다. 보고서를 제출하듯 꼬박꼬박 하던 연락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돼서 좋았고, 밤거리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어서 편했다. 혼자 있는 방에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너는 다시 내게 돌아올 거니까, 괜찮겠지. 분명 너에게 먼저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신경을 껐다. 하루, 이틀. 점점 지나며 너의 빈자리를 느끼기 시작했다. 아침이면 걸려오던 너의 모닝콜이 끊기자 지각하는 날들이 빈번했다. 시간마다 오던 연락이 사라진 핸드폰은 조용했다. 원래 내 핸드폰이 조용했나? 괜히 허전한 기분에 하루에도 몇 번씩 메일함을 확인했다. 잠이 들었다가도 네 빈자리의 공허함에 깨는 날이 잦아졌다. 혼자여서 좋았는데, 어쩐지 외로운 기분이었다.


문득 지나 보니 너에게 연락이 오지 않은지 한 달이 지났더라. 그러자 왠지 모를 초조함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네가 나를 떠날 수 없는데. 그날은 내가 너무 심했나 싶어 오랜만에 네 번호를 눌렀다. 익숙한 너의 단축번호를 누르고 네 목소리가 들릴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처음엔 잘못 걸렸다고 생각했다. 다시 네 단축번호를 눌렀다. 여전히 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번엔 선명히 기억나는 네 번호 한 자리 한 자리를 눌렀다. 너와 내가 만난 그 날부터 한 번도 바뀐 적 없던 번호.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던 난 옷을 챙기고 네 집 앞으로 갔다. 가는 동안 너와의 메일함을 천천히 읽어봤다. 흐릿한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기다리고 있을게  오후 8:05


아, 새벽에 너를 내쫓았던 날. 그날 너는 나를 기다렸구나. 네가 보낸 마지막 문자를 확인하자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째서인지 점점 불안한 마음이 커져갔다. 나는 익숙한 집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오래전에 너희 집 열쇠를 잊어버린 탓이었다. 하지만 기다리던 넌 나오지 않았고, 수도 없이 문을 두드린 결과 옆집 사람에게서 너의 소식을 들었다.


‘옆 집주인 바뀐 지가 언젠데요. 서둘러 짐 뺀다고, 위약금도 엄청 물고 가서 시끄러웠는데.’


도망치듯 네 집 앞을 벗어났다. 그리고 곧장 스구루에게 찾아갔다.


‘넌 알지.’

‘뭐를?’

‘걔가 어디 있는지 너 알고 있잖아!’

‘하. 이기적으로 굴지 마, 사토루. 너 피하겠다고 자기 흔적 다 지우고 사라진 애야.’


난 걔가 상처 받는 꼴 다시 못 봐. 그러니까 꺼져 사토루.


그렇게 욕하는 스구루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당장 너에게 찾아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했다. 그래도 직장엔 나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너의 회사 앞으로 찾아갔다. 동기들에게 전화가 계속 울렸지만 전부 무시하고 너의 퇴근까지 기다렸다. 하지만 퇴근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네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너를 데리러 간 회식자리에서 스치듯 보던 얼굴이 보여 그 사람을 붙잡았다. 너가 안에 있냐고 물어보자 퇴사를 했다는 대답이 들려왔다. 어디로 이직을 준비하지도 않고, 스카웃 제의가 온 곳도 없이 그냥 그만두었다고. 혹시 몰랐냐고 묻는 목소리가 끔찍해서, 나는 미친놈처럼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너의 모습을 찾았다.

너와 함께 갔던 식당, 종종 산책하던 공원, 우리가 자주 가던 카페, 네가 나를 기다리던 카페.. 그러다 돌아온 곳은 결국 학교였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나와 함께했던 네가 아니면 너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정말 혹시나 네 소식을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술자리에 나갔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연거푸 마시다 넌지시 네 얘기를 꺼냈다. 유독 너를 잘 따랐던 나나미와 하이바라의 표정이 굳어갔다. 작은 희망이 피어올랐다가, 최근에 연락한 적이 없다는 말에 속이 울렁거렸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찾으세요?’

‘뭐?’

‘하이바라.’

‘왜, 선배도 알건 알아야지. 아파서 새벽에 응급실 가고도 다음날 선배 보러 술자리까지 나온 거였는데, 그 자리에서 자기가 어떻게 했는지. 선배는 아무것도 모르죠. 선배가 없을 때면 애들 사이에서 어떤 얘기들이 오가는지. 남자애들한테는 온갖 성희롱은 다 당하고, 여자애들한테는 비웃음 거리라는 거 알고 있어요?’


하이바라가 비꼬듯 말하는 모습에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네 생각만 났다. 내 곁에서 어떤 생각으로 버티고 있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욕을 먹고 뺨을 맞더라도 너를 봐야 할 것 같았다. 


‘..선배는 쓰레기예요.’


나도 알아. 치솟는 화에 꽉 깨문 입술이 터지기라도 했는지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퍼졌다. 


“왜 요즘은 사랑한다고 안 해줘?”

“응?”

“사토루, 애정이 식었어.”

“무슨 소리야. 그런 말 하지 마.”


그때 사랑한다고 해줄걸. 조금 더 잘해줄걸.


어느덧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지 두 뺨이 축축했다. 집에 들어오자 옅게 남은 네 향기와 흔적에 울음이 더 커졌다. 정말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너와 내가 끝났고, 너는 내 곁에 없다는 게. 너를 마지막으로 안았던 게 언제였지. 집에 남은 네 옷들을 찾아 끌어안았다. 그래도 너를 품에 안았던 그 느낌이 아니었다. 너를 보내던 날이 떠올랐다. 간신히 서러움을 토해내던 너, 끝내 무너지던 너. 그리고 체념한 듯 나를 올려다보던 시선이. 

고요한 집이 네 생각들로 쌓여간다. 아침이면 같이 눈 뜨던 침대, 껴안고 티비를 보던 소파, 함께 밥을 먹던 식탁. 우리의 흔적이 가득한 집에서 유일하게 너만이 부재했다. 너에게 했던 모진 말들이 나를 향해 되돌아왔다. ‘왜 이렇게 투정을 부려. 진짜 사람 피곤하게 만든다, 너.’ 미친새끼. 찬란했던 네가 떠올랐고, 그 찬란함을 내 손으로 뭉갰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다시 한번 네게 전화를 걸었다. 그냥 한 번이라도 네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말도 안되는 걸 알지만, 네가 보고 싶었다.


..뒤늦은 후회였다.














BGM이 필요하다면 틀어주세요:)













사토루와 헤어졌다. 너를 지워내기에 우리의 6년은 너무 길었지만,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진짜였는지 점점 괜찮아지더라. 

처음 네가 없던 한 달은 무척이나 괴로웠다. 우습게도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도 상처를 받은 건 나였다. 깨어있는 내내 네 생각이 나 잠이 들지 않고서야 생각을 멈출 수 없었고, 취하지 않고서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항상 너와 걷던 거리에 빙 돌아가야만 눈물을 참을 수 있었고, 온통 너의 흔적이 남은 집에서는 편히 쉴 수 조차 없어 매일 밤을 방황했다. 그럴수록 마음이 가벼워지는 게 아니라, 네게 못해준 것만 떠오르더라. 왜 후회를 내가 하는 건지 억울하기도 했고, 나를 완전히 잊은 것 같은 네 모습에 열이 나 쓰러지기를 반복했다. 네가 없이는 정말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토루 없이는 내가 살 수가 없는 거였다.


‘..왜 왔어.’

‘너 죽었을까봐.’

‘스구루, 내가 불쌍해?’

‘너보다 이런 너를 보는 내가 더 불쌍하지.’


그렇게 말하는 스구루의 눈빛이 어쩐지 익숙해서, 하루하루 죽어가던 나를 붙잡아 준 스구루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스구루와 함께 6년 동안 하지 못한 일들을 하나씩 시작했다. 너와 함께 있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아무 곳이나 가까운 곳으로 잡은 직장을 때려치웠고, 자취방에 있던 너의 흔적들을 정리했다. 내 인연은 너와도 잔뜩 얽혀있어서, 너의 소식을 듣게 될까 무서워 sns도 끊고 잠수를 탔다. 너를 만난 이후로 바꾼 적 없었던 핸드폰 번호를 바꾼 것도 모자라 핸드폰을 새로 샀다.


그리고 5년 만에 이사를 했다. 무려 도쿄에서 미야기까지. 한 번도 밟아본 적 없는 마을에서의 새 시작이었다. 이 또한 스구루의 도움이 컸었다. 그리고 짐이 얼추 정리된 후에는 그동안 미룬 연락들에 답하기 시작했다. 너와 함께한 시간이 길었던 만큼 우리를 알았던 지인들을 만나 차분히 관계가 끝났음을 알렸다.


‘잘 됐네요. 그 사람 신경 쓰지 말고 누나 인생 살아요.’

‘아아, 그래. 그 쓰레기한테 네가 너무 아깝잖냐. 잘 됐네.’

‘그러는 지는..’

‘뭐, 지는? 이 새끼가-’


오랜만에 본 메구미는 참 많이 자라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부자가 똑같은지, 둘 앞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헉.. 그럼 이제 선배 솔로예요?! 그럼 이제 게- 읍!’

‘이사 가신다고요. 미야기까지.’

‘응, 그렇게 됐네. 다 정리되면 집들이할게, 놀러 와!’

‘읍읍!!’

‘..하이바라랑 게토 선배랑 셋이서 찾아갈게요.’


귀여운 후배들과도 잘 이야기를 끝냈다. 두 사람은 정말 걱정이라고는 안 하는 것 같아서, 그 분위기가 편해서 가볍게 만난 모임은 술자리까지 이어졌다. 


‘뭐? 그 자식 미친 거 아니야!?’

‘다음에 수술할 일 있으면 실수인 척..’

‘저기 쇼코..? 무서우니까 말은 끝까지 해 줄래..?’

‘이리 와, 고생 많았어.’


술자리는 어느새 커져서, 정신을 차릴 쯤에는 너와 내가 알던 사람들이 모두 모였더라. 다정한 이오리 선배와 쇼코가 나 대신 화를 내는 모습에 나는 마음 놓고 너를 털어냈다. 이토록 좋은 사람들이 너와 내 곁에 있었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나더라. 그렇게 그들 앞에서 온전한 ‘나’로 웃게 되었다. 


‘괜찮지?’


스구루에 물음에 뭐라고 답했더라. 술기운에 제대로 기억은 안 나지만 환하게 우리가 마주 보고 웃었던 것만은 또렷하게 기억난다.



이 모든 게 고작 반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녀왔습니다아.”

“어서 와.”

“..어?”


아무도 없을 게 분명한 집에서 환영 인사가 들려온다.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드니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당황해 입을 벌리고 있자 웃으며 내 짐을 집어 든 스구루가 복도 끝으로 사라진다. 


“뭐야, 스구루!?”

“오늘 종강했거든.”

“아니.. 그러면 집에서 쉬어야지!”

“누가 보고 싶더라고.”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스구루를 밉지 않게 흘기며 황급히 거실로 들어갔다. 아, 이럴 줄 알았어! 잔뜩 차려진 밥상이 나를 반긴다. 대학 조교라면서 애가 왜 이렇게 여유로운지.. 서둘러 손을 씻고 나머지를 도왔다. 그래 봤자 스구루가 거의 끝마친 상태여서 음식 나르기가 전부였지만.


“어디 다녀왔어?”

“유우지랑 쇼핑센터! 애가 쑥쑥 자라서.. 아, 메구미것도 샀는데 전해줄래?”

“벌어 둔 돈을 전부 애들에게 쓰는구나..”

“읏, 뭐 어때! 돈이야 벌면 되지.”


나는 미야기로 내려오고 난 후에 병이 났다. 이사로 지친 건지 이별의 후유증인 건지 출근하던 와중에 집 앞에서 쓰러진 적이 있었다. 옆집에 사는 유우지가 빨리 발견해주어서 다행이었다. 그 이후로 미야기에서의 근무는 재택근무로 바뀌었고, 쇼코의 잔소리 폭탄과 스구루의 과보호를 얻게 되었다.

내가 쓰러졌다는 사실을 알자 거의 매주 찾아오던 스구루가 과제와 시험 때문에 거의 한 달을 오지 못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조금 들뜬상태였다.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먹어.”


스구루와 나는 자연스럽게 식기를 챙겨 마주 보며 앉았다. 분명 혼자 사는 집일 텐데 어째서인지 도쿄에서 보다 짐이 많았다. 가끔 찾아오는 쇼코나 이오리 선배, 혹은 유우지를 위한 여분이기도 했지만 자주 오는 스구루의 식기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집들이를 하던 날 뻔뻔하게 선물이라며 여러 식기를 건네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스구루도 장난기가 많았다는 걸 잊었던 내 실수였지.


“어, 전화 온다.”


스구루가 테이블에 뒤집어 놓았던 핸드폰을 들어 발신자를 확인한다. 발신자를 확인하더니 무음으로 바꾸고 전화를 무시하는 모습에 호기심이 들었지만, 굳이 누구냐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잠시 끊겼던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예쁜 노을이 방을 물들일 때까지 우리의 말소리는 도란도란 이어졌다. 대체로 이야기를 하는 쪽은 스구루였다. 나는 조기졸업을 준비하느라 캠퍼스 생활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기에, 그에게 듣는 학교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자기는 학생이 아니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이야기를 꺼내는 네가 웃겨 푸스스 웃음이 터졌다.



이른 저녁을 다 먹은 나는 스구루를 바래다 주기 위해 산책 겸 집을 나섰다. 스구루가 미야기에 올 때마다 우리 집이 아닌 친척 집에서 머물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외진 곳에 위치한 단독주택이라 상관이 없는데도, 혼자 사는 여자에게 나쁜 소문 돌게 하고 싶지 않다며 그는 항상 내 제안을 거절했다. 그럼 나는 미안한 마음에 그를 바래다주는 게 우리의 일상이었다. 한적한 길가에는 우리의 웃음소리와 자박대는 발걸음 소리로 가득했다.


“아주머니!”

“어머, 오늘도 졌나 보구나.”

“의외로 고집이 세서요.”


만담 같은 우리의 대화를 들으며 머쓱하게 웃는 스구루의 옆구리를 콕 찔렀다. 아주머니의 표정이 질린다는 표정이어서 우리 둘 다 웃음을 터트렸다. 이사온지 다섯 달도 안되었는데, 그동안 얼마나 신세를 졌는지.. 나는 밉지 않게 스구루를 흘겨보았다. 학생 때는 한 번도 찾아오지 않더니, 평생 볼 얼굴을 올해 다 보겠다며 뼈 있는 농담을 하는 아주머니에 스구루가 식은땀을 흘렸다. ‘이래서 너희는 언제 연애하니?’ 아주머니는 스구루가 찾아올 때마다 우리를 놀리고는 하셨다. 처음에는 스구루의 방문을 환영하던 아주머니도, 그 횟수가 잦아지자 내 편을 들어주시기 때문이었다. ‘그냥 한 집에서 자는 건데, 스구루는 너무 조심하는 것 같아요.’ 라는 내 말에 오늘도 스구루를 놀리시는 아주머니였다. 이젠 나도 스구루가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고 있었지만. 

아주머니가 웃으면서 먼저 들어가시고, 스구루와 나는 문 앞에서 실랑이를 벌였다.


“얼른 들어가! 피곤하겠다.”

“정말 밤 길 혼자 가도 괜찮겠어?”

“응, 무서우면 전화할게.”

“미안한데..”

“어서 들어가서 쉬기나 해!”


걱정된다며 집 앞에서 머뭇거리던 스구루의 발걸음을 돌린 건 아주머니의 부름이었다. ‘너희 거기서 밤새겠다!’ 화통한 아주머니의 말에 그제야 걸음을 옮긴다. 끝까지 바래다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스구루에게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전화를 받으라는 신호였다. 


숙소부터 집까지의 거리는 꽤 되는 편이어서, 스구루가 샤워를 끝낼 때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보니 스구루와 함께 걸어올 때엔 선홍빛 노을이 번지던 하늘에 어둑한 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어쩐지 비가 올 것 같아 걸음을 재촉했다. 언덕 너머 불어온 미지근한 바람이 머리를 흩트리고 지나간다. 


어느덧 너 없이 맞는 여름이 무르익어간다. 




만약 사토루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태연하게 웃어 보일 수 있을까 아니면 모른 척 지나칠까. 사토루를 다시 만나는 날은 내 마음이 정리된 다음일 테니까 어찌 되었든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저 멀리서 익숙한 모습이 보이기 전까지는, 정말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도 안 된다고 네가 여기를 어떻게 알고 찾아오겠냐 생각했지만 내 이름을 부르는 너는 그 어떤 때보다 선명해서, 내 걸음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토루와 눈이 마주쳤다. 


다시 만나게 되어도 괜찮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마음이 우습게도 나는 괜찮지 않았다. 굳어버린 나를 껴안는 사토루의 품에 닿고서야 너를 간신히 밀어냈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네 팔은 쉽게 풀렸고, 바보처럼 내 이름만 부르던 네 목소리에 점점 울음이 묻어 나왔다.


“가지 마!”

“…”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어쩔 줄 몰라 방황하던 네 손이 내 손목을 조심히 잡아온다. 하염없이 떨리는 그 손까지는 차마 뿌리치지 못해서, 우리 둘은 그렇게 멍하니 서 있었다. 잘못했다는 말 말고는 하질 않는 너와, 그 어떤 말도 할 말이 없는 내가.


“보고, 싶었어..”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작게 뱉어진 말에 그제서야 사토루의 얼굴을 볼 자신이 생겨 고개를 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전보다 훨씬 마른,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한껏 움츠러든 몸을 가진 사토루가 눈에 들어온다. 간절하게 내 손을 붙잡은 손을 떼어냈다. 그러자 내 거부에 충격받은 것처럼, 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는 너의 모습에 마음이 아릿해져 왔다. 네 눈물에 다시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나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

‘응? 갑자기?’

‘갑자기 아닌데.’

 

바보같이, 눈을 감아도 떠도 네가 떠오른다. 다시 눈을 떠, 내 앞에 서있는 너를 바라봤다. 푹 젖은 속눈썹에 애처롭게 눈물이 맺혀있다. 간절하게 나를 내려다보는 네가 너무 작아 보였다.


“미, 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잘할게. 나.. 나, 버리지 마.”

“..사토루.”

“응, 응.. 나 듣고 있어, 여기 있어.”


과거의 너와 지금의 네가 겹쳐져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너를 떠나면서도 네가 힘들지 않기를 바랬는데. 사토루를 떠난 건 그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내가 너무 지쳤으니까. 사토루의 옆에서 더 버틸 힘이 없어서였다. 그의 애정이 변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있기 힘겨웠고, 내 사랑이 멍들기 전에 나는 그에게서 떠나야만 했다. 나의 사랑은 그랬다. 미련하고 바보같이 주는 법 밖에 몰라 다치고 다쳐도 나보다 네가 소중한.

지금의 감정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사토루가 싫지 않았지만, 그에게 다친 내 마음은 괜찮지 않았다. ‘너는 네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아야 해.’ 오늘같이 울고 있던 날 위로하던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떼어낸 건 그래서였다.


“돌아가 줘.”

“..싫어.”

“고죠.”

“……”

“..네가 끝낸 거야. 돌아가 줘.”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에 나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회색의 바닥에 물방울이 스며들며 어둡게 물들어간다. 그렇게 사토루의 곁을 지나쳤다. 내가 이름으로 불렀을 때부터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토루는 나를 잡지도 못한 채, 멍하니 서서 외친다.


“..진짜 이렇게 끝낼 거야?”

“……”

“나 사랑한다고 그랬잖아. 나 이렇게 왔잖아..”

“……”

“제발, 나 버리지 마.”


응? 자기야.. 끝까지 울음 섞인 네 목소리가 그림자에 매달려온다. 내 머뭇거림을 기민하게 알아챈 사토루가 애원한다. 그 모습에 아프게도, 너를 못 잊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도, 울지는 않았다. 


너를 뒤로한 채 들어온 집 안의 공기가 축축했다. 몇 시간 전의 따듯한 공기는 날아가고, 비를 닮은 습한 공기가 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간신히 소파 위로 몸을 뉘었다. 부족한 온기에 창백한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굳게 마음을 먹고 돌아섰다. 어쩌면 도망이었을지도 모르지. 아직도 나는 사토루를 온전히 정리하지 못했으니까. 스스로의 모습에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다시 만난 게 뭐가 그렇게 큰 일이라고.., 잡념을 떨치기 위해 움직이는 손은 번잡했다. 뭐라도 해야 이 감정을 날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계속해서 손을 움직였다. 따듯한 커피를 내리는 손이 작게 떨렸다. 그러다 울리는 전화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스구루’ 너의 이름에 머뭇거리다 수화 버튼을 눌렀다. 


‘집에 잘 들어갔어?’

“응, 방금 막 들어왔어.”

‘..무슨 일 있었어? 목소리가..’

“밖에 비가 와서.. 우울해서 그래.”


잠깐 대화 소리가 끊어졌다. 내 기분 변화에 예민한 너가 쉽게 눈치챌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나는 솔직하지 못했다. 그러면 다정한 너는 결국 내 말에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넘어가 준다. 


‘우울하면 안 되는데.. 내가 애교라도 부려줘야 하나?’ 

“뭐어-?”


좀처럼 집중하지 못하는 나를 알면서도 혼자라도 대화를 이어가려는 스구루의 모습에 내가 겹쳐졌다.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스구루가 답지 않은 말을 건네는 것에 웃음이 터졌다. 어지러운 마음이 점점 차분해졌다. 다정이 배인 네 목소리를 한참 듣다가 나도 모르게 홀린 듯 질문을 건넸다.


“스구루는 왜 나에게 다정하게 굴어?”

‘갑자기?’


불쑥 튀어나간 무례한 질문에 내가 당황하기도 잠시, 수화기 넘어 들려온 네 목소리에 웃음이 섞여있어서 안심이 되었다. ‘왜 그런 걸 물어봐?’ 너의 질문에 머뭇거리는 쪽은 나였다. 글쎄, 네가 꼭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이 구니까. 내가 사토루를 대하던 것처럼 네가 나를 보는걸. 그 어떤 대답도 옳은 것은 아니어서, 나는 솔직한 마음을 삼켜야만 했다.


‘솔직하지 못한 건 우리 둘 다 똑같네.’

“어?”

‘그냥, 보고 싶다는 말이야.’


부드러운 네 목소리에 심장이 작게 두근거렸다. 차가웠던 몸에 온기가 곁들었다.


“뭐, 래..!”

‘난 진심인데?’

“내일 또 보잖아.”

‘그래도 또 보고싶은데.’


몰라! 끊을래. 놀리지 마! 애써 쿵쿵대는 심장을 무시하고 전화를 끊었다. 가끔씩 훅 들어오는 스구루의 말은 나에게 너무 과분했다. 


정말 나를 좋아하는 걸까. 

하지만 나는 아직도.. 아, 사토루.


그제서야 사토루를 만났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사토루의 생각에 너와의 전화에 집중하지 못했으면서 이렇게 쉽게도 잊어버리다니.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한번 거슬린 생각은 무척이나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살짝 문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빗줄기가 어느새 굵어져 있었다. 본격적으로 퍼붓기 시작한 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설마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 건 아니겠지? 예전의 너라면 모를까, 지금의 너는..


자꾸만 사토루의 생각이 떠올라 기분이 가라앉았다. 잡념을 떨치기 위해 냉장고의 가장 안쪽에서 술 한 병을 꺼냈다. 잔을 채우는 게 익숙했다. 사토루와 헤어진 이후에는 매일같이 술을 마셨으니까. 이럴 때마다 나를 말려주던 스구루가 없으니, 술병을 비우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끊어진 전화 이후에 다른 연락은 없었다. 아마 아주머니의 일손을 도와드리는 중일 테지. 그것도 아니면 졸고 있으려나? 종강하자마자 달려온 걸 보면 많이 피곤했을 텐데. 술을 마실수록 뒤죽박죽 생각들이 얽혀갔다. 널 잊으려고 했는데, 왜 나를 괴롭히는 거야..


술에 취해 전화기를 들었다. 여전히 익숙하기만 한 너의 번호를 꾹꾹 눌렀다. 신호가 몇 번 울리고, 네가 전화를 받는다. 한참을 말이 없던 우리의 통화는, 빗소리로 채워졌다.


‘……’

“..왜.”

‘……’

“왜 이제 와서 날..”

‘..미안해.. 그냥, 내가 전부.. 잘못했어.’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그게 너무 안쓰럽다가도,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하나 싶어서 가슴이 답답했다. 차라리 계속 나쁘던가. 연애할 때도 들은 적이 거의 없던, 울음이 섞인 목소리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너가 너무 미워. 미워 죽겠는데.. 네가 싫지가 않아..”

‘..예전처럼 안 할게. 네가 기라면 기고, 짖으라고 하면 짖을게.’


간절한 너의 목소리에도 내 의심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술 때문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여전히 나는 너를 좋아하지만, 너는 그렇지 않을 거야. 네가 나를 좋아한다면 이래서는 안 되잖아. 네가 이런다고 뭐가 바뀌겠어.


나를 사랑한다면 왜 그랬는지. 원망과 고백이 동시에 새어 나왔다. 왜 이렇게 나만 아파야 해.


‘흐으.. 나 떠나지만 마. 너 없이 안돼...

“..모르겠어. 너 때문에 지금 너무..,”

‘기다릴게, 응? ..가라는 말만 하지마.’ 


세찬 빗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어쩐지 너의 울음이 가까이 들리는 것 같았다. 


“..가, 사토루.”

‘싫어.. 여기서 기다릴래. 너 화 풀릴 때까지 서 있을게.’


아이처럼 떼쓰는 그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멋대로 걸은 전화를 끊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아팠다. 테이블 위에 고개를 묻고 열을 식혔다. 핸드폰은 계속해서 진동이 울렸다. 


















“..여보세요..”

‘누나, 나 배고파..’

“유우지?”

‘할아버지 병원 가서, 안 와..’

“뭐?”


그 말에 놀라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제 술을 먹다 테이블 위에서 잠들었는지 온 몸이 쿡쿡 쑤셔댔지만, 당장 혼자 있을 유우지가 더 중요했다. 다급하게 나오느라 슬리퍼를 신었다가, 아직도 내리는 비에 미끄러졌다.

문을 두드리자 유우지가 나온다. 혹시라도 울었을까 싶어 얼굴을 살피는데, 차갑다며 투덜거리는 얼굴은 멀끔했다. 일단 유우지를 안아 들고 우리 집으로 향했다. 폭우처럼 내리는 비에 그새 젖어버린 옷이 축축하게 달라붙었다.


“유우지, 젖었어?”

“아니! 누나, 수건 줄까?”

“괜찮아. 누나가 찾을게.”


바닥에 내려주자 익숙하게 제 집처럼 이리저리 쏘다니는 유우지에 살풋 웃어 보이고 물기를 대충 닦아냈다. 어제 스구루가 만들어준 반찬들을 꺼내 유우지의 아침으로 차려주고,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서, 할아버지 어디 아프시대?”

“웅? 아니! 어떤 형아 때문에!”

“응..?”


내가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자 유우지가 밥을 삼킨 후에 재잘거린다.


“할부지가 아침 산책 갔다가 오는데, 어떤 키 큰 형아가 요 앞에 쓰러져 있어서 병원에 데려다주고 온댔어. 금방 온다고 했는데 배고파서..”

“하.. 놀랐잖아! 할아버지가 아프신 줄 알았네.”

“음. 근데 그 형아 엄청 잘생겼더라. 연예인 같았어! 머리도 하얗고..”

“..어?”


하얀 머리, 큰 키. 어딘가 익숙한 묘사에 순간적으로 사토루가 떠올랐다. 설마.., 초조함에 아까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핸드폰을 들었다. 창을 켜자 익숙한 번호로 부재중이 와 있었고, 네게 온 문자도 있었다.



내가 다 미안해.  오후 11:00

잘못했어.  오후 11:01

얼굴이라도 보여주면 안 될까..  오전 1:00

보고싶어.  오전 4:00



미안하다는 네 문자를 바라보다, 문자가 온 시간을 확인하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닐 거라고 믿고 싶지만 내가 아는 사토루라면 문 앞에서 고집스럽게 기다렸을게 분명했다. 유우지에게 내 핸드폰을 맡기고 차키만 챙겨 집을 뛰쳐나왔다.


“..스구루?”

“..데려다줄게. 나랑 같이 가자.”

“미안, 부탁할게..”


형편없이 떨리는 내 몸을 스구루가 잡아준다. 운전 못하지 않겠냐고, 떨리는 손으로 잡아 든 나의 차 키를 가져간다. 그 모습에 나는 입술을 짓이기며 고맙다는 말 밖에 하지 못했다.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은 적막했다.


“기다릴게.”

“응, 진짜.. 고마워.”


황급히 차에서 내린 나는 사토루의 이름을 대고 병실로 찾아갔다. 고열로 실려왔다며, 요즘 세상에 영양실조인 사람은 처음 본다는 간호사분의 말이 가슴을 아프게 죄여 왔다. 침대에 누워있는 익숙한 인영이 시야에 들어온다. 곧 일어날 거라는 말에 그제야 안심이 됐다. 안 그래도 하얗던 피부는 더 하얗게 질려서 안쓰러워 보인다. 이런 너에게 안쓰러운 감정을 느끼는 내가 우스웠다. 그렇게 너를 앓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너를 놓지 못하나 봐. 자조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 맨날 아팠으면 좋겠다.’ 

‘무슨 그런 말을 해.

‘왜에- 그럼 우리 자기가 맨날 나 아껴주잖아.

‘으이구, 얼른 낫기나 해! 다 나으면 얼마든지 아껴줄 테니까.

‘! 나 다 나았어.


그 언젠가 사토루가 아팠던 날이 생각이 났다. 좀처럼 아픈 적이 없는 그여서 걱정이 많았다. 그때도, 지금도. 홀쭉해진 볼이나 거칠어진 네 피부가 고생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잠이 든 너의 모습을 천천히 눈에 새겼다. 얕은 숨소리와 빗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병실 안에서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나를 담던 너의 눈, 내 이름을 부르던 너의 입술. 그 무엇도 굳게 닫혀 나를 부르고 있지 않았다. 내가 사토루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확신이 없었다. 너를 사랑하는 것도 확실했고 네가 나를 사랑할 거라는 확신도 있는데, 우리가 괜찮을 거라는 확신이. 나는 괜찮을 자신이 없었다. 사토루의 머리칼을 살살 쓸어 넘기던 손을 떼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지 마.”


잔뜩 갈라지고 쉬어버린 목소리로 나를 붙잡는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토루가 내 손을 붙잡는다. 내 손을 붙잡지 않은 다른 쪽 손이 하얗게 질려있다. 나는 한숨을 쉬며 그 손을 살살 풀어냈다. 그러자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린다. 네 예쁜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온다.


“제발..”


간신히, 말을 내뱉는다. 그제야 드러난 사토루의 청명한 푸른 눈동자. 눈물이 맺혀 일렁이는 눈동자가 꼭 바다 같았다. 내가 뿌리치지 않는 손이 마치 소중한 것을 잡는 몸짓이어서, 꼭 죽기 직전의 사람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토루에 입술이 바짝 말라온다.


“..갈게, 아프지 마.”


내 말에 사토루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사토루를 계속 바라보면 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쫓기듯 네 병실을 벗어났다. 사토루와 멀어지고 나서야 눈물이 흘렀다. 너를 밀어낼 수도 없었고, 너를 다시 품에 안을 수도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나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간신히 이끌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주차장을 두리번거리다, 차 밖에 나와 기대 있는 스구루를 발견했다. 그리고 나는 이제서야 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잔뜩 젖은 모습의 네가. 그러고 보니, 네가 어떻게 알고 왔는지 물어봤어야 했는데.


“왜 또 울어.”

“...”

“..제발 울지마.”


나를 품에 껴안은 네 심장이 뛰어오는 게 전해진다. 왜 우냐고 물어오는 너의 음성이 안타까워서, 내 울음소리는 조금 더 커졌다. 내가 뭐라고 네가 이렇게 아파하는지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듯, 내 몸을 끌어안은 팔에는 힘이 없다. 귓가에 내려앉은 너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리고 있어서, 얼굴을 확인하러 고개를 들려는데 네 커다란 손이 내 뒤통수를 붙잡는다. 그 손마저도 조심스럽기 짝이 없어서, 나는 팔을 들어 너를 껴안았다. 


“사토루를 좋아하는 건 괜찮았는데, 네가 우는 건..” 

“...”

“어떻게 해야.., 날 봐줄래.”

“스구루...”

“너에게, 나는 부족할까.”


알게 된 너의 진심이 너무 무거워서 눈물이 내 입을 막았다. 쏟아지는 눈물에 숨이 막혔다. 그런 나의 침묵에 너의 호흡이 거칠어진다. 이제야 알아챈 내가 너무 바보 같고, 이런 나를 애틋하게 여기는 너의 진심이 안타까웠다. 그럼에도 어떤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게 너무 미안해서, 나는 그저 너를 더욱 껴안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내리는 비에 숨어 한참을 눈물을 쏟아냈다. 긴 장마의 시작이었다.

















후기


- 과거에 상편을 붙인 제가 원망스럽게도....이번 글이 너무 마음에 안드네요.... 하지만 외전을 쓰는 중이라^^.. 일단 올립니다..^^......


- 별로 중요한 점은 아닌데, 드림주의 '너' 호칭이 사토루에게서 스구루에게로 넘어가게 적었습니다.

사실 '너'라는 호칭이 완전히 스구루의 것이 되었어도 그게 스구루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은 아닐거에요. 너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청소년기에는 미숙했고, 지금 이들은 성인이니까요. 


- 분명 고죠 후회물인데.. 어째서 고죠보다 드림주가 더 많이 우는건지..?



오늘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드림, BL, HL 좋아하는 것들을 끄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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