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의 이름으로


17. 영원의 이름 (下)


written by. 은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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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세계에서 평범히 쓰였을 이름이, 히나타의 마지막 조각이었고 영원의 이름이었다. 영원의 이름은 세 가지 조건이 완성되어야 불릴 수 있는 이름이었다. 태양을 상징하는 이름인 히나타 쇼요, 조각난 기억과 영혼이 품고 있는 정화의 힘, 그리고 반려의 피.

반려인 츠키시마가 진심을 다해 부를 사랑스러운 이름이 열쇠였다. 히나타 쇼요, 그 자체가 영원의 이름인 것을. 이리저리 엉켰을 붉은 실이, 아니 끊어졌을 것이라 생각했던 운명이 히나타의 이름 아래 이어졌다. 귓가에 남을 언어는 생의 마지막까지 유한할 것이고 영원을 속삭일 것이다.

그토록 알고자 했던 숲의 마지막 비밀이 이토록 간단하다니. 히나타는 헛웃음을 흘렸다. 바로 옆에서 금빛의 사내가 이 쪽을 보며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 실눈을 뜨고 가만히 그의 얼굴을 더듬었다. 

과거 선대 숲의 주인이 어떤 예지(豫知)를 하여 현재, 새로운 주인에게 어떤 안배를 해 놓았는지 알지 못한다. 언젠가 츠키시마가 말했다. 선대의 주인이 어떤 미래를 보았기에 오랫동안 이어져 왔을 권리와 고귀한 자리를 내려놓고 지금의 히나타에게 계승한 건지 알지 못하겠다고. 의문형으로 끝나던 말과는 다르게 저를 바라보는 시선은 묘했다.

모두가 아는데, 나만이 모르는 것.

히나타의 상념을 가르고 청명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쇼요. 아니, 숲의 주인. 저는 숲의 기록자 ‘시미즈’입니다.”

길었던 해가 내리고 달의 시간이 시작된 밤의 공기를 가르며 나타난 그는 얇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제 이름을 밝히며 히나타를 한 번, 츠키시마를 한 번 쳐다보았다. 눈이 가려져 있음에도 훤히 다 보이는 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히나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성별을 알 수 없는 존재가 자신을 기다렸다니. 제가 무엇이라고? 의문을 되새긴 순간 히나타는 제 위치를 다시금 떠올렸다.

히나타의 혼란을 느낀 시미즈가 주인의 손을 끌어와 손등 위에 가볍게 키스했다. 낙인처럼 진득하게 내려앉는 느낌에 히나타가 잠시 몸을 떨었다. 오래지 않아 제 팔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망연히 올려다보았다. 은은하게 내려 앉는 달빛을 가득 담아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를 하고 시미즈를 쳐다보는 그는 묘하게 화가나 있는 듯했다. 빙설 같은 분노를 받으며 마주 서 있는 시미즈의 태도는 태연하기만 했다.

“반려께서 여기에 계실 줄 몰랐는데요. 아…, 영원의 이름에 필요한 조건에 반려의 혈액이 필요하지요. 그거 아십니까?”

저는 좀 더 걸릴 줄 알았거든요. 조롱하듯 덧붙인 시미즈가 환하게 웃었다. 날카로운 눈매가 접혀지며 드러나는 미소는 퍽 차갑게 느껴졌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하네요, 숲의 기록자.”

츠키시마의 말에 시미즈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붉은 입술을 열어 답했다.

“모든 것을 알아야 하니까요. 숲의 기록은, 전부 제 손에 있답니다.”

“그럼 다르게 말하지요.”

“…….”

“숲의 기록자, 그리고 예지자이며 선대 은백의 주인. 그 전부가, 그대입니까?”

“뭐?”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경악을 담은 눈이 츠키시마와 스가와라를 번갈아 보다, 자신을 시미즈라 소개한 이를 바라본다. 모두가 아는데 나만이 모르는 것.

그것은 기이한 위화감이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이리저리 뒤엉킨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오래된 첫 탄생의 기억이 물밀듯이 들어오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생의 편린들이 끊임없이 속삭인다.

아. 마침내 벼락같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순혈 뱀파이어의 피를 지닌 자신이, 돌연변이가 되어 이 은백의 주인이 되었는가에 대해서.

그 증명이 눈 앞에 있지 않은가.

가라앉은 시선이 시미즈의 얇은 천을 응시한다. 예지의 힘을 지닌 댓가로 시력을 잃은 선대의 주인, 그리고 정화의 힘을 지닌 댓가로 돌연변이가 되어 태어난 현대의 주인.

선택된 운명이었다. 그 운명의 댓가로 히나타 쇼요는 돌연변이가 되어, 제가 사랑한 가문을 저버리게 만들었다. 순혈임에도 완전함을 가지지 못한 그는 정반대의 힘을 가졌다. 정말로 얄궂은 장난이나 다름없었다.

문득 어깨 위로 무게감이 느껴졌다. 히나타가 고개를 돌려 제 반려를 보았다. 어두운 밤 사이로 보이는 선명한 금빛 눈동자가 히나타에게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걱정 말라는 듯이, 그렇게.

침묵이 옅게 깔린 숲에서, 숲을 계승한 후대의 주인을 보며 시미즈가 선언했다. 절제를 가진 목소리가 힘을 싣고 허공에 울려 퍼졌다.

“이제 미래가 바뀔 것입니다. 단 하나뿐인 반려가 찾아낸 영원의 이름이 효력을 가지고, 은백의 주인을 완전케 하니 그 모든 속박에서 풀어날 것이라.”

온 몸이 뜨겁다. 제 몸에 감도는 피가 역류하는 기분에 숨을 가쁘게 몰아 쉬었다. 정신이 혼몽하다. 옆에서 츠키시마가 무너지려는 히나타의 몸을 붙들었으나 그런 것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몸 속을 빠르게 흐르는 혈액들을 전부 뽑아내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힌 채 계속해서 이어지는 시미즈의 목소리에 지배당했다.

고통뿐인 생이다. 하지만 찬란을 얻은 생이다. 함께 할 이를 찾았고 마음을 준 이를 얻었다. 히나타를 버티게 할 이유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츠키시마의 말대로 예지자이며 선대의 주인이었던 시미즈의 힘은 반려의 피와 영원의 이름 아래 히나타 쇼요를 완전하게 만들기 위한 초석이었다.

이를 악물고 버텨내던 히나타의 신음이 점점 잦아든다. 제 옷이 땅바닥에 질질 끌려 더러워지는 것도 모르고, 땀을 흘리며 눈을 감고 있는 연인의 얼굴을 걱정스레 바라보던 츠키시마의 앞으로 작은 칼이 떨어졌다.

난데없이 떨어진 칼 자루에 츠키시마의 눈썹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섬세하게 세공된 단검은 제법 날이 서 있었다. 손을 뻗어 칼을 잡은 그에게 시미즈가 명령했다.

“그 칼로 피를 내어 주인께 먹이세요. 한 방울이면 됩니다.”

그걸로 끝날 겁니다. 끝을 고하는 목소리가 지쳐 있었다.

그게 끝이라면. 입매를 단단히 굳힌 츠키시마가 제 손에 들린 단검을 살짝 기울여 잡았다. 망설임없이 그은 손가락에선 금세 피가 비쳤다. 검을 내려놓고 히나타의 입술 위로 피를 흘려 넣었다.

순결한 선인의 피가, 숲에 근접하여 영향을 이어받은 관리인의 피가 은백의 주인에게 전해진다. 목울대가 울렸다.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평정을 되찾고 간헐적으로 터져나오던 숨소리가, 가쁘게 오르내리던 가슴이 잠잠해진다. 그 변화들을 전부 지켜본 츠키시마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이제 히나타에게서 금목서의 향과 함께 청량한 기운이 감돌았다.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스가와라가 가까이 다가와 무릎을 굽혀 히나타의 손을 잡았다. 맞잡은 손에서 푸른 실선이 만들어지자 신수의 전신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히나타의 운명을 지배하던 잔혹한 댓가가 끝났다.

“끝났어, 쇼요. 눈을 떠. 왜, 왜 눈을 안 뜨는 거죠, 기록자님?”

“곧 눈을 뜰 거예요. 대가를 깨는 건 그렇게 쉽지 않답니다. 다행인 건 반려의 피를 먹였으니 괜찮을 겁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지 않겠어요?”

“…그렇게 해서 대가를 깨는 거라면 선대 은백의 주인이었던 기록자님의 대가를 왜 깨지 못한 겁니까?”

츠키시마의 의문은 정당한 것이었다. 히나타 쇼요의 ‘영원의 이름’이 해제의 일부라면 시미즈의 ‘영원의 이름’이 존재했을 터였다. 날카롭게 파고드는 질문에 잠시 멈칫한 시미즈가 침묵했다. 보이지 않는 시선이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츠키시마의 얼굴 위로 내려 앉았다. 이윽고 유려한 호선이 떠올랐다.

“영원의 이름은 히나타 쇼요에게만 유효합니다. 세상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그에게 왜 영원의 이름이, 영원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그것도 반려가 있어야만 발동할 수 있는 능력을?”

“…….”

“정화의 힘은 영원성을 띠고 있지요. 그 누구보다도 고결한 힘. 그래, 그대라면 아실텐데요. 초대 은백의 주인이 어떤 이유로 사라졌는지.”

“초대 은백의 주인, 말씀이십니까.”

언젠가 보았고 제 입으로 읽어 내렸을 기록 하나가 떠올랐다. 흐려진 시야 사이로 그가 남긴 유산을 기억했다. 모를 리 없었다. 그게 지금의 히나타와 무슨 연관이 있으려고. 하지만 지금 이 숲의 기록자가 허투루 말할 리 없다는 것도 알기에 그가 내놓을 다음을 기다렸다.

“그 분께서 가진 능력은… 정화의 힘입니다.”

“……!”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었나. 눈을 깜박여도, 제가 들었던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품 속에 얌전히 안겨 있는 연인의 체온을 느끼며 츠키시마가 다시 되물었다.

“지금, 초대 은백의 주인께서 가진 힘이. 정화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긍정의 말을 뱉은 그를 보고, 연인을 본다. 알 수 없었던 의문이 풀렸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음에 츠키시마는 입술을 사려 물었다. 묘한 표정을 그린 사내의 얼굴 위로 그림자가 스며든다. 곁에서 느껴지는 인기척과 히나타에게 뻗어지는 손을 외면하며 츠키시마는 작은 몸을 고쳐 들었다.

등에 업힌 히나타의 숨결이 목덜미를 간지럽힌다. 굽혀진 무릎을 펴고 일어나 가려진 시선을 마주했다. 보이지 않는 눈은 츠키시마를, 그리고 히나타를 살핀다. 이윽고 점점이 번져 나가는 미소가 현세의 반려에게 답을 묻는다.

“원망합니까?”

무엇에 대한 원망을 묻는지 되물을 필요도 없었다. 그 무엇도 원망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서 들은 감정에 대한 질문은 생소하게 느껴졌다. 하여 츠키시마는 부정했다. 허공을 찌르고 달아나던 불온한 감정이 예지자에게 잔뜩 붙들려 속삭임을 더했다.

“진실로, 그 애를 원망하지 않는다… 인정합니까?”

“질문의 의도가 뭔지 물어봐도 됩니까?”

“그 애를 보호할 의무가 저나 신수에게 있지만 그댄 아니죠. 고작 그 ‘영원의 이름’에 얽히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던가요. 그대와 그 애는 반려의 연으로 영혼이 서로 속박되어 있는 상태이며, 그대는 그런 것 따위 답답해하지 않았습니까? 하여 묻는 겁니다. 북부의 관리인, 그대는 지금 이 상황을, 그리고 그 애를 원망합니까?”

결을 맺는 목소리를 들으며 뜨겁게 날뛰는 감정을 통제하려 애썼다. 손아귀에 땀이 들어찬다. 가만히 서 있던 스가와라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마치 제게서 히나타를 빼앗으려는 듯이. 히나타에게 선보였던 숨가쁜 고백과, 낯선 과거의 잔재가 그를 시험한다. 모든 속박이 풀렸으니 연을 끊을 기회를 주는 거라고.

연을 끊는다.

츠키시마의 아름다운 얼굴에 조소가 그려진다. 싸늘한 빛을 띠는 웃음에 예지자와 신수는 침묵했다. 그 날 선 표정에서 답을 얻은 까닭이다. 하도 짓씹어 붉어진 입술에서는 맹목적인 집착이 깃든 경고가 새어 나왔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고개를 숙이는 사내의 금빛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흩날린다. 애초에 생각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다. 연이 이어졌기에 이리 닿을 수 있는 것을. 달콤한 도화를 닮고 향긋한 금목서를 닮은 연인이 허락한 건 오직 자신뿐이므로.

예지자가 원하는 대답이 어떤 것이든, 소신 있게 제 뜻을 전한 사내는 발을 옮겼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숲의 끝에 자리할 히나타의 성. 위치를 가늠하며 한 발짝, 한 발짝 떼어 걷던 그의 등 뒤로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늑대의 음성이 목덜미를 잡아당긴다. 제 뒤를 따라오며 들러붙는 음성들이 츠키시마의 신경을 자극했다. 하지만 비꼬는 것도 화내는 것도 아니었으니 결국에는 인정의 뜻을 담고 있었다.

어쩔 수 없더라도, 그는 히나타 쇼요의 반려이니까.


깊어진 밤을 가르고 돌아온 성에는 방문자가 들어 앉아 있었다. 주인이 없는 사이에 들어온, 어두운 풀색 머리카락을 소유한 사내. 그를 보는 모두의 표정이 제각각 다른 빛을 띠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익숙하면서도 낯선 방문자는 곧장 다가와 누군가의 앞에 섰다.

“언제 돌아올 생각이십니까!”

아. 츠키시마가 예의 당혹스러운 낯을 했다. 숲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지. 재빠르게 셈하던 사내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다행스럽게도 한 계절이 지나기 직전이었고 그 전에 돌아가야 했다. 관리인에게 주어졌던 의무를 전부 저버리고, 히나타 하나만을 보고 왔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보는 보좌관을 보며 얼굴을 굳힌 그가 냉엄하게 말했다. 등에는 아직 히나타를 업고 있는 데다 빽빽한 숲길을 헤쳐온 행색이 썩 좋지 않아 그가 내보이려던 위엄 따위는 다 소용없음에도.

“곧. 곧 돌아간다.”

“곧이면, 지금 돌아가시겠지요. 지금 북부가 난리인 건 아십니까!”

누가 들인 거지.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관리인이 할 만한 생각은 아니었으나 어쨌든 이미 생각해 버렸으므로, 용기 내어 자신을 찾아온 보좌관을 외면하며 침실로 가 히나타를 보료 위에 눕혔다. 얌전히 눈을 감고 누워있는 이의 얼굴을 바라본 야마구치가 헉, 하며 놀란 듯 숨을 삼키는 소리를 냈다.

히나타? 이어 중얼거리던 그가 제 상관을 돌아보았다. 해명을 바라는 눈길에도 여전히 히나타만을 바라보는 사내는 어쩐지 제가 알던 친우 츠키시마가 아닌, 낯선 타인을 보는 것 같았다. 대체 히나타와 츠키시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의아한 시선을 받으며, 보료에서 몸을 뗀 츠키시마가 몸을 돌려 야마구치의 앞에 섰다. 나가지. 작게 속삭이고는 그대로 지나쳐 나갔다. 야마구치는 살짝 발 끝을 들어올려 침실에서 벗어나 살며시 상관의 곁에 다가가 걸었다. 창가에서 달빛이 새어 드는 복도를 걷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질질 끌려간다. 공기 중에 떠도는 한기보다도 더 숨 막히는 건 츠키시마의 침묵뿐이라, 야마구치는 그 어떤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고요 속에서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에는 스가와라와 처음 보는 사람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앉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난 야마구치를 잡아 자리에 앉힌 츠키시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전의 당혹스러움은 전부 없앤 채로.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신수님?”

모두 여기 있었을 텐데요. 덧붙이는 그의 눈매가 가늘어진 것을 보며 스가와라가 빙긋 웃었다. 천진하게 보이는 미소에 던져지듯이 가운데에 놓인 야마구치가 더더욱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설명하랬더니, 저들끼리 싸움을 붙이는 행태가 더더욱 기가 막혔다.

“내 권한으로 반려의 손님을 들였을 뿐. 간절히 찾고 있기에 이 곳으로 가는 길목을 비틀어 텄다. 듣자 하니, 북부의 상황이 좋지 않다며.”

재색 눈동자가 흘깃, 야마구치의 모습을 보다 말을 잇는다.

“그리고 설명이 필요할 듯한데. 이 곳이 어딘지, 혹은 그래…, 반려라 부르는 이유 같은 것들.”

“네! 그렇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기다렸다는 듯 반색하며 달려드는 야마구치의 얼굴을 마주하며 츠키시마는 제 손을 들어 안경을 고쳤다. 챠랑-하며 흔들리는 안경줄에선 경쾌한 소리가 났다. 확실히 히나타와 츠키시마의 관계는, 그리고 이 곳에 모여있는 이들의 정체는 쉬이 말할 수 없는 진실들로 가득했지만 가장 가까운 친우이자 보좌관인 야마구치에게 말을 해야 함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어디부터 얘기를 해야 하나. 간단히 말하자면, 그래.”

드디어 시작하는, 이 은백의 숲을 둘러싼 이야기를 들으며 야마구치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화했다. 혼란과 당황, 경악, 의문이 한 데 섞인 반응을 보며 긴 얘기를 핵심만 쏙쏙 빼서 말을 끝낸 츠키시마가 다 식은 차를 홀짝였다.

“그래서… 그 분이, 은백의 주인이시고 이 분은 신수이시며, 츠키시마 님은 그 분의 반려라 한 게 맞습니까?”

“제대로 들었군.”

“이 무슨…….”

잠시간 말을 잇지 못하던 보좌관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가 싶더니, 난감한 듯 눈썹을 추욱 내렸다. 필시 북부에 무슨 일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잊고 있었지만, 북부를 관할하는 사람이 츠키시마였으니 돌아가야 하는 건 사실이었다.

히나타를, 아니— 쇼요를 여기에 두고?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쓸모 없는 생각을 내던지며 다기 위를 바라보는 시선이 스산했다. 그러다 심장 부근에 찬 기가 스며드는 느낌에 입매를 굳힌 그가 흘깃 제 보좌관을 돌아본다. 묘한 기대에 가득 찬 암녹빛 눈동자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동작이, 답을 내놓으라 재촉하는 것처럼 보이는 입술의 달싹거림. 그 모든 행동을 보며 하문했다.

“네 선에서 해결이 불가능한 일인가?”

“아시지 않습니까. 중앙에서의 전언이신데, 그리고 이 은백의 숲과 관련한 일이니 관리인께서 가셔야 함이 옳습니다.”

“내가, 만약에… 널 지정한다면. 어떻게 생각하나?”

“츠키시마!”

야마구치가 못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 경악 어린 어조로 소리쳤다. 지금 그가 하는 소리는 ‘관리인’으로서의 의무를 저버리겠단 뜻이다. 북부의 관리인을 이어받을 후계가 없는 상황에서, 먼 훗날 중앙으로 거처를 옮겨야 할 상황에서 제 보좌관인 야마구치에게 고귀한 자리를 주겠다는 얘기는 실제로 불가능한 얘기이니까.

애초에 ‘북부의 관리인’이란 자리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적합한 후계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성장해야 물려줄 수 있는 자리다. 그 것을 잘 알고 있을 그가 분명한데, 언제든지 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단호하게 물어오는 츠키시마가 낯설게 느껴졌다.

흔들리는 눈길로 입 안을 잘근잘근 짓씹던 야마구치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 옆에서 묘한 미소를 짓고 있던 시미즈가 손을 뻗었다. 김이 폴폴 올라오는 다기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낮은 어조로 속삭였다.

“영원의 이름에 얽힌 맹약을, 연이 이어졌다 해서 그대에게 ‘북부의 관리인’이란 의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랍니다.”

목소리는 건조하게 이어진다. 그들 사이의 현실을 뼈저리게 일깨워 주려는 것처럼.

“그대가 선인으로 태어나 북부의 관리인으로 자란 이상, 후일 중앙으로 가는 것 또한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댄 반려로 선택됐고 반려이길 선택했지요. 모두가 인정한 운명의 반려가 머물 곳은 주인의 곁이지만 그댄 북부의 관리인. 하여 우린 마지막으로 그대에게 묻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눈이 츠키시마의 전신을 찌를 듯 날아들었다. 가려진 시선이 날카롭게 벼려진 칼처럼 번뜩이는 것 같았다.

“북부의 관리인, 아니면 반려를 택하시겠습니까?”

숲의 기록자이며 선대 은백의 주인. 그리고 뛰어난 예지자 시미즈의 보호는 당연한 것이었다. 망가져버린 세상을 구할 정화의 힘은 없으나 미래의 일을 예지할 힘을 지닌 그가 제 대가를 바쳐 태어난 소년을 오랜 시간 기다려왔던 것처럼. 제 몸을 타고 흐르는 피에 얽힌 운명을 따라서 착실히 찾아온 마지막 후계에게 걸린 반려의 맹약이 주인을 배반한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시미즈는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싸늘한 조소가 입가에 걸린다. 마지막 선택을 두고 반려로 선택받은 이는 어떤 선택을 할 지 궁금했다. 오랜 시간을 잠들어 있었다 해도, 숲의 기록자이며 예지자인 그에게 정보의 제약은 필요 없었다.

츠키시마 케이의 이능이 ‘지식의 서재’인 것처럼, 기록자인 그에게도 고대에서부터 후대까지의 기억이 존재했다. 계속 변할 미래까지도. 전부 알고 있는 그가 왜 묻는 것인가 하면, 미래의 일들은 지금 당장 일어날 현재가 아니기 때문에 ‘변칙성’이 존재한다.

변칙성.

히나타 쇼요의 ‘영원의 이름’이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다. 

히나타의 반려가 찾아낸 그 ‘영원의 이름’이, 반려에게도 영향을 끼친다는 걸 알고 있기에. 예지자이며 기록자 시미즈는 긴장 어린 눈길로 츠키시마의 답을 기다렸다. 선계에서 나고 자란 츠키시마 케이가 지닌 지위가 얼마나 고귀한 위치인지 아주 잘 알고 있기에 그가 내놓을 답을 짐작할 수 없다. 만일 그가 북부의 관리인으로 남겠다고 한다면 강제적이라도 반려의 맹약을 끊을 것이고, 두 자리 중 하나를 포기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 은백의 숲에서 영원히 추방할 생각이었다. 어느 쪽이라도 히나타에게 슬픔을 가져다준다면 시미즈는 제 하나뿐인 후계를 위해 모든 것을 걸어서라도 보호할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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