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머리가 아직도 몽롱해.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취했지. 어린이날 아침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깨어난 희수는 바로 일어나지 못하고 끙끙거렸다. 이불을 고이 덥고 자고 있는 걸 보니 둘 중 하나였다. 큰 사고는 치지 않고 곱게 잤거나, 친절한 자신의 하우스메이트이자 어제의 알코올메이트 영인이 데려다 눕혔거나. 

평소에는 취기가 돌면 적당히 꺾어 마셔서 이렇게 취한 적이 없었는데, 스무살 때쯤 이후로 근 10년만의 블랙아웃에 희수는 어안이 벙벙했다. 분명 민서 이야기를 하고, 지수 이야기를 하던 중간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뒤로는 정말 동영상 재생을 멈추고 종료한 것처럼 깜깜했다.


"으…."


목소리가 갈라졌다. 온몸이 찌뿌둥했다. 앉은뱅이술이라더니 진짜 무섭긴 무섭구나. 새삼 체감하며 겨우겨우 앉아 침대 헤드에 기댔다. 그리고 목이 말라서 주위를 둘러 보니 생수병이 있었다. 자기 전에 꼭 자리끼로 생수를 가져다 놓는 누가 생각이 나서 희수는 제 예상 중 후자가 맞겠거니 짐작했다. 아. 최악이야. 

'영인이도 어제 많이 마셨는데.'

가볍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술을 많이 마시게 됐다. 술고래인 유민과 함께 마실 거라 1.8l짜리를 산 게 문제였다. 알코올 냄새도 없이 달달한 게 술술 넘어가서 그걸 다 비웠으니…. 도수가 낮은 술도 아닌데…. 만취할 만했다. 

어제 실수한 거 없겠지 한참 침대에서 끙끙대던 희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일어났어?"

"으, 으응. 영인아! 일찍 일어났네!"

"…뭐. 10시도 넘었으니까. 그보다."

"어제 내가 진짜 미안…! 술 마시고 뻗었지. 진짜 미안. 무거웠지…."

"아."


소파에 앉아 있던 영인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왔다. 그리곤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희수는 자신이 뭐 크게 실수를 한 건가 싶어 눈썹을 그러모으고 영인을 바라보았다.


"그래. 너 무겁더라~~"

"미안……."

"농담이야. 살 좀 쪄야…. 아니다. 암튼 안 늦었어?"

"응?"

"곧 11시야. 너네 점심 먹는다며?"

"아!!!"


시계를 바라보았다. 약속 시간은 12시반. 지금 시간은 10시 45분. 빨리 준비해야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었다. 영인은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 푸스스 웃고선 소파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차를 한 잔 꺼내서 따라 주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냉장고에 없던 유리병에 희수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가 끓여 놨으니까 마셔. 결명자차."

"아. 응. 이걸 언제…."

"난 새 게임 하러~ 들어갈게. 잘 다녀와."

"아, 응! 고마워. 미안하고."


방에 가던 영인은 잠시 걸음을 멈추곤 됐다는 듯 손사레를 치곤 들어갔다. 조금 피곤해 보일 뿐 평소와 많이 다르지는 않은 영인의 모습에 희수는 조금 안도하고선 차를 꼴깍 마셨다. 시원한 차가 들어가니 좀 살 것 같았다. 


"가기 싫다……."


그냥 영인이랑 결명자차 마시면서 같이 놀고 싶은데. 그래도 가야겠지. 여름 원피스나, 블라우스도 사야 하고. 

…지수도 그렇게 노력하고 있으니까. 



14.2.


어제의 술자리가 만들어지게 된 계기는 2일, 화요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헬스장에 들렸다 출근해서 수업 준비를 하고 있는 희수에게 톡이 도착했다. 


[채지수: 희수야! 서산 잘 다녀와쏘? 못가서 넘 아쉬뷰ㅠㅠㅠ]

[채지수: 우리도 얼굴 본지 오래되따ㅠ]

[채지수: 어린이날에 쇼핑하러 안 갈래....??]

[채지수: 여름옷 사러 가자!]

[채지수: 사실 그건 핑계구 보고시포ㅜㅜ]


영인이라면 '애 쓴다'라고 했을 것 같은 지수의 애교 섞인 깨톡에 희수는 폰을 붙잡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데면데면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그럴 거면 애써 넘어간 이유가 없으니까. 희수는 망설이다가 그러겠노라 답을 보내고 아랫입술을 물었다. 

영인은 그 얘기를 듣고 살짝 미간을 구겼다. 지수랑 싸워서 불쾌하기라도 한 걸까. 사실은 희수 역시 가기 싫었다. 아직도 지수 얼굴을 보면 그날 일이 플래시백 되곤 하는데. 퇴근 뒤 소파에 착잡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데 영인이 빼꼼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일 몇 시 약속?"

"내일? 12시 반."

"어디?"

"강남 WB. 고터!"

"흠. 괜찮으려나. 머 많이 안 마심 되겠지."


영인은 눈을 꿈뻑거리며 고민하곤 말을 이었다.


"접때 사온 소곡주 마시지 않을래?"

"아. 소곡주?"

"응. 좀 마시고 싶어서. 내일 휴일이니까."


막걸리를 마신 날도 굉장히 즐거웠다. 내일이 오는 게 싫어서 끙끙 앓느니 차라리 오늘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내일 일을 조금이라도 잊는 게 낫지 않을까. 게다가 영인이 먼저 뭐를 같이 하자고, 하다못해 밥이라도 같이 먹자고 하는 일도 드물었기에 (주말엔 늘 희수가 먼저 연락했다) 희수는 더더욱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영인과 뭘 하든 즐거웠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안주는 오늘 내가 준비할게! 전 부칠까?"

"배달시킬 건데요. 지금 벌써 9시야. 언제 해서 언제 먹어?"

"에…. 맛있는 거 해 주고 싶었는데. 얼마 안 걸려."

"주말마다 차려주는 밥으로도 감지덕지야. 오늘은 쉬어. 좀."


영인은 배달어플을 켜고선 소파에 푸욱 기대며 신난 듯 콧노래를 불렀다. 희수 역시 웃으면서 그런 영인의 어깨에 고개를 올리곤 함께 메뉴를 살폈다. 


"뭐 먹지~~."

"그러게. 소곡주는 뭐가 잘 어울려?"

"다 괜찮은데. 할배랑은 회센타서 회 떠다 먹었나."

"아, 그럼 회 시킬까? 스시나?"

"너 회 안 좋아하잖아. 패-쓰."

"어떻게 알았어? 나 먹긴 먹어!"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심드렁하게 배달음식 찜 리스트를 보며 답하는 영인을 희수는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영인은 생각보다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제일 친한 친구인 지수조차 스시집에 데려가면서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영인이는 나한테 관심이 있구나."

"말을 좀 이상하게 하네."

"아, 아니. 아니. 그냥. 기뻐서."

"별게 다. 야 놀지 말고 빨리 골라. 지금 시켜도 10시야."

"안 놀았는데……. 와 여긴 껍데기도 파네."

"별로."

"아 그렇구나…."

"…고르라고 해 놓고 끙짜 놔서 미안. 나 팅글팅글? 그런 거 좀 별로야."

"어? 우리 족발 먹으러도 자주 갔잖아. 백식족발."

"족발은 괜찮아."

"뭐야. 일관성이 없네~"

"조희수는 나한테 관심이 없네~ 껍데기 못 먹는 줄도 모르고."

"뭐래. 아니거든! 관심… 많아!"

"그래요. 그래요. 말 나온 김에 족발 먹을까? 나 튀긴 족발 좀 먹어보고 싶었는데."

"응. 좋아."




족발에 곁들여 소곡주를 먹고 있었는데 11시 쯤 적당히 기분 좋게 취기가 올랐을 무렵, 희수의 전화가 울렸다. 민서에게서 걸려온 영상통화였다. 대충 내용이 짐작이 가서 희수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영인은 원래도 꽤 돈독했던 자매 사이를 알고 있었기에 그러려니 하고 술잔을 기울이며 받아도 된다는 듯 손짓을 했다. 희수는 고개를 끄덕이곤 방으로 들어가며 수신 버튼을 눌렀다.


- 이모오오오오오!!!

"으아. 연우야!"

- 야! 남연우! 밤인데 그렇게 시끄럽게 굴면 된댔어?

- 안 된대써!

- 대답만 잘하지. 대답만!!

"아하하. 연우 안녕!"

- 나는 안 보여?

"너도 안녕~~"

- 조카하고 동생 대하는 게 너무 다르네. 서운하게. 


화면에는 8살 난 희수의 조카 연우와 그 엄마인 동생 민서가 가득차게 비추고 있었다. 연우 품에 안겨 있는 거대한 레고 상자에 희수는 소리내어 웃었다. 


"다행이다. 맘에 들어?"

- 웅!!!!

- 맘에 드는 정도가 아냐. 택배가 8시 넘어서 왔는데 보자마자 막 달라고 난리 난리를~

"아하하. 다행이다. 어린이날 전에 도착해서."

- 그러니까. 고마워. 진짜. 뭘 이렇게 비싼 걸 보냈어.

- 고마워. 이모!! 너무 사랑해!

- 얌마. 넘 대가성 멘트 아니야?

"고마워. 이모도 연우 사랑해-!"

- 이히히.


몸을 배배 꼬며 웃다가 창피한지 후다닥 도망간 연우와 달리 민서는 낄낄 웃으면서 희수에게 물었다. 


- 웬일이야? 쑥스러워하지도 않고. 술 마셨어?

"아, 응."

- 누구랑? 하긴 뭐 집인 거 보니까. 영인 언니?

"응. 영인이랑 마시고 있어."

- 영인 언니 보고 싶다. 언니 너무 예쁘잖아. 

"응. 너무 예뻐. 듬직하구."

- 듬직? 그새 살이라도 쪘어? 빼빼 말랐었잖아. 치면 부러질 것 같았는데?!

"그냥……. 에이 몰라!"

- 조희수. 취했네. 취했어. 영인 언니 궁금하다. 나 언니 한참은 못 본 것 같은데. 

"그런가…."


제주도로 집이 이사를 간 뒤로 영인은 민서를 만날 일이 없었다. 유민이나 희수야 제주도로 놀러도 왔지만, 기본적으로 두문불출이 디폴트인데다가 여행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영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같이가 아니라면, 따로 희수와 함께 제주를 갈 일도 없을 관계기도 했다. 


- 쫌 보고 싶다. 예전에 언니 SNS 보니까 여전히 존예던데.

"영인이 분위기 있고 예쁘지?!"

- 왜 언니가 좋아해? 암튼……. 같이 있음 좀 비춰 봐! 얼굴 구경하게. 울 영인 님♡

"영인이…?"


희수는 망설였다. 영인은 민서와 연우의 일을 전혀 몰랐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불안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왜 말을 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지수만 해도 늦게 알렸다고 속상해하고 화를 냈었으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금의 영인을 믿었기에 민서의 얘기를 하고 싶었다. 영인은 마냥 자신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아니지만, 든든하게 받쳐 줄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더. 왜 자신이 내일이 불편한지에 대해서도. 이제는 털어놓고 싶었다. 어쩌면 사실은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 적도 많았다. 영인은 수상할 정도로 제 앞에서 지수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 배려가 고맙고 미안했다. 


"응. 잠시만."



14.3.


"허? 오랜만이네?? 와. 진짜. 10년만인가?"

- 한 8-9년? 이렇게 된 거 같아요!!

"그지 나 21살 막 이럴 때 봤으니까. 와. 진짜 예뻐졌다. 민서."


영인은 반갑게 민서를 맞이했다. 학교에서 그리 멀리 살지 않았기에 기숙사에 사는 유민은 룸메 영인과 함께 집밥을 먹는다는 핑계로 희수의 집에 자주 놀러 왔었다. 희수 빼고 모두 외향인인 가족들은 늘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해 줬다. 그중 민서가 특히 그랬다. 민서는 늘 영인에게 예쁘다며 꺅꺅거리며 앵겼는데 영인 역시 싫지 않은 듯 잘 받아줬다. 반가울 법한 사이였다. 


- 꺄아~ 말이라도 고마워요. 근데 언니가 할 말은 아닌데요? 여전히 미인이네요!!

"내가 쫌 그렇지? 약간 안 늙는 스타일."

"응?"

"반응이 왜 그래. 조희수."

"아, 아니야…."

- 푸하하. 아 아무튼 반갑네요. 언니랑 잘 지내시죠?

"응. 얘가 나 괴롭혀."

"야! 내가 언제에?!"

- 언니 왜 그래? 나빴네.

"어 나빴지. 부모님께 말씀드려서 혼내 줘."

"뭐래. 진짜 공영인."

- 뭐야. 둘이 되게 친해졌네? 약간 어사였잖아.

"어사인 적 없거든?!"

"아. 뭐 지금도 어산데?"


영인은 평소처럼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술기운이 좀 도는 희수에게는 세상 서러운 말이 따로 없었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울상이 되어 자신을 보는 희수에 영인은 화들짝 놀랐다. 민서는 화면에서 낄낄 웃으며 그런 희수를 놀렸다.


- 삐졌다. 삐졌다. 언니 완전 개삐짐. 저럼 울 엄마도 못 말리는데.

"야. 진짜 삐졌어?"

"어색한 사람이랑 말하기 싫네요."

"장난이잖아. 허."

"씨이…."

- 조희수 완전 서럽네. 울겠어요. 언니.

"그르게. 끊고 달래야겠다."

- 언제 제주도 놀러 와요! 연우도 보러 오구.

"연우?"

- 우리 딸이요. 


희수는 삐진 것도 잊고 순간 움찔했다. 민서가 영인에게 먼저 말할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자신이 영인에게 진즉 이야기했을 것이라 생각한 게 분명했다. 놀라서 영인의 얼굴을 살폈지만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아. 너 닮았어?"

- 음~~ 반반? 그래도 애기 땐 완전 남편 닮았었는데. 크면서 쫌 외가 얼굴이 나와요. 언니도 좀 닮았고.

"푸핫. 그럼 예쁘겠네. 어린이날이라 무지 신났겠어?"

- 그죠. 내일 학교 안 간다고 신났어요.

"오……. 끝내주지. 선물도 많이 받았겠네?"

- 안 그래도 선물 때문에 전화했어요! 언니가 레고 사줬거든요. 지금도 아마 포장 뜯으러 간 거 같아요. 원래 어린이날 땡하면 주려고 했는데. 하도 성화여서.

"이야. 좋겠다. 나도 어릴 때 완전 좋아했는데."

- 키키. 와서 같이 노세요. 연우 레고 많아요. 

"그래. 조희수가 삐져 가지고 나 안 데려 갈 거 같지만."


영인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태연한 말과 행동이 마치 이미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희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벙쪄서 그런 영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인은 그런 희수의 생각이 짐작 갔는지 피식 웃고 인사를 건넸다.


"그럼 우린 술 마시러 다시 갈게. 딸랑구 놀아주러 가."

- 부럽다. 진짜아.

"서울 오면 놀러 와."

- 진짜 가요? 난 울 언니처럼 막 사양 안 해?

"이크……."

- 푸하하. 언니 여전히 재밌네요.

"내가 좀 개그맨이지. 그럼 진짜 이만 끊을게. 반가웠어."

- 넹~~ 집 말고 밖에서~~ 난제 봐요. 언니.


통화를 끊고 영인은 희수를 살폈다. 희수는 미안함과 놀람이 섞인 얼굴로 입술을 말고 있었다. 영인은 술을 한 모금 들이켜고선 말했다. 


"조카 귀엽겠네."

"알, 았어?"

"아니. 몰랐지. 네가 말을 안 했는데. 내가 초능력자도 아니고."

"그럼 어떻게…."

"그냥. 뭐 왜 말을 안 했을지 짐작은 가니까. 민서. 아직 어린데, 애기가 학교 다니면."

"그렇구나……."


말하지 않은 게 서운할 법도 한데, 아니면 사실 놀랄 만도 한데,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영인이 희수는 고마웠다. 고등학생이던 동생이 예기치 못하게 아이를 가졌을 때, 주위의 누구도 영인과 같이 반응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의도치 않은 일이었고, 실수라면 실수였다. 그러나 그 책임을 지는 건 민서 본인과 형석, 그리고 가족들이었다. 그러나 책임을 손톱만큼도 지지 않는 이들의 '생각해서 하는 말'이 모두를 아프게 했다.

남편인 형석과 부모님 모두와 상의하여 낳겠다는 결정을 내린 건데, 그거에 대해서도 모든 친척이며 지인들이 한 마디씩 얹었다. '밝고, 싹싹하고, 예쁜' 둘째 딸은 19살의 혼전 임신 하나만으로 '문란하고, 멍청하고, 헤픈' 사람이 되어 있었다. 걱정이라는 이름 아래 쏟아지는 사실과 다른 말들은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도 의연하던 민서를 갉아먹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으로 인해 민서가 받은 상처는 가족 모두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결국 부모님의 결단으로 잘 되던 빵집도 접고 모든 연을 끊고 일면식 없는 제주로 가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가족들은 조용한 그곳에서 잘 적응하고, 지금은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베이커리는 서울에서보다 훨씬 성업 중이었다. 


"그래서 제주도 가신 거야?"

"……응."

"힘들었겠네."

"…응. 민서가."

"사람들이 남의 일에 너무 함부로 말하지."

"………응."

"울어?"

"………묻지 좀 마."


왜? 이게 뭐가 네가 울 일이라고 그래. 조카 착하게만 잘 키웠구만. 선물 고맙다고 전화도 하고. 조희수 술버릇 진짜 개차반이네. 영인은 주절주절 궁시렁거리면서도 훌쩍이는 희수를 안아 주었다. 


"…얘기. 못해서 미안해."

"괜찮아. 사람 사이엔 적당한 비밀도 필요한 법이지~."

"널 못 믿어서가 아니야."

"못 믿어서여도 상관 없어. 그땐 나도 어렸으니까 지금처럼 얘기 못했을지도 몰라."

"으으응. 너는 안 그랬을 거야."

"고만 울어. 고만. 술 잘 마시다가."

"훌쩍. 근데 어떻게 그렇게 알고 있는 거처럼. 잘 말해?"

"나 원래 은근 그런 거 잘해. 타고난 재주랄까?"

"그래?"

"응. 모르는 척. 아는 척. 잘해."


프로야. 평소에 거드름 피우며 자랑할 때와 달리 영인은 약간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마치 그러고 싶어 그러지 않은 사람처럼. 그렇게 웃었다. 그 서글픈 미소에 희수는 적어도 자신만은 영인으로 하여금 그런 척을 안 하게 하고 싶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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