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아몬드 에이스 코미나토 료스케 드림




소꿉친구 인 더 트랩 下




이제는 소꿉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면 화가 나는 건지 슬픈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예고도 전조도 로맨틱함도 없이 불쑥 다가와서 첫 키스에 이어 두 번째 키스까지 훔쳐가 버린 소꿉친구는 어디까지 제멋대로일 참인지, 이제는 도쿄로 가서 한 번도 연락이 없었다.


멋대로 키스튀해버린 건 그렇다 쳐도(그렇다 칠 일도 아니지만), 여태까지 연락 한 번 없는 건 너무하지 않아? 아무리 핸드폰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고 해도 공중전화 정도는 있을 텐데. 굳이 연락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뭐야.


생각을 하면 할수록 속은 부글부글 끓고 열이 뻗치는데 막상 화를 터트릴 상대가 자신을 신경도 쓰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면 울고 싶어진다. 하지만 눈물이 고일 참이면 다시 연락 한 번 없는 키스 도둑(전과 2범)이 괘씸해서 눈물은 쏙 들어가고 다시 분노가 자리를 채우는 연쇄가 반복된다. 아무튼, 소꿉친구의 생사조차 다른 사람을 통해 확인해야 했던 몇 달째 이래저래 복잡하기 짝이 없는 요즘이었다.


"하루쨩, 너희 형은 도쿄 가서 죽었다니?"


전에도 이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응? 아니. 어제 부모님이랑 통화하는 거 들었, 아."


아차 하는 얼굴을 하는 하루이치를 보며 늘빛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이번에는 굳이 하루이치에게 이유를 숨길 필요도 없었으니 표정이 마음 놓고 구겨졌다. 코미나토 료스케 진짜 싫다. 형과 똑닮은 하루이치의 뒤통수마저 원망스러워질 정도였다.


하루이치는 울상인지 우거지상인지 모를 늘빛의 얼굴을 안절부절못하며 들여다보다가 주변을 살피기를 반복했다.


"…어, 혹시 형한테서 연락 없었어?"


한참 만에 건네진 질문은 조심스러웠다. 늘빛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왔어. …한 번도."

"에."


하루이치의 덥수룩한 앞머리 아래로 보이는 입이 반쯤 벌어진 채 고정되었다. 한동안 거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조차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형을 세상에 둘도 없을 우상으로 생각하는 동생에게 있어서는 방금 피해자의 입으로 들은 형의 비도덕적인 행위에 대한 증언이 지나친 충격이었나보다.


"…그. 늘빛 누나."


끝내 하루이치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조용히 늘빛의 손을 꼭 잡았다.


"료스케 바보 멍청이 쪼다 등신 도둑놈 꼬맹이 핑크 머리…."


늘빛의 입에서 줄줄 료스케의 욕이 쏟아져나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지막 단어는 욕이 아니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아무튼 대개 평소라면 두 살이나 어린 하루쨩 앞에서는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지만 지난 몇 달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못했던 고민을 털어놓자 주체할 수가 없어졌다. 욕뿐만이 아니라 간신히 참아왔던 서러움까지도.


"코미나토 료스케 확 대머리나 돼라!!"

"누나…."


하루이치가 테이블을 쾅쾅 내리치며 훌쩍훌쩍 우는 늘빛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다음에 형한테 전화 오면 누나한테 연락 좀 하라고 말할까?"

"필요 없어!!"


늘빛은 훌쩍훌쩍 울면서 새롭게 다짐했다.


"료스케 같은 거 없던 셈 치고 남친 만들 거야아…첫키스도 그걸로 칠 거야…."


역시 전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지만 그런 건 지금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어…."


뭔가 말하려던 하루이치는 현명하게도 얌전히 입을 다물고 다시 늘빛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는 쪽을 선택했다.


그렇게 정말로 료스케 따윈 잊어버리겠다고 다짐하고 새로이 시작한 고교 생활은 성공이었는가 하면,


"좋아합니다! 사귀어주세요!"


…어느 정도는 그랬던 것 같다.


어느 순간인가 친해졌던 같은 반 남학생에게 예상치 못한 고백을 받았을 정도니까.


고백한 남학생은 (료스케 보다) 키가 크고 (료스케 보다) 어깨가 넓고 (료스케 보다) 다정했다. 여기에서 고개를 끄덕이면 괜찮은 남자친구가 생길 것이다. 생각해보면 혼자 다짐했던 핑크빛 고교 생활에 한 발 가까워진 것 같긴 했지만….


"………."


왜 하필이면 이럴 때 얄미운 얼굴이 떠올라버리고 마는 건지. 그동안 정말 한 번도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늘빛?"

"…어…저기."


늘빛은 뜨거워진 눈가를 애써 깜빡이며 입을 뻐끔거리다가, 결국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안."


꾸벅 고개를 숙여 사과하는 와중에도 떠오르는 건 소꿉친구의 목소리였다.


'3년 동안 내 생각 조금만 하고 있어. 금방 데리러 올게.'


이런 타이밍에 그 말이 생각나버리는 건 세뇌이거나 원격조종이거나…아무튼 무언가 함정에 빠진 게 틀림없었다. 코미나토 료스케라면 어떻게든 함정을 파고도 남으니까. 그리고 아마도 늘빛은, 거기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었으므로.



―그래서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걸 깨닫고 무언가 변했는가 하면, 이번에는 딱히 그런 건 아니었다.


그 뒤로도 료스케에게서는 내내 연락이 없었고 늘빛은 이제 거기에 적응했다. 적응했다는 건 이제 전화를 기다리면서 화를 내고 우는 일이 없어졌다는 뜻이지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해가 바뀌는 날이 되었을 때쯤엔 인사하고 가는 옆집 동생의 뒤통수를 보고도 속이 끓지 않을 정도로는 발전했다.


"늘빛."

"…료스케?"


하지만 그것이 이제껏 연락 한 번 없었던 주제에 갑자기 불쑥 찾아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소꿉친구의 얼굴을 보고도 멀쩡히 평정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늦었어."

"……."


어제도 봤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얼굴이 눈에 들어온 순간, 울컥 눈물이 터지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아, 역시 우네."


원흉은 얄밉게도 태평한 소리를 하며 다가왔다. 늘빛은 손등으로 눈물을 문질러 닦아내며 료스케에게서 멀어지려고 했지만, 그보다는 뻗어온 손이 늘빛을 당겨 안는 것이 빨랐다.


"놔. 왜 왔어."

"울지 마."

"…저리 가."

"여기 있으니까."


못 본 사이에 더 단단해진 것 같은 손이 어릴 때처럼 등을 쓸었다. 그 동안 연락 한 번 없었던 주제에 우는 자신을 달래는 방법만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 더 얄미워 자꾸 눈물이 새어 나왔다.


"늘빛."

"너 진짜 싫어……."

"응, 알아. 나도 좋아해."


료스케가 눈물범벅이 된 늘빛의 얼굴을 당겼다. 입술까지 번진 물기를 핥아 가져가고, 한참 동안이나 맛보듯이 건드리고 나서야 떨어졌다. 오늘로 세 번째였던가. 눈을 깜빡이는 늘빛을 보며 료스케가 웃었다.


어딘가에서 열두 시를 알리는 텔레비전 방송의 카운트 다운 소리가 들려왔다.


"해피 뉴이어."


뭐가 해피야. 억울함에 입을 뻐끔거리는 늘빛에게 다시 료스케가 다가왔다.


"새해 선물."

"……."


네 번째 키스와 함께 새해가 밝았다. 


"그러니까 2년만 더 기다려."


어느새 료스케가 말하는 카운트 다운도 1년이 줄어들어 있었다.






"…그래서, 2년 지났는데."


료스케가 늘빛을 보며 늘 그렇듯 꿍꿍이 있는 웃는 얼굴을 했다. 늘빛은 그 얼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뭐에 홀렸는지 씌였는지, 정말로 코미나토 료스케를 기다리느라 설레는 짓 한 번 못 해보고 고교 생활이 끝나버렸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지금도 억울하다. 역시 기다리지 말 걸 그랬다. 기다리지 않는다는 선택지가 자신의 인생에 존재했더라면 말이지만.


"이제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지."


가만히 앉아 한참 바닥이며 천장이며 대화 상대를 번갈아 노려보던 늘빛이 료스케의 말에 눈을 깜빡거렸다.


선택? 코미나토 료스케의 입에서 나오기엔 너무 어색한 말이었다.


"뭘 선택해?"


료스케가 뽀얀 얼굴로 웃었다.


"4년 더 기다려서 결혼할래, 아니면 지금부터 나랑 결혼을 전제로 사귈래?"

"……."


놀랍지 않게도 결혼하지 않는다거나 만나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는 모양이었다.


"잠깐만. 그게 다야?"

"그거 말고 뭐가 필요해? 속도위반?"


역시 틀림없는 함정이다.


하지만 역시 이번에도, 그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후자로."

"잘 생각했어."


늘빛은 한숨인지 웃음인지 안도인지 모를 것을 삼키며 얌전히 료스케와의, 몇 번째인지 모를 키스를 받아들였다.



루이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