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이 짧습니다)



 애인에게 시간표를 받았다. 생전 처음 받아본 것이라 입꼬리가 절로 씰룩거렸다. 사진도 하나 찍어놓고, 일부러 뽑아 냉장고에도 붙여두었다.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함께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게 뭐냐며 약간 놀리는 듯 웃던 하나 씨가 굳이 떼어내지 않는 것도 좋았다.

 색색깔의 시간표는 내가 보기에도 썩 괜찮았는데, 하나 씨 말로는 월요 공강이 가장 ‘꿀’이라고 했다. 오전 수업도 하나뿐이니까 자신이 승리자라고. 교양 수업 하나가 더 늘긴 했지만 괜찮을 거라는 말에 언젠가는 점심이라도 사줄 겸 학교 근처로 가볼까 하는 마음도 슬쩍 먹었다.


 데이트는 연이어 계속 이어지긴 했지만 코앞으로 다가온 개강을 대비해 함께 쇼핑한 것들을 정리하는 동안 -후드티와 조거팬츠 같은 편안한 캐쥬얼 의류가 전부였고, 대부분 내가 한발 먼저 결제해서 불평을 들었다- 그가 시무룩한 티를 냈다.


“그렇게 싫어요?”

“개강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아마 교수님도 개강은 싫어할 걸요.”


 이전보다 자주 보기 어렵고, 과제 폭풍이 몰아친 후 시험 기간이 되면 더더욱 힘들 텐데 어떻게 좋아하느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난 대부분 가게에 있으니까, 필요하면 여기서 지내도 돼. 오전 수업 있는 날엔 운전기사도 내가 해줄게.”

“그런…, 달콤한 말로 꼬시지 마요. 이러다 내가 여기 완전 눌어붙어서 같이 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면 안 되는 건가, 생각하다 사고가 뚝 멈췄다. 단 한 번도 누군가와 산다는 걸 염두에 둔 적이 없었다. 가족에게서 도망치듯 떠난 이후로 늘 혼자였다. 사람을 만나고 사귀게 되어도 집에 들이는 일조차 적었다.

 순간 나의 공간 안에 남은 그의 수많은 흔적을 눈으로 훑어갔다. 냉장고에 붙은 시간표까지. 하나 씨는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내 얼굴을 보지 못했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정말 보여주지 말아야 할 모습일 것 같았다.


 그 이후로도 하나 씨와 공간을 공유한 순간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렸다. 서로가 편해진 뒤론 자고 가는 일도 잦았지만, 그러지 않아도 오래 머물다 가는 게 언제부터 일상이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문득 위가 졸아 드는 것 같다. 이런 날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내가 왜. 어째서. 꼭 이성애라도 하는 것처럼.

 연애하다 자연스레 동거하고, 그렇게 결혼까지 이어지는 삶은 언제나 내 것이 아니었다. 원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기피했을 정도였다. 여자를 좋아한다는 걸 자각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립해서 내 힘으로 살아야지 결심하던 순간에도 누군가와 함께 사는 선택지는 없었다.


“내일 또 와도 돼요?”


 그냥 같이 살아요. 머릿속을 부유하는 말에 놀라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어렴풋한 두려움이 그림자처럼 늘어져 목 주변에 감긴다. 나는 눈을 감았다.



 동아리도 없는데 왜 이렇게 바쁜지 모르겠다는 그가 곁에 있지 않아 다행이었다. 함께 살자고 말한 적도 없고, 상대방의 의사가 어떤 지도 모르는데 혼자 고민이나 하는 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재미없는 사람이랑 왜 사귀어요, 대뜸 물어보고 싶어질 것 같았다. 왜 내가 좋으냐고 물었던 때와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에 자신이 못나 보이기도 했다. 함께 산다는 것.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는 그 의미가 가진 힘이 나를 짓눌렀다.

 과거의 편린이 자꾸만 되살아나려하고 있었다. 흉터라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게 아니라던 말을 이렇게 되새길 줄은 몰랐다. 그래도. 이렇게 계속 혼자서만 생각할 순 없었다. 자꾸만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두려움을 상대하면서 바쁜 하나 씨의 뒤에 숨어 있으면 안 된다. 혹여 반대 상황이었다면 아무것도 모르도록 한 것에 서운했을 테니까.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하는지 몰라 고민하는 동안 하루이틀이 지났다. 개강 초부터 조별 과제가 생긴 탓에 조원들과 만나고 온 하나 씨는 조금 지친 얼굴이었다. 곧장 가게로 들어오는 게 익숙해진 건 좋았지만, 테이블에 엎어지는 걸 보자니 마음이 안 좋았다.


 알바생이 전부 퇴근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빠르게 핫초코를 대령하여 맞은 편에 앉았다.


“많이 피곤해요?”

“출석일만 채우면 되는 선배 하나가 있어서, 도움이 하나도 안 돼요. 그래서 고생 좀 했어요.”

“저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나 씨를 이렇게 고생시키면 쓰나.”


 꼬물꼬물 다가온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간판 불까지 끈 가게는 조용했다. 테이블에 완전히 녹아버린 모양이 안쓰럽다. 어쩌나.


“뭐라도 먹을래요? 샌드위치 만들까?”

“아뇨…. 입맛 없어요.”

“설마 저녁도 안 먹었어요?”

“…….”

“최하나 씨.”

“아니, 그게 아니라….”

“야! 최하나!”


 대뜸 가게 문이 벌컥 열리더니 쨍한 목소리가 찬 공기보다 먼저 들어찼다. 놀란 탓에 반사적으로 하나 씨에게서 떨어진 나는 반쯤 울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우는 줄 알았더니 화가 난 것 같기도 하다. 누구지. 잡았던 손을 풀어낸 하나 씨가 한숨과 함께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요.”


 하나 씨의 낮은 목소리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온 여자가 하나 씨를 껴안았다.



 자리에 앉아서도 잔뜩 가까이 붙인 머리통을 떼어낼 생각이 없어 보이는 여자와는 오랜 친구라고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다, 해외로 이민을 가면서 헤어진 단짝이라고. 그런 거면 포옹도, 우는 것도 이해 가지만 여기 있는 건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그건 어찌됐건 좋으니 아무튼 좀 떨어지면 좋겠는데. 평온을 가장하며 핫초코를 한 잔 더 만들어 내놓는 동안에도 울고 있는 탓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미진아, 좀 떨어져.”

“How can you….”

“까불지 말고 한국어로 말해.”

“너는 나 안 보고 싶었어?”


 훌쩍이는 얼굴은 착장만큼이나 화려했다. 운 탓에 잔뜩 번진 화장이 색색깔로 번쩍이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도 하나 씨는 별 반응이 없었다.


“비행기 티켓도 보내고, 아파트도 사준다고 했는데 와주지도 않고….”

“내가 언제 그런 거 필요하댔어?”

“그치만.”

“나는 내 친구가 필요했던 거지, 내 친구의 돈이 필요했던 게 아니야. 그때도 말했잖아.”


 이전에 본 적 없는 싸늘한 말투였지만 어렴풋이 상처받았음을 읽을 수 있었다. 서운했구나.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펑펑 흘리고 있는 얼굴이 안쓰러워 일단 깨끗한 타올을 건넸다.


“오랜만에 만난 것 같은데, 늦었으니까 이야기는 내일 제대로 하면 어때요.”

“늦었는데 미안해요.”

“아니야. 정리하고 금방 올 테니까 잠시만 있어요.”


 하나 씨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어서 데리고 뭐라도 먹여야지. 급한 마음에 앞치마부터 벗으려 몸을 일으키는데 팽 소리가 나도록 코 푸는 소리와 함께 댁은 누구냐는 질문이 등에 꽂혔다.


“누구신데 그렇게 참견하냐고요. 아까는 손도 잡은 거 같던데.”

“김미진.”

“내 이름 김 진이야. 개명했다고 했잖아. 저기요, 누구시냐니까요.”

“이 가게 점장님이고, 내 애인이야.”

“뭐!?”

“이쪽은 내 꼴통 친구. 김 진이에요.”

”그, …윤정민 입니다.”


 이제는 완전히 엎어져서 우는 모습을 보니 그냥 친구는 아니겠구나, 확신이 들었다.



 세상이 망해도 저것보단 덜 울 것 같다. 타올이 흠뻑 젖도록 우는 동안 무언가 계속해서 중얼거리는 거 같았는데 영어와 한국어가 섞인 데다 우는 목소리라 이해하기 어려웠다. 겨우 정리한 뒤 가게를 나서자 이번엔 딸꾹질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차가 있으니 데려다주겠다는 말에도 끝끝내 싫다며 타올에 숨긴 얼굴을 보여주지 않은 채 도망치듯 모범택시를 타고 사라진 후, 우리는 잠시 말을 잃었다.


“놀랐죠.”

“조금. 나보다 하나 씨가 놀랐을 거 같은데.”

“쟤는 항상 저런 식이라서 놀랍지도 않아요.”

“속상해 보이던데, 아까.”

“이제 익숙해요, 그런 것도.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미진이가 무례하게 군 거.”

“아니에요. 안 그래도 돼.”


 늦게까지 영업하는 단골 빵집에서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사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하나 씨는 말이 없었다. 시동이 꺼진 후에도 잠시 멈춰있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쁜 애는 아니에요. 착한데, 그만큼 철이 없어요. 그래서 친해지고 나선 많이 챙겨줬어요. 답답해서.”

“이민 간 이후로 처음 본 거예요?”

“아니에요. 쟤도 한국 자주 왔고, 저도 가고 그랬으니까. 쟤네 집이 대대로 부자여서 신세진 게 좀 많아요. 아주. 방학 내내 편하게 놀 수 있도록 용돈까지 챙겨주실 정도였는데, 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랬구나.”

“다쳐서 병원 입원했을 때 전화가 왔어요. 어떻게 알았는지 몰랐지만 그래도 반가웠어요. 대회 준비 때문에 연락도 제대로 못 한 지 오래였고, 친구니까. 또 울겠구나 하면서 받았는데.”


 천천히 말하라는 뜻으로 텀블러를 손에 쥐여주었다. 따듯한 차를 조금 마신 하나 씨가 작게 웃었다.


“좋아하고 있더라고요. 육상 안 하게 됐으니까, 이제 한국에 그만 있으라고. 자기한테 오라고. 그래서 욕해주고 끊었어요.”

“그럼 그 뒤로 처음 본 거예요?”

“네. 연락은 종종 왔는데 받아주기만 하고 얼굴은 절대 안 봤어요.”


 학교 다니느라 진짜 바쁘기도 했고. 조용히 말을 붙인 하나 씨는 속상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뻗어진 손으로 뺨을 쓸었다. 다른 거라도 더 해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동안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에게 한마디 하지 못했을 실망감과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 감정들이 여전히 진행 중임에도 몰랐다. 입이 쓰다. 미진이라 했던 친구가 분명 자신을 좋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명확히 선 그었을 단호함까지도 썼다.


“올라가요. 빵 왕창 먹고 기운 낼래요.”


 자신이 직접 들어야 한다며 빵이 잔뜩 든 종이백을 안고 들어선 하나 씨는, 따듯하게 데워진 집 공기에 몸이 녹는다고 좋아하더니 소파에 앉기 무섭게 잠들었다. 슬쩍 깨워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억지로 깨우는 것보단 잠깐이라도 재우는 게 나을 거 같아, 빵부터 정리해두고 먼저 씻고 나오니 가물가물한 눈을 겨우 뜨고 있었다. 둥근 이마에 짧게 키스하고 마주 보며 바닥에 앉았다.


“씻어야지.”

“응.”

“내일은 아무 스케줄 없으니까 푹 쉴까요.”


 잠깐 잠들었다고 그새 발개진 뺨이며 눈가가 사랑스러웠다. 새파란 코발트 색깔의 니트와 두툼하고 하얀 조거 팬츠가 뿌듯하도록 잘 어울렸다. 뒤늦게 고개를 끄덕인 하나 씨가 품에 안겼다.


“여기 살고 싶다.”

“…응?”

“내 집보다 여기가 더 편해요. 따듯하고, 아늑해.”


 목소리. 맞닿은 체온. 향기. 멀리 들리는 공기청정기와 냉장고 소리. 숨. 보드라운 감촉.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하나 씨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을.


“그럼 같이 살까?”

“또 그런다, 또. 자꾸 그렇게 받아주면 나 진짜 살림 챙겨 온다니까요.”

“아니, 정말로.”


 품에서 뺨을 떼어낸 하나 씨가 시선을 맞춰왔다. 피곤 속에서도 또렷해진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진심이에요?”

“요즘 그런 생각 많이 했어요.”

“많이 했다고요? 그동안 왜 말 안 했어요?”

“놀랐으니까.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거든요.”

“요즘 고민 있나, 했더니. 그거였구나.”


 잠기운이 가신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그가 뺨을 감싸왔다. 단단한 손가락이 닿은 부분들이 다정하게도 뜨끈했다.


“정말 그러고 싶어요?”

“아직 모르겠어요. 사실 두렵기도 해요. 혹시라도 내가, 하나 씨를 힘들게 할까 봐.”

“윤정민 씨는 절대 날 힘들게 하지 않아.”

“그건 모르는 거예요. 누구도 그건 알 수 없어.”

“난 알아요.”


 이마를 맞댄 그가 소리 내 웃었다. 그의 확언에 민망하게도 가슴이 너무 뛰어 소리가 새어 나갈 것 같았다. 꼭 처음 고백하던 순간처럼.


“내가 당신보다 어리고, 튼튼하니까. 내 말 믿어요.”

“…네.”

“우리는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걱정하는 일이 또 반복되진 않을 거야. 그런 모습이 아니도록 노력하면 돼요.”

“네.”

“여기서 자고 집으로 돌아간 날에, 얼마나 아쉬웠는지. 당신은 아마 평생 모를 걸.”

“그랬어요?”


 이마가 떨어졌는데도 우리는 가까웠다. 숨이 코끝에서 서로를 간질일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는 미소지었다. 평생 보고 싶은 얼굴. 다정한 눈빛. 전부 소중했다.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는 벅찬 마음은, 두려움을 동반한다. 언젠가 깨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과 혹시나 옅어지진 않을까 하는 노파심 따위의 감정들. 사실은 이 모든 게 꿈이었고 당장에라도 연기처럼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럼에도 손을 뻗어 그것을 잡는다. 잡고, 또 잡는다. 달리기를 잘하는 하나 씨는 언제나 먼저 뛰어가지만, 오래 걷는 것에 자신 있는 나와 속도가 맞는다. 우리는 다른 템포로 움직이지만 결국 이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함께 있다. 단지 이것만으로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사랑에 찬 확신이 손안에 잡혔다.


 나는 네가 믿는 나를 믿어. 네가 보는 내가 단단하고 건강했으면 좋겠어. 더 오래 함께일 수 있게.그러니 더욱 노력할 거야. 언젠가 네가 휘청이는 순간이 오더라도 지탱할 수 있도록, 너의 운동화 끈을 새로 묶어주고 뛰는 내내 곁을 지킬게. 함께 뛰어갈 수 있게 체력도 기를게. 그러니까.


“우리 같이 살까요?”

“네. 좋아요.”


 웃음소리가 키스보다 달콤하게 닿았다.








‪1‬

‪새로운 캐릭터가 드디어 나왔네요 저는 이 친구를 꽤 좋아해요‬


‪2‬

‪8화 쯤에선 헤어질 줄 알았는데 제 생각보다 서로 많이 좋아하네요 그래서 이런 방향이 되었습니다 사실 저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3‬

‪다음 주엔 번외편이 업로드 됩니다‬


‪4‬

‪유달리 힘든 시기입니다 부디 마음 잘 잡으셔서 오래오래 함께 해주세요 늘 감사해요‬



take your broken heart make it into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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