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 창가 쪽에 앉아 서류를 보고 있던 여주는 자기 쪽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들자 재현이 여주를 보며 싱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여주고 입꼬리를 올려 웃고서는 보고 있던 서류를 옆에 내려놨다. 소소한 근황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다 곧 재현의 앞에도 음료가 놓였고 재현은 가방에서 서류뭉치들을 꺼냈다. 저번 여주의 루머에 대한 고소건으로 중간 점검으로 잡은 약속이었다.





지금까지 진행된 상황을 들으며 재현이 건네준 서류들을 보는데 저번에 자기가 다 해결해 줄 테니 믿고 기다리고 있으라던 말이 허투루 한 게 아니었나 보다. 지금 여주의 앞에 놓여진 서류뭉치만 해도 엄청난데 일부만 가져온 거라니,







"다 순차적으로 진행 중이야. 루머에 대한 출처 또한 찾고 있는 중이고."


"절대 합의나 선처 같은 건 없다고 단단히 일러둬."


"응. 알았어."


"고마워 오빠. 괜히 나 때문에 힘들겠다."


"힘들기는, 내가 이런 걸로 밥 벌어먹고 사는 건데."





여주 너야말로 이런 말도 안되는 얘기들 때문에 마음 고생 심하겠다. 재현의 말에 여주는 낮게 웃으며 이런 것보다 더 한 일들도 많은데 뭐. 중얼거렸다. 재현이 이어서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에 울리는 여주의 벨 소리.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보니 발신자는 아버지였다. 재현은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두어 번 끄덕였고 여주는 짧은 숨을 내쉬고서는 전화를 받았다. 네. 아버지. 또 자신의 자리를 재윤에게 넘기고 백화점 대표직을 맡으라는 헛소리로 자신의 속을 뒤집어놓지는 않을까 여주는 생각했지만, 





- 그래. 얘기 들었다. 재민이랑 만난다고? 


"...네?"





또 다른 헛소리를 할 거라는 예측은 못했다.  





- 그랬으면 진작에 얘기하지 그랬냐. 


"아니... 아버지."


- 조만간 나 회장하고 식사 자리 한번 마련해야겠구나. 





계속 되는 헛소리에 여주는 눈을 질끈 감으며 한 손을 올려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앞에 재현이 있어 길게 통화를 못하니, 





"누가 아버지께 말씀 드렸는지 모르겠지만 아닙니다."





전화 끊겠습니다. 여주는 단호한 목소리로 얘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금껏 자신에 대한 이런 저런 소문에도 조용하다가 이런 거에 반응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재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아니라고? 여주에게 되물었다.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내가 누구를 만날 틈이 어디 있어." 


"왜. 만날 수도 있지."


"조금만 틈을 보이면 달려들려고 뱀 한 마리가 있어서." 





아니. 근데 오빠는 지금 나에 대한 루머들에 고소를 해주고 있으면서. 여주의 말에 재현은 머쓱하게 웃더니 손에 들린 서류를 살짝 흔들며 아니. 당연히 이런 건 안 믿는데.





그래도 이번 건 좀 믿을만 했거든. 사실 재현도 신제품 출시 행사에 들렀고 지환과 인사를 하고 일이 있어 돌아가려다 여주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들었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 쳐다봤고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니 곧 고소장을 보내려던 인물들이라 속으로 혀를 차고 지나치려는데 재민을 봤다. 싸늘한 표정으로 그들에게 하는 말들도 다 듣고 지켜봤다.





"됐고, 나 다른 걸로 오빠한테 상담 받을 거 있어."


"어. 뭔데?"





재현은 말을 더 잇지 않았다.






*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는 중 재현은 여주에게 다시 회사로 돌아가는 거냐 물었고 여주는 시간을 확인했다. 회사로 돌아가기에는 애매한 시간이긴 하네. 중얼거리던 여주는 잠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재현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여주야. 너무 일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 놀기도 해야지. 놀라고? 응. 그렇게 일에만 매달리면 지루하고 답답하잖아. 그런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던 여주가 다시 재현을 보고서 물었다. 





"....근데 뭘 하면서 놀아야 해?" 


"...일 하느라 못 했던 것들을 하면 되지?"


"...."


"딱히 생각 나는게 없으면."





친구한테 연락해 봐. 같이 놀자고. 귀엽다는 듯이 여주를 보며 웃던 재현은 먼저 간다며 인사를 하고 멀어졌다. 연락할 친구가 없는데. 멀어지는 재현을 보며 중얼거리던 여주가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주소록을 살폈다. 하, 김여주 진짜 시간 빌 때 연락할 사람도 없네. 





"...소희. 소희는 요새 촬영 중이라 바쁠 테고." 





주소록을 내리다 보이는 이동혁의 연락처를 보고 여주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곰곰이 생각을 하던 여주는 휴대폰을 가방에 집어넣고 걸음을 옮겼다.






*






"...저, 대표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노크를 하고 들려오는 조심스러운 비서의 목소리에 재민은 고개를 들었고 제 사무실로 들어오는 여주를 보며 눈이 커다래졌다.





"........이거 꿈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재민은 손을 올려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아야. 아픈 걸 보니 꿈이 아니구나. 그럼 정말로 여주가 지금 나 보러 여기까지 온 거란 말이야? 재민의 표정이 밝아졌다. 지금 이 기분을 말로 표현 하기 힘들 정도로 좋았다. 





"많이 바빠?"





바쁜데 내가 방해되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할 만 한게 여주는 이렇게 일 하는 시간에 약속 없이 남의 사무실에 온 적이 없었으니까. 재민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여주가 있는 곳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아니. 하나도 안 바빠. 나 진짜 완전 한가해."





재민은 사실 진짜 완전 한가하지는 않았다. 해야 할 일은 남아있었지만 꼭 오늘 끝마쳐야 할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여주가 갑자기 온 이유가 무엇일까. 





"여주야. 무슨 일 있어?"


"아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그럼 내가 뭐 도와줘야 해?" 


"살짝 비슷한 거?" 





재민은 말해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여주는 괜히 어색하게 웃었다. 응? 왜. 뭐길래 그래? 재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여주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놀자. 나랑."





돌아오는 대답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재민은 자신이 들은 게 맞는 건지 여주에게 되물었다. 여주야. 지금 놀자고 한 거야? 응.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여주의 모습이 귀여워 웃음이 터졌다. 재민이 푸흐흐- 웃자 여주는 괜히 민망해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나한테 너무 일만 하지 말고 좀 쉬라고 해서.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뭐 하고 놀고 싶은데? 재민의 물음에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던 여주가 되물었다. 너는 놀 때 뭐하고 노니?  





"뭐 하면서 놀긴,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놀지." 


"...."


"잘 생각해 봐. 그동안 일 하느라 못 했던 거 있을 거 아니야." 





입술을 살짝 말아물며 고민을 하던 여주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아- 하고 짧은 소리를 내고서 재민을 쳐다봤다.생각났어? 뭐, 뭐 하고 싶어 여주야. 재민은 지금 여주에게 다 해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만약 하늘에 별을 따달라고 하면 기꺼이 해줄 수 있을 정도였다. 











*






멍- 하니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던 동혁은 뺨에 닿아오는 차가운 기운에 화들짝 놀라 옆을 쳐다봤다. 범인은 송 대리였다. 동혁의 뺨에 닿았던 비타민 음료를 흔들며 잠깐 바람 좀 쐬고 오자며 말해왔고, 동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송 대리 뒤를 따랐다.





동혁은 옥상에 올라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는 송 대리를 빤히 쳐다봤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인 송 대리는 자신을 쳐다보는 동혁을 보며 왜. 이 대리도 한 대 피려고? 하고 묻자 동혁은 송 대리 손에 들린 담배갑을 받았다. 뭐야. 이 대리 금연한 거 아니었어? 놀란 표정으로 동혁을 쳐다보며 말하는 송 대리에게 동혁은 가끔 핀다고 대답하고 라이터를 받아 불을 붙이고 깊게 한 모금을 빨았다. 





"대체 무슨 고민이길래 하루 종일 죽을 상이야." 


"...티 많이 나요?"


"출근 해서부터 계속 정신을 못 차리는데 눈치 안 채고 배겨?"


"......"


"뭔데 그래. 연애 고민이야?"





그럼 더욱 더 나한테 얘기해 봐. 연애 고민은 내가 제일 잘 알지. 말 없이 담배를 피던 동혁은 송 대리에게 한 개비를 더 빌리고 나서야 동혁은 입을 열었다. 입술을 살짝 깨물며 오늘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자신의 느끼고 있는 이 답답함을 얘기했다. 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걸까. 





"들어보니까 이 대리 연애 쪽으로는 완전 꽝이구나?"


"...."


"왜 그러긴 왜 그래."


"이 대리가 그 사람 좋아하니까 그런 마음이 생기는 거지." 





확실하다는 듯이 말해오는 송 대리의 대답에 동혁은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며칠 전부터 앓아왔던 이런 답답함이 다 내가 여주를 좋아해서 그런 거라고? 그런 동혁을 보며 송 대리는 계속 입을 열어 말을 이어갔다.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그 친구가 다른 남자랑 연락하고 만나는 게 싫다는 거잖아."


"...."


"친구로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이 대리가 마음을 늦게 알아챌 수는 있어." 


"...."


"그 마음을 인정하고 표현하며 다가가던지, 아니면 끝까지 숨기던지. 선택은 이 대리가 하는 거지만 나중에 후회할 선택은 안 했으면 좋겠어." 





나도 이 대리랑 비슷한 케이스였거든. 우리 와이프하고 맨날 티격태격하면서 싸우고 서로 애인 만나는 것도 지켜보고 그랬었어. 근데 어느 와이프를 볼 때마다 막 심장이 두근 거리는거야. 그때부터 바로 와이프한테 엄청 다가가서 결국 결혼까지 했잖아. 송 대리가 자신의 경험담까지 말해주다 손을 올려 동혁의 어깨를 두어 번 힘차게 두드렸다. 





"근데 이 대리. 모든 것에는 다 타이밍이 있는 거야." 





먼저 내려갈게. 이 대리는 조금 생각 정리하고 내려와. 그 말을 하며 송 대리는 동혁의 손에 담뱃갑을 쥐여주고 옥상 문을 열고 내려갔다. 동혁은 멍하니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송 대리가 해준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던 중 오른쪽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 꺼내어 미리 보기로 확인해 보니 예진에게서 메세지가 온 거였다. 





동혁은 필터까지 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긴 연기를 내뿜었다. 화면을 보는 순간 동혁은 예진과 정리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예진과의 사이를 정리해야....






"....그래야 여주한테 무슨 말이라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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