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년 1월 2~4일 사이에 썼던 단문들입니다. 3번 빼고는 멘션 온 커플링으로 어쩌구 하는 해시태그...




1. [유현유진] 데리러 갈게

또 그 꿈이다. 눈 내리는 설원, 커다란 나무 뿌리 사이에 잠자는 것처럼 누워 있는 유현이. 내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도 여전했고 유현이도 창백한 얼굴로 꼼짝 않고 누워만 있었다. 하염없이 그 얼굴을 보다가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나마 이름을 불러 보았다. 유현아. 유현아.

"... 현아."

"응, 형. 나 여기 있어."

따뜻한 손이 내 손을 잡더니 이내 허리를 둘러 감싸안았다.

"형, 울어?"

"아니, 아니야. 잠깐만 이렇게 있자."

동생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서, 두고 온 동생을 떠올린다. 미안해. 불쌍한 유현이. 꼭 데리러 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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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현유진현제] 사랑한다고 말해 주세요

한유현은 전투 직후의 흥분에 몸을 맡기고 성현제를 노려보았다. 성현제는 방금까지 공격력 두 배 효과를 공유받기 위해 한유진을 끌어안고 있었고, 그 상태로 몬스터에게 공격을 퍼부으면서 요즘은 사랑한다는 말을 통 안하던데, 사랑이 식은 건가? 따위의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쓰러진 몬스터의 거체 위에 위풍당당하게 올라서 한 팔로 한유진을 안고 있는 성현제의 모습은 공주를 납치한 마왕 같았다.

"성현제 씨, 이제 보스 몬스터도 잡았으니까. 슬슬 내려 주시죠."

성현제는 한유진을 내려놓기는 커녕 부드럽게 턱을 잡고 얼굴을 돌려 저와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한유현의 주변 온도가 급격히 높아졌다.

"아직 내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공주님."

"헛소리에 일일이 대꾸할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만."

"방금 한 말보다 사랑합니다 다섯 글자가 훨씬 경제적이라네."

"네에 사랑합니다, 세성 길드장님."

원하는 말을 들려줬건만, 무엇이 못마땅한지 성현제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려 주시죠."

몬스터의 몸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성현제는 한유진을 내려놓고는 아쉬운 듯 그 손을 잡아 손등에 키스했다.

"다음엔 좀 더 진심이 섞인 말을 기대하지."

어이없다는 얼굴로 성현제를 쳐다보는 한유진의 몸이 휙 낚아채져 이번에는 제 동생의 품에 안겼다.

"너까지 왜 이래. 나도 발 있다고."

달랑 들린 채 게이트를 빠져나가며 한유진이 툴툴거렸다. 한유현은 던전을 빠져나가서야 한유진을 내려놓고 물었다.

"나는?"

"엉?"

한유현의 어깨 위로 고개를 내민 이린이 무언의 재촉을 보냈다.

"아, 우리 유현이도 사랑하지. 유현이를 젤 사랑하지."

얼굴을 붉히며 하는 말에 한유현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기가 차다는 듯한 성현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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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현제유진] Omne ignotum pro magnifico

한유진은 정신세계에서 성현제의 몸을 갈라 보는 것에 성공했다. 성현제가 그리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한유진이 도무지 그의 사랑을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실로 돌아온 한유진은 고개를 숙인 채로 말이 없었다. 성현제는 한유진의 얼굴을 잡아 들고 시선을 마주했다.

"내 밑바닥까지 보았으니, 이제 한유진 군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나?"

한유진이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 잘 모르는 것은 대단해 보이는 법이래요."

Omne ignotum pro magnifico. 성현제도 알고 있는 격언이었다.

"그래서, 한유진 군의 눈에는 더이상 내가 대단치 않아 보이나?"

"그게 아니라... 성현제 씨가 나를 좋아하는 건,"

"사랑하는 거라네."

"아무튼, 그건-,"

"한유진 군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유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현제는 얼굴을 모로 살짝 기울이며 미소지었다.

"아니. 내가 한유진 군에게 반한 건,"

황금빛 눈동자에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언제나 내가 한유진 군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던 순간들이었다네."

성현제의 입술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한유진은 눈을 감았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을 보면서 성현제는 한유진에 대한 몇 가지의 새로운 사실을 더 알았다. 맞댄 입술의 촉감이라거나 그 안쪽의 온도, 입안에 갇힌 숨결의 달콤함 같은 것들. 그리고 그만큼 더 한유진에게 반했다.


(* 제가 외우고 있는 유일한 라틴어 문장을 읊는 유진이를 보고 싶어서 썼던 것인데... 아무래도 오글거려서 고쳤네여 ㅋㅋㅋㅋ 머쓱타드...;;; 제가 좋아하는 격언이에요.. 대부분의 경우에 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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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현제유진] 공주님

성현제는 직전까지 방패처럼 휘두르던 한유진의 팔을 당겨 품에 안고 우아하게 턴해 등으로 공격을 받았다.

"성현제 씨!"

그의 등에서 피가 솟았다.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릿하게 보였다. 붉은 피가 햇살 아래 분수처럼 잘게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져 내리는 광경과, 바싹 다가붙은 얼굴에 걸리는 다정한 미소, 천천히 벌어지는 그의 입술.

"조금만 기다리게, 내 공주님."

성현제는 한유진을 가볍게 들어 유명우에게 던졌다. 대장간의 문이 열리고 한유진은 속절없이 그 안에 갇혀 버렸다. 한유진은 무릎을 꿇고 앉아 딱 한 번 정도의 치명타를 막을 수 있을 만큼의 마력만 남은 팔찌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순간 성현제에게, 그는 아이템이 아닌 공주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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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현제유진] 성현제가 임신하고 튐

[지구를 지키기 위해선 당신들의 아이가 필요해요.]

배구공이 침착하게 헛소리했다. 한유진은 잠깐 눈을 의심했으나 메시지창의 선명한 글씨는 사라지지 않았다. 성현제는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나와... 이 사람 말야?"

[네! 체인과 허니요!]

"왜죠?"

[체인은 지구에서 가장 완벽한 유전자를 가졌고, 허니는 완벽한 양육자니까요!]

"시스템이 뭘 좀 아는군."

성현제는 흡족한 듯 중얼거렸고 한유진은,

"우리 유현이도 완벽하거든?"

"저런, 그쪽이 신경 쓰이는 건가."

[허니의 동생도 훌륭하지만요, 우리가 아무리 패륜아라 불린다지만 근친상간을 조장할 수는 없잖아요?]

납득해 고개를 끄덕이던 한유진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근데 남자끼리 뭔 아이야?"

[두 분의 유전자를 조합해서 임신시켜 드릴게요!]

"누구를?"

[음... 누구든 큰 상관은 없지만 아무래도 양육자가...]

"내가 하지."

한유진이 기겁해서 배구공을 걷어차기 직전에 성현제가 말했다.

"네?"

"싫은가?"

"아니, 아뇨, 그래 주시면 다행이지만, 아니, 근데 성현제 씨가..."

지구를 위해 임신을 불사할 그런 영웅적 인물은 아니잖아요...?

혹시나 성현제가 말을 번복할까 무서워 뒷말은 삼켰다. 하지만 성현제는 마치 그 말을 들은 것마냥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공주님과 나의 아이라니 꼭 갖고 싶군."

이상하게 심장이 술렁거려서 한유진은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성현제가 사라진 것은 그의 임신 3주차 때의 일이었다.


(* 1월 3일에 쓴 것인데요... 정말로 둘의 아이가 생길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것도 바로 며칠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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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현제유진태원] 터진 오렌지

"그 남자, 위험한 사람입니다."

종종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곤 하던 남자가 한유진에게 처음 건넨 말은 그런 것이었다. 첫인사 치고는 이상한 말이었다.

"같이 사시는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사실을 적시하자 침묵만이 돌아온다.

띵, 엘리베이터가 13층에 도착하고, 먼저 문을 나선 한유진의 등 뒤로 다시 경고의 말이 따라붙었다.

"조심하십시오."

한유진은 뒤돌아서 커다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통성명이나 하죠. 저는 한유진, 아시겠지만 1305호에 살고. 그쪽은?"

"... 송태원입니다."

"성현제 씨랑은 무슨 사이예요?"

"동료, 입니다."

동료라는 말은 잇새에서 으스러져 불분명한 발음으로 뱉어졌다. 한유진은 한쪽 입꼬리를 과장되게 올리고 웃었다.

"그럼 그쪽도 위험하겠네."

송태원은 대답하지 않고 우묵한 눈으로 한유진을 보다가는 먼저 제 집으로 들어갔다. 1304호, 한유진이 썸타는 중인 잘생긴 남자와 송태원이 함께 사는 집이었다.


(* 이건 언젠가 디벨롭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복잡한 삼각물인데요 도대체 언제가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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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노아유진] 너라고 부를게

"유진, 밥 먹었어요?"

노아는 요즘 통역기를 떼어 놓고 한국말을 배우고 있었다. 그런데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좀. 유진 씨라고 들리던 건 통역기의 재량이었던 거야?

"노아 씨, 형이라고 해 봐요."

"네?"

"형. 유진이 형."

"그거 동생이 부르는 말. 노아 유진 동생 아니에요."

"노아 씨가 나보다 어리잖아요."

노아는 한참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그래도 동생 아니에요."

"친동생만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닌데."

"동생 하기 싫어요."

노아는 고집스런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통역기라도 다시 끼고 설명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귀찮아서 그만두었다.

"에휴, 맘대로 해요."

"응, 유진."

반말하라고까진 안 했는데. 이 외국인은 알고 그러는 건지 모르고 그러는 건지, 예쁘게도 웃고 있었다. 어쩐지 얄미워.


(* 한유현이 호형을 금하리라는 것을 예상했었어야 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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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민의유진] 그의 애마를 위한 진혼곡

김민의는 얼떨떨한 눈으로 잘빠진 스포츠카를 바라보았다.

"똑같은 차로 해주려고 했는데요, 그게 의외로 당장 구하기 힘들다고 하더라구요. 일단 이거 쓰시고 구해지는 대로 전에 쓰시던 차종도..."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뭔 소리야 이게 세 배는 더 비쌀 텐데!

길드장이 부순 김민의의 차 대신이라는 스포츠카는 던전 부산물까지 재료로 들어간 최첨단 신차로 20대 헌터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하는 차 1위에 랭크된 차종이었다. 앙증맞은 것을 좋아하는 김민의의 취향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김민의로서는 마수 사육사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길드장의 친형이 사죄의 뜻으로 직접 주는 귀한 물건에 손사래 칠 계제가 못 된다.

"이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차키를 받아들고 사의를 표하자 한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들고 있던 작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다행히 인형은 같은 거로 구할 수 있었어요."

열어보자 예전 차에 매달아 놓았던 것과 똑같은 디○니 인형이 방향제와 함께 들어 있었다. 그거 그냥 누가 디○니랜드 다녀온 기념으로 줘서 달아놨던 건데... 세심한 배려가 느껴졌다.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어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죠."

생긋 웃는 하얀 얼굴을 보자 어쩐지 낯이 뜨거워졌다. 괴물 같은 길드장이 어째서 제 형에게만큼은 죽고 못 사는지 알 것 같았다.


(* 김민의 헌터의 애마가 부서진 날이었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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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하민유진] 햄스터 성애자

도하민의 세상에는 자신과 햄스터밖에 없었다. 그 작고 보들보들한 생명체가 경계심을 풀고 손바닥 위에서 오물오물 해바라기씨 따위를 받아 먹는 것을 보고 있자면 세상 행복해지곤 했다. 흥신소 일 따위야 햄스터들을 건사하기 위한 돈을 벌려는 수단으로 귀찮은 일일 뿐이었다. 한유진의 마수연구소로 들어온 지금은 햄스터들에게 쏟을 시간이 넉넉해진 덕에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도하민이었다. 그랬는데.

"오랜만. 햄스터들은 잘 지내?"

그의 고용주가 그를 자주 찾지 않는 것은 다행인 일이어야 할 텐데.

"주님, 세입자한테 너무 신경 안 쓰는 거 아냐?"

왜 그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없음에 가끔 서운함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뭐 불편한 거 있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보는 하얀 얼굴이, 무해한 초식동물처럼 말갛다.

"아니, 뭐 딱히 그런 건 아니고."

"맨날 햄스터들하고만 있으니까 심심해?"

사랑스러운 햄스터들과 있는 시간이 심심할 리가 없잖아.

"좀 그렇네, 한가하다 보니."

"할 얘기도 있는데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얼결에 고개를 끄덕여 함께하게 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오물오물 음식을 씹어 삼키는 한유진의 얼굴을 보며.

"이렇게 보니까 주님, 햄스터 닮았네."

도하민은 사랑을 자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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