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리로 떠나기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빨갛고 하얀 옷을 입은 요정이 순록을 타고 날아다니다가 어린이가 있는 집으로 몰래 침입해서 장난감을 두고 가는 날이라는 거지?"

"대충 비슷해요."


내 장황한 설명을 듣고 있던 알렉이 크리스마스를 깔끔하게 요약해줬다. 그제야 일리자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크리스마스는 서양 명절이니까 지엄하신 유교 얘기도 없다. 두 녀석이 비교적 이해하기 쉽겠지?

그런데 바로 우리집 마왕님이 태클을 걸었다.


"근데 은수네 세상은 요정이 없잖아. 마법이 없어서 순록도 못 날잖아. 신도 없고."

"그렇죠."


산타. 나는 이미 유치원 때에 산타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내가 유치원 다닐 때에는 1년에 한 번 산타 분장을 한 아저씨가 아이들에게 하나하나 선물을 나누어주는 행사를 했다. 그런데 행사 한 달 전쯤에 '아이들이 갖고 싶어 하는 선물 리스트'를 보고 말았다. 그걸 가지고 각 가정에 '이런 선물을 준비하면 된다'고 전화를 돌리던 광경도.

게다가 행사 당일도 문제였다. 이름을 부르면 앞으로 나가 포장된 선물을 받는 방식이었는데, 산타 할아버지의 수염이 고무줄로 매달려 있었다. 누가 봐도 가짜더라고. 게다가 너무 젊었다.

별로 충격받진 않았다. 나는 산타보다 만화에 푹 빠져있었다. 학교가 로봇으로 변하거나 마법 소녀가 변신하고 있는 세상에서 사는데 그까짓 산타가 눈에 들어오겠냐고요. 뭐 선물은 감사했기 때문에 얌전히 받았다.

알렉이 아주 사실적이고 상식적이며 평범한 의문을 제기했다.


"요정하고 마법이 실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선물을 줘? 그 산타라는 게 진짜 있어?"

"어, 뭐 산타 협회라는 게 있는 거 같긴 한데 거기서 진짜 선물을 나눠주는 건 아니고요. 기본적으로 부모님들이 산타인척하고 몰래 선물을 놔두거나 해요. 아니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같은 데서 산타 분장한 선생님들이 줘요."


평범한 한국이지. 그리고 솔직히 해외라고 별로 다른 것 같지도 않았다. 25일 어린이들이 트리 아래 산타가 두고 간 선물을 발견하는 거로 기뻐하는 모습은 어느 나라 콘텐츠를 보든 꼭 하나씩 있어서. 이상하게 크리스마스는 전 세계 만국 공통이더라. 마음이 따뜻해지지.

그런데 이 따뜻한 공휴일 이야기에도 우리집 음유시인이 거칠게 분개했다.


"맙소사! 그렇다면 온 세상의 어른이 협력하여 순진한 어린이들이 '산타'의 가짜 기적을 믿도록 만든다는 겁니까?!"

"...대충 그런 셈이죠?"

"결국 산타라는 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거짓 기적으로 어린이들의 믿음을 착취하고 있는 셈 아닙니까?! 어떻게 어른이라는 자들이 그 상태를 방관하며 심지어 돕기까지 할 수 있습니까! 어린이들이 자신의 믿음을 착취당하고 있었으며, 진실로 속았다는 사실을 알면 얼마나 충격을 받겠습니까?! 어째서 은수 현인의 세계는 이토록 불합리한 겁니까?!"

"맞아. 어린이 착취라니. 거기 정상 아니야."


심지어 알렉까지 눈썹을 찌푸리면서 심각해 했다.

아, 환장하겠네. 그런 이세계적 기준 윤리 문제 걸고넘어지지 말란 말이야! 요점을 파악하라고! 온 우주가 합심해서 어린이 동심 지켜주는 날이잖아! 얼마나 아름다워! 거기서 너희들만 빠질 거야? 나는 결국 이마를 쳤다.


"저희 세계에서는 뭐 믿어봤자 별일 안 일어난다니까요."

"하지만 믿음 아닙니까! 신들께 마음과 기원을 전하는 행위입니다! 대상의 양식이자 저희의 소망. 이 작은 믿음 하나하나가 세계를 바꾸는 법이거늘! 그 믿음을 대놓고 착취하는 데다 배신까지 하다니!"

"현대사회는 믿음이 아무런 에너지도 없어요. 착취 아니에요. 배신은... 산타가 진짜 아니라는 건데 별로 해롭진 않잖아요?"


두 녀석 눈이 똑같아졌다. 그놈의 '현대 사회 이해하기 어렵다' 표정이다. 솔직히 웃겼다. 신이니 마력이니 믿음이 없다는걸 못 믿다니 웃긴 놈들. 상상력 너무 없는 거 아니냐. 역시 만화가 없는 세상이라 그렇다.

아직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말투로 알렉이 태클 걸듯 물었다.


"그럼 대체 뭘 위해 그런 날을 만든 건데?"

"예수님 생일이긴 한데. 잘 몰라요. 선물 줄 핑계 같은 거 아닐까요?"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줄 때에 왜 핑계가 필요합니까?"

"어, 모르겠네요."


나한테 따지지 마라 이놈들아.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 좀 궁금했다. 예수님 생일이 어쩌다가 산타가 와서 어린이들한테 선물 주는 명절로 변한 거지? 인터넷이 없어서 모르겠다.

웃기게도, 저녁 식사에 알렉은 자기 망토를 뒤집어서 빨간색 내부가 드러나도록 입고 나타났다. 아주 거만했다.


"산타 등장. 메리 크리스마스."


환장하겠네. 산타인 척 하는 마왕이라니 종교 세계관 괜찮냐? 그리고 망토만 빨간색이면 다 산타인 줄 알아? 옷차림 챙겨! 모자도! 꼬불꼬불한 흰색 수염도! 다 얘기해줬는데 성의 없잖아! 설마 본인 미의식에 안 맞아서 저러나. 그래도 남의 세계 요정 컨셉은 존중해라!


"...산타처럼 안 보이는데요."

"왜? 빨간 옷이잖아."

"설명해 드린 거랑 다르잖아요. 그리고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이라고 했잖아요. 아직 8월인데요."

"그건 은수 세계고. 이미르 크리스마스 산타는 나야. 그리고 여기 크리스마스는 오늘이야. 내가 그렇게 정했어."


저놈의 마왕이 자기 마음대로 이세계에 크리스마스 현지화한다!


"아무튼 둘 다 크리스마스 선물."


알렉이 꺼내 든 건 얇은 금색 발찌였다. 1캐럿짜리 보석 검은색, 밤색, 노란색이 박혀 있었다. 셋이 세트로 하면 재미있을 거 같다고 했다. 어마어마하게 비싸 보이는데. 그냥 줬으면 100% 일리자가 거절했겠네. 크리스마스가 핑계인가 보다.

일리자가 기뻐하면서 선물로 노래를 만들겠다고 했다. 이럴 거면 그냥 징글벨이나 연주하지 싶어서 징글벨 동요를 들려줬다. 이세계 노래라고 더 신나 한다. 역시나 음악 천재답게 순식간에 편곡해버렸다. 분명히 동요인데 오페라 음악처럼 묵직한 느낌으로 울려 퍼졌다.

하필이면 CCTV 집사분께서 우리가 노는 꼴을 본 것 같다. 다음날 조세핀 할머니가 크리스마스란 게 구체적으로 뭔지 물어보시러 왔다. 그런데 알렉은 내가 대답하지 못하게 막더니 이렇게 말했다.


"일 년에 한 번 선물 줄 핑계 만드는 날. 빨간 옷 입고 산타가 된 다음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면서 주면 돼."

"무척 재밌는 날이로구먼."


이자식이 지금 뭐라는 거냐? 뭘 어떻게 해야 크리스마스를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건데? 어이없어서 태클도 못 걸었다.

보통이라면 그런 날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볼 만도 한데, 하필 젊은 사람들과 끝내주는 의사소통을 하면서 신문물도 적극 받아들이는 조세핀 할머니셨다.

할머니는 그날부터 일주일 동안 빨간 로브를 두르시고 친한 분들께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며 값비싸고 맛있는 과자와 케이크를 선물하셨다고 한다. 가끔 너무 비싸고 부담스럽다면서 난색을 보이는 마법사 젊은이들이 있으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 년에 한 번 선물 주고 싶은 이들에게 핑계를 대고 선물하는 행사일세. 은수 디자이너의 나라 풍습이라더군. 무척 다정한 날이지 않은가?"


얼마 후 여기저기서 붉은색 계통 로브가 인기를 타기 시작하더니 산타라거나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단어가 들렸다. 나는 내 귀에 이상이 생기거나 비슷한 단어를 잘못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볼일이 있어서 헤윰에 갔더니 웬 마법사들이 간절하게 '저는 산타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외치며 튀어나왔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꼭 선물을 받아달라며 애쓰는데, 몇몇은 나뿐 아니라 일리자한테까지 잘 보이려고 노력했다.

그제야 이세계에 크리스마스가 괴상하게 현지화되어서 널리 알려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정할 시기도 한참 지나버렸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냐고요. 너무 충격적이어서 알렉이 아니었으면 무의식중에 곱게 포장된 선물을 받을 뻔했다.


"이 자식들이. 서은수랑 일리자 산타는 나뿐이니까 꺼져!"


산타인척하는 우리집 마왕이 성질낸다. 검집째로 검을 뽑아 크게 휘둘렀다. 빨간 로브를 입은 마법사 몇 명이 하늘로 날아갔다. 당연하게도 반짝거리면서 안전하게 착지했다. 이놈의 시트콤에 BGM이 빠질 리가 없었다. 일리자가 오페라로 편곡한 캐럴을 부르면서 또 제멋대로 개사했다.


"특별한 날, 특별한 선물, 특별한 이에게 허락된 영광을."


나는 도저히 제정신으로 이 꼴을 볼 수 없어서 재빨리 도망쳤다. 그거 아냐. 크리스마스 그거 아니라고.

알렉과 일리자가 그 헛소리를 지껄인 뒤로 산타의 의미까지 이상해졌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한참 후였다.

하....






월화목 오후7시 < 이세계까지 와서 마법진 디자이너 > 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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