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가 배를 만지작거렸다. 군침을 삼켰다.

“아… 배가 좀 고프네. 오늘은 짜장라면이 땡기네.”

“선배. 그렇게 인스턴트 음식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아요.”

“알지. 그렇지만 먹고 싶은걸. 그래도 나 여기 살면서 예전보다 훨씬 덜 먹고 있어.”

유하는 여전히 떫은 표정으로 맥주를 마시는 한결을 보았다. 오늘따라 맥주를 왜 저렇게 초저녁부터 마시는지 모르겠네. 눈빛은 완전히 싸가지가 없어. 이런 날은 한결의 비위를 대충 맞추고 빨리 도망치는 게 상책이다. 유하는 저녁만 먹고 바로 방으로 들어가야지 하고 다짐했다.

“한결아, 그럼 너는 짜장라면 안 먹을 거야? 내 것만 끓인다.”

“네. 안 먹어요.”

한결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았다. 까만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바람에 흩날렸다.

유하는 오랜만에 짜장라면을 끓이며 군침을 꿀떡 삼켰다. 라면과 달리 가끔 짜장라면이 땡겼다. 짜장면이랑은 또 다른 맛이었다. 한 번 먹으면 이상하게도 자꾸만 생각났다.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새 잿빛 구름이 잔뜩 끼여 있었다. 공기에 수분이 많아 축축하고 날씨가 조금 쌀쌀해진 느낌이었다.

“역시, 이런 날 짜장라면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데. 한결이는 늘 맛있는 음식만 먹으니 이런 걸 좋아할 리가 없지.”

유하는 젓가락으로 면에 짜장 소스를 열심히 버무렸다. 거실에는 고소하고 달콤한 짜장라면 냄새가 가득했다. 한결은 여전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결아, 미안 먼저 먹을게. 너 저녁 먹고 싶을 때 먹어.”

“…….”

한결은 대꾸가 없었다. 유하는 한결과 같이 산지 좀 돼서 한결의 뒷모습만 봐도 빡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뭐야, 왜 또 저래? 유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유하는 식탁에 앉아서 입으로 후후 불면서 짜장라면을 한 젓가락 먹었다.

“으음. 역시 이 맛이야. 대기업의 맛은 정말 좋아.”

만족한 미소를 짓고 짜장라면을 계속 먹었다.

갑자기 한결이 심통 난 얼굴로 식탁으로 다가왔다. 얼굴에 심술이 가득했다.

“냄새 맡으니 갑자기 먹고 싶어졌어요. 한 입만 줘요.”

“어? 그래. 냄새 맡으니 먹고 싶지. 먹어.”

유하가 자신의 그릇을 내밀었다.

한결은 그 자리에 서서 젓가락으로 그릇 깊숙이 찔러 넣어 남은 면을 거의 다 집어서 후루룩 한입에 먹었다. 그릇에는 몇 가닥 남지 않았다. 한결은 한 번에 많은 양을 먹느라 입 주변에 시커먼 짜장 소스가 묻었다. 휴지로 슥슥 닦으며 아무렇지 않게 유하를 보았다. 오히려 통쾌하다는 듯 눈빛이었다.

유하는 그 눈빛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어. 그거 너무 많잖아. 한입이라며! 다 먹는 게 어디 있어. 양심 무엇이야!”

그릇에 몇 가닥 안 남은 면을 삭삭 긁어먹으며 유하가 짜증을 냈다.

“왜요?”

뻔뻔한 한결이 오히려 눈을 부라리며 유하를 보았다.

“나 한 입 밖에 안 먹었단 말이야. 그러게 아까 끓이기 전에 미리 말을 하지. 이 식충아!”

유하는 한결의 싸가지 없는 행동에 슬슬 열 받았다. 안 돼. 여기서 화를 내면 안 돼. 멈춰야 해. 아무리 식충이라서 꼴 보기 싫어도 참아야 해. 그렇다 상대는 단순한 후배가 아닌 어엿한 이 집의 주인이었다. 유하는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쩔 수 없이 배가 고파서 짜장라면을 더 끓여 먹기로 했다. 면 몇 가닥으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유하는 뭔가 모르게 기분이 조금은 좋아진 것 같은 한결을 보며 말했다.

“너 이번에는 확실히 말해! 먹을 거야 말 꺼야!”

“머…먹을래요. 맛있긴 맛있네요.”

“그럼 2개 끓인다.”

유하는 한결의 확답을 받고 짜장라면 2개를 끓였다. 배는 고프지 또 짜장라면은 끓여야지. 유하의 속도 부글부글 끓었다. 양심이 있는 놈이라면 분명히 사과를 하면서 ‘이번 라면은 제가 끓일게요’라고 빈말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저 싸가지 없는 곱게 자란 도련님인 한결에 바란 저가 잘못이었다.

전형적으로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눈 흘긴다는 속담처럼 밖에서 화가 나서 집에 와서 유하에게 화풀이하는 격이었다. 유하는 어차피 작업실로 이사 올 때부터 수시로 강한결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상황이 올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먹는 걸로 그러는 건 좀 그랬다. 너무 치졸하고 비겁했다. 주인만 아니면 벌써 한 대 쳤을지도 몰랐다. 더러워서 빨리 보증금 마련해서 방을 빼고 싶었다.

“다 끓였어. 먹자.”

유하는 그래도 속으로 화를 꾹꾹 참으며 나름 평정심을 유지하며 한결을 불렀다. 천하 태평하게도 소파에 누워서 핸드폰으로 게임하는 한결의 엉덩이를 보니 한 대 걷어차 주고 싶었다.

유하는 일단 혹시라도 또 뺏길지도 몰라서 한결이 오기 전에 입안 가득 짜파게티를 먹었다.

한결은 어슬렁거리며 식탁으로 다가왔다. 양쪽 볼이 빵빵한 채로 순식간에 면을 흡입하는 유하를 보며 낄낄거렸다.

이게 누구 때문인데. 진짜 강한결 치사하고 드럽게 먹는 걸로는 좀 그러지 말자.

“선배, 왜 이렇게 빨리 먹어요. 누가 훔쳐먹는데요? 짜장라면 양 이 정도면 넉넉하잖아요.”

“엉. 너 못 믿어서 그래. 이 식충아!”

“식충이요! 나 태어나서 그런 말 처음 들었어요.”

한결이 짜장라면을 한 젓가락 집어서 먹었다. 아까 워낙 많은 양을 한 번에 먹어서 그런지 이번에는 그렇게 많이 먹지 않았다. 유하는 순식간에 짜장라면 한 개를 다 먹고 만족하며 입을 휴지로 닦았다.

“혼자 일찍 다 먹는 건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요. 저 아직 다 안 먹었는데…. 먼저 일어서기 있기 없기?”

“있기!”

유하는 벌떡 일어나서 냉장고로 가서 냉수 한 잔을 마시고 거실 소파로 갔다.

한결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남은 짜장라면를 먹었다.

쏴아아아.

어느덧 창밖에 비가 내려 물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생각보다 많이 오는 듯 유리창에 물방울이 가득했다.

“비 오네. 오랜만에 비라서 기분 좋네.”

유하가 잠깐 창밖을 쳐다보며 감상에 젖었다. 아까 다 마시지 못한 맥주를 가지고 소파에 앉았다. 티비를 틀고 아무 채널이나 돌렸다. 그러다가 로맨스 영화를 보게 되었다.

유하는 쿠션을 안고 영화를 진지하게 보았다. 한결은 짜장라면을 다 먹고 유하 옆에 맥주 캔 하나를 더 따서 앉았다. 벌써 3캔째였다.

“너 오늘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시냐? 술이 센 건 알지만 내일도 생각해야지.”

유하는 슬쩍 한결을 바라보았다.

취기가 오른 듯 얼굴이 붉었다. 눈빛이 살짝 풀렸다. 표정은 아까보다 배가 불러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많이 부드러워졌다.

한결은 유하가 보는 영화에 흥미가 있는지 옆에 쿠션을 안고 나란히 앉았다. 생각보다 영화는 재미있었고 점점 더 두 사람은 몰입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남녀 주인공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며 진하게 키스를 했다. 외국 영화 속 키스는 역시 차원이 달랐다. 서로의 혀가 깊숙하게 얽히는 게 느껴졌다. 유하는 갑자기 열이 올랐다. 그렇게 야한 장면은 아니지만 한결과 같이 보려니 괜히 민망했다. 그렇다고 이렇게 몰입해서 보다가 채널을 돌리기도 일어서기도 그랬다.

유하는 쿠션을 꽉 움켜쥐고 몸을 배배 꼬며 괜히 발을 오므렸다 폈다. 침을 꿀떡 삼켰다.

곁눈질로 한결을 보니 별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내가 한결이보다 한살이나 많은 데 민망해하면 좀 그렇겠지. 그냥 무덤덤한 척해야지. 유하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목과 얼굴에 열이 올랐다. 목이 타서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그다음이 장면이 유하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설마…싶었는데 남녀 주인공이 침대로 가서 옷을 훌렁 벗어 던졌다. 일명 베드신이었다. 물론 직접적으로 행위를 하는 장면이 아니라 15세 관람가라서 은근한 손짓과 신음 소리가 나왔다. 여자 주인공이 허리를 꺾고 섹시하게 입을 벌이며 야릇한 소리를 냈다. 두 남녀의 격렬한 몸짓에 침대가 삐걱거렸다. 절정으로 치닫는 모습은…. 차마 유하는 눈을 뜨고 보기가 그래서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정말 예상 밖에 일이라서 유하는 얼굴이 빨개지고 등에서 식은땀이 났다. 자꾸만 몸이 뜨거워졌다. 민망한 부위로 피가 몰렸다. 허벅지에 힘을 꽉 줬다. 혼자서 보는 건 괜찮았는데 한결이 옆에서 같이 야한 장면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자 기분이 묘했다.

한결이 동훈처럼 동기가 아니라 동생인지라 더욱 민망했다. 옆에서 한결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계속 영화를 보며 맥주를 홀짝였다.

“후우.”

유하는 홧홧한 얼굴을 손으로 부채를 만들어서 부쳤다.

“선배…. 더워요? 아님 부끄러워요?”

한결이 언제부터 유하를 봤는지 몰라도 히죽 웃으며 빤히 쳐다보았다.

“아~~아뉘. 난 이런 거 하나도 안 부끄럽거든. 네가 부끄러울까 봐 걱정이야. 너 부잣집 도련님이라서 귀하게 컸잖아. 이런 거 봐도 되냐?”

유하가 오히려 한결을 걱정하며 물었다.

“풉!”

한결이 유하의 질문에 같잖지도 않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저 성인이거든요. 고등학교 때 다 봤거든요.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19금도 아니고 이것보다 훨씬 야한 거도 많이 봤어요. 어쩌면 선배보다 더 알지 모르죠. 크크큭.”

한결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유하를 쳐다보았다. 분명히 술에 취해 흐물흐물했던 눈동자에 어느새 단단한 빛이 들어와 있었다.

“그…그랬구나. 나는 또…. 근데 동생이랑 보는 건 영 좀 그렇긴 하네. 뭔가 좀 민망한 기분이랄까?”

유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금발 머리가 땀에 젖어 두피에 달라붙었다.

“뭐가 민망해요. 크큭. 선배는 가끔 참 엉뚱해요.”

한결이 귀엽다는 듯 유하의 머리를 꾹꾹 누르며 쓰다듬었다.

“탁!”

유하가 그 손길을 거부하며 손으로 쳐냈다. 한결이 요즘 은근히 강아지 만지듯이 유하의 머리와 몸 여기저기를 만졌다. 왠지 모르게 그 손길이 싫었다.

“너 요즘 왜 자꾸 머리를 만져? 좀 그렇다. 내가 강아지도 아니고…. 몸도 좀 만지지 마 남자끼리는 좀 그래. 어후….”

유하가 눈을 흘기며 한결을 아니꼽게 쳐다보았다. 팔뚝에 닭살이 돋아서 손으로 팔을 마구 문질렀다.

“그래서 또 물 거예요? 크큭.”

한결이 재미있다는 듯 눈빛을 번뜩였다. 유하는 한결의 팔뚝에서 희미해진 이빨 자국을 보고 얼굴을 붉혔다. 하…. 저 이빨 자국. 몸을 방어하기 위해서 물었는데 의도와 다르게 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스 마크 같잖아. 어휴, 내가 미쳤지. 뭐 하러 애를 물었을까?

유하는 야하다는 생각을 하는 자신이 변태 같았다. 한결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역시 부잣집 애라서 뭘 모르는 듯했다. 다 아는 척해도 순진한 풋내기였다. 어휴…내가 이 어린 걸 데리고. 한결아, 아직 형님 따라오려면 한참 멀었거든. 저 순진무구한 까만 눈동자 좀 봐. 양심에 찔린다.

“아니…. 물긴 뭘 물어?”

유하가 시치미를 뚝 떼며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물고 싶으면 물어도 돼요! 크큭.”

한결이 술에 취해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유하의 얼굴 앞으로 팔을 불쑥 내밀었다.

유하가 미간을 팍 찌푸리며 팔을 잡아서 치웠다.

“안 문다니깐. 뭘 물어. 장난 그만해. 내가 개도 아니고.”

한결이 조금 더 유하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귓속말을 했다. 한결의 더운 숨결이 느껴졌다. 알코올 냄새와 머스크향이 확 났다. 

“선배, 최근 키스 언제 해봤어요?”

한결이 한쪽 입꼬리를 씩 올리며 짓궂은 질문을 했다. 입술을 혀로 천천히 핥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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