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은 뻘쭘하게 서 있는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못 마주치는 유하를 보며 씩 웃었다.

“왜 그렇게 있어요? 풉. 누가 잡아먹어요?”

“아니…그게 아니라. 이제 옷 좀 입어라. 민망하다.”

유하가 한결의 몸 대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숨을 쉬었다. 한결이 장난스레 유하의 금발 머리카락을 손으로 마구 꾹꾹 쓰다듬었다.

“더 작게 만들어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어요.”

“누르지 마. 야! 너 힘세다고 자랑하는 거야. 지금도 작은 데 여기서 얼마나 작아져야 해!”

유하가 한결의 손목을 잡으며 장난을 못 치도록 말렸다. 한결은 못 들은 척 장난을 계속 쳤다. 일부러 유하가 가장 싫어하는 키를 건드렸다. 오늘 저 기분이 좀 그래요.

“하지 말라고. 이게 선배한테 뭐 하는 짓이야. 장난도 정도껏 해야지.”

유하가 눈꼬리를 치켜뜨며 한결의 손을 ‘탁’ 소리가 나도록 쳐냈다. 한결은 그 모습에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역시 유하 선배는 앙탈 부릴 때가 가장 선배답다.

이 선배 오늘 왜 이렇게 귀엽지…. 막걸리 먹어서 그런가 발그레한 볼이 귀엽다. 자꾸만 더 놀려주고 싶다.

한결이 볼을 잡아당기려고 뺨에 손을 대자 유하가 진저리를 쳤다.

“아…. 그거 진짜 하지 마. 한나 누나가 하던 거잖아. 남매 둘 다 똑같네. 하면 욕할 거야.”

유하가 질색하며 상체를 뒤로 뺐다.

“크크큭.”

한결의 유하의 경고를 대놓고 무시하며 손을 뻗었다. 심술궂은 눈빛이 번뜩였다. 힘으로 밀어붙여서 버둥대는 유하의 두 손을 꽉 잡고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양팔 안에 유하를 가뒀다. 유하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힘으로 상대가 안 되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존심이 상한 눈빛으로 한결을 째려보았다.

한결에 눈에는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보였다. 유하가 더 화내기 전에 멈춰야 하는데 그러기가 싫었다. 오히려 손아귀에 힘을 더 줬다.

순간 유하가 한결의 팔뚝을 물었다.

“콱”

“악!”

한결은 팔에 선명하게 난 빨간 이빨 자국을 보며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진짜로 물 줄은 몰랐다.

진짜…물었어.

당황한 한결은 두 눈을 느리게 깜박거렸다. 오히려 묘하게 흥분돼서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이쯤에서 그만둬야 한다는 이성의 경고가 들렸다.

유하는 씩씩거리며 한결을 못마땅한 듯 쳐다보았다. 취기가 살짝 올라오는 듯 얼굴이 붉어졌다. 덜 취했을 때가 문제였다. 힘도 팔팔하고 오히려 성격은 더 사나워진 것 같았다. 그물에 걸린 짐승처럼 눈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한결은 계속 장난쳤다가 유하가 진짜 화낼 것 같아서 멈췄다. 입맛을 다시며 내려다보았다.

“미…미안해요. 장난인데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요.”

“기분 조금 나빴어. 팔 물어서 미안해. 힘으로 안 되니깐. 순간 자존심이 상해서….”

유하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올렸다. 후회하는 눈빛으로 한결의 물린 팔뚝을 보았다.

“괜찮아? 약 안 발라도 돼?”

“아…아프지는 않아요. 괜찮…괜찮아요.”

한결이 겸연쩍어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한결은 오히려 좋다고 말하면 변태 취급당할까 봐 입을 꾹 다물었다.

“됐어요. 신경 쓰지 마요. 피곤한데 들어가서 자요. 근데 오늘 뭐 다른 일은 없었어요?”

“어. 전혀…. 늘 똑같지 뭐.”

유하가 하얀 뺨을 긁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결이 싸한 눈빛으로 한 번 더 물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응.”

유하가 똑같은 대답하기 귀찮다는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한결의 눈치를 한 번 슥 보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쉬운 듯 그런 유하를 바라보며 한결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아.”

한결은 유하의 방문을 물끄러미 보며 한숨을 쉬었다.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사실 불안하고 초조해서 될 대로 되라지 하는 급한 마음에 새로운 시도를 해보았다. 섹시 컨셉. 여자들이 입을 모아 한결의 근육질 몸매가 섹시하다며 칭찬했다. 노출은 물론이고 유혹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멀쩡하게 옷만 입고 있어도 서로 고백을 하겠다고 야단이었으니깐. 그때 문득 남자도 다르지 않을까 생각했다. 밑져야 본전이지 싶었다. 그런데 어째 유하의 반응 보니…. 영 시원찮은 것 같았다.

한결은 유하의 벗은 몸을 본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그때 몸이 저절로 반응했었다. 하얗고 매끈한 가슴과 다리를 보니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민망하고 야릇했다. 유하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크하하핳핳.”

한결은 참담한 결과에 씁쓸하게 웃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웃는데 눈물이 났다. 진짜 미치겠네. 이 선배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미간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손 교수와 차별화해서 젊음을 어필하고 싶었다. 유하는 손 교수의 어디를 보고 반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손 교수는 잘생겼지만 나이가 있어서 육체적인 매력은 한결을 따라올 수 없었다. 한결이 가진 최고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빈말 못하는 유하도 수시로 한결에게 잘 생겼다고 말했다.

난 유하 선배의 취향이 아닌 걸까?

한결은 고개를 푹 숙였다. 몇 달 전 술자리에서 유하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동남아 삘…. 지금도 그말을 떠올리면 뱃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쳐 올라서 열받았다. 장난이겠지라고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들었지만…. 

거울을 자세히 살펴보니 너무 진한 이목구비가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코가 조금만 더 낮았더라면. 눈이 조금 더 작았더라면. 구릿빛 피부도 마음에 안 들었다. 한결은 거울을 보기가 싫어졌다.

조금 전까지 창문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유하가 언제 올지 지켜보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이었다. 유하가 늦게 오는 날의 한결의 습관이었다. 술을 마신다는 말에 차로 데리러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물론 같이 술을 마시고 싶었지만 유하가 먼저 권하지 않았기에 눈치껏 술자리에 동참하지 않았다. 유하의 사생활도 어느 정도 존중해줘야 했다. 전화를 하고 문자를 했지만 유하는 거절했다. 한 번도 데리러 와 달라고 하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니 비가 폭포수처럼 쏟아붓고 있었다. 바람까지 불어 휘이잉거리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들썩였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걱정하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유하가 야속했다. 

한결은 자존심 상했다. 문자에 답이라도 해주면 덜 상했을 텐데. 문자에는 역시나 답이 없었다. 뭐…좀 많이 보내긴 했다. 10번 보내야 한 번 답해 줄까 말까 하니깐.

오늘은 다른 날과 달랐다. 창문을 바라보니 손 교수의 차를 타고 유하가 내렸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분명히 동훈과 술을 마신다고 통화했다. 어떻게 손 교수의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한 건지 의문이었다. 유하가 한결에게 거짓말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미주알고주알 설명할 이유도 없었다. 받아들여야 했다. 눈으로 본 사실 그대로.

한결은 점점 더 불안하고 초조했다. 유하가 손 교수 주위를 맴돌수록 피가 말랐다. 아직은 아무 사이도 아닌 게 분명했다. 손 교수는 모르겠지만 유하는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동경한다. 존경한다 라는 단어를 썼지만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었다.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잡았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몸이 떨렸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동안 유하를 쭉 봐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유하와 지금의 편안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노력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굴욕과 설움의 시간들이었다. 물론 좋았을 때도 가끔 있었다. 비 온 후에 무지개가 생길 확률만큼 적었다. 그게다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고 생각하면…. 한결은 견딜 수가 없었다. 싹을 잘라야 했다.

비겁하지만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어.

한결은 누나인 한나에게 전화했다.

[왜? 이 늦은 밤에. 외롭냐?]

[아니. 저 있잖아. 손 교수. 강의 일정 좀 빨리 마무리 지으면 안 돼?]

[왜? 마음에 안 들어?]

한결은 한숨을 푹푹 쉬며 한나에게 자초지정을 얘기했다.

[어휴. 내가 너 때문에 못 살아. 다들 손 교수 수업 못 들어서 안달인데…. 어휴. 이걸 그냥.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

[싫으면 하지 마.]

한결은 삐져서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를 소파에 집어 던졌다. 이사장은 할머니지만 누나가 알아서 일 처리를 해줄 것이다. 저렇게 싫다고 투덜거려도 한나는 어렸을 때부터 한결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해주었다.

한결은 소파에 앉아서 유하의 방문을 쳐다보았다. 손 교수 정도라면 여기가 아니라 얼마든지 다른 곳에서 러브콜을 많이 받을 것이었다. 한결은 애써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려 스스로 합리화했다.

유하 선배, 이게 다 선배 탓이에요. 전 어쩔 수 없었다고요.

한결은 자신의 결정에 씁쓸하게 웃었다. 옳은지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유하의 마음이 딴 곳으로 가는 것을 막아야 했다. 한결은 그 마음을 가질 때까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한나가 알게 된 것이 처음에 쪽팔리고 못마땅했지만 이렇게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한나라면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좀 앞서 나가서 탈이었지만. 

벌써 같이 산지 몇 달이 지났다. 한결은 슬슬 조바심이 났다. 유하가 한결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 것은 분명했지만 그건…절대 사랑은 아니었다. 어떻게 유하의 마음을 사로잡을 건지 전략을 수정해서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가야 할 시점이었다.

한결은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이러다가 몇 년 지나도 제자리라면 너무나 무능력한 자신이 한심해서 차라리 접싯물에 코 박고 죽고 싶었다.

하아. 모르겠다. 저 선배는 너무 어려워. 바보 같아 보여도 영악하다니깐.

유하는 단순하게 잘해준다고 해서 자신의 마음을 주지 않았다. 남자라는 게 무엇보다도 가장 큰 걸림돌임에 분명했다. 유하가 조금이라도 귀엽거나 섹시해 보이면 한결은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런데 혼자만 그렇다는 사실이 너무 비참했다. 같이 살면서 급히 화장실로 뛰어갔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러다가 제 명에 못 살지 싶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 교수는 파리 전시 일정이 앞당겨지는 바람에 학생들과 제대로 작별 인사도 못 한 채 떠나야 했다. 유하는 몹시 서운해하며 기운이 없어 축 쳐졌다. 섭섭한지 시무룩했다. 한결은 그런 유하를 뻔뻔하게 위로했다.

그러니깐…. 저 말고 딴 데 보면 안 된다고 했죠….

한결은 은근슬쩍 유하의 움츠러든 작은 어깨를 손으로 감싸 안았다.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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