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어째서 이런 일을 꾸민 거야.”

“……그냥 둘이서 얘기 하고 싶었어. 언니가 집에서 나가고 연락도 잘 안하고 그러니까…”


왜 처음부터 의심하지 않았을까. 안나가 전해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게 아니었다. 적어도 부모님께 확인 전화라도 했었다면 이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왜인지 날짜까지 정해 꼭 이 날이여야한다고 성화를 부려 연차까지 써가며 왔더니 실은 부모님이 여행가셨다고 말하는 안나를 따끔하게 혼냈다. 눈에 띄게 풀이 죽은 모습을 보는 것은 괴로웠지만 단 둘만 있는 상황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다음에 두 분 다 계실 때 다시 올게. 그때 다 같이 얘기하자.”


그나마 짐을 풀기 전에 사실을 들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방을 다시 챙겨 든다.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

“…뭐?”


그 말에 현관을 향하던 발걸음이 멈췄다. 굳은 얼굴로 돌아본 안나는 명백하게 날 비웃고 있었다.


“카산드라랑 그 집에서 뭘 하며 지내는지 부모님이 들으시면 참 좋아하시겠다, 그렇지?”

“안나 아렌델!”


조용한 거실에 내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렇게 크게 소리친 게 얼마만인지, 수치스러움과 배신감이 뒤섞여 몸이 조금씩 떨려온다.


“도가 지나쳐. 아무리 동생이라고 해도 내 사생활까지 간섭 받을 이유는 없어.”


날 노려보는 청록색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하룻밤 상대로 만난 카산드라와 함께 마주쳤던 그 날, 당황한 마음에 애인이라고 둘러대었던 것부터가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부모님께 말할 리는 없겠지만 불안한 마음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아서 더욱 냉정하게 다그쳤다.


“이게 지금 간섭하는 걸로 보여?”


성큼성큼 다가온 안나가 내 손에 들린 가방을 잡아빼낸다.


“협박하는 거야.”

“……협박?”

“응.”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에 멍하니 되묻는 사이 안나가 날 소파에 밀쳐 넘어트려 허벅지 위로 올라앉았다.


“이게, 무슨 짓,”

“나랑도 해. 그럼 부모님한테는 아무 말도 안할테니까.”


제 티셔츠를 훌렁 벗어던진 안나를 차마 바라보지 못한 채 버둥거렸다. 보란 듯이 코앞에 아른거리는 주근깨들이 자꾸만 나를 궁지로 내몰아서, 고개를 돌린 사이, 셔츠 단추 위로 올라오는 손을 다급하게 잡아 멈췄다.


“그만, 안나!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내려와.”

“이 손 놔.”

“지금이라면 없었던 일로 생각 할테니까, 얼른 옷 입어.”


겨우 멈춘 움직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안나를 타일렀다.


“전에도 한번 말했지만, 자매끼리 이런 일은…”

“하! 언니가 그런 소리 할 자격이 있어?”


언제나 햇살처럼 웃던 안나의 표독스러운 표정이 내 피부를 찌르고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제발, 안나. 날 그런 눈으로 보지마.

들릴 리 없는 애원이 끊임 없이 혀끝에 맴돈다.


“1년 전 일은, 술에 취해서 다른 사람으로 착각 했을 뿐이라고 했잖아.”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던 기억이 검은 그늘 안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술에 절은 몸, 내 뺨을 매만지던 굳은 살 박힌 손, 걱정스럽게 날 바라보던 예쁜 청록색 눈동자. 몽롱한 정신에 현실을 분간 못하던 내가 꿈이라고 착각하지만 않았더라면, 너는 지금도 날 다정한 언니로 봐주었을텐데. 조금 더 잘 숨겼어야 했는데. 절대 드러내서는 안되는 일이었는데.


“그 날 일을 말하는 게 아니야.”


입술을 꾹 깨문 채로 씹어뱉듯 이야기하는 안나를 바라봤다.

같은 실수를 했을 리는 없어.

그때 이 후로 술에 취하면 언제나 밖에서 자는 버릇을 들였다. 안나를 제대로 보는 것만 해도 벌써 한 달만이다.  다른 일이 있을 수가 없었다. 없어야만 했다.


“일 주일 전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겨우 말머리를 떼는 목소리에 그 날 무슨 일을 했었는지 빠르게 더듬어갔다.

아니, 설마, 설마… 아니야, 설마.


“언니 집에 갔었어.”


온 몸이 떨려온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몸부림치지만 위에서 내리누르는 안나를 떨쳐낼 수는 없었다.


“그때… 들었어.”


양 팔 아래 날 가둔 채로 내려다보는 그 모습은 내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천사와 같이 보였다.


“내, 내가, 나, 아니,”


벼랑 끝에 내몰린 채로 울음을 삼키는 것조차 벅차서, 말 한 마디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고 안나를 보고 싶은데, 그 눈 안에 어떤 감정이 담겨 있을지 무섭다.

경멸하겠지. 친언니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헐떡이는 소릴 들었으니.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냥 이대로 멀리, 아주 멀리 사라져 버린다면 편할 텐데. 어릴 때부터 쭉 보아왔던 청록색 눈동자가 못 견디게 그리워지겠지만 미움 받는 걸 실시간으로 확인하는 것보다야 백배, 천배 나았다.


“언니, 여기 봐. 응? 울지말고…”

“안, 나…?”


어느 새 축축해진 뺨 위로 부드럽게 눈물을 닦아주는 굳은살 박힌 손이 느껴졌다. 내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고개를 돌려주는 움직임에 홀린 듯이 그 손을 따른다.


“한번만이라도 좋으니까, 솔직해지면 안될까?”


분명 저 눈이 나를 곱게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 했었는데.


“우리, 서로한테는 절대 거짓말 하지 않기로 약속 했잖아…”


마주친 안나의 눈 속엔 간절한 애원이 담겨있었다.


“안나 사실은…”

“응, 엘사.”

“…좋아해.”


엉망이 되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를 얼굴로 말한 나를 향해, 너는 따스한 봄날에 내리쬐는 햇살보다 더욱 밝게 웃으며 끄덕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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