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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라일리가 명랑한 음성으로 복귀를 알리면, 불이 켜지듯 많은 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알 시라의 모듈에 CS 이시스가 도킹을 마친다. 선내의 시계가 콜로니와 정확히 같은 시간을 표시한다. 작지 않은 장치들이 함선 표면의 열을 식힌다. 차가운 무채색에 가까운 창백한 실내에서 서로 다른 속도의 발자국들이 바쁘게 엉킨다. 일차적인 조치가 끝나기까지 류드밀라 류보프는 분주해진 반원형의 선착장 위 투명한 유리 벽 뒤에 서 있다. 몇몇의 관측 팀원들이 노곤하게 기지개를 켜며 그의 옆을 지난다. 그에는 아랑곳않는 듯, 콘솔 표면의 버튼 옆에 손을 둔 채 그는 왼손을 들어올린다. 이내 두 번 금빛 눈을 깜박이며 그가 아래를 내려다본다. "준비합시다."

류드밀라 류보프의 손끝에서 신호가 대기 상태의 표시등에 머무는 동안 CS 이시스 안의 팀원들은 모듈로 내려설 채비를 한다. 하나둘 사용하지 않는 공간에서 소리 없이 조명이 암전한다. 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의자에 앉은 채로 아직 환복하지 않은 팀원들이 활동복의 지퍼를 편하게 내린다. 반쯤 불이 꺼진 함내에는 부드러운 회색의 그늘이 내려앉아 있다. 짧은 웃음소리와 긴장 없는 한숨 따위가 부스럭대는 움직임 사이로 섞여들고, 약속 없이 느슨하게 풀어진 인원들의 눈길이 한 곳으로 모이는 것은 머지않은 순간의 일이다. 

등 뒤에서 함장실의 문이 닫히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바실리 즈다노프가 회색 눈을 가늘게 뜬 채 고개를 돌린다.

"아직 주목하라는 말은 하기 전인 듯싶은데."

눈이 마주친 리하오란이 생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회피한다. 검은 점프수트를 발목 아래로 끌어내린 세실 영이 발표하듯 한 손을 든다. "설마 아직도 신호가 안 온 겁니까?" 바실리 즈다노프가 예의상의 시선을 왼편으로 튼다. "의료 팀이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소요된다는 모양입니다."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의 창 옆에서 영 지루해 보이는 낯의 크리스 로페즈는 의미 모를 짓으로 고개를 주억이고 있다.

"참, 어차피 의례적인 절차면서. 그냥 류드밀라가 우리 얼굴을 보는 게 싫은 건 아니고요?"

"저는 그 쪽에 걸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그래도 건강 문제잖아요."

"맞아요, 또 로페즈에겐 거의 2년만에 오는 콜로니 아닙니까?"

"뭐, 파타스페라 상주 팀이 그렇죠. 한동안 더 그랬잖아요. 이번에 팀장님도 오셨고, 해서 좀 풀리려나 싶긴 하지만." 크리스 로페즈가 긴 한숨과 함께 의자에 몸을 묻고 눈을 감는다. 파일럿들의 목소리 아래에 뒤늦은 시스템 종료음이 엷게 깔린다. 낯설지 않은 잔음이 사그라들 즈음 바실리 즈다노프가 문간에 비스듬히 어깨를 기댄다. "그럴 겁니다." 뜻없이 적막해진 실내에 목소리가 울리고, 다시 한 번 파일럿들의 눈길이 그의 낯으로 모인다. 바실리 즈다노프가 못 본 척 태연하게 손목에 이능력 제어 장치를 감는다. 가벼운 먹먹함과 함께 천천히 잦아드는 감각을 의식하며 발끝부터 의자까지의 거리를 가늠하다가, 그는 문득 저 밖의 누군가를 알아차린다: 어지럽게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그는 다만 서 있다. 의식 없이 바실리 즈다노프가 옅게 웃는다. "한 차례 점검도 끝났고…… 이제 이런저런 사유로 자주 드나들게 될 테니까." 크리스 로페즈가 보란듯이 눈을 뜬다. "들었죠? 긴장해요, 앞으로 내 기록을 깨기 어려워질 거라고요."

"사실 그렇게 부럽진 않은데."

"부럽다고 말해야죠! 그리고 건강도 문제될 일 없는 게, 파타스페라에도 카노푸스는 있어요."

"아, 그 애가 유능하긴 하죠."

"그 애? 카노푸스가 언제 '그 애'가 됐습니까?"

"왜요, 호출 키워드로 애칭도 등록돼 있단 말입니다."

"난 이름으로 부르게 되던데. 그 편이 웃기잖아요."

"오이디푸스? 팀장님이 지으신 이름을 이렇게 놀리깁니까."

"오이디푸스가 어때서……." 파타스페라와 다를 바 없이 이어지는 파일럿들의 대화를 뒤로 한 채 바실리 즈다노프가 눈을 가늘게 뜨고 표시등의 색을 좇는다. 전자 시계의 점들이 세 번 깜박인다. 황색등을 지나, 화면은 곧 짤막하고 경쾌한 신호음과 함께 녹색을 띤다.

창밖을 내다보던 리하오란이 한 손을 내밀어 보인다. "먼저 내리셔야죠. 오셨을 것 같은데."

기다렸다는 듯 파일럿들이 몸을 일으킨다. 함내의 마지막 조명이 꺼지고, 탑승 인원들이 제 몫의 짐들을 손에 쥔다. 미련 없이 몸을 일으키는 동작을 따라 금속으로 된 인식표 따위가 잘각이는 소리를 낸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며 바실리 즈다노프가 달갑게 크지 않은 가방을 든다. 

"와 있네요. 내립시다, 알 시라." CS 이시스의 문이 부드럽고 조용하게 열린다. 

알 시라의 선착장에는 언제나 기분 좋은 서늘함이 가득하다. 밝은 백색의 조명이 어두운 색의 제복을 창백하게 탈색한다. "휴스턴, 여기는 콜로니. CS 발디스는 착륙했습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대원 몇이 장난스럽게 손을 들고, 유리벽 뒤에서 류드밀라 류보프는 아래에서 보일 만큼 고개를 까딱여 보이는 것으로 화답한다. "류보프!" "우리 얼굴이 보기 싫어서 하선 신호를 늦게 준 것 아닙니까?" 그는 간단히 세실 영을 무시한다. "반가운 건 알겠지만, 절차는 밟아야죠. 여기 우리 팀장님만 계시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류드밀라 류보프가 마이크의 버튼을 누른다. 스피커에서 보다 정돈된 음성이 천장이 높은 선착장 안을 울린다. 

―우리 모두를 위하여.

"언제부터 와 있었습니까?"

"30분쯤 전에 도착하셨죠, 아마."

함 옆으로 도열한 군인들이 동시에 입을 열고 손들이 일제히 익숙한 궤도로 눈썹 옆을 건드려 경례한다. 바실리 즈다노프가 손을 한 번 저으면 곧 알 시라의 대열은 쉽게 흩어진다. 사람들 사이의 벌어진 길로 바실리 즈다노프와 파타스페라의 파일럿들이 걸음을 옮긴다. 기다렸던 것처럼, 그리고 선착장의 한켠에서 흰 가운을 입은 의무팀이 각자가 담당하는 파일럿을 찾아 그들 사이로 섞여든다. 계단을 내려온 류드밀라 류보프가 오래지 않아 중령을 찾는다.

"팀장님." 다만 위를 바라보며 바실리 즈다노프는 시선 끝에서 마주치게 될 눈의 색을 짐작한다. 파일을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그가 입을 연다. "필요없는 절차는 전부 미뤄 달라고 하고 싶지만." 유리벽 뒤, 고개를 들면 보이는 위의 자리에 그의 동거인은 여전히 서 있다. 말없는 금빛 눈앞에서 바실리 즈다노프가 옅게 웃는다. "늘 문제는 이 정도가 최소한이라는 점에 있겠죠."

류드밀라 류보프가 다른 패드를 내민다. "최대한 줄였습니다. 안 계시는 동안 이걸 처리해도 되나…… 얼마나 고민했는지 아세요? 아무리 팀장 대리라지만."

"대개 특별한 일이 없잖습니까, 콜로니 내 알 시라에는." 훑어본 내용 아래에 서명이 적힌다. "파견도 말한 경우 외에는 승인하게 되어 있었을 테고."

"그건 그렇지만요. 하필 쌍성의 극대기가 겹쳐서 통신도 못 했고…… 혹시 편지 쓰셨어요?"

바실리 즈다노프가 눈을 깜박인다. "그래도 프로젝트는 예정보다 이르게 시작할 겁니다. 무리 없이."

"전달해 드릴까요?"

"알아서 하겠습니다."

"흠, 하여튼 파일럿들이 보고한다던 내용이 그 내용이군요."

"아마도. 이외에는?"

"급하시네요. 검진에서 이상이 발견되지 않는 한 당장은 없습니다." 이내 류드밀라 류보프는 유쾌하게 덧붙인다. "있다고 해도, 내일도 나오실 테니까요?"

'지겨워…….' 빌헬미나 융의 느긋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바실리 즈다노프가 회색 눈을 살짝 가늘게 한다. 무던하고 창백한 손 아래에서 하나둘 서명된 문서들이 제자리를 찾는다. "이시하라 소령을 찾으면 됩니까?" 무심코 다시 올려다본 분리벽 너머에서 그의 동거인은 어딘가로 자리를 비운 듯 보인다.

그는 문득 간지러운 기시감에 사로잡힌다.

그때 두 살 어린 후배는 그를 그다지 달갑지 않게 여겼던 듯싶다. 이제 와 그는 그 시절의 옆모습이 어떤 생각의 끝에 있었는지를 어렴풋이 짐작하지만, 열다섯 살의 바실리 즈다노프에게 시그마 디아스의 태도는 언제나 난해한 것이었다. 천장이 높은 LPMA의 이능력 측정실에서 그들은 빈번하게 스쳐 지났고 부딪히지 않았다. 그는 이따금 멀리서 닿는 금빛 시선을 느꼈지만, 약간의 의도된 묵인하에 눈이 마주치는 일은 드물었다. 열세 살의 시그마 디아스는 그 낯보다도 어떤 기척과 파편적인 인상들로 익숙했다: 마다린, 검은 머리카락, A, 뜻모를 금빛 눈동자, 전자기력, 기묘한 움직임, 단단한 손, 무른 뺨, 그 특유의 태도. 딱딱한 어투와 어울리지 않는 투덜거림을 바실리 즈다노프가 퍽 즐겁게 여기게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시그마 디아스는 그가 이해한 식과 규율과 조건들 속에서 그와는 완전히 다른 전략을 취하는 것처럼 보였다. 열여덟 살 즈음의 바실리 즈다노프는 아주 일방적인 유대감에 빠져 있었다: 바실리 즈다노프가 졸작 혹은 이름붙이지 못할 건축물인 세계에서 시그마 디아스는 대성당이었다. 

그는 과르네리 델 제수의 활로 현을 긋던 그날의 저녁을, 그 순간의 투명한 음률을, 창백한 낯에 떠오르던 표정들을 기억한다. 바실리 즈다노프의 세계에는 기묘할 만큼 위계가 없다. 그곳에 있는 것들은 모두 돌출되어 있고, 모든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은 역설적으로 모든 것을 사소하게 만든다. 그러니 일순간 밤하늘을 가로질러 사라지는 유성처럼, 시선의 전환은 즉흥적이고 때로 발작적이다―세계가 그에게 우호적인 만큼, 그리고 이해가 어렵지 않은 만큼 바실리 즈다노프는 충동을 가장한 채 방종하게 굴었다. 그 저녁은 특별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훈련을 마친 LPMA의 강당에는 사람이 없었다. 백색 벽에는 창문을 따라 짙푸른 색의 도톰한 커튼이 드리웠고, 그들은 계단의 단차에 맞추어 늘어선 의자들의 맨 앞과 높지 않은 무대에 있었다. 바실리 즈다노프가 연달아 두 곡의 연주를 마쳤을 때 텅 빈 홀 안에는 희미하게 바이올린의 잔음이 감돌았다. 긴장처럼 날카로운 적막 속에서 그는 그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시그마 디아스가 손을 부딪혀 박수를 쳤다. 날 선 귓가를 파동이 지나친다는 착각에 시달리며 바실리 즈다노프는 시그마 디아스의 어린 낯에 시선을 고정했다. 시그마 디아스가 입을 열었다. 빈 공간을 울리고 있는 소리들 사이로 음계 하나가 더 엉켰다. 

'정말 두 곡을 전부 연주해 주시네요.'

고저 없는 낮은 D에, 떨리고, 떠 가는 은빛 거품 같은 파편들. 알 수 없는 기호와 조각이 그리는 배열 사이에서 가장 난해한 것은 그였다. '네가 손해를 본 거야.' 다른 것들에는 무관심하게, 바실리 즈다노프는 시그마 디아스를 의식했다. 그곳에는 드디어 위계가 있었다. 그만이 돌출된 채였다. '연습을 더 했으면 모를까, 처음이거든.' 손가락 끝에 닿는 활을 얕게 긁으며 그는 조금 전 왼손으로 스쳤던 시그마 디아스의 속눈썹과 머리카락의 감촉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잖아, 난 내키지 않는 건 되도록 하지 말자는 주의라고…… 내키는 건 되도록 가능할 때 하자는 주의이기도 하지.'

'해도, 처음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의미를 가지기도 하지 않습니까. 연주는…….'

시그마 디아스가 입을 다물었다. 바이올린에 턱을 괸 채 바실리 즈다노프가 회색 시선을 위로 올렸다. '마음에 들어?'

그가 단어를 고르는 잠깐 동안 바실리 즈다노프는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집요하게 좇았다. 비죽 올라간 눈매가 연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짧게 선명한 금색의 눈이 아래로 내리깔렸다가, 오래지 않아 다시 그의 낯을 마주했다. 바실리 즈다노프는 어렵지 않게 몇 가지를 포착했다. 약간의 만족, 담담한 신중, 희미하게 기분 좋은 기색; 예의 무표정 위로 옅게, 그러나 꺼림없이 떠오르는 표정들을. 정말로 알 수 있을 듯한, 그래서 뜻모를 얼굴로 시그마 디아스가 입술을 뗐다. '선배 같습니다.' 바실리 즈다노프가 웃음을 터트렸다.

"즈다노프 중령." 그리고 기다렸던 호명과 함께 바실리 즈다노프는 깊지 않은 상념에서 끌려나온다. 

"우리 모두를 위하여."

"다녀오셨어요."

"인사하자마자 헤어지겠어……."

자연스럽게 시그마 디아스가 팔을 벌린다. 바실리 즈다노프가 어깨에 걸친 코트 아래로 그의 몸을 끌어안는다. 드러난 팔목 안쪽에 알카이드의 검은 제복이 닿고, 살짝 들린 턱 끝이 진회색의 점프수트를 입은 어깨 위에 얹힌다. 시그마 디아스가 그의 등을 두 번 두드린다. "검진만 마치면 된다고 들었습니다." 가까운 귓가에서 그의 목소리는 S 0189년의 것보다 낮은 감을 띤다. 고른 호흡이 낯을 간질이고, 뺨을 스치는 시그마 디아스의 짧고 검은 머리카락에서 그는 낯선 방식으로 라임, 바질, 만다린의 냄새를 맡는다. 작은 감상 속에서 바실리 즈다노프가 작은 한숨을 내쉰다. "그렇지. 늦지 않게 올게." 빠르지 않게, 단단한 팔이 그를 한 번 힘주어 안았다 놓는다. 

"곧 뵙겠습니다."

바실리 즈다노프가 한 박자 늦게 반 걸음 뒤로 물러선다. 그는 이내 시그마 디아스를 바라본다. 

서른에 접어든 그의 얼굴에는 앳된 감이 없다. 드러난 이마 위로 흐트러진 검은 곱슬머리 아래에서 한쪽 눈을 가린 안대는 어린 시절의 그에게는 없던 것이다. 기억 속의 모습에서 소년이었던 뺨은 지금 온전한 청년의 윤곽을 드러낸 지 오래인 것처럼 보인다. 그대로, 조금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선 채 바실리 즈다노프는 회색 눈을 깜박인다. 한때 모호하다고 여겼던 입가에는 희미한 안도가 묻어 있다. 저 금빛 눈의 온도는 그를 향한 것이다. 흐트러짐 없는 깃 아래의 넥타이는 그가 알고 있는 방식으로 매여 있고, 미온하고 단단한 손에 끼워진 장갑은 지난 생일 그가 직접 고른 물건이다. 아주 사소한 부분들을, 언젠가를, 상상하지 않았던 지난 날들을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시그마 디아스는 바실리 즈다노프가 알고 있는 낯으로 두 걸음 앞에 서 있다. 시그마 디아스가 살짝 고개를 기울인다. 불현듯 그는 견디기 어려운 애정을 느낀다. 말없는 그들의 옆으로 선처럼 움직이는 사람들이 지난다. 함선의 폐쇄를 알리는 신음 같은 신호음, 말소리가 들린다.

입안으로 바실리 즈다노프는 두 개의 단어를 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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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로 서로를 두는 건 어때, 우리.’ 짧은 문장을 발음하며 바실리 즈다노프는 거짓말의 선을 가늠했다. 보호자. 동거인. 그러나 되고 싶은 것은 그런 정형의 관계 따위가 아니다.

21.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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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진신고 할 게 있어."

"다치셨습니까."

핸들 앞에 있던 시그마 디아스가 한 쪽 눈썹을 올려 보인다. 바실리 즈다노프는 의자에 살짝 머리를 기대며 왼쪽을 돌아본다. 귓가에서 소리 없이 긴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떨어진다.

"작은 소리가 잘 안 들리네. 페널티 탓에…… 곧 사라질 증상이긴 하지만."

검은 차량이 자율주행으로 익숙한 길을 달리는 동안 시그마 디아스는 그의 낯 쪽을 보고 있다. "다른 상태는 괜찮으시고요." 바실리 즈다노프는 그의 음성과 입모양이 조금 더 명확해졌음을 모르지 않는다. 가볍게 얼굴에 웃음이 지난다. "아주." 시그마 디아스의 등 뒤에서, 내부가 보이지 않도록 한 번 처리된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콜로니의 풍경을 흘려 보내며 바실리 즈다노프는 손가락 사이의 작은 저장 장치를 건드린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부드럽고 낯익은 정적이 말없이 멀지 않은 차량의 공백을 가득 채운다. 여덟 시를 지난 콜로니의 거리에는 밤을 알리는 조명들이 켜져 있다. 뜻없이 등을 기댄 채 바깥을 바라보다가 바실리 즈다노프는 도로 옆을 지나는 노선 위의 열차를 발견한다. 옅은 외피 위에서 람파스행을 알리는 기호가 한 번 반짝인다.

"한 달쯤 집을 비운 것도 오랜만인 것 같다."

"처음이신 것 아닙니까. 196년 이후로는."

"그래, 7년만이지……" 신호등이 녹색으로 변하고, 거리의 이름을 알리는 표지판에 희미한 청록색 불빛이 어린다. 바실리 즈다노프가 문득 입을 연다. "그 집도 7년째인가?"

"이번 12월이면 만 7년이 될 겁니다."

바실리 즈다노프의 손가락이 장치 표면의 매끄러운 면에서 멎는다. 자율주행 시스템이 약하게 속도를 줄이고 우회전을 감지한다. 이내 차량이 올림프, 아우더에이설 모듈의 이사르 거리에 들어선다. 7년 전의 언젠가와 다르지 않은 감상 속에서 그는 시그마 디아스의 동작을,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그 길의 모든 것들을 가늠한다. 

"그때는 너와 이렇게 오래 살게 될 줄 몰랐다. 동선…… 그런 핑계를 댄 동거였으니까."

이사르 거리 188번지는 예정에 없던 곳이다. 그의 가족이 있는 뉴센트럴과는 다른 분위기의 집들을 지나며 바실리 즈다노프는 그동안 그가 거쳐 온 방들을 떠올린다. 여전히 뉴센트럴의 집에는 바샤 즈다노프가 어릴 적 지냈던 방이 남아 있지만, 그는 더이상 그 방에서 잠들지 않는다. 빌헬미나 융이 지나쳤던 집들에서 그의 방은 때로 방문객의 자리가 되었다. 지금 일레-이페에 있는 이나 융의 집에는 특별히 남아 있는 그의 것이 없다. 성 마리아 성당 옆에 위치한 고등학교의 기숙사와 람파스 프라임 사관학교 숙소 동 410호의 빈 공간이, 네베사 대학의 특실이 그렇듯이.

194년 외우주의 행성을 확인하고, 섹터정착안보연맹이 군 장교들을 위해 마련한 숙소로 단출한 짐을 옮긴 후로도 그는 콜로니의 어떤 곳에도 길게 머물지 않았다. 최소한의 회복 기간이 지나면 그는 약속한 것처럼 다시 바깥으로 향했다. 의무와 임무가 없을 때면 그는 파타스페라에 머물렀고, 그의 일상에는 하나가 아닌 두 개의 태양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아날로그 시계의 초침으로 시간을 가늠했다. 60초, 60분, 24시간과 7일을 초침이 604,800번 움직이는 동안 밤낮이 없는 검은 우주를 바라보며 그는 별들 사이의 거리를 재곤 했다. 그곳은 아주 조용하고, 고요했고……

"그때 루실린 일이 끝나고, 평소보다 조금 길게 파타스페라에 다녀온 이후로 한동안 파견 임무가 잦았잖아." 바실리 즈다노프가 잿빛 눈을 느리게 깜박인다. 그때 아직 확인되지 못한 별들의 동떨어진 지도로부터 콜로니로 그를 돌아오게 하는 것은 늘 명령과, 작은 약속이었다. 금요일이면 시그마 디아스는 파타스페라로 짧지 않은 연락을 보냈고, SASHA의 주의가 외우주 탐사로부터 멀어짐에 따라 바실리 즈다노프가 산업사령부와 방위사령부 근처를 오가게 되었을 때도 그는 이따금 그와 대련을, 혹은 저녁식사를 같이했다.

훈련; 제어기기를 끄고 절제 없이 감각을 끌어올릴 때의 날카롭고 달콤한 고양감, 들쑤셔진 살갗으로 느껴지는 해방감. '내가 너를 이겼으면 좋겠어?' 시그마 디아스는 그의 손에 낯을 둔 채 웃었다. 다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기분 좋은 욱신거림과, 기묘한 감상과, 다시 여상한 온도를 되찾은 뺨 뒤에서 아직 울렁이는 충동을 내리누르며 그들은 번화가가 아닌 거리의 식당으로 향했었다. 마주 앉은 그들의 앞에 식기와 물잔이 놓였다. 은색의 금속으로 된 주전자가 기울어지고, 좁은 주둥이에서 물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숙소로 돌아가십니까?' 창백한 손끝에 차가운 유리잔이 닿았다. 

'그렇겠지.' 오래지 않아 투명한 잔의 표면에 작은 물방울들이 어리기 시작했다. 무심코 바실리 즈다노프는 그가 돌아가야 할 문 안의 풍경을 그렸다. 파리한 생각의 실내에서 창백하고 밝은 불빛이 방 안의 물건들을 비추었다. 람파스의 모든 장교용 숙소는 같은 모양이었고, 몇 주에서 몇 달여의 임무가 반복되면 방은 사용의 흔적 없이 깨끗하게 남아 있기 마련이었다. 바실리 즈다노프는 그곳에 남겨둘 물건을 찾지 못했다. 제이 언더우드가 선물한 화분과 몇 권의 책은 모두 알 시라의 함 안에 있었다. 가방 한 개 분량의 옷과 물건을 제하면 그 방의 모든 것은 특정하지 않은 한 사람을 위함이었다. 탐사가 길어지고, 부재가 익숙해지고, 어느날 그가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403번 숙소에는 특별한 것이 남지 않을 것이었다. 그 순간에도 그 방 안에는 과르네리 델 제수의 케이스만이 조금만 몸을 숙이면 닿을 만한 자리에 놓여 있을 것이다. 침묵, 완전한 침묵.

'너도 람파스로 주소를 옮겼다고 했던가?' 

아직 식지 않은 수프에서 따뜻한 김이 올랐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는 희미하게 습한 후각성의 환각을 느꼈다. 목 안을 건조하게 하는 작고 날카로운 통증이 지나고 나면 얼얼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가벼운 둔통만이 남을 것이다. 백색의 테이블보에 시선을 둔 채 바실리 즈다노프가 무방비한 잿빛 눈을 천천히 감고 떴다.

'알카이드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배정받았습니다.'

'F?'

'네.'

'가깝네. 오늘이 지나면 언제쯤 한가해?'

'돌발상황이 발생하지만 않는다면, 보통……' 이내 시그마 디아스가 일정을 읊는다. 약간 고개를 기울인 채 그가 바실리 즈다노프를 바라본다. '다시 대련해 주시려고요.'

바실리 즈다노프가 옅게 입꼬리를 당긴다. '시간을 내 달라고 할 생각이었지. 시간이 늦어지면…… 식사는 어떻게든 해 볼게.'

'요리도 하십니까.'

'물론이지. 파타스페라에서 개발한 건조 식품 레시피가 몇 권 분량은 될걸.'

둔하게, 그리고 아주 갑작스럽게, 바실리 즈다노프는 그가 시그마 디아스와 함께 문을 여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물잔을 쥐려던 손이 멎었다.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는 무의식적으로 얕고 짧은 숨을 들이켰다. 그러나 상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바실리 즈다노프는 그 문을 연 뒤를, 그 공간의 생김을 그릴 수 없었다. 경험하지 않은 것에 관한 가정은 언제나 조금 모호하고 추상적인 선에 그치기 마련이었다.

'같이 지낼래?' 언젠가 그 말을 입밖으로 낼 때 그는 오직 그 제안의 답이 될 수 있는 가능성들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거절, 승낙, 어떤 이유로든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들.

"……이런 식으로 선착장이 아닌 알 시라 본부에 머물게 되면 동선이 꽤 겹칠 것 같아서. 저번에도 마주쳤었잖아, 파견에서. 참 궁색한 핑계였지." 가로등 불빛 아래로 익숙한 형상이 보인다. 차량이 멈추고, 번호를 인식한 시스템이 차고의 문을 연다. 자연스럽게 턱을 괸 채 그 장면을 바라보며 바실리 즈다노프가 살짝 낯을 들어올린다. "처음 떠올린 건 그날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내 외로움에 너를 이용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금 더 오래 생각해 봤어."

몇 개의 텍스트 파일이 저장된 플라스틱 카드가 차량의 컵 홀더로 떨어져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바실리 즈다노프가 핸들 위에 놓인 시그마 디아스의 손을 당긴다. 차체가 부드럽게 차고 안으로 들어선다. 장갑에 덮이지 않은 손바닥의 우묵한 부분으로 손끝이 틈입한다. 번지듯 차 안에 그늘이 내리깔린다. 

"이상하지. 그런데 여전히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장갑 안에서 따뜻하고 건조한 손가락이 미온한 손바닥을 긁는다. 옅은 숨소리가 들린다.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회색과 금빛의 시선이 맞닿고, 시그마 디아스가 바실리 즈다노프의 뒷목을 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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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의 순간은 언제나 조금 막막하고, 깨달음은 그 자리에 약한 얼얼함을 남긴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잠든 시그마 디아스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두 손에 낯을 기댄다.

21.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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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실리 즈다노프가 등 뒤로 문을 닫는다. 현관 옆의 벽으로 시그마 디아스의 등이 밀린다. 입술이 입가를 지나 단단한 턱선을 더듬듯 스친다. 시그마 디아스가 손을 올린다. 가죽 장갑의 질감이 귓가에 닿을 때 바실리 즈다노프는 느리게 눈을 감는다. 벌어진 채로 입술이 닿는다. 성급하게 젖은 혀들이 얽히고 입 안에서 열 오른 호흡이 오간다. "보고싶었어." 고개를 기울이고 숨을 들이켜며 그는 감은 눈꺼풀 너머에 닿아 있는 금빛 시선을 느낀다. "눈은 감고 계시면서요." 얕게 전율이 뒷목을 긁어 올린다. 바실리 즈다노프가 차가운 벽을 짚은 채 무심코 품 안의 몸을 조금 더 밀어붙인다.

불을 켜지 않은 거실에는 간지럽고 약한 긴장이 그늘처럼 내려앉아 있다. 검은 머리카락과 옷깃 사이의 살갗에서 바실리 즈다노프는 그의 것과 다르지 않은 희미한 바스오일의 냄새를 맡는다. 고개를 기울이고 깊이 파고들며 바실리 즈다노프는 첫 번째 키스를 생각한다. 시그마 디아스가 옷깃으로 손을 올려 어깨를 당길 때 바실리 즈다노프는 회색 눈을 조금 크게 뜨고 있었다. 다문 입 위로 건조하지 않게 미온한 입술이 닿았고, 숨을 들이켜며 바실리 즈다노프가 고개를 숙였다. 짧은 몇 초간 그는 스칠 수 있을 듯 가까워진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이내 더디게, 지금에 비해 지나칠 만큼 조심스럽게 혀끝이 이미 살짝 벌어져 있는 입술 사이를 건드렸다. 어설프게 늘어뜨렸던 손이 옷에 덮인 허리 위로 올랐다. 입안에는 그 방에 들어서기 전 그가 내린 커피의 쌉쌀한 맛이 약하게 남아 있었다. 

건조하고 온도 높은 손 아래에서 시그마 디아스의 등이 약간 떨린다. 내뱉는 숨에 희미하게 목소리가 섞인다. 눈을 감지 않은 채 바실리 즈다노프는 얕게 몸 안을 간질이기 시작하는 열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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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바실리 즈다노프는 그의 뒷목에 새겨진 검은 다이아몬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그마 디아스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과 목덜미가 이어지는 부분을 쓸어올렸다. 바실리 즈다노프가 짧게 웃었다. 검은 마름모 옆에 있던 손끝이 면의 안에 닿았다. 목 뒤의 피부는 다른 곳보다 조금 높은 온도를 띠었고, 손끝에 닿는 문양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바실리 즈다노프는 문득 그가 희미한 욕망을 느끼고 있음을 깨달았다. 시그마 디아스의 뒷목을 어루만지던 손이 뜻없이 멎었다. 부드럽게 목께를 스친 두 손이 턱선을 건드리고 그의 뺨을 뒤에서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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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일 위로 쏟아지던 물소리가 멎는다. 샤워가 끝난지 오래지 않은 순간 특유의 습기와 비누 냄새가 방안에 어린다. 깨끗한 이불을 당겨 펴며 바실리 즈다노프가 옆자리에 베개를 놓는다. 시그마 디아스가 그 자리의 이불 안으로 들어가 앉는다. 천들이 사각이는 소리가 들린다. 벗은 등에 침대 헤드가 서늘하게 닿고, 아직 물기가 다 마르지 않은 어깨가 다른 살갗에 눌린다. 침대 안으로 조금 더 깊숙이 파고들며 바실리 즈다노프가 시그마 디아스의 어깨에 기댄다. 이내 그는 침대 옆의 협탁에서 작은 카드가 꽂힌 단말을 집어든다.

"읽을래, 아니면 내가 읽을까?"

손가락 사이에서 화면에 빛이 들어온다. 글자들을 바라보다가 시그마 디아스는 바실리 즈다노프의 머리카락으로 손을 옮긴다. "후자요." 나른하고 익숙하게 바실리 즈다노프가 눈을 감고 뜬다. "아니길 바랐는데.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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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파타스페라에 안전히 도착했어. 통신 시스템은 거의 마비 상태고, 지자기 변동도 대처할 방법이 제한적인 탓에 장비는 최소한으로 가동 중이다. 덕분에 이 편지는 보낼 일이 없게 됐어. 적을 만한 내용을 거를 필요도 없고.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이런 내용을 쓸 수 있었다면 그나마 내용 있는 편지를 보낼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되면 보고서와 다를 바 없나?

……2일. 이곳 사람들은 상상을 참 좋아한다는 생각을 한다. 정기적인 일정이나 탐색 외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는 이 기지의 탓인지, 그런 사람들이 선발돼서 알 시라에 오는 탓인지 선후 관계를 명확히 하기는 어렵지만. 영은 우주 그 자체의 탓이라고도 하는데, 과연 우주가 사람을 감성적으로 만드는지는 조금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다. 알 시라 본부 상황실도 비슷하거든.

어느 쪽이든……

오늘의 주제는 J-03 행성 위성의 그림자가 무엇을 닮았는지에 대한 토론이었는데, 다들 개인 시간에 동물 다큐멘터리만 재생했던 모양이다. 행성 표면 그림자가 아르마딜로를 닮았다는 발언은 정말 처음 들어 봐. 지구 시대의 사람들은 알았을까? 화성 궤도의 후손들이 외우주에서까지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으리라는 걸?

……7일째. 평소보다 조금 분주했다…… 아마 전체 정비를 하던 날이었던 것 같아…… '아날로그’ 식으로 일하는 것도, 중력조정장치 없이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내 일이니까. 사실 그래서 왔지만.

네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여러 가지로. 사담이지만, 과연 파타스페라에 신속대응팀을 신설할 날이 올까. 난 조금 회의적이야.

……8일.

버릇일까? 이 시간이면 편지를 써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건 네게 보여줄 일도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했었지. 지금 읽고 있지만.

……10일. 솔직히 말하자면 내 일을 늘어놓는 데는 여전히 관심이 없다. 별들뿐인데, 무슨 재미가 있겠어? 네가 알다시피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면 모를까, 말이 아닌 글로 무언가를 이렇게 나열한다는 일이 영 어색하게 느껴진다. 소냐는 내가 말하는 만큼만 글로 옮길 줄 알았다면 이나가 내 손에 바이올린이 아니라 펜을 쥐여 주셨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엄연히 말과 글은 다르니까. 그리고 음성 인식 기능은, 글쎄. 혼잣말 같은 느낌이다. 사실 영상도 비슷해. 말투 따위가 덜 딱딱하게 들릴 뿐, 파일럿 훈련 과정에서 배우는 일지 작성이나 기록용의 영상 녹화가 아닌 이상에야.

이런 잡념 때문에 정작 실제로 적는 분량은 줄어들기 마련이라, 언제나 즐거운 건 네가 보내준 것들을 읽는 일이었지……

……14일. 이제 네게 전할 법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전부 떨어졌어.

……17일. 정거장에서 경주를 했다. 본래는 참여할 생각이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특별히 참여하지 않는 이유가 있냐고 묻는다면…… 오만하게 들릴 수는 있겠지만, 질 자신이 없어서라고 해 두자. 하지만 생각해 봐…… 이론적으로는 몰라도 체감할 수 있는 단위에서 나보다 중력이라는 걸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이변은 없었고, 2차전으로는 당구를 했어. 보통은 캐롬이나 스누커를 하는데 오늘은 포켓이었다. 어떻게 됐을 것 같아?

……18일. 난 일주일 간 식사당번에서 배제됐어. 덕분에 더 한가해졌네.

……21일. A를 둘 이상 배치해야 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는 어렵겠지만, 너와 한 번쯤 같은 임무를 하고 싶어. 너와 나 말고는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가장 좋을 것 같다. 단순한 휴가도 좋지만…… 적당히 주의를 분산할 만한 임무를 가진 채로. 호흡을 맞추고……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그런 일들……"


낮고 느리게 이어지던 말소리가 멎는다. 아주 조금 고개를 틀어 바실리 즈다노프는 그의 쪽을 바라보는 시그마 디아스의 얼굴을 본다. 여전히 노곤하게 기댄 채 그가 다시 입을 연다. "……22일. 귀환 일정이 가깝다.


다들 돌아갈 짐을 추리고 있다. 로페즈는 거의 2년만에 콜로니로 돌아간다고 해. 몇 년 전만 해도 여기 물건을 두고 다녔었던 것 같다. 실험이나, 탐색이나, 대부분의 임무를 여기서 했었으니까.

중력이 그렇듯이 워프는 본질적으로 시공간 압축을 이용한 기술이지…… 전부 언젠가 했던 이야기야. 언젠가는 그 울렁이는 여행의 감각을 콜로니에서의 삶보다 즐겁다고 생각했었고, 몇몇 이유들을 제하면 그다지 돌아가고 싶지 않았었다. 그렇다고 영원히 우주에서 살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겠지만, 방향의 문제는 사소하다고 하긴 어렵지.

집. 다만 물질로 된 공간 말고, 흔적이 남는 장소. 당연히 돌아가야 할 곳으로 여겨지는 어딘가. 막연하고 당연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 그렇게 느끼기까지. 그리고 콜로니에 있는 너를 이제는 후배나 동거인이라는 말과 함께…… 애인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 이곳에 있는 내가 그렇듯이. 얼마나 이상한 말이야, 소유격을 사용하는…… 너를 고작 그런 표현으로 형언하다니. 만족스럽다는 점이 가장 그렇고.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잖아. 그 점에 웃음이 난다. 상상한 적 없었어. 사실 한동안 꽤 생각 없이 살았던 것 같고. 나는 그렇게 계획적인 사람은 못 되는 것 같다. 일어난 일에 쉽게 적응하는 게 내 장점이지. 돌이킬 수 없는 일들. 이런 생각…… 이런 시인이. 


……한때는 생경했고 이제는 황홀해." 뺨에 닿은 손에 바실리 즈다노프가 눈을 감는다.

















▼ 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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