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뉴트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뭔가 소리를 들은 듯한 기분에 그는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뭐였을까. 눈을 깜박이며 그는 몇걸음을 더 디뎠다. 그리고 곧 발견했다. 그의 의식을 끌어당긴 소리의 근원지를. 비상계단으로 이어지는 복도 근처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다. 호기심이 생겨 그는 고개를 조금 더 그 쪽으로 내밀었다. 두 남녀였다. 이쪽에 등을 돌린 금발머리의 여자와 그녀에게 고개를 숙인, 검은머리의 남자. 이쪽의 존재는 눈치채지 못한 듯 잠시 더 젖은 소리가, 뉴트의 신경을 끌어당겼던 소리가 이어졌다. 이렇게 눈에 띄기 쉬운 데서 애정행각을 하고 있는 연인들이 누구인가 궁금해졌지만 이쯤에서 예의를 차려줄까 싶어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둘이 떨어졌다. 남자가 고개를 들었고 뉴트와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가 눈을 한 번 깜박이더니 씨익 웃었다. 여자의 립스틱이 번져 붉어진 입가를 하고. 우습게도 뉴트는 그 순간 사랑에 빠져버렸다.












2.

"뉴트, 무슨 생각해?"



들려온 목소리에 뉴트는 생각에서 벗어났다. 민호가 그의 손을 끌여당겨 장난스레 입술을 꾹꾹 눌렀다. 자신과는 다른 도톰한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진다. 



"너한테 반했던 일?"



손 위로 웃음이 퍼졌다. 그의 손을 쥔 채 키득거리던 민호가 시선을 올렸다.



"그래? 언제인데?"

"글쎄.."



뉴트는 말 끝을 애매하게 흘렸다. 그는 민호에게 잡혀있던 손을 빼내어 민호의 목과 어깨를 따라 느릿하게 따라 내려갔다. 좀 전까지 엉켜서 격하게 뒹굴었던 민호의 몸에는 여기저기 붉은 흔적이 남아있었다. 내일 즈음에는 검붉어지겠지. 맘에 드는데 뭔가 묘하게 부족한 느낌이라 꾹꾹 손톱으로 누르자 민호가 간지럽다며 웃었다.



"뉴트?"

"한 번만."

"아까도 그러더니."



말과는 달리 민호는 뉴트가 미는 대로 순순히 다시 침대로 누웠다. 민호의 입가에 진득하게 키스를 했다. 입술과 혀가 얽히고 짙게 내뱉는 신음. 그가 자극하는 대로 열이 올라 붉어지는 몸까지. 모든 게 만족스러운데 이상하게도 갈증이 났다. 











3.

연말이 되면 으레 파티가 있다. 크리스마스나 신년파티 같은 것들. 뉴트는 그런 행사에는 그닥 관심이 없어 매년 이리저리 핑계를 대고 빠지거나 적당히 자리를 지키다가 일찍 빠져나오곤 했지만 올해는 좀 달랐다.


문제의 검은 머리 남자-민호가 파티에 참석한다는 것을 여사원들의 수다를 통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민호때문이라 생각하기에는 스스로도 자존심이 상해 뉴트는 굳이 핑계를 다른 것들에게서 찾았다. 이를테면 집요하게 참석 여부를 확인하는 제 상사라던지, 빠지면 눈에 띌 수 밖에 없어진 제 직급이라던지 하는 것들을.



뉴트는 샴페인잔을 손에 쥔 채 파티장을 시선으로 훑었다. 빠르게 움직이던 눈동자는 검은 머리가 나타나면 잠깐 멈췄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시선이 익숙한 금발과 그 옆의 검은 머리를 발견하고 멈췄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다른 사람일 거라 생각하면서 시선을 돌리려는 순간 검은 머리쪽이, 남자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곁에 있는 여자에게 뭔가 웃으면서 속삭이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뉴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목이 타 그는 샴페인을 기울였다.


임자 있는 남자-아마도 스트레잇-을 놓고 내가 뭐하는 짓이지. 멍청한 짓이라 생각하지만 시선이 쫓아가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4.


주말의 아침은 늦게 시작한다. 가능한한 늦게까지 침대에 달라붙어있던 뉴트는 먼저 일어난 민호가 샤워까지 끝내고 그의 등을 내려치고 나서야 겨우 일어났다. 일어나면서도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는 뉴트에 민호가 피식 웃었다.



"밤새 시달린 건 난데 왜 게으름은 니가 피우냐."

"체력좋은 너 괴롭히느라 힘들어서."

"얼씨구."



하여간 말은 한마디도 안 져요.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정겨워 그는 눈을 다시 감았다. 또다시 얕은 잠에 빠지려는 찰나 뜨거운 체온이 그의 입술을 꾸욱 눌렀다. 깨우는 방법을 바꾼 건가 싶어 신이 나 응한 것도 잠시, 아예 코를 막아버리고 키스하는 통에 숨이 딸려 뉴트는 결국 민호의 어깨를 두들겼다.



"-복, 항복!!"



헥헥거리면서 숨을 내쉬며 항복을 선언하자 민호는 또 기분좋은 표정으로 웃었다. 



"일어날 거지?"

"...한 번 더 해주면?"



대답대신 민호가 뉴트의 코를 세게 쥐었다. 












5.

나 오늘 여기 왜 왔지.


뉴트는 짜증스레 페이퍼타올을 더 뽑아서 와이셔츠를 꾹꾹 눌렀다. 딴 데 정신을 팔아서일까. 자기에게 다가오는 여자를 미처 피하지 못했고 덕분에 그녀가 들고 있던 와인과 제 손에 들려있던 샴페인까지 한꺼번에 셔츠 위로 쏟아버렸다. 샴페인은 그렇다쳐도 레드와인이라니. 물로 적셔 닦아봤지만 지워질 거 같아 보이진 않았다. 버리는 수 밖에 없나. 마음에 든 셔츠였는데. 안 그래도 썰렁한 화장실에 셔츠까지 물로 적셨더니 한기가 들었다. 추위에 소름이 돋는 팔을 다른 편 손으로 쓸면서 다시 한 번 페이퍼타올을 꺼내려 손을 뻗는데 좀전에 뽑아낸 게 마지막이었던지 아무 것도 잡히지 않았다.




"Shit!!"

"이거라도 쓸래요?"



갑작스레 들린 목소리에 뉴트는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민호가 제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얼결에 손수건을 받자 민호는 시선을 뉴트의 셔츠쪽으로 옮겼다. 그가 안됐다는 표정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이런, 셔츠가 완전 엉망이 되었네요."

"아, 네..그렇네요. 고맙습니다."



아까까지 추웠던 건 거짓말이었는지 한순간에 한기가 가셨다. 손수건으로 닦고 있는 사이 민호는 뉴트의 셔츠와 그 위에 남은 얼룩으로 시선을 옮겨나갔다. 갑자기 숨이 막히는 기분에 뉴트는 넥타이로 손가락을 밀어넣어 느슨하게 풀어내렸다.

넥타이가 풀어져내리는 매끄러운 소리가 실내에 퍼졌다. 그 사이에 제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가려졌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풀어낸 넥타이를 손에 돌돌 감다가 눈을 들자 저를 빤히 올려보고 있던 민호와 눈이 마주쳤다. 그날 밤, 우연히 마주쳤던 순간이 떠올라 뉴트는 또 다시 눈을 깜박였다. 민호의 눈이 또다시 빙그레 곡선을 그렸다.













6. 


"그래서 반했던 게 언제야?"



불쑥 민호가 물어왔다. 뉴트는 수프를 뜨던 숟가락을 멈추고 눈을 깜박거렸다. 어제 밤에 했던 이야길 아직도 기억하고 있단 말야? 눈이 그렇게 말하는 걸 느꼈는지 민호의 손이 뉴트의 코를 툭 쳤다.



"글쎄...."



또다시 뉴트는 말을 흐렸다. 민호의 입술로 시선을 옮겼다. 맘에 안 드는 건 아닌데, 항상 뭔가 아쉬운 기분.
"잘 모르겠어."



민호가 헛웃음을 흘렸다. 식탁 위로 상체를 기대며 민호가 물었다.



"어제 했던 말은 뭐야, 그럼?"

"그게...."



뉴트는 눈만 데굴데굴 좌우로 움직였다.



"때는 기억이 나는데."

"그런데?"

"정확한 계기가 뭐였는지 잘 모르겠어." 



그게 뭐야. 민호가 어이없다는 핀잔을 흘렸다. 












7.

얼결에 빌리게 된 손수건을 어떻게 돌려줘야 부담스럽지 않지만 호감을 끌어낼 수 있을까. 검색엔진에 온갖 그럴듯한 단어 조합을 해서 나오는 썸탈 때의 팁이라는 것들을 보며 이리저리 고민해봤지만 어떤 것도 썩 맘에 들지 않았다. 결국 뉴트는 손수건을 깨끗하게 빨고 좀 망설이다가 그가 쓰던 향수를 아주 약하게 뿌리고 역시 조금 더 많이 망설인 끝에 일하면서 먹을 수 있을 법한 과자 몇 개를 샀다.조금이라도 대화할 시간을 더 낼 수 있게 퇴근할 즈음에 맞춰 민호의 사내메신저가 꺼지기만을 바라보고 있던 뉴트는 민호의 메신저가 꺼지기 무섭게 컴퓨터를 끄고 퇴근 인사를 남기고 회사의 정문을 향했다. 우연히 마주친 척 돌려주며 뭐라도 이야기를 더 할 생각이었던 뉴트는,



-짝!!



한 연애의 종막의 증인이 되어버렸다. 새빨개진 뺨을 잡고 서 있는 민호를 보며 안쓰러움보다 기쁨이 먼저 느껴졌지만 뉴트는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그 연애의 종말에 대체 그가 기여한 게 뭐가 있단 말인가. 우연인듯 어색하게 인사하며 손수건을 건네는 손 끝이 안 떨리기만을 바랬을 뿐이었다.그렇게 그날, 민호의 연애가 끝났고 뉴트는 희망을 얻었다.














8.

뉴트는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인사치고 너무 과하게 하는 거 아니야? 가벼운, 존경과 친애의 뜻이 담긴 비쥬였지만 뉴트의 눈에는 곱게 비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긴 했다. 상대가 민호의 전 여친이었으니까.


저 여자는 그렇게 깨어지고 난 전 애인과 비쥬따윌 할 생각이 든단 말야? 펍에서 우연히 만나 반갑게 인사를 비쥬로 한다. 애초에 전 애인과 반가운 인사라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게 비쥬라는 건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인사도 하지 말라기엔 업무 관계로 얽혀있으니 그럴 수 없지만 말로 하면 충분하지 뭘...




"뉴트, 인상 풀어."




돌아본 민호가 뉴트의 뺨을 가볍게 손등으로 치며 말했다. 어느새 문제의 그 여자는 제 자리로 돌아갔고 제 앞에는 민호만이 남아있었다.




"질투하지마."

"내가 언제."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다 보이거든."




웃으면서 잔을 건네는 민호의 볼에 작게 붉은 빛이 묻어있었다. 비쥬하던 와중에 살짝 부딪히더니 묻은 모양이었다.




"저 여잔 왜 남의 애인에게 립스틱을 묻히고 지랄이야. 칠칠맞게."

"뉴트."




부르는 톤이 한층 낮아졌다. 뉴트는 입을 다물고 대신 손을 뻗어 민호의 볼에 묻어있던 립스틱을 문질렀다. 원래 립스틱이란 게 그런 건지 깔끔하게 지워지는 대신 오히려 색만 옅게 흐리며 민호의 피부 위로 번졌다. 


입가에 묻은, 붉은색. 


뉴트는 눈을 깜박였다. 옅게 손에 묻은 붉은색과 민호의 볼을 번갈아보고 다시 고개를 돌려 사람들 사이로 사라진 여자를 찾았다.




"뉴트?"

"나 너한테 왜 반했는지 기억났어."

"뭐?"




뜬금없는 소리에 민호가 뭐라 더 말을 붙이기 전에 뉴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사람들 사이를 파헤치고 민호의 전 여자친구-헬렌이었나 셀리나였나-를 찾아갔다. 갑작스레 자기에게 다가 온 뉴트를 여자는 약간 놀란 표정으로 올려봤다.




"저기, 미안한데 립스틱 좀 잠깐 빌릴 수 있을까요?"

"네?"

"걱정말아요 입술에 직접 대진 않을 거니까."




여자는 황당한 표정을 보다가 상황이 웃겼는지 픽 웃고서 핸드백에서 립스틱을 꺼냈다. 뉴트에게 건네며 그녀가 말했다.




"여기있지만, 뭘 하려고요?"

"조금만 바르게요."




말하고 뉴트는 립스틱 뚜껑을 열어 손가락에 묻혀 제 입술에 치덕치덕 발랐다. 여자는 점점 더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봤다. 거울을 보지 않아 알 수 없었지만 촉감으로 대충 발라졌다 싶자 뉴트는 립스틱을 돌려 바닥의 상표명을 확인하고 그녀에게 돌려줬다.




"고마워요. 다음에 볼 때 새 걸 하나 선물할게요."

"천만에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농담을 덧붙였다. 그런 보상이라면 아예 줄 수도 있겠는 걸요. 뉴트는 웃고 자리로 돌아갔다. 여자보다 더 황당한 얼굴로 자신이 하는 짓을 보고 있던 민호가 입을 떡벌린 채 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 너 뭐.."




민호의 뒷말을 채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뉴트가 다짜고짜 잡아당겨 키스했기 때문이었다. 만족할만큼 입술을 문지른 뉴트가 고개를 떼자 민호의 입술 주변에 얼룩덜룩하니 붉은 자국이 짙게 남았다. 뉴트는 씨익 웃었다.




"립스틱 묻은 네 입술이 섹시했거든."




황당한 얼굴로 보던 민호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뉴트는 천연덕스레 말을 이었다.




"변태같다고 싫어할 거야?"

"아니."




대답이 당연히 No 일 거라 생각하고 던진 질문에 민호가 웃으면서 답했다. 그렇지만 이어지는 대답은 뉴트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난 네 넥타이 푸르는 손가락에 반했는 걸."




민호의 손가락이 뉴트의 넥타이를 끌어당겼다. 또다시 맞붙은 입술 사이로 웃음이 흘러내렸다.












9.

뉴트는 다음 날 유명한 화장품 브랜드 매장에 들렸다. 그리고 똑같은 번호의 립스틱을 두 개 샀다. 포장은 하나만 했다.



 

이실isil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