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조식을 먹으러 호텔 라운지로 내려왔다. 아침부터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수해는 잠에서 깨는 걸 힘들어하곤 했다. 아직도 졸음이 가득한 기색으로 스크램블드에그와 베이크드 빈을 포크로 떠서 입에 넣는다. 매번 반쯤 졸고 있는 수해를 앞에 두고 하는 생각이지만, 저렇게 먹으면 무슨 맛인지는 아는 건가 싶다.

   종업원이 다가와 홍차를 더 마시겠냐고 묻는다. 따뜻한 차로 잔이 채워지자 정운은 테이블에 놓인 크림으로 손을 뻗었다. 우유도 아니고, 크림도 아닌 그 중간 쯤의 느낌을 가진 액체를 여기는 크림이라 부른다. 차에 따르고 섞자 갈색 홍차가 부드러운 빛깔로 변한다.

   "여긴 홍차에 크림을 넣어 먹는 문화가 참 좋아요."

   수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서 마시는 홍차처럼 떫은 느낌도 없고. 개인적인 기호에 따라 간을 딱 맞추면 자기도 모르게 자꾸 홀짝이게 된다.

   알맞게 구워진 스콘을 반으로 갈라 잼과 클로티드 크림을 얹어 수해 앞에 놓아준다. 자기 몫의 스콘에 잼을 바르며 정운이 말했다.

   "이렇게 평소에 안 해본 방식으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한국에 가서도 이렇게 지내볼까."

   조금 뻑뻑하다 싶을 정도로 되직한 클로티드 크림을 한껏 퍼서 얹는다. 그러고 보니 이 클로티드 크림을 한국에서도 파나? 어디서 살 수 있지. 수해가 스콘을 한 입 베어먹고는 꿈꾸는 듯한 표정을 한다. 정말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차마 숨길 새도 없이 표정이 드러나는 것이 사랑스럽다.

   "음... 맛있다. 한국에 가서도 계속 생각날 것 같아요."

   정운도 스콘을 한 입 먹어본다.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에 부드럽게 퍼진다. 한국에 돌아가면 크림을 어디서 파는지 꼭 찾아봐야지.

   스콘 한 입, 홍차 한 입을 번갈아 가며 맛을 즐기던 수해가 정운에게 물었다.

   "정운 씨는 늘 반복되는 일상에서 안정을 느끼는 줄 알았는데. 가끔 이렇게 벗어나는 게 좋을 때도 있나 봐요?"

   천천히 홍차를 마시며 잠시 생각하다 대답한다.

   "반복되는 루틴이 언제나 정답으로 이끈다면 그건 언제든 환영이죠. 그런데 그 일상이 나를 답이 없는 문제나 고통 속에 묶어놓는다면, 그건 지옥이겠죠."

   자신이 원해서 지옥 속에 사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벗어나고 싶어 할 것이고, 도저히 그럴 수 없다면 정운처럼 잠시나마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수해가 숨을 내쉬며 창밖에 시선을 주었다. 잔뜩 흐린 날씨에 빗방울마저 떨어지는 것 같다. 오늘 해가 개려나 모르겠네.


   수해가 말했던 대로 이튿날은 바닷가 숙소를 잡고 싶다고 해서 기차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다. 기차칸에 자리 잡고 앉은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쿡쿡 웃었다.

   "생각보다 낯설지 않은 기분이네."

   "그렇죠? 가짜 추억이라고 하던가. 직접 경험하지도 않은 일인데, 티비나 영화에서 간접경험으로 보고서는 마치 그런 추억을 실제로 겪은 것 같은 느낌을 받잖아요."

   "아니 그것도 그런데, 묘하게 서울 지하철 같아."

   "하하. 진짜."

   흐린 하늘을 제치고 온통 푸릇한 잔디가 자란 들판이 끊임없이 시야에 스쳐 지나간다. 가끔 이런 곳에 집이 있나 싶을 정도의 민가가 서 있기도 하고, 그런 집들이 점점 모이더니 작은 마을을 이뤘다가 기차가 통과해가면 다시 집의 빈도수가 적어진다. 수해는 기차 창문에 얼굴을 바짝 붙였다. 와, 양이 왜이렇게 많아? 아직 봄의 초입인데도 잿빛 하늘과 초록색 잔디의 대비가 선명하다. 

정운은 e북 리더기를 꺼내 들고, 수해는 여전히 주위와 바깥 풍경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다. 책에 집중하려 애쓰던.    정운이 책 읽는 것을 포기하고 리더기를 내려놓으며 자기는 사실 대중교통 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중얼거렸다. 내가 모르는 곳으로 향하는데, 이렇게 빨리 이동하는 느낌이 불안하다고 했다.

   "직접 차를 운전하는 게 좋아요. 정해진 노선대로 가야 하는 상황이 싫은가 봐요. 중간에 멈추거나 내릴 수도 없고. 실수로 잘못된 차를 타기라도 하면, 혼자 낯선 지역에서 길을 잃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될까 봐 긴장하곤 했어요. 아니면 내가 애타게 기다리는 차가 혹시 오지 않을까 봐 걱정하기도 하고."

   널찍한 창밖으로 보이는 시야는 여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을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휙휙 빠르게 지나간다. 지금처럼 이렇게 가만히 앉아있는 사이에 너무 많은 것들을 놓쳐버리게 되면,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아득하게만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수해 씨랑 같이 있으니까 왠지 조금 길을 잃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어디로 가야 할 지 방향을 잃은 것 뿐이지, 가야 할 곳을 잃어버린 건 아니니까."

   가야할 곳과 가야 하는 방향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디론가로 무작정 길을 떠나 한참 여정에 지쳐버렸을 때, 비로소 가야 할 곳을 깨닫는 경우도 많으니까.

   수해가 정운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난 정운 씨랑 있으면 어디로 가든 상관 없어요. 어디로 가는 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같이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게 더 좋아서. 가기로 한 곳에 도달하지 못하고 중간에 되돌아와도 상관 없어요. 날씨가 얼마나 나쁜 지도 상관 없고."

   "나도."

   영국에 온 이후로 두 사람은 항상 손을 잡았다. 한 사람만으론 버겁고 벅차고 두려운 일들이, 둘이 함께한다는 사실 만으로 훨씬 감당하기 나은 일이 된다. 수해의 손을 꼭 잡아보던 정운이 웃으며 말한다.

   "그래도, 바다 보고 싶다면서요."

   "바다 보고 싶지."

   수해가 웃었다. 이왕이면 보고 싶다는 얘기에요.

   기차역에 내려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바다 냄새 섞인 짠기가 훅 끼쳐온다. 근처에 바다가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는 냄새. 해안가 도시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공기처럼 익숙한 냄새. 강 근처까지 가야 겨우 비릿한 강물 냄새나 맡을 수 있던 곳에서 살아온 수해와 정운은 낯선 도시에 도착했다는 인상을 냄새로 처음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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