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카제가 머리를 기르기 시작한 건 지난겨울의 일이었다. 별 다른 동기는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의 의미가 컸던 것 같다. 귀 바로 밑에서 짧게 잘려있던 머리가 뒷목을 덮는 데까지는 6개월 채 걸리지 않았다. 걸핏 지저분해 보일 수도 있는 머리지만 나름대로 정리까지 끝내면 볼만한 정도는 되었다. 하카제는 어깨까지 오는 머리를 한 손으로 모아 쥐곤 끈으로 묶었다. 이제 좀 더 보기 괜찮을 것이다.

 6월 중순쯤 되어가면서 기온은 높아졌다. 하늘은 맑고 구름은 높았다. 그따위의 것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습하고 더웠으나 머리를 묶은 덕인지 뒷목에 땀띠가 나는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다. 하카제는 옥상에 걸터앉아 매점에서 산 초코우유를 한입 마셨다. 초콜릿 탄지 분유가 밑에 가라앉아 웃길 정도로 밍밍한 단맛이었다. 이래서 흔들어먹으라고 써있는건데. 하카제는 멍하니, 우유곽을 옥상에서 하늘로 던졌다. 난간 너머로 넘어간 우유가 학교의 바닥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재수 없으면 누군가 맞는 거고, 아님 말고. 위험하건 말건. 애초에 막아둔 옥상을 뚫고 올라와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게 더 위험한 짓일지도 모른다. 분명 바닥엔 우유 자국이 남을 테고 선생님들은 범인을 찾을 노력도 안 한채 지나가는 애 하나를 붙잡아다 청소나 시킬 것이다. 이 학교는 그랬다. 다들 열정이 없었다. 그건 하카제 본인도 마찬가지다. 사실 좋게 말한다면 그런 거고 나쁘게 말하자면 그냥 양아치 집단들의 소굴이다. 그리고 그건 하카제 본인도 마찬가지다.
 물론 하카제가 정말 인성 쓰레기의 양아치는 아니다. 누굴 괴롭힌 적은 없다. 돈을 뺏는 일 따위 해보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적어도 떳떳하게는 살았다. 그렇다고 범생이냐 한다면 그렇다 할 수는 없다. 수업에서만 봐도 선생들이 보는 눈빛이 달랐다. 어머, 쟤는 하카제 가문 애라면서 왜 여기 왔대? 왜 이런 날라리 짓을 한대? 머리도 기르잖아? 이따위의 눈빛들을 수도 없이 보았다. 그니까 양아치는 아니어도 선생들이 말하는 날라리란 건 부정할 수 없었다. 둘의 차이가 뭐냐 묻는다면 딱히 뭐라 할 순 없었다. 남한테 피해를 주면서 비행청소년 짓을 하느냐, 아님 지만 손해 보며 비행청소년이 되느냐 그 정도 차이일 것이었다.
 그렇지만 맹세코 하카제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예를 들자면 하카제는 초코우유를 옥상에서 던졌다곤 하지만 조금 뒤 옥상에서 내려갔을 때 우유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근처 아무 대걸레나 가져와서 대충이라도 닦아내긴 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또 착하다고 말할 순 없었다. 하카제는 벌써 3일째 수업을 빠졌다. 곧 아버지한테 소식이 갈 것이다. 노기에 차올라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내며 화를 낼 아버지의 모습이 벌써부터 그려져 하카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카제는 착한 사람이 아녔다. 그냥 그저 그런 사람이었다.

 더럽게 더운 여름 한낮에 그늘 없는 옥상에 올라와 이렇게 궁상떠는 짓이 재밌냐고 묻는다면 그렇다 할 순 없었지만 그래도 다른 것보단 나았다. 바다 근처에 지어진 학교여서인지 옥상에서는 바다 수평선이 넓게 펄쳐져 보였다. 하카제는 목덜미에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그러고 보면 바닷속에 안 들어간지도 꽤 됐다. 이번 여름엔 꼭 들어가자. 이따위의 생각을 하며 하카제는 난간 위에 서서 아래를 슬쩍 보았다. 여전히 초코우유 자국이 남아있었다. 제가 저지른 짓은 제가 책임져야지. 어쩔 수 있나? 하카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론 우유 마시기 전엔 꼭 흔들어 먹어야겠다는 다짐은 덤이었다.
 닫혀있던 옥상 문이 기괴한 철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마침 내려가려던 하카제가 난간에 매달린 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오늘은 담배 안 팔아. 보통 옥상에 올라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거의 다 목적이 같았다. 용돈벌이 겸 제가 조금씩 팔던 담배 한 개비에 맛들려 담배를 피우러 오는 것이었다. 물론 하카제는 담배를 펴본 적 없었다. 피는 이유도 이해가 가질 않았고, 그딴 걸 해볼만큼 철없지도 않았다, 이미 담배를 파는 시점에서 철없는 짓이긴 했다. 뒤쪽의 사람은 별 말 않고는 뒤에서 난간을 붙잡은 하카제의 손을 잡았다. 유난히 하얀 손이 눈에 익었다. 위험하잖아. 하카제는 그제야 뒤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 뭐야, 사쿠마 씨가 웬일이야? 하카제는 순순히 그가 팔목을 잡아당기는 대로 끌려가며 난간에서 내려왔다. 투신자살로 오해받는 일 따위는 해명하기도 귀찮을게 뻔했다. 그렇다고 저 남자한테 걱정받는 일도 딱히 바라지는 않았다. 엮이기 싫은데. 속으로 중얼거리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하카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느릿하게 입을 연다. 오랜만이네 하카제 군. 그는 입꼬리를 비뚜름히 올려 웃었다. 하카제는 마지막으로 그를 본지 벌써 3달이 넘어간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하카제 군 담배도 팔아? 그는 학교 옥상에 유일하게 있는 그늘막에 걸터앉았다. 발랑 까졌네, 하카제 군 주제에. 하카제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댁이 상관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내가 발랑 까진 거랑 사쿠마 씨랑 뭔 상관이야. 사쿠마는 그런 하카제의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으며 낄낄대고 웃었다. 웃기네, 개그맨 해볼래? 그리곤 앉아있던 그늘막에서 내려와 하카제에게 한 걸음씩 다가왔다. 정오의 햇빛이 따가울 정도로 내려 찌고 있었다. 하카제는 자신에 목덜미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다는 걸 느꼈다. 담배, 이 몸한테도 줘 봐. 하카제가 그를 돌아봤다. 그의 피부가 금세 붉게 달아올라있었다. 오늘은 담배 안 판다고 했는데. 그는 그대로 하카제의 허리춤에 손을 찔러 넣어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그럼 이건 뭘까? 하카제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웃기다는 듯이 내는 소리가 귀에 맴돌고 있었다. 젠장, 내가 미쳤지. 하카제가 말하는 걸 듣는 건지 모르는 건지 그는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있는 기름이 거의 다 된 라이터를 주워 들었다. 플라스틱 케이스가 반쯤 깨져있었다. 하카제 군도 빨리 한 개비 물어. 늦장 부리다 걸려도 이몸쨩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카제는 뻔뻔하게 구는 그를 흘겨보다, 곧 주머니에 하나남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담배 처음 펴보는데. 하카제가 중얼거렸다. 오 그래. 의외인데 하카제 군. 원래 그렇게 쫄보이셨나? 좀 더 날라리 아니었어? 매캐한 연기에 하카제가 켁켁 거리며 숨을 내뱉었다. 불만 있어? 하카제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대충 닦아내고 숨을 고르려 했다. 여전히 숨을 쉴 때마다 불편한 감각이 그대로였다. ...저기 말이야? 남들이 담배 피는걸 방관한다고 상대가 담배를 피울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 줄래? 거칠게 대꾸한 하카제는 담배를 대충 지져 끄곤 그대로 바닥에 대충 드러누웠다. 적어도 생각보단 맛없네. 하카제는 그대로 위를 쳐다보았다. 바뀐 시야에서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보는 거야. 그는 말없이 나를 계속해서 쳐다본다. 시선이 맞물린다. 새파란 하늘. 그 앞에 빨간 눈. 두 색이 어지럽게 섞이는 걸 보다, 하카제는 눈을 감았다. 잔 웃음소리가 위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 그가 웃고 있다. 미안, 하카제군. 딱히 비웃으려던 건 아닌데. 하카제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코끝에 희미해졌던 담배냄새가 다시 매캐하게 찌르는 걸 보니 그도 자신의 담뱃대에 불을 붙인 모양이었다. 당신은 담배 자주 피워? 그가 연기를 뱉어냈다. 자주 안 펴, 이몸쨩도. 그냥 가끔 피는 거야.
 -우와, 그거 되게 양아치 같네.
 너무하네~ 하카제 군은. 좀 더 상냥하게 말해보라고? 그는 구태여 변명하진 않았다. 하카제보다도, 이 학교에서 평판이 안 좋은 게 그였다. 그래 뭐, 양아치라면 양아치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카제는 그런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진짜로 양아치는 아니지만. 하카제는 여전히 두 눈을 감고 코 끝을 스치는 담배냄새를 맡았다. 목덜미를 삐져나온 머리카락이 바람에 스치고 있었다. 양아치보다는 미친놈에 가까울지도 모르지. 하카제는 대꾸했다. 그거나 그거나. 대답은 오지 않았다. 하카제가 실눈을 떴다. 그가 몸을 난간에 기댄 채,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쪽 손에 들린 담뱃대 끝이 타들어가 있었다.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어딘가 아픈 병자처럼 보일 정도였다. 저거, 하카제 군이 한 거야? 하카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아직까지도 학교 바닥에 갈색 자국이 적나라하게 나있을 것이었다. 하카제 군도 여간 미친 게 아니네. 누가 맞았으면 어쩌려고? 그는 손끝으로 재를 대충 털어내곤 발로 담배를 비벼 껐다. 그가 하카제를 돌아봤다. 하카제는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웃기게도 참 안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안 더워, 당신? 그가 뒷목을 쓸어내렸다. 아니, 더워. 이몸쨩 죽기 직전. 하카제가 눈을 끔뻑였다. 햇빛이 눈에 비춰 들어왔다. 그래 보여. 하카제가 다시 눈을 감았다.
 하카제 군도 내가 미친 것 같아? 그는 갑자기 그렇게 말했다. 하카제는 그가 자신의 앞까지 걸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감아 보이는 것은 없었지만 인기척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아깐 나도 미쳤다며? 하카제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더 이상 이런 문 답 같은 대화 따위 의미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빨리 저 사람 보내고, 우유 자국이나 닦아내고 싶었다. 물론 그사이 누군가가 닦아준다면 고맙겠지만. 그는 말이 없었다. 그러다,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럼 둘 다 미친놈이니까 모처럼 좀 더 미친 짓을 해도 상관없겠네. 하카제의 입술에 동시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하카제는 한참을 생각해 낸 끝에야, 그게 그의 입술이란 것을 깨달았다. 하카제는 대꾸할 말을 찾으려 했으나 여전히 입술은 막혀있었다. 눈을 뜬다. 붉은 눈이 마주친다. 미친놈. 그렇게 말하려 한 목소리가 막힌 입 안으로 터져 나왔다. 혀를 밀어 넣는다. 그가 제 머리끈을 푸르는 걸 느끼며 하카제는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는 1시간이나 지나있었다. 땀에 젖은 목덜미에 긴 머리카락이 달라붙어있었다. 하카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난간 아래를 쳐다보았다. 우유 자국이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여, 하카제. 담배를 사러 오는 놈들 중 얼굴이 익은 놈이 옥상에 올라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하카제는 난간 아래를 계속해서 유심히 쳐다보다, 그에게 말했다. 밑에 우유 자국 누가 치웠어. 그는 무심하게 하카제를 쳐다보았다. 아, 그거. 아까 사쿠마 그놈이 대충 치우고 가던데. 하여튼 미친놈. 옥상에서 우유를 던지네, 누구 맞으면 어쩌려고. 하카제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바닥의 담뱃재 자국을 한번 발로 차곤, 그에게 말했다. 오늘은 담배 안 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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