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 

 

단 돈일푼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파아란 염원을 껴안고

사랑하는 자녀에게 침대 밑에 숨어있는 

발 없는 이의 정체조차 일러주지 못하고

 

슬프다는 말이 부족해

알지 못할 바엔 차라리

마주치지 않는 편이 낫다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옆집 사람들은 무채색 옷을 입지는 않고 

대신 얼마 후 나타난 그의 영혼과

일말의 죄책감 없이 서글픈 춤을 추며

그의 움직임에 발맞추어 흐르는 눈물을 모았다


아무리 불러도 의미를 깨닫지 못할 

오래된 영어 노래 가사를 매만지며

그의 자식에게 짤막한 혀를 내어보라 해놓고는

그 위에 가만히 숭고한 그 아버지의 유언을 올려놓았다

 

그의 자식은 독처럼 묻어있는 거짓말을 불신하며

그날 밤부터 맨바닥에 이불을 깔았고

침대 밑의 여전한 묵은내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영영 죽지 않을 파아란 주문을 외웠다

 

 


기억에 남지 않는 사람

  

북한산 아랫동네 이층집에는 할머니와 그녀의 여동생이 살았다. 여동생의 남편은 종이를 모았고 병뚜껑을 간직했다. 그것들은 쟁반 위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짙은 나무 계단 위를 올랐다.

나는 그곳을 '평창동'이라고 불렀다. 평창동 2층으로 올라가면 어두운 미닫이문 뒤편으로 아늑하다 못해 비좁은 그의 방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방 안쪽에는 나와 그만이 알고 있을 비밀의 문이 존재했다. 나 혼자만이 남게 될 때 그 문짝을 열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하인들이 저마다의 고충을 찬양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흔히 바라는 큰 날개에 빛나는 몸,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저녁마다 몰래몰래 그들의 대화를 엿듣다가, 누군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려오면 물건을 훔친 도둑마냥 다시 할머니의 방으로 줄행랑 쳤다.

나는 꽤 자주 평창동을 오갔지만 그가 내게 건네는 문장들은 놀랍도록 똑같았고, 그의 방은 늘 어지러웠다. 그도 천사들의 대화를 엿들은 적이 있는 걸까, 아무도 그걸 듣지 못하도록 꽁꽁 막아놓은 것일까. 어딘지 모르게 무서웠던 그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상상을 펼치고 있자면 그는 내게 또 한결같은 목소리로 '왔냐,' 하고서 눈 깜짝할 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마치 중대한 잘못을 저지르는 듯한 기분으로 이방저방을 구경하다 보면 금세 저녁이 되었고, 할머니는 내게 저녁 먹을 시간이니 그를 데려오라고 말했다. 티브이 앞 소파에 길게 누워있던 그는 가만히 서 있던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이내 무거운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했다. 나는 그가 자리에 앉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할머니에게 쪼르르 달려가 그 얇은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일요일이 아닌 날에도 그는 꼬박꼬박 교회에 나갔다. 그가 교회에서 맡은 일에 관해 물은 적이 없어 자세한 것은 몰랐지만 나는 분명 그가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교회에 다녀온다고 해서 돈을 버는 것도, 무엇을 얻어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쩌면 나는 그래서 그를 더욱 멋진 사람으로 판단했을 지도 모른다. 현관문 앞에 서 있던 그의 모습을 떠올린다. 온통 갈색 톤으로 맞춰 입은 옷에 다 닳아가는 검은 구두는 왠지 모를 그리움의 내를 동반한다.

그는 한 명의 딸과 한 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의 아내는 고집이 조금 셌지만 수려한 미모를 가졌으며, 성질이 고약하긴 했지만 그만큼이나 정들어버린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시츄 한 마리를 키웠다. 그 시츄의 이름은 딩요였는데, 딩요가 방과 거실 구석에 오줌을 한바닥 싸놓았을 때도 그는 절대로 성을 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신문지와 세정제를 가져와 누런 흔적들을 닦아낼 뿐이었다.

그렇게 온화한 성격을 지닌 그를 만나지 못한 것도 어느새 4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그 사이에 나는 놀라우리만치 성장하여 어엿한 어른이 되었고, 그는 믿을 수 없이 노하고 쇠약해져 결국엔 병원을 직장처럼 드나드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의사가 그에 대하여 신뢰성 떨어지는 절망을 진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없어 그냥 다시 내뱉고 말았다. 그런 쓸데없는 진실은 굳이 삼켜낼 필요가 없었다.

다음 주에 그를 병문안 하기로 했으나 어떤 이유들로 약속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 부디 저번의 두 번째 이별처럼 내가 너무 늦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어떠한 애정도 유대감도 없는 이가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은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므로, 글로 내뱉고는 한동안 잊어보려 한다. 이번에 평창동에 가면, 나는 다시 천사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을까. 그는 여전히 종이와 병뚜껑으로 천사들의 아지트를 지키고 있을까.

  

 

 

섬여자


하마터면 그 창백한 손목을 타이백으로 착각할 뻔했어 

눈 하나 깜빡않고 흔들리지 않는 모습이

콧대 높은 옆 동네 여사감 같아 역겹고 얄미웠다니까

 

그녀의 집에는 늘 전등이 딱 하나만 켜져 있었어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는 외로운 모습이

마치 변두리를 유영하는 방랑자 같아 마음 한켠이 쓰렸어


어부를 따라 이곳으로 흘러온 소녀는 의지할 곳이 없었어 

육지에 두고 온 모든 것들을 그리워하며 울어대는 모습이

꼭 잃어버린 엄마를 닮은 것 같아 어부는 매일밤 뭍으로 나와 울었다더라


이 이야기는 섬의 아무도 알 수 없었어 

여사감이 왜 이곳을 떠나지 않는지

그의 어부 외에는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니까

 

정적의 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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