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뷔민 / 국뷔] Mad, Sexy, Gun (부제 : 도원결의)


Written by 효우








완전 무장 후 일렬종대를 정렬한 우리 소대 앞에 소대장님과 중대장님이 섰다. 오랜만에 하는 무장이라 무겁고 불편했지만 꾹 참았다. 다들 나와 같은 생각인지 어수선한 공기가 흘렀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만. 소대장.”



“네! 알겠습니다! PT체조 준비! 시작!”




완전 무장의 무게는 가히 20kg를 웃돌았다. 그걸 메고 달고 PT체조를 뛰라니… 그냥 지금 딱 죽고 싶었다. 그걸 하느니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기분. PT체조의 꽃은 마지막 번호는 생략인데 연병장에 처참하게 울려 퍼지는 마지막 번호.




“30!”



“…아….”




마지막 번호가 울려 퍼지자마자 나도 모르게 깊은 탄식이 쏟아졌다. 그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전부 그랬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자괴감에 빠져있을 거라 생각했다. 또 다시 어수선한 분위기가 흘렀고 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헤쳐모여! 연병장 5바퀴 돈다. 실시!”



“… ….”




다들 터져 나오는 탄식을 꾹꾹 눌러 담는 것이 느껴졌다. 나 역시 그랬다. 자꾸만 눌러오는 무게를 감당하느라 이빨을 꽉 깨문 덕분에 턱이 얼얼했다. 새삼 지구의 중력에 대해 생각했다. 이 순간만은 우주에 있는 우주인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결국엔 스스로 최면을 거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우주인이다. 여기는 우주다. 무중력 상태다. 최면을 걸며 꾹 참았더니 어느새 마지막 바퀴였다. 다들 짠 듯이 입술 꽉 다문 채 발소리만 들렸다. 마지막 바퀴가 끝나고 일제히 딱 멈췄다. 드디어 모두들 훈련소의 DNA가 깨어난 것이었다. 중대장님의 흡족한 고개 끄덕임이 보였다.




“뒤로 취침!”




달콤한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잠시 땅에 군장의 무게를 맡겨두고 하늘을 쳐다보며 아까 참았던 땀이 그제야 비 오듯 흘렀다. 나는 특이하게도 뛸 때보다 쉴 때 더 많은 땀이 났다. 옷소매로 연신 땀을 닦았다. 불어오는 한 점의 바람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휴식을 만끽하고 있는데 이번엔 소대장님이 아닌 중대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히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 있는 목소리였다.




“쉬면서 듣는다. 오늘 우리는 애기봉을 오를 예정이다. 지금처럼 정신 바짝 차리고 부상자 없이, 낙오자 없이 무사히 전망대에 오른다. 알겠나?”



“네! 알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애기봉 전망대 행에 우리 모두 당황했지만 티를 낼 수가 없었다. 또 다시 어수선한 분위기가 흘렀다가는 오늘 우리는 애기봉 전망대 행이 아니라 천국행이 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애기봉 전망대는 이병 때 딱 한번 가본 적이 있는데, 그때에는 자대배치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너무 긴장했던 터라 어떤 풍경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한 가지 기억나는 건 그 곳에 가면 바로 북한이 지척으로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중대장이 갑자기 거길 왜 가자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별로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애기봉은 북쪽 하안이라는 도시와 거리가 3km 밖에 되지 않는다고 들었고, 밤에 등탑에 불을 켜면 전력 사정이 나쁜 북측에서는 그 불빛이 약 25km 떨어진 개성 시내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했다. 생각보다 해발고도는 그리 크게 높지 않았지만 아는 사람이 아니면 길을 찾기가 어렵게 되어있었고 갈림길마다 해병에 관한 팻말들이 놓여있었다. 그리 높지 않다고 해도 산은 산이고, 군장은 여전히 무거웠다. 아까 빨리 정신 차렸었다면 그렇게 기합 받지 않았을 텐데 피로가 빠르게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그냥 별 생각 없이 옆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어느 새 전정국이 내 옆에서 걷고 있었다. 전정국은 언젠가부터 그랬다. 딴 생각에 빠져있다 정신 차려보면 어느덧 내 시야 안에 있었다. 늘 그렇듯 그런가보다 하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리는데 작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그 30. 저예요.”



“… ….”




전정국을 보며 가끔 아니 자주 드는 생각은 이거였다.


‘도대체 이 새끼 뭐지. 또라인가.’


그 말을 듣는데 실소가 터졌다. 행여 소리가 커질까 조용히 웃기만 했다. 전정국도 지가 웃긴 건지 숨죽여 웃었다. 나는 그걸 보며 더욱 웃음이 터졌고 전정국은 그런 나를 보며 웃음이 터졌다.




“거기 둘! 열외. 쪼그려 앉아! 쪼그려 뛰기 10회 실시!”



“… ….”



“… ….”




우린 결국 열외 되어 기합을 받았다. 웃음이 싹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애기봉 오르기 전에 도대체 기합을 몇 번이나 받았는지 모르겠다. 얼마 되지도 않는 길이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무거운 무장과 기합으로 현저히 떨어지는 체력, 비 오듯 쏟아지는 땀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 보이는 느낌마저 들었다. 옷소매로 연신 땀을 닦는데 남은 손에 뜨거운 온기가 느껴져서 보니 전정국 이었다(또, 또 전정국). 또 기합 받을 수 없어서 조용하게 입모양으로 말했다.




‘놔라.’



‘싫어.’



‘어쭈.’



전정국은 이제 막 나가기로 한 모양이다. 아, 자꾸 이러면 하극상인데 진짜.



‘힘내.’



‘너도.’




전정국의 저 눈을 보면, 눈빛을 보면 그냥 다 용서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내가 그거에 약하다는 걸 알아챈 걸까. 여우같은 놈. 내가 살짝 노려보면 뭔가 다 안다는 듯 전정국이 살짝 웃는다.



어느 새 애기봉 전망대에 다다랐다. 시야가 밝아지고 시원한 바람이 우리를 맞이했다. 가을이 가까워오는 여름이라도 여름은 여름이었다. 여름을 상징하는 푸름과 파란 하늘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바람을 만끽하며 새하얀 구름이 둥실둥실 떠가는 것에 시선을 빼앗겼다. 한참 먼 산을 보며 정렬을 맞추는데 중대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너머는 북쪽이다. 여기서 북쪽이 참 잘 보인다.”



“… ….”



“별 말 하지 않겠다. 뭔가 느끼는 게 있으면 좋겠다.”



“… ….”




맑은 날이라 저 너머가 잘 보였다. 뭔가 사람이 움직이는 것도 보이고 마을 같은 것도 보였다. 생활감이 느껴졌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 그게 너무 신기했다.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생활을 꾸려가듯이 저기도 사람 사는 건 매 한 가지일 것이다. 그 당연한 것이 왜 이리도 신기할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자연스레 고개를 돌리는데 중대장과 눈이 마주쳤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위에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햇빛이 너무 밝았다. 찰나의 순간 중대장님이 웃었다.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갔지만 순간 그 웃음이 눈부시게 느껴졌다. 반한다는 느낌이 이런 걸까. 

이 느낌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 나쁜 예감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망했다.







-



그 이후로 나는 중대장님 생각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그때 본 하얀 구름처럼 하늘인 듯 떠다녔다. 목소리와 눈빛과 웃음이 자꾸 떠올라 밤잠을 설치곤 했다. 오늘도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이고 있는데 거친 숨소리와 앓는 소리가 들렸다. 전정국이 있는 침대 쪽에서 들리는 걸 보니 또 악몽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근래에 좀 잠잠하다 싶더니 애기봉 다녀온 후 피로가 누적된 것 같았다. 혹시나 다른 사람이 깰까 조심히 전정국이 있는 침대로 다가가 살짝 잠을 깨우려는데 난데없이 전정국이 나를 자리에 눕히고 목을 졸랐다. 살기가 띠는 전정국의 눈빛과 점점 조여 오는 숨통에 두려움이 엄습했다.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ㅈ…전정국, ㄴ…나야. 김태형. 으윽.”



“… ….”




살짝 눈빛이 풀어지는 것 같더니 이내 화들짝 놀라며 나에게 손을 뗐다. 하마터면 정말 죽을 뻔했다. 숨을 크게 쉬고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바짝 긴장했던 몸을 풀어줬다. 전정국은 땀을 닦으며 숨을 헐떡였다. 무슨 꿈을 꾸기에 이러는 건지. 죽을 뻔 한건 난데 아직 진정이 되지 않는 것 같은 전정국이 안쓰러웠다. 손을 뻗어 손을 잡으면 흠칫 놀라는 게 느껴졌다. 손이 축축했다. 잡은 손을 당겼더니 힘없이 툭 당겨왔다. 그 몸을 그대로 안았더니 뻣뻣하게 굳었다. 안심하라는 듯 등을 토닥여줬더니 뻣뻣했던 몸에 점점 풀리며 내게 기대었다. 여전히 생활반은 고요했고 깬 사람은 없는 듯 했다. 그래도 혹여 깰까봐 조용히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 ….”




어깨가 축축했다. 처음에는 아까 흘렸던 땀 때문인가 생각하다가 이내 곧 깨달았다. 울고 있구나. 전정국이 울고 있었다. 그걸 증명하듯 조금씩 등이 들썩였다. 소리 없는 울음. 전정국은 밖에서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꿈을 꾸는지 궁금해졌다. 선임과 동기들이 몇 번씩 묻고는 했지만 조개처럼 입을 꼭 다물고 절대 말하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전정국의 첫인상이 더 안 좋아지게 하는데 한 몫을 했다. 뭔가 께름칙하다고 했다. 하지만 사람의 삶이 모두가 같은 것이 아니니까 말 못할 이유가 있거나 말하고 싶지 않은 뭔가가 있겠지 생각했다.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고 솔직히 알 필요도 없었다. 그런 거 알지 않아도 이 안에서의 삶만으로도 벅차고 충분했다. 처음에 악몽을 꿀 때에도 그저 들어와서 많이 긴장했나보다. 사람이 긴장하고 마음이 힘들면 나쁜 꿈을 꾸기도 하니까. 나도 처음 자대배치 받고는 힘들어서 종종 꾸고는 했으니까. 이런 생각을 했는데 오늘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전사의 눈빛이라 생각하기엔 그건 아니었다. 우리는 공병대대라 사람을 해하는 훈련보단 뭔가를 만들고 부수고 보급하는 것이 우선이라 그걸 중점으로 하는데 전정국의 눈빛은 뭔가 싸했다. 딱 정의할 수는 없지만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의 살기가 띠는 눈빛은 내 인생에 처음이었다. 생각에 빠져 전정국의 등을 토닥이다보니 전정국은 울다가 잠이 든 모양이었다. 잠이 든 전정국을 그대로 자리에 눕히고 일어서려는데 손이 잡혔다. 아직도 눈가에 눈물이 맺혀있는 모양이 마음에 걸렸다. 오늘은 다른 의미로 잠은 다 잤다 싶었다.



“야, 김태형.”



“김태형 일어나봐.”



부르는 소리에 일어나 보니 동기들이 보였다. 간밤에 잠을 설쳐 눈이 부었는지 눈 뜨기가 어려웠다.



“가끔 보면 네가 더 해.”



“뭐?”



“아무리 그래도 자는 애 자리를 뺐냐.”



“어?”



동기들이 하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주위를 둘러보니 내가 전정국 침대에 앉아있었다. 전정국은 침대 옆에 서있었고, 동기들은 나를 보고 있었다. 동기들 틈 사이로 전정국이 슬쩍 웃는 게 보였다. 밤새 손을 잡혀 있다가 잠든 사이에 전정국이 나를 눕혀놓은 것 같았다. 

저 토끼 탈을 쓴 여우같은 놈. 

다 필요 없고 더 자고 싶다. 요즘 나의 잠을 빼앗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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