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윤 x 영빈


#5


이 바닥에서 15년차 중견 실장이 된 배우 이재윤의 매니저 영호는 모름지기 프로라는 건 적재적소에서 딱 맞는 타이밍으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로 10년 차 배우 이재윤의 지금 이 처사는 아주아주 프로다운 행동이라고 할 수 있었다.

 

“도경씨! 뭐하고 계세요?”

“어? 이거 메이킹인가요? 안녕하세요~”

 

도경은 재윤이 이번에 맞은 드라마의 배역이었다. 냉철하고 차분한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로 평소 웃는 얼굴이라곤 구경하기 힘든 이지적인 캐릭터였는데 평소 느긋하고 조금 맹한 듯 풀어져 있는 실제 이재윤과는 꽤 거리가 먼 배역이었다. 그러나 그건 OFF 상태의 ‘인간 이재윤’과 다르다는 말이지 일 잘하고 똑 부러지며 제 능력을 십분 발휘해 어디서든 그 곳의 분위기를 제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드라마 속 김도경은 ‘배우 이재윤’과 싱크로율 200 %의 캐릭터였다.

 

저 멀리에서 이미 카메라의 빨간불이 반짝이는 걸 곁눈질로 백번은 눈치채고도 남았던 재윤이 저를 부르는 스텝의 목소리에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는 듯 눈을 둥그렇게 뜨며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어 보였다. 하얀 피부에 입꼬리 끝으로 쏙 패는 재윤의 보조개를 보던 스탭이 죄송해요, 놀라셨나요? 하고 묻자 재윤은 능청스레 정말 몰랐어요, 저 멍 때리고 있었는데 부끄럽네요. 하고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살짝 숙이며 수줍게 웃어 보이는 재윤을 보며 영호가 혀를 내둘렀다. 저게 팬들 사이에서 말로만 듣던 그 이FOX, 이재윤이구나. 단번에 납득이 가는 상황에 영호가 소리없이 너털 웃음을 지으며 오늘따라 텐션이 날아갈 듯한 재윤을 가자미 눈으로 흘겨봤다.

 

추가 촬영도 어느새 마지막 촬영을 앞두고 있는 터라 현장 분위기가 조금은 어수선했다. 지금 대기하고 있는 씬이 끝나면 어느새 재윤의 추가 촬영도 완전히 끝이 날 터였다. 사전제작 드라마라 지금부터 후작업에 들어가 몇 주 뒤면 프로모션 준비로 또 바빠지겠지만, 오늘이 지나고 나면 대부분의 배우들이 작품을 끝내고 그러하듯 재윤도 몇 주간의 자유를 얻게 될 예정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기분이 좋다고 하기엔 어제오늘 재윤의 컨디션이 너무 최상이었다. 하루종일 강아지마냥 방방 뛰어다니며 여기저기 엉겨 붙어 스텝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현장을 누비느라 감독님이 밤샘 촬영 때문에 혹시 정줄을 놔 버린거냐면서 껄껄 웃어 보이셨다. 에너지가 넘치는 탓인지 조금도 쳐지지 않고 장르물이라 유독 긴 전문용어 대사까지 NG 없이 해내는 재윤 때문에 한 차례 박수까지 이어졌다. 이 텐션 도대체 무엇? 영호가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재윤에게 다가가기 무섭게 재윤은 이미 메이킹이 떠난 자리에서 여전히 핸드폰을 토독토독 두드리다가 영호에게 화면을 슬쩍 보여주곤 씨익 웃었다.

 

“형 이거 봐, 우리 영빈이 귀엽지?”

 

허,

 

우리?

영빈이?

귀엽지?

 

왜 아주 피켓에 대문짝만하게 이재윤 애인 김영빈 써 붙여 다니지? 어이가 없어진 탓에 할말을 잃은 영호 대신 곁에 서있던 다른 스텝이 그 모습을 슬쩍 보고는 와 재윤씨 아이돌 그룹 누구랑 절친이라더니 진짜구나? 하고 좋겠다, 나도 아이돌 보고싶다. 하면서 스쳐지나갔다. 그래, 이게, 모르는 아무개가 보기엔 정말 친한 형 동생처럼 보이겠구나. 한편으론 다행이면서도 재윤이 말한 ‘우리 영빈이’가 이재윤보다 1살 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영호는 사랑에 미쳐버린 이재윤이 사고를 치기 전에 입단속 좀 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치켜들고 재윤이 보여줬던 카톡 대화에서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너 어제오늘 종일 텐션업 돼 있던 거 김영빈씨 입국 날짜가 내일이라서 그런 거야?”

 

바야흐로 이재윤이 사랑에 미친 계절이었다.


***

 

어지럽게 흔들리는 핸드폰의 액정 너머가 분주했다. 형태가 잘 구분되지도 않는 화질에 눈을 고정한 재윤이 아무렴 어떻냐는 듯이 허허실실 웃었다. 영상의 화질이 좋지 않았지만 새빨간 머리통의 머리결이 유난스럽게 반짝이는 건 너무 잘 보이는 탓에 재윤은 저도 모르게 나풀거리는 한 가닥 머리카락을 정리하듯 쓰다듬으면서 손을 움직였다. 아시아 투어의 마지막 공연이 끝난 영빈은 바빠 보였다. 찹찹찹 맨발로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는 발소리가 너무 귀여워서 재윤은 차 뒷좌석에 늘어져 손등으로 입을 막고 가만히 그 ASMR 같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화질의 김영빈 너무 귀여워.


- 오늘은 In my bag을 해 볼 거예요! 제 캐리어 속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하시죠?


내내 결 좋은 빨간 머리통의 윗부분만 나풀나풀 보여주더니 별안간 화면을 전환해 보여주는 건 보고 싶던 얼굴이 아니라 캐리어 속에 가득한 짐들이라서 재윤은 좋으면서도 아쉬운 마음에 얼굴 좀 보여주세요! 하고 작게 타박했다. 조잘조잘 쉴 새 없이 떠드는 목소리를 듣고 있다가 새삼 영빈의 직업이 아이돌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정적 없이 오디오를 종알종알 채우는 목소리가 신기해서 재윤은 말을 더 보태지 않고 영빈이 하는 양을 지켜봤다. 아주 잠깐, 뭔가에 집중한 듯 잠잠하던 화면 너머에서는 곧 철푸덕 하고 바닥에 앉는 소리와 함께 앵글이 좀 낮아지고 캐리어 안에 물건들을 하나하나 짚어 가면서 설명하는 중이었다.


이건 제가 해외 투어 갈 때마다 항상 챙기는 건데 눈에 하는 아이스팩이에요. 제가 요새 쪼끔만 피곤해도 한쪽 눈에만 쌍꺼풀이 생겨서 이걸로 마사지 좀 하고 가면 그나마 좀 나은 편이거든요. 그리고 이건 멤버 동생들이 챙겨준 영양제들이고, 여기 선글라스도 있고 또오...


말꼬리가 늘어지던 영빈이 이번엔 해외 투어를 하면서 사들였던 쇼핑 물품들을 하나씩 들어 보이며 얘네는 캐리어에 다 안 들어가서 따로 트렁크를 하나 샀는데... 하고 말을 끌었다. 말꼬리를 늘어뜨리는 건 다음 할 말을 찾을때 영빈이 자주 하는 습관이란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 노력하네 김영빈, 그냥 얼굴만 보여줘도 되는데.


“김영빈, 얼굴 보고 싶다. 짐 소개 말고 얼굴 보여 주면 안 돼?”


보고 싶은 얼굴 빼고 숙소 안에 오만곳을 보여주는 영빈에게 십만 팬들을 대변하듯 얼굴이 보고 싶다며 중얼거리는 재윤의 목소리는 조금 애절하기까지 했다. 그 말에 재윤의 목소리를 무시로 일관했던 영빈이 결국 목소리를 죽이며 화면을 다시 전환해 제 얼굴이 나오도록 조정했다.


'이재윤 형이라고 안 할래?'

"반말해야 봐주는구나?"

'아니이, 그런게 아니라. 쇼핑하다 보니까 너 생각나서 몇 개 샀단 말야, 이제부터 보여주려고 했는데.'


여태 브이앱 마냥 핸드폰을 들고 재윤에게 짹짹거리던 영빈은 사실 재윤과 영상통화 중이었다. 무려 아이돌 기질을 십분 발휘한 깜찍한 브이앱인척 하기 영상통화. 그것도 이제 막 한국으로 가기 전 투어 마지막 날의 영상통화였다.

 

신발도 사고, 가방도 사고, 이건 귀여울 거 같아서 산 모잔데 사실 커플로 샀고. 얇은 입술을 비죽 내밀고 제 말을 들어주지 않는 재윤이 섭섭하다면서 재윤을 위해 산 쇼핑 목록들을 보여주는데 재윤은 참지 못하고 으하하하 소리를 내서 웃어버렸다.

 

그 흔한 '형동생' 사이에서 '연인'으로 관계를 발전시킨지 꼭 일주일째가 되는 날이었다. 얼른 얼굴도 마주보고 싶고 손도 잡고 싶고 저 빨간 머리통도 쓰다듬고 싶은데 영빈은 여전히 한 달째 해외 체류 중이었다. 대신 연락 없이 재윤을 애태웠던 2주와는 다르게 틈만나면 영상통화에 전화에 카톡에 쉬지 않고 공백을 채우는 중이었다. 로밍 안 해 왔으면 진짜 큰일 날 뻔 했다, 요금 폭탄 맞을뻔 했잖아. 그치? 어느새 뜨끈뜨끈 해진 핸드폰을 붙잡고 영빈이 조잘거렸다. 그렇게 요금 폭탄을 맞을 바엔 일주일정도는 전화를 참고 연락을 최소화 할수도 있지만 이제 막 시작한 불타오르는 연인에겐 연락을 하지 않는다, 따위의 선택지는 없었다. 언젠가는 전화를 끊어보니 통화시간 3:00:15 가 떠 있는걸 보고 둘 다 우리 이렇게 오래 통화했냐며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까르르 웃었던 적도 있었다.

 

"이제 내일이면 보겠네? 숙소로 바로 와?"

'응, 아마?'

"25층으로 올 거지?"

'...으응....'

 

아마?

 

25층, 그러니까 재윤의 집으로 올 거냐는 물음에 답지 않게 귀가 빨개진 영빈이 시선을 돌리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왜 눈 피해? 부끄러워? 재윤은 모른척 하지 않고 물었다. 부끄러워 하는 게 더 귀여우니까. 영빈이 놀리지 말라는 듯 재윤을 향해 눈을 모로 뜨자 예쁜 눈 보여달라며 재윤이 울상을 해 보였다. 영빈이 마침내 흐흐흐, 하고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침대 위로 쓰러져 웃어 보이자 재윤은 그게 예쁘다는 듯 눈을 활짝 휘며 웃었다.

 

‘근데 설마 너 아직도 촬영해?’

”응, 이제 마지막 장면 남았는데 대기가 길어. 왜?“

‘왜긴 지금 새벽...2시 반? 넘었어.’

”아아, 지금 찍는 장면이 야외 촬영인데 새벽 바닷가가 배경이라서 대기시간이 엄청 길어.“

‘그럼 지금 바닷가라고? 옷 잘 챙겨입었지? 아직 새벽 날씨는 추워.

”지금 차 안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어, 괜찮아.“’

 

아, 근데 나 대기시간이라고 시간도 안보고 전화했다. 형 나 때문에 못 잤어? 뒷좌석 의자를 내리고 비스듬이 누워 있던 재윤이 레버를 당겨 의자를 세우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영빈에게 미간을 좁혀 보였다. 그런 재윤의 미간을 펴주듯 카메라 액정 가득 기다란 손가락이 삐죽 튀어나오더니 불쑥 손동굴을 만들어 까만 그림자 속에 빨간 입술을 카메라 앞에 가져다댄 영빈이 속닥거렸다.

 

‘응, 너 보고 싶어서 잠이 안 왔어.’

 

달달한 애정표현들을 뻔뻔하게 곧잘 할 때는 언제고 영빈이 부끄럽다는 듯 벌게진 얼굴로 후드를 폭 뒤집어 쓴 채 뒤로 물러나더니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재윤은 슬쩍 제 차 주위로 아무도 없는걸 확인하고는 꽤 큰소리로 웃어 보였다.

 

나 이제 마지막 장면 완전 심각하고 감정 많이 쏟아야 되는 장면인데 형 때문에 자꾸 웃어서 어떡해. 나 이번 드라마 방영 시작하고 연기력 논란 불거지면 김영빈한테 손해배상 청구할 거야. 알았어? 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눈꼬리가 축 처지도록 사르르 웃고 있는 영빈에게 으름장을 놓은 재윤이 그 뒤로도 한참 깔깔거리며 통화를 하다가 이제 스탠바이 해야 된다면서 저를 데리러 온 매니저에게 부탁했다. 형 나 지금 슬프고 우울한 음악이 필요해. 도저히 세상이 핑크빛으로만 보여서 안 되겠어. 영호가 뒷목을 잡고 튀어나오는 곱지 않은 단어들을 목뒤로 전부 삼켰다.

 

***

 

”컷-!“

 

잠깐 쉬었다 갑시다!

 

긴긴 새벽이 지나고 동이 터오고 있었다. 마지막 장면은 감정도 감정이지만 실타래처럼 꼬여있던 사건들을 풀어내야 하는 서사의 결말이기 때문에 긴긴 대사의 호흡이 잘 맞아 떨어져야 해서 급하게 야외 배경이 필요한 장면들을 먼저 찍고 동선 이동이 필요한 부분들은 오전까지 이어서 찍기로 했다. 소금기가 서린 서늘한 바닷바람을 몇 시간이나 맞고 있던 탓에 녹초가 되어버린 스텝들과 배우들이 잠깐 쉬자는 감독님의 외침에 다들 외투를 여미고 코를 훌쩍거렸다.

 

촬영하다 감기 걸리면 산재 처리는 되는 거냐며 조연출이 농을 던지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분위기가 순항중이라 다들 기운을 내자며 으쌰으쌰 중이었다.

 

”아, 따뜻한 커피 한 잔만 딱 마시고 싶다.“

 

재윤과 마지막 장면을 찍고 막내 배우가 세상 불쌍한 얼굴로 저를 찾아온 메이킹 카메라 앞에서 죽상을 해 보이자 다들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잠시 자리를 비웠던 재윤의 매니저, 영호가 나타나 크게 박수를 짝짝 쳤다. 그럼 다들 커피 한 잔씩 드시고 가시죠? 그 말에 다들 휙휙 좀비떼 처럼 고개를 돌렸다. 노동에 지친 직장인에게 누가 커피 소리를 내었느냐... 그 흉흉한 몰골에 빠르게 촬영장 뒤편에 설치된 커피차를 가리킨 영호가 ‘마지막까지 힘내시라고 재윤 배우 앞으로 커피차 왔어요!’ 하고 크게 소리쳤다.

 

우와아아-! 짧은 환호성과 함께 다들 줄지어 커피차 앞으로 향해 가면서 재윤에게 한마디씩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잘 먹을게요, 재윤씨. 와 이래서 사람들이 이재윤, 이재윤 하는구나! 우리 드라마 주연배우 진짜 캐스팅 잘했다~ 농담이 섞인 감사 인사들을 웃는 얼굴로 받아주던 재윤이 어느새 곁에 다가와 배너 앞에 가서 인증샷 한 번만 찍자며 제 등을 미는 영호에게 누가 보낸 거냐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누가 보냈어? 나 누구한테 뭐 들은 거 없는데? 팬들이 보낸 거야?“

”팬은 팬이지, 팬들은 아니고. 원래 너 팬으로 유명했다고 하던데.“

”아...? 설마?“

”나는 너만 엄청 목 메고 있는 줄 알고 걱정했는데, 그건 또 아닌가 보다?“

”진짜 영빈이가 보냈어?“

”너 어디 가서 연애한다고 티 내지 마라 진짜, 그건 우리 쪽도 문제지만 그쪽이 더 문제인 거 알지? 아무리 세상이 변했어도 아이돌 연애에는 팬들이 그렇게 관대하지 못해요. 근데 김영빈씨도 뭐 조심할 마음이 없는거 같기는 하다. 이걸 너한테 말해봤자 어차피 소귀에 경읽기지.“

 

애정 어린 잔소리를 쏟아내는 영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재윤이 벌써 헤벌쭉해진 얼굴로 커피차 양옆에 서 있는 등신대와 배너들을 향해 후다닥 뛰어갔다. [”도시의 밤“ 김도경에게 –영빈이 형이♥-], 커다락 현수막에 언젠가 영빈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 중 하나라던 재윤의 얼굴이 크롭되어 박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사진들을 구경하는데 테이크 아웃잔에 귀엽게 붙어있는 재윤의 스티커를 훈장 마냥 입고 있던 패딩이나 옷가지 여기저기에 붙인 스텝들이 한 번 더 커피 잘 먹을게요~ 하고 한차례 지나갔다. 사람들이 조금 빠질 때 즈음이 되어서야 케이터링 가판 앞으로 다가온 재윤에 커피차의 사장님이 친절하게 웃으며 재윤은 주문하지도 않은 메뉴를 전달했다.

 

”어? 이건 커피 아니네요?“

”주문해주신 분이 배우님 커피 못 드신다던데요? 그래서 핫초코 준비했어요. 마지막 촬영 힘내시라고.“

”아, 감사합니다.“

 

영빈이 준비했다고 하면 에스프레소라도 마실 기세였던 재윤이 저를 생각해 특별히 커피가 아닌 음료를 미리 부탁했다는 말에 봉긋한 광대를 하늘까지 승천시킬 듯 끌어올렸다. 확실히 혼자 하는 주접은 아니었구나, 싶어진 영호가 인증샷이나 찍어서 인스타에 올리자며 핸드폰을 들고 포토크래퍼를 자처했다. 무릎을 꿇고 카메라를 낮게 눕혀 든 채 주절주절 하는 영호의 말에 재윤은 영호의 포즈가 웃겨 조금 웃었다가 대꾸없이 제 핸드폰을 꺼내 셀카도 몇장 더 찍었다. 내가 너 맨날 키 2메다처럼 찍어 줄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아냐? 이런 매니저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얼굴로 그렇게 빙구 같이 웃지 말아줄래? 툴툴거리는 매니저는 안중에도 없는 재윤이 모락모락 김이 나는 핫초코를 얼굴 옆으로 들어 올려 하얀 뺨에 살짝 대고는 제 배너 옆에 서 있는 영빈의 등신대 옆에 바짝 서서 방긋 웃는 얼굴로 셀카를 몇 장 찍었다. 이건 영빈이 보내줘야지~ 하고 사르르 웃는 얼굴이 아주 그냥 김영빈을 지가 낳았네 낳았어. 아니 보통 보내는 사람 사진도 저렇게 등신대로 뽑아 보내고 그러나? 영호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손하트를 야물딱지게 보여주고 있는 영빈의 사진도 언젠가 재윤이 슬쩍 보고 너무 귀엽다며 호들갑을 떨던 사진이라 재윤은 마냥 행복해했다.

 

”나 보라고 보낸 거야, 내가 보고싶어 할 거 아니까. 형, 나 이거 집에 가져가도 돼?“

 

실물보다 조금 작은 사이즈로 나온 영빈의 등신대를 들고 정말 회사차에 실어 놓을 모양인 재윤을 보고 세상 외롭게 커플천국 솔로지옥에 외치던 영호가 분노로 부르르 떨리는 손을 하면서도 소속사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찾아 해시태그를 야무지게 달았다.

 

#도시의밤 #김도경_이재윤 #영빈 #커피차 #이재윤만핫초코 #찐우정

 

”아 형, 이건 뭔데. 찐우정이 뭐냐?“

”공개 열애하고 싶으면 계약 기간 만료 후에 해라.“

”나 재계약한지 아직 얼마 안 됐거든?“

”너 말고 영빈씨.“

”아...“

“제발, 조심하라고 했다.”

“어엉.”

 

영빈의 이름을 꺼내자 이번엔 영호의 말을 좀 알아들은 듯 재윤이 사뭇 상기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차 응원의 기운을 받아 재게 된 촬영은 갑자기 내린 여우비로 두 시간 정도쯤 더 딜레이가 되는 바람에 예상 보다 추가촬영이 더 늦어져 버렸다. 쉬는 시간에 짬을 내 연락한 영빈은 이제 출국 준비를 끝내고 공항에 있다고 카톡을 남겼고 소나기가 그칠때까지 또 다시 차에서 대기하던 재윤이 그 틈을 타 커피차 앞에서 찍은 셀카를 몇 개 골라 영빈에게 보냈다. 기다렸다는 듯 바로 오는 전화에 또 실실 웃음이 터졌다.

 

'커피차는 잘 받았어?'

"응, 덕분에 마지막 촬영에 스텝들한테 고맙다는 소리 엄청 들었어. 나도 고마워. 어떻게 그런 걸 보낼 생각을 했어?"

'너 몰라서 그렇지 그동안 네가 받은 조공들에도 내 지분 꽤 많을걸? 매니저형 이름으로 모금하긴 하는데 우리 팬들은 사실 우리 매니저 형 이름도 다 알아서 나 몇 번 팬들한테 걸린 적도 있어.'

"진짜? 그런 것도 해봤어?"

'그런 것도? 나는 더한것도 하지.'

"나한테 또 뭐 해줬는데?"

 

'....연애?'

 

깜빡이도 없이 훅 들어오는 영빈의 담백한 고백들은 언제나 재윤을 속절없이 웃게 만들었다. 딱 한 장면만 남겨두고 곧 한국으로 돌아올 영빈과 통화를 하고 있자니 괜시리 마음이 조급해진 재윤이 가뜩이나 통통한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나 촬영 끝나고 빛보다 빨리 달려갈테니까 도착하면 집에서 봐.

 

자기야.

 

그리고 제 입에 나온 말을 저가 감당하지 못해 영빈의 탄성 한마디만 듣고 얼른 전화를 끊었다. ‘헐’ 탄성도 꼭 저 같이 귀엽게 하는 김영빈.


드디어 시원섭섭하게 마지막 장면까지 컷소리를 받고 나자 느즈막한 오후 노을이 지는 바닷가에서 작게 소란스러운 인사가 오고 갔다. 수고하셨습니다!!! 재윤이 제일 먼저 선창을 하면 기다렸다는 듯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인사말이 스텝들과 배우들 사이 돌림노래처럼 번져갔다. 인사소리에 맞춰 미리 준비해둔 꽃다발과 기념 케이크까지 우르르 들고 오는 스탭들과 한차례 요란하게 기념사진을 찍고 종영 소감까지 메이킹으로 담고 나면 재윤은 드디어 사전제작 드라마의 긴긴 6개월 대장정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모래 후시녹음 후작업이 있다며 스케줄을 미리 알려준 영호가 푹쉬라는 말과 함께 재윤을 주차장에 내려주자 재윤은 영호에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누구보다 빠르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통통통통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엘리베이터가 너무 느린느낌이라 괜히 발 끝에 힘을 주고 땅끝을 발코로 차던 재윤이 입구가 열리면 얼른 몸을 구겨넣고 25층을 누른채 닫기 버튼을 숨쉬듯 눌러보였다. 빨리빨리빨리, 보고싶다. 진짜. 누가 보면 집에 꿀단지라도 모셔놓은 듯이 후다닥 소리를 내며 도어락을 급하게 연 재윤이 현관에 우뚝서서 조금 낯선 풍경에 또 입꼬리를 잔뜩 올렸다.

 

현관에 널브러진 저보다 2사이즈 작은 운동화와 은은하게 간접등이 켜진 거실, 혼자서 돌아가는 티비와 VOD로 틀어놓은 제 이전작품. 소파로 가는 거실 길목에 놓여진 자켓, 가방, 모자. 심지어 공항 입국길 프리뷰에서 봤던 영빈의 옷들은 익숙하기까지 해 그걸 주워들면서 좋아서 입이 쭉 찢어진 재윤이 유독 고요한 거실 소파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팔 하나를 보고 그쪽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영빈아, 자?”

 

씻고 잠이 든 건지 보송보송 화장기 없는 얼굴로 곤하게 잠든 영빈은 정말 누가 업어가도 모를만큼 기절해 있었다. 쉬지도 못하게 괜히 여기까지 오라고 했나? 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다가도 덜마른 머리 끝에 곱게 감긴 눈매, 자느라 살짝 벌어진 입술사이로 존재감을 빛내는 중인 토끼 앞니 두 개가 너무 귀여워 한참 그 곁에 쪼그려 앉아 구경을 하던 재윤이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내려 그대로 잠들어 있는 영빈의 입술에 도둑 뽀뽀를 한 것은 영빈이 샤워를 하고 나와 입고 있던 옷이 재윤의 셔츠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재윤에겐 조금 타이트하기도 했던 것 같은데 벙벙한 품에 소매를 두 번 접은 셔츠는 누가 봐도 영빈에겐 한참 커 보였다. 안 그래도 여리여리한 몸에 품이 큰 옷이 흘러내려 제법 위험한 연출을 보여주는 영빈을 보고 입술에 한 번, 이마에 한 번, 양쪽 뺨에 한 번씩 뽀뽀를 남기면서 재윤은 지금 깨면 바로 키스 할 건데 눈 좀 떠주면 안 되겠냐고 아주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 말에 거짓말처럼 부스스 눈을 뜨곤 눈 앞에 있는 재윤의 얼굴을 확인한 영빈이 두 팔을 뻗어 목을 끌어안아 오면서 재윤이야? 하고 잠결에 묻자 그대로 입술을 내려 턱 아래부터 귀 뒤까지 뽀뽀세레를 퍼붓던 재윤이 영빈의 몸을 가볍게 끌어안아 제 무릎 위에 올리곤 입을 열였다.

 

“얼굴보고 다시 대답들으려고 나 엄청 착하게 기다렸어. 바로 오지도 못하면서 거기서 그렇게 대답하면 나 진짜 불면증 걸려 죽으라는 거지?”

 

칭얼칭얼 커다란 몸을 온통 품에 안긴 영빈에게 엉겨가며 투정을 부리는 재윤의 말에 잠결에도 푸스스 웃음이 터진 영빈이 두 손을 동그랗게 모아 재윤의 귓가에 손나팔을 만들더니 푹 잠긴 아주 낮은 목소리로 간질간질하게 재윤이 원하는 말을 들려주었다.

 

“오래 기다렸지, 이재윤? 내가 너, 진짜 많이 좋아해.”

 

귓바퀴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낮고 그르렁거리는 영빈의 잠에 취한 고백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재윤은 저도 모르게 몸을 한 번 부르르 떨고는 그대로 영빈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너무 자연스러워 그대로 소파 위로 몸을 눕혀 재윤의 아래 가둬진 영빈이 여전히 제 목에 쪽쪽 빨아들이고 있는 재윤의 뒷통수를 살살 문지르며 낮게 숨을 모아 터트리곤 까르르 웃었다.

 

“어어, 입술부터. 지금 눈 뜨면 키스 해준다고 안 했어?”

“어디에 한다고는 말 안 했어.”

“헐.”

 

“어디에 할지 안 정한 김에 그냥 좀 더 아래에 할까 봐.”

“뭐?”

 

그대로 영빈이 입고 있던 트레이닝 복 반바지가 내려갔고, 이제 막 시작한 연인들의 밤이 내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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