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뚱이네 이모네로 돌아온 태오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더니, 채준이에게로 휙- 집어던졌어.


 

“니, 함만 더 야한테 담배 심부름 시키믄 가만 안 둔다.”


 

채준은 담뱃갑 겉에 싸여진 비닐을 뜯어내며, 이래가 머리 검은 짐승 새끼는 거둬봐야 은혜를 모른다카는갑네, 라고 중얼거렸어.


태오와 우영이 나갈 때와 들어올 때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눈치 챈 채준은 피실, 웃었지.


우영은 이번 일을 계기로 참을 땐 참고, 지를 땐 지를 줄도 알아야 곪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고여 있는 물은 언젠가 이끼를 피우고 썩게 되어있으니 말이야.





어느새 테이블 구석엔 초록 병들이 8개나 늘어서 있었지. 내일이 일요일이라 작정하고 마셔보자, 하는 건지 다들 일어날 생각들이 없어보였어.


우영은 아직은 괜찮긴 했지만, 조금 알딸딸하긴 했어. 의외로 술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태오는 합 맞춰주느라고 몇 잔만 마셔서인지 멀쩡했지. 


한겸이야 워낙 말술이야 이 정도로는 끄떡도 없어보였고, 채준은 조금 버거워지는지 벽에 옆머리를 기대고 있었어.


얼굴만 보면 이 중에서 채준이 젤 멀쩡해보였지만, 채준인 취기가 오르면 얼굴이 오히려 더 허옇게 질리는 체질이라 그럴 뿐이었지.


한겸인 청소업체에 제법 적응을 잘하고 있었어. 아직, 한겸이 기준에서 더러운 곳을 가면 헛구역질은 하고 있는 모양이긴 했지만.


한겸이는 한참동안, 청소 일을 하면서 겪었던 일화들을 늘어놓았지. 그렇게 또 소주병이 하나 더 늘었을 때였어. 채준은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잠이 들어버렸지.


벽에 기댄 채 고개가 자꾸만 아래로 꾸벅꾸벅 떨어지는 채준의 얼굴을 받쳐 든 한겸은, 자연스럽게 제 어깨 위에 채준의 머리를 얹어놓고 있었어.


맞은편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우영은 괜스레 심통이 났지. 채준이 마음도 모르면서 저런 다정한 짓을 당연하다는 듯이 하니까, 채준이 더 힘들어지는 것만 같았거든.


맞아, 우영은 지금 취했던 거야.



“그래도 쌔가 빠지게 청소 다하고 나서 깨끗해진 거 보믄, 카스테라가 느껴진다카니까.”

“카스테...하아, 카타르시스겠지. 카스테라는 빵이고! 이 빵 대가리 같은 놈아!”


 

우영이 반쯤 풀어진 눈에 나름 힘을 줘서 채준을 노려보며 꽥 질렀어. 한겸과 태오의 놀란 눈이 우영에게로 날아와 박혔지.


그동안은 우영이 아무리 취해도 한겸이에게, 아니 태오를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이런 식의 발언을 한 적은 없었거든. 태오는 괜히 저가 쭈뼛해져 입을 떼어냈어.


 

“이 새끼 취했는 갑네.”


 

한겸은 뭐에 홀린 듯 계속해서, 빵 대가리, 를 연달아 중얼거렸어. 적잖이 충격적이었나 봐.


 

“내가 돌대가리, 똥 대가리는 들어봤어도, 살다 살다 빵 대가리는 첨 들어본다.”

“돌대가리나 똥 대가리보단, 빵 대가리가 나은 거 같은데. 빵은 맛이라도 있으니까.”



태오가 우영을 감싸고돌자, 한겸은 도끼눈을 뜨고 태오를 후려 보며 으르렁거렸어.


 

“민우영, 니 암만 취했어도 너무 심한 거 아이가? 취중진담이라카드만, 니 그동안 내한테 그런 생각 품고 있었나? 내가 암만 카타시...흠, 암튼 그걸 모른다고, 빵 대가리라니.”

“취한 놈한테 와 그라노? 점마 낼 인나믄, 기억도 몬 할끼다.”

“내 가슴엔 스크라치 내놓고 지는 기억도 몬 하는 기, 더 나쁜 거거등!”

“말 꼬랑지 잡는 거 보이, 니 새끼도 취했네. 채준이도 뻗어쁫꼬. 고마 인나자.”


 

우영은 태오와 한겸이 나누는 대화 소리가 웅웅- 뭉개져서 정확하게 들리지 않았어. 게다가 눈앞이 어지러웠지. 테이블에 이마를 쿵 찧으며 작게 중얼거렸지.



“우리 과에 진짜 이쁜 아 있는데...가랑 채준이 소개팅 시키줄끼다..이 빵 대가리 놈아...”


 

점차 울그락불그락 변하고 있는 한겸의 표정을 보던 태오는, 멈추지 않고 중얼 거리는 우영의 입에 빵이라도 쑤셔 넣고 싶은 심정이었지. 얘가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건가, 싶어서 등줄기에 땀이 흘렀어.


 

“내가 제빵 배우고 나서부터, 우영이가 계속 주댕이에 빵을 달고 살아가꼬 긍갑다. 내가 계산하고 갈 테니까, 박채준은 니가 좀 데비다 주라.”


 

태오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우영의 팔을 끌어당기며 일으켜 세웠어. 우영은 흐느적거리며, 흔들리는 시야에 비춰진 한겸을 보았어.


화가 난 표정 같았지. 근데, 그게 꼭 빵 대가리 때문은 아닌 것 같았어. 취해서 착각을 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평소의 한겸이라면, 우영이 빵 대가리라고 했다고 해서 저렇게 화를 내진 않았을 거거든. 한겸을 만나고 나서 처음으로 본 표정이었어.


화가 나고 답답하고 빼앗기고 싶지 않은 소유욕. 그러나 왜 그런 감정이 휘몰아치는지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운. 딱 그런 복잡한 표정이었지.


우영이 뭐라고 또 말을 쏟아내려고, 입을 떼어내려는 찰나였어. 태오가 빠르게 계산을 마친 뒤에 우영을 질질 끌고 가게를 빠져나왔지.


밖으로 나온 태오는 비척대는 우영을 들쳐 업었어. 우영은 알아듣기 힘든 말을 몇 마디 웅얼거리다가, 이내 태오의 등 위에서 축 늘어져버렸지.


 

“빼당구(*뼈다귀) 바께 엄는 새끼가 와 이리 무겁노.”


 

술 취해서 모든 힘을 다 빼고 늘어진 사람은, 젖은 솜 마냥 무거운 법이니까.


태오도 한겸이, 빵 대가리, 때문에 표정이 굳어진 건 아닌 것 같았어. 한겸을 봐온 세월이 얼만데, 한겸이 고작 그런 걸로 진심으로 화를 내지 않는 성격이라는 것쯤은 충분히 알고 있었지.


처음엔 빵 대가리로 장난을 치긴 했지만, 표정이 그렇게 굳어지진 않았거든. 그렇다면 우영이 채준을 소개팅 시켜주겠다는 발언만이 남는데...태오는 생각을 더 깊게 파지 않기로 했어. 어쨌든 두 사람의 문제는 두 사람만이 해결할 수 있는 거니까.


 

**



택시를 타고 우영의 자취방 앞까지 도착을 할 때까지도, 우영은 고요하고 평온한 얼굴로 쿨쿨 잠들어 깨지 않고 있었어. 태오는 우영의 코를 살짝 비틀었지.



“남의 가슴에 폭탄 던져노코, 니는 잠이 솔솔 오나. 이 주정뱅이 새끼야.”



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흐으음, 콧소리를 내면서도 잠에서 깨지 않았어. 태오는 하는 수 없이 택시 밖으로 우영을 끌어내, 다시 등에 업었지. 원룸에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참 다행이었어.


우영의 집 앞까지 온 태오는 우영을 업은 채로, 허리를 구겨 제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스페어키를 꺼내 문을 열었어. 대충 제 운동화를 벗어던지고 안으로 들어와서 우영을 침대 위로 던지듯 놓았지.


땀이 비 오듯 쏟아졌어. 가쁜 숨을 헉헉 내쉬면서도 태오는 우영의 발에 신겨있는 운동화를 벗겨 현관 쪽으로 아무렇게나 툭툭 던져놓았어.


에너지를 쏟아냈더니, 담배가 말렸지. 방에서 담배 피면 우영의 잔소리를 3박 4일은 들어야했기에, 태오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작게 난 베란다로 나갔어.


묵직하긴 해도 바람을 쐬니, 땀이 좀 식는 것 같았지.



“태..오야...”



담배를 겨우 세 모금 빨았을 때였어. 힘아리 없는 우영의 목소리가 들려왔지. 태오는 베란다 구석에 놓아둔 깡통 속으로 담배를 던져버리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어.


우영은 그 단세 눈두덩이 퉁퉁 부어서 눈도 제대로 다 못 뜬 채, 부스스한 몰골로 일어나 앉아 있었어.



“무울...”



우영이 웅얼거렸어. 태오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컵에 따른 뒤, 우영의 입술에 컵을 가져다 대줬어. 


우영은 목이 말랐는지 홀짝홀짝 마셨지. 잠시 후, 이제 그만 마시려는지 입술로 컵을 밀어냈어. 태오가 컵을 치워내자, 우영이 또 도톰한 입술을 움직이며 웅얼거렸어.



“뽀뽀...”


 

태오는 피식 웃으며 우영의 입술에 가볍게, 촙, 입술을 맞췄어. 그러자 우영이 배시시 웃었지.


 

“좋나? 내는 니 업고 온다고, 허리 다 뿡가질라카는데.”


 

태오의 말에 우영은 끊겼던 필름들이 이어지며, 차르르 머릿속에 펼쳐졌지. 취기는 한겸에게 빵 대가리 발언을 하기 전부터 오르고 있었어.


혹시나 그거 외에, 채준과 관련하여 한겸에게 어떤 실수를 하진 않았나- 기억을 쥐어 짜내보는데...다행히 없었던 것 같아.


채준이 소개팅 시켜주겠다는 말은 심통 나서 지르긴 했지만, 그게 실수는 아니었으니까.


그때 굳어가던 한겸의 표정이 언뜻 떠올랐어. 하지만 취해서 그 기억이 명확하진 않았어.


 

“니는 인자 클났다. 이한겸 새끼, 빵 대가리로 최소 3년은 울궈묵을라고 할 걸.”


 

우영은 양팔을 뻗어 태오의 허리를 감아 안으며, 상체를 태오에게 밀어 기댔지.


 

“내 이제부터는 술도 마이 안 묵고, 그 선배 근처도 안 갈게. 지인짜 웃긴 선배 놈이다, 지가 뭔데, 내 뽈따구를 맘대로 쪼물딱 거리노. 선배믄 다가? 마쩨?”


 

우영이 고개를 휙 들어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태오를 보며,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어보였어.


 

“어데서 애교 질이고? 그런다고 내가 니 뽈따구 500번 안 빨아 묵을 줄 아나?”


 

태오가 고개를 틀더니, 입을 한껏 벌려 입술만으로 우영의 왼쪽 볼을 한입에 물고 훅- 빨아 당겼다가 놓아주었어. 살이 연하다 보니, 가뜩이나 취기로 붉어져 있던 볼이 한층 더 진하게 붉어졌지.


 

“니 업고 온다고 땀을 한바가지 흘릿드만, 쫌 씻으야겠다.”


 

제 몸을 감고 있는 우영의 팔을, 태오가 슬며시 풀어내려는데. 우영이 팔을 풀지 않으려고 힘을 꽉 줬어.


 

“키스.”


 

발그레 진 볼따구를 하고 눈꼬리를 아래로 축 내리며, 우영이 조르듯 말을 뱉어냈지.


태오는 오른손을 뻗어 우영의 뒷머리를 눌러 쥐었어. 곧 빠르게 고개를 꺾어, 우영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깊게 눌러 붙였지.




몽상가 夢想家 꿈을 꾸는 낭만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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