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들의 이름, 배경, 나이는 국가나 실제 인물과 관련이 없습니다. 창작물 속의 설정입니다.)


좀비 바이러스. 일명 죽음의 바이러스가 등장한 이후 한국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국민 모두가 자기방어를 위한 무기를 가지고 다닐 수 있도록 무기소지를 허용했다. 언제든지 바이러스에 감염된 이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감염자를 알아볼 수 있는 증상은 푸른색 몸, 붉게 충혈 된 눈, 이리저리 꺾이며 온전치 못한 관절,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와 고름으로 인한 악취였다. 일단 감염자인 좀비에게 물리면 5분 안에 바이러스가 몸에 퍼져 좀비가 된다. 몸이 푸른색으로 변하고 피와 고름이 뿜어져 나오며 관절이 꺾이고 악취가 난다. 좀비가 되면 인간의 이성은 사라지고 오로지 살육에 대한 갈망과 본능만이 남는다.

 

이렇듯 감염자의 외형과 증상 등을 자세히 서술해놓고, 조금이라도 감염이 의심되면 바로 사살하라고, 국가는 그에 대한 책임은 조금도 묻지 않겠다는 내용의 개인보호 법까지 만들어졌기에 현재의 한국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고요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비단 감염자에게 물리는 것만이 아닌 감염자의 타액이나 혈액이 신체 내부에 들어오거나 공기 중에 떠다니는 바이러스가 호흡기를 통해 감염 되는 경우가 있기에 외출 시에는 반드시 마스크를 쓰고 무기를 소지한 채 다녀야 했다.

 

**

 

[다행히 한국은 아직까지는 바이러스 감염자가 없잖아. 진짜 다행이지..]

“응. 그렇지..그래도 언제 나타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좀 불안하다..밖에 나가기도 무섭고..외국은 벌써 많아져서 계속 사살하고 있대..허락 안 받으면 밖에 못 나가고..”

[휴..이게 언제까지 계속될까..나 남자친구도 못 만나고 있어..보고 싶다, 우리 자기..아아, 이거 언제 끝나..]

 

한쪽 턱을 괸 채, 책상에 앉아 통화하던 18살의 소녀. 여주가 심각한 현실에도 투정을 부리는 수화기 속 상대방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 사람은 여주의 친구였다. 야, 주아 너는 이 상황에서도 그런 소리가 나와? 이 심각한 때에? 너도 참 태평하다..

 

[뭐..! 내가 뭐..! 보고 싶은 걸 어떡해..불안하기도 하고..걱정도 되서 매일 전화하는데..그러면 그럴수록 더 보고 싶단 말이야..]

“그래..마음은 알겠는데..지금은 그런 태평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닌 거 알잖아..너랑 내가 통화하는 것도 어쩌면..내일 당장이라도 못하게 될 수도 있다고..외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불안한 시대잖아..진심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상황이 상황이니까 긴장 늦추지 말자.”

[알았어..너희 가족은 다 괜찮지? 문제없지?]

“응. 너희는?”

[우리 가족들이야 너무 건강하지..그리고 그게 진짜 다행이고..예전에는 이런 평화로움이 지루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너무 감사해.]

“응..”

 

장난스런 말투로 시작한 대화가 결국 심각한 말투로 맺어졌다. 이 어둡고 기분 나쁜 시대에서 동갑내기 18살 소녀들은 당장이라도 닥쳐올 것만 같은 어둠으로부터 소중한 미래를 지켜내기 위해 미력하나마 노력하고 있었다.

 

[이만 끊자. 아, 뉴스 보는 거 까먹지 말고..! 요즘은 뉴스가 제일 중요해. 이젠 뉴스에서 거짓말 하는 경우는 없으니까. 가족들하고 꼭 같이 봐?]

“응. 알겠어, 주아야. 몸조심하고 늘 건강해야 돼.”

[응..너도.]

 

6년 지기 친구 주아와의 통화가 끝나고 방에서 나온 여주는 거실에서 신나게 게임을 하는 동생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좀비들도 저 게임에서처럼 한꺼번에 다 죽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하다못해 바이러스가 사람을 좀비로 변하게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나마 상황이 더 나았을 텐데..’

 

거실 벽에 걸려 하염없이 움직이는 시계를 힐끗, 쳐다본 여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파에 앉았다. 주아와의 통화가 꽤 길어지나 싶더라니..어느새 시간이 많이 흘러있었다. 시계가 저녁 6시, 3분 전을 가리켰다. 이제 곧 밤 뉴스가 시작할 시간이었다.

 

“벌써 6시가 다 됐네..텔레비전 리모컨이..어디 있더라..”

 

리모컨을 찾다가 문득 다시 떠오른 주아와의 통화에 여주는 고민에 잠겼다.

 

[그래. 네 말대로 상황은 심각해. 우리나라는 아직 좀비가 없다지만 미래는 모르는 거잖아? 만약이 아니라..이젠 정말로 소중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우리의 미래를 위해서 덜 소중한 사람을 죽여야 할 수도 있어. 그게 설사..친구거나, 동료거나, 방금 전까지 인사를 하던 이웃집 꼬마라고 해도 말이야.]

“..정부에서 정식으로 무기소지랑 좀비 사살을 허가했어. 이건..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살인을 저지를 지라도 넘어가주겠다는 거야. 이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전 같지 않을 거야. 살기 위해 죽여야 하는..”

[응..피로 물든 세상이 되어가겠지. 우리도 대비를 해야 해, 여주야. 너 말처럼 외줄타기를 하는 것 같은 불안한 시대니까..각오 단단히 하자.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

 

“정말 소중한 누군가를 위해 덜 소중한 누군가를 죽여야 할 수도 있다..그 말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좀비를, 아는 사람이었을지도 모를 존재를 살기 위해 죽여야 하는 거잖아..바이러스 때문에..어쩌면..”

 

‘최악의 상황에는 가족끼리 서로를 죽여야 할 수도 있어..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야지..’

 

지금보다 더 어릴 때부터 나이에 비해 세상을 지나치게 깊고, 입체적인 시선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 바라보았던 여주였기에 리모컨을 찾음과 동시에 중얼거림은 멈췄지만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생각이 이어지고 있었다.

 

삑- ,

 

경쾌한 소리와 함께 텔레비전의 화면이 켜졌다.

 

[안 좋은 소식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와 워싱턴 주에서 하루 50명이 넘는 감염자가 나왔습니다. 감염자들은 현장에서 전부 사살했지만 이 추세로 보아 앞으로도 많은 감염자가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좀비 바이러스가 세력을 키워가는 가운데 비단 아메리카 대륙뿐만이 아닌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으로도 퍼질 가능성이 있다는 세계 보건기구 W. H. O의 의견에 각 국가들의 여론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리고-]

 

뉴스에서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와 워싱턴 주에서 많은 감염자가 발생했고, 현재 그 현장에서 살상한 후라는 내용의 뉴스가 나왔다. 또한 점점 그 세력이 넓어지고 있어, 곧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퍼질 가능성이 보인다는 소식도 있었다.

 

여주의 입에서 또다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하아..

 

“누나, 왜? 뉴스에서 또 심각한 소리만 해? 하여간 제대로 하는 건 없으면서 매일 사람들 겁만 준다니까. 실제로는 네 몸은 네 스스로가 지켜라. 라고 사람들을 방치한 주제에..”

 

어느새 게임을 끝내고 다가온 동생이 해맑은 목소리로 질문을 했다. 동생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뉴스에 나오는 국회의원과 대통령을 노려보며 짜증이 가득 담긴 말을 내뱉기까지 했다. 나이는 찰 때로 찼지만 도무지 현실을 읽을지 모르는 그 해맑은 모습에 픽, 웃음이 터진 여주였다. 풉..야, 넌 어쩌려고 그렇게 해맑아? 진짜..웃기다, 웃겨..

 

“..? 웃기려고 한 말이 아닌데, 누나.”

“난 웃겼어. 어쨌든 우울해지기만 하니까 뉴스는 그만보자.”

 

웃기려고 한 말이 아니었다며 눈을 동그랗게 뜬 동생의 어깨를 툭, 치며 텔레비전을 끈 여주가 부엌으로 향했다.

 

바로 어제, 부모님이 2박 3일로 진행되는 캠프에 가셨기 때문에 집에는 여주와 두 동생들밖에 없었다. 예전이면 자유다! 하며 좋아했겠지만 이제는 상황이 상황인 만큼 덜컥, 겁부터 났다. 그래서 여주와 동생들은 어제부터 오늘 저녁까지 집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았다.

 

“뭐하게? 라면 끓일 거야? 그럼 난 #라면! 3개 끓여 누나!”

 

여주가 냄비에 물을 가득 붓고, 가스레인지에 올리자 초롱초롱한 눈빛을 한 17살의 소년. 하주가 라면 끓일 거냐며 잽싸게 자신이 먹고 싶은 라면을 외쳤다. 하주는 방금 전에 해맑은 말로 여주를 웃겼던 동생이었다.

 

“알았어. 그 대신 넌 여기 와서 고기 좀 구워. 대패삼겹살이야. 안 구우면 국물도 없다?”

“에이, 하기 싫은데..”

“빨리.”

 

소파에 드러눕던 하주는 얼른 와서 저녁준비를 도우라는 여주에 툴툴거리며 부엌으로 걸어왔다.

 

“굽고 있어. 난 식탁 좀 닦을게.”

“어. 근데, 누나..라면은 그렇다 쳐도 삼겹살 먹어도 되는 거야? 그 바이러스 공기랑 물로도 퍼진다고 했지 않아..? 아무리 동물한테 안 걸린다고 해도 동물 몸 안에 머물다가 인간이 그 동물과 접촉하거나 가공해서 섭취했을 때 감염 됐다며..”

 

하주의 질문에 식탁을 닦던 여주의 움직임이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조금은 불안한 얼굴의 하주가 보였다. 여주는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아직 우리나라는 감염 사례가 없고, 고기도 국내산이고..아직 아시아 쪽으로는 안 왔다니까 괜찮을 거야.”

“아, 어..”

“그리고..일단 익혀 먹으니까..괜찮을 거라고 믿어야지..”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그러기를 바래야하고, 그럴 거라 믿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여주의 동공은 바람 앞에 홀로 서있는 촛불처럼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좀비 바이러스는 물, 공기, 감염자의 타액, 혈액 등으로 퍼지기에 물고기와 해산물은 물론 동물의 고기나 과일, 곡식 같은 것도 쉽사리 먹기가 꺼려지는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식 자원을 검열하고 제한하면 바이러스 때문이 아니라 식량난 때문에 인류가 멸종하게 생겼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저..직접적인 접촉이 있는 해산물을 될 수 있는 한 피하고, 고기나 곡식은 익혀먹으며, 가능하다면 이미 1차로 가공되어 있는 식품을 섭취하는 수밖에. 그 과정에서 이건 괜찮을 거다, 이건 먹어도 될 거야. 라는 자기 세뇌는 그를 따라오는 작은 미션인 셈이었다.

 

“뭐야. 뭐 먹어?”

 

저녁을 준비하느라 부엌이 소란스러워지자 방에서 죽은 듯이 누워있던 여주의 막내 동생이 하품을 하며 비척비척 걸어 나왔다. 아, 지금 깬 거야? 너 설마 지금까지 잤어?

 

“응. 피곤해서..근데 방금 깼어..어..저녁 뭐야?”

“라면이랑 삼겹살. 너도 저녁준비 도와. 수저 놓고 밥도 푸고.”

“내가 왜?”

“준비 안 도우면 설거지는 너야.”

“아, 알았어..”

 

14살의 소년. 여준은 여주와 하주의 막내 동생으로 여주와 4살 터울이 나기 때문에 꽤나 애지중지하며 돌보는 동생이었다. 까칠하긴 해도 일단 시키면 툴툴대다가도 시키는 대로 하기 때문에 오늘도 일단 삼남매의 저녁시간은 평화로웠다.

 

**

 

쨍그랑- ,

 

날카로운 금속이 무언가와 부딪혀 쨍한 소음을 일으켰다. 그 소리에 방에 있던 하주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던 여주가 거실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아..미안. 내가 무기 손질하다가 떨어트렸어.”

 

여준이 어색한 얼굴로 긴 검을 쥐고 웃어 보였다. 여주와 하주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놀랐잖아. 사고라도 난 줄 알고..

 

“검 닦다가 미끄러워서 떨어트렸어. 그 소리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지..”

“근데 갑자기 무기 손질은 왜? 그저께에 손질했잖아. 오늘이나 내일 사용할 거 아니면 굳이 안 해도 되는데..야. 너. 내일 어디 가려고?”

“..응. 내일 친구 집 놀러갈 건데, 가는 길에 혹시 모르니까..”

 

무기 손질은 왜 하냐는 하주의 물음에 깨끗이 닦은 검을 품에 안으며 내일 외출할 거라고 대답한 여준이었다. 그러자 여주와 하주의 표정이 굳어졌고,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지기 시작했다.

 

“.....”

“..여준아. 우리 어제 약속했잖아. 엄마아빠가 안 계실 때는 외출하지 않기로. 근데..친구 집에 가겠다고?”

 

침묵을 깬 것은 조용한 여주의 목소리였다. 차분한 시선과 평온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 여주였다. 너도 알지? 우리가 서로 약속한 거. 우리끼리 있으면 위험하니까 외출은 하지 않기로 한 거.

 

“나도 알아..그래도 벌써 3달 째 못 봤어..딱 3시간만 보고 올게. 이번 한번만..안 돼..?”


고개를 숙안 여준의 얼굴이 어느새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하주가 울컥, 소리쳤다. 야, 당연히 안 되지..! 3시간은 무슨..! 지금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그, 그렇지만..보고 싶단 말이야..! 가까이 사는데 얼굴 한번 못 보는 게, 말이 돼? 막말로 이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데 그때까지 친구 얼굴도 못 보고 살 수는 없잖아..!”

 

여준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하주가 여준과 말을 주고받으며 한숨을 쉬어대는 것을 지켜보던 여주가 조용하게 물었다. 조심하면서 다녀올 수 있냐고.

 

“..조심하면서 다녀올 수 있어?”

“어. 당연하지..!”

“누나!”

 

“하주야. 걸어서 10분 거리잖아. 빠르게 걸으면 5분이야. 그리고 아주 오래 있을 것도 아니고..그 대신 여준이 너, 명심해? 딱 3시간이야.”

 

소리를 치려는 하주에게 차분히 설명한 여주가 3시간 안에 돌아오라며 약속을 받아냈다. 응. 당연하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막내 동생의 해맑은 얼굴과 누나의 차분한 설명에 결국 고개를 끄덕여 외출을 허락해준 하주가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헤헤..가서 뭐하지? 3시간이라 짧긴 한데 그래도 할 수 있는 게 뭐라도 있을 텐데..”

 

기뻐하며 무기를 반짝반짝하게 손질해 원래 있던 자리에 걸어놓는 여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겹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기 없는 얼굴을 마주했다. 

 

“.....”

“.....”

 

여주와 하주는 부디 저 반짝이는 날에 피를 묻히는 일이 없기를, 저 검이 지금 모습 그대로 다시 벽에 걸렸으면..하고 간절히 빌었다. 지금 이 혼란한 시대에 두 사람이 동생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부디 아무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

 

다음날.

 

뭐가 그렇게 급한 건지 여준은 아침댓바람부터 일어나 정신을 차리자마자 집을 나서려고 했다. 너무 일찍 가는 것도 실례라며 여주와 하주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정말 아침 일찍 찾아갔을지도 모른다.

 

결국 형 누나들의 제지 덕분에 공복으로 나가려던 여준은 9시 30분쯤..밥을 먹고, 마스크를 쓰고, 검을 옆구리에 찬 채로 집을 나섰다. 그리고 여준을 배웅해주고 다시 잠이 들었던 여주와 하주는 11시쯤 깨어 늦은 아침 겸 점심을 먹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때, 주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던 것이다.

 

[......다니까? 어때?]

“뭐, 뭐? 흡, 콜록, 콜록, 콜록..!”

 

주아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놀란 여주가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해댔다.

 

[왜, 왜 그렇게 놀라고 그래? 누가 보면 내가 나쁜 말이라도 한 줄 알겠다! 사레까지 들리고..별일이네..? 왜 그러냐?]

“아, 아니..네가 놀라게 했잖아..그보다, 뭐라고?”

 

스피커폰으로 해둔 수화기에서는 주아의 명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을 따라준 하주 덕에 겨우 기침을 멈춘 여주가 다시 한 번 말해달라고 했다.

 

[아~~ 그거야..좋은 소식이 있다고 했지! 너도 알다시피, 세계 보건기구에서 좀비 바이러스의 백신을 연구하고 있잖아?]

“어..그렇지..근데?”

[흐흐흐, 있지..아주, 아주 조-오금? 실마리가 잡히는 것 같다는 소식이 있어서 말이야. 기사가 떴거든. 바이러스가 스며든 공기나 물, 세포를 연구해서 바이러스를 찾아냈대. 그 동안 바이러스의 정체조차 못 발견했었잖아? 그냥 이름만 붙이고, 제대로 된 수확은 없어서 얼마나 짜증났는데..무튼 그 샘플을 가지고 이것저것 하고 있나봐. 가능성은 희박하지만..될 거라고 믿어야지.]

“좀비 바이러스의 백신이 개발 될 수도 있다고..?”

[그래! 불행 중 다행이지, 뭐야..! 이대로 우리나라에 오기 전에 백신이 개발돼서 얼른 해결됐으면 좋겠다..그렇지?]

 

주아가 전해온 소식은 세계 보건기구 W. H. O에서 본격적으로 좀비 바이러스에 대항할 백신을 만들기 시작했단 소식이었다.

 

그 동안 바이러스의 정체도, 형체도 모른 채 막연히 고대의 바이러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심해의 바이러스다, 좀비 바이러스다. 라며 주위를 뱅뱅 돌기만 하던 것이 드디어 시작점을 제대로 찾은 것이었다. 


바이러스를 찾아냈으니 뭐라도 시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어둠과 절망이 가득하던 터널에 미약하나마 끝이 보이기 시작했고, 빛이 비춰지는 것 같았다.

 

[여주야? 듣고 있어?]

 

우울하고 슬펐던 어제와는 다르게 기쁨과 희망이 가득한 주아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제게 묻는 것을 미소를 머금은 채로 조용히 음미하던 여주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잘 듣고 있어.”

 

여주는 솔직히 조금 많이 기뻤다.


아직 이른 감정이지만, 아직 아무것도 시작 되지 않았고, 어쩌면 실패할 수도 있지만 작은 실마리라도 찾아내었다는 사실이 절망에 빠진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이나마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절망에 푹 빠져서 슬픔에 잠긴 채로, 죽음만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될 계기가 될 같았기에..


아직 어린 18살이라는 나이에 세상을 깊게 보던 소녀는 그 애매모호한 소식이 너무나도 기뻤다.

 

[이제..조금씩 나아지겠지?]

“응. 그럴 거라고 믿어, 난.”

 

조심스럽게 제게 동의를 구하는 주아에게 확신에 찬 대답으로 희망을 불어넣어주며 여주는 생각했다.

 

아, 이제 미약하나마 세상이 다시 희망으로 가득 찰 준비를 하겠구나. 그 끝은 아무도 모르나 시작을 하기 위한 출발선까지, 그 시작점에 설만큼은 왔구나..

 

이 혼란스럽고 절망스러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먼 미래와 내일을 바라보는 소녀로서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때론 거짓된 희망이란 너무나 잔혹해서 조금의 자비로 베풀었던 희망을 배로 가져가버리고 만다.


세상은 기어코 성인도 되지 않은 나이에 세상의 평화와 행복을 바라던 어린 소녀의 간절한 바람과 그 안에서 불씨로서 타오르던 작은 희망을 가져가버리고야 말았다.

 

**

 

“누나. 우리 잠깐 편의점 다녀올까? 콜라 마시고 싶어.”

“그래. 잠깐이라면 다녀오자. 얼른 가자.”

 

주아와의 통화를 마치고, 점심 설거지를 하던 정오. 12시. 30분만 더 있으면 친구네 집에 놀러간 막내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그 전에 콜라가 마시고 싶다는 하주의 제안에 기분이 좋았던 여주도 흔쾌히 수락해 집을 나섰다. 그래도 마스크를 쓰고, 각자의 무기인 긴 검을 옆구리에 찬 채로 조심조심 하며 걸었지만 그래도 긴장이 조금 풀린 상태였다. 그들은 어렸고, 아직 청소년에 불과했으니.

 

아무리 어른인 척을 해도 기본적으로 아주 순수했고, 그만큼 긴장을 풀어버리기에도 쉬웠다. 아무리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세상을 읽어내려 해도 잠깐의 따스한 바람에 금세 어린아이같이 되었으니까. 그 바람이 폭풍의 전야제였다는 것을 모른 채로.

 

이때는...아마 좋은 소식에 긴장이 풀렸던 것이라고. 사실 최소한의 가능성이 있는 한, 긴장을 늦추면 안 되었는데 자신이 어리석었다고. 그 가능성이 최소한의 것도 아닌 아주 큰 것이었고, 이 날이 곧 큰 일이 닥치기 직전이었다는 것을 그때서야 깨닫고 말았다고. 여주는 이 날을 떠올릴 때면 그렇게 말하곤 했다.

 

집에서 10분 거리에 위치한 작은 편의점에서 시원한 콜라와 간식거리들을 고른 두 사람은 막 계산을 마치고 봉투에 계산한 것들을 담고 있었다.

 

하주가 묵직한 봉투를 집어 들고 편의점의 문을 열어 밖으로 나갈 때, 여주에게는 곧 집으로 출발할 거라는 여준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여준이-좀 이따가 출발할게. 약속한 시간 안에는 갈 거야


“약속은 잘 지키네..역시 우리 막내야.”

 

착실한 메시지에 싱긋, 미소를 지은 여주가 하주를 따라 편의점을 벗어날 때였다. 편의점 맞은편의 거리에서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걷는 남자가 겁도 없이 차가 다니는 도로를 건넜던 것이다.

 

“어, 어..! 위험해요!”

 

놀란 하주와 여주가 위험하다고 소리쳤지만 남자는 개의치 않고 여전히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하주와 여주가 있는 편의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데..”

“어. 일단 물러나자, 누나.”

 

뭔가 수상쩍고, 불쾌한 느낌을 받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였다.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며 옆구리에 찬 검을 꽉, 쥐었다.


그리고 그 예상은 딱 들어맞았다. 도로를 3분의 2정도를 건너던 남자가 갑자기 픽, 쓰러지더니 이내 쿨럭, 쿨럭 기침을 하며 피를 토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도 그 모습은 선명하게 보였다.

 

“키에에에엑!!!!”

 

그리고 곧 그 남자는 끔찍한 몰골이 되어 피와 고름을 흩뿌리며 여주와 하주가 있는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으아악!!!!”

“뛰, 뛰어!”

 

좀비. 좀비였다.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좀비 바이러스 감염자가 등장했고, 그 자가 지금 자신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빠르게 움직여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직원의 도움을 받아 문을 잠그고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바, 방금..”

“조, 좀비..좀비였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온 좀비는 유리문을 쳐대며 핏자국을 남겼다. 국가로부터 들었던 그대로 끔찍한 몰골이었다.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꺄아악! 저게 뭐야! 우리나라에도 좀비가 있는 거였어?! 아아..이게 뭐야..나, 나..이제 죽는 건가? 아, 안 돼..!”

 

편의점에 있던 직원은 20살이 갓 넘은 여학생이었다. 놀라서 울먹이며 주저앉는 직원에게 침착하게 무기가 있냐고 물은 여주가 직원을 달래며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들고는 하주에게 눈짓했다.

 

“진정하세요, 언니. 울기만 하면 아무 소용없어요. 혹시 가진 무기 있어요?”

“흑..창고에 가면 야구배트나 몽둥이가 있을 거야..안쪽까지 살펴보면 그 외에도 뭔가가 있을지도 몰라..”

“네. 알겠어요. 하주야.”

 

하주도 조용히 검을 꺼내고는 손가락을 가져다대고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응. 쉿..조용히 하세요.

 

무기를 가져오면서도 여주는 연신 울먹이는 직원을 달랬다. 울지 마세요. 수도 적고, 우리는 셋이니까 할 수 있어요.

 

사실 떨리기는 매한가지인 여주였다. 무기라고는 한 번도 안 잡아 봤고, 칼을 쓰는 건 요리를 할 때 만이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때린 적도, 상처 입힌 적도 없다. 누군가를 죽여본 적은..당연히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지켜야할 것이 많다. 그러니 강해져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세뇌시켰다.

 

“하주야. 다행히 지금은 유리문 때문에 못 들어오는 것 같거든? 일단 유리문에서 떨어트려야 공격을 하던지 할 텐데..”

 

“좀비는 소리에 민감하다고 했어. 내가 검으로 벽을 쳐서 유인할게. 그때 누나랑 직원분이 나가서 검을 심장에 찔러. 깊숙이 넣어서 죽여야해. 그 다음에 내가 목을 밸게.”

 

좀비영화라도 많이 봤던 건지 익숙하게 작전을 짜는 고등학생 남매에 훌쩍이던 직원은 놀란 얼굴을 했다. 어른인 자신보다 더 침착한 아이들이었으니까. 어, 어떻게..

 

“아..몇 번 시뮬레이션 해봤거든요.”

 

직원에게 웃으며 대답해준 여주와 하주가 그 말을 끝으로 미소를 거뒀다. 유리벽에 머리를 박으며 피를 줄줄 흘리는 좀비를 바라보는 남매의 눈이 매서웠다. 여주가 조용히 숫자를 셌다. 작전을 시작하기 위한 카운트다운이었다.

 

5..4..3.....2......

 

“..! 아, 안 돼요! 좀비라고요!”

“아아아아악!!!!”

 

그렇지만 카운트다운은 다 세어지지 못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주위를 지나던 사람 한명이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좀비에게 물어뜯기기 시작한 것은.


처참한 광경이었다. 얼굴의 반쪽이 전부 물어 뜯겨, 살점이 너덜너덜하고 안구가 반쯤 튀어나와선, 온몸에서 피와 물이 흘러내리며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사람을 목격한 세 사람은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그제야 실감했다. 재앙의 그림자가 자신들에게도 닥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아아..아아..”

“아아아....”

 

둘로 늘어난 좀비를 앞에 두고 세 사람은 손에 얼굴을 파묻었고, 입에서는 울음 섞인 신음소리만이 새어나왔다.

 

어둠의 그림자가, 이곳을 삼키기 위해 모두의 코앞까지 와있었다.

 

끝.

꿈꾸는 일은 즐겁다. 얼렁뚱땅 굴러가는 글방 주인장 & 초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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