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 없음

*6권 스포 주의 / 그 이후 전개 날조




물 끓는 소리가 난다.

창문 앞을 가린 발을 흐트리는 바람 사이에 풀냄새가 배였다. 이름 모를 들꽃이나 잡초가 우거진 틈을 비집고 살아남은 벌레가 저 멀리서 울고 길 위를 오가는 말이 성난 울음을 터트렸다. 이따금 나무가 바람에 쓸리는 소리나 분주히 길을 오고 가는 걸음소리가 소음을 더했다. 쉬익, 열이 오른 주전자가 뚜껑을 흔들며 비명을 내질렀다. 손잡이를 움켜쥐고 들어올려 묵직한 무게를 잠시 손목으로 느꼈다. 그대로 옮겨 찻잔에 기울여 얌전히 놓여있는 찻잎을 물로 적시기 시작했다. 서서히 우러나오는 차에 시선을 두며 라야는 괜히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그새 차오른 찻잔에 쥐고 있던 주전자를 멀리 치워냈다. 한김 식게 둔 찻잔을 식탁에 올려두고 발을 걷어냈다. 바람이 불었다. 쨍한 풀내음과 나뭇잎이 같이 흔들렸다. 저마다의 수단으로 오고가는 사람들의 생기가 맥동하고 계절은 가을을 향해 달려가듯 하늘이 끝없이 높고 파랗다. 그 한가운데 누군가가 멈춰있다. 라야는 눈을 내려뜬 채 숨을 내쉬곤 나무로 겹겹이 쌓아올린 발을 내렸다.

추억이란 이름으로 뭉쳐진 시간들을 곱씹다 애틋하게 보다듬을 시간없이 절망했다. 박탈당한 미래는 모래알처럼 손 틈 사이로 흩어졌다. 사막이란게 늘 그렇듯이 아기에 또한 그러했다. 사막을 적시고 생명을 움트게 할 능력을 신으로부터 부여받고 태어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막의 모래알 같은 삶을 살았다. 희망을 줄 수 있는 구원자는 평생 희망을 빼앗기며 살아남았다. 악몽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된 채. 라야는 그런 삶을 쥐어주고 싶지 않았다. 돌아보면 웃음이 나올 추억을 쌓게 해주고 싶었다. 제 마음을 왜곡없이 표현하며 시간을 걷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그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이 되었다. 분명 사랑이라는 이름이 붙을테지. 노을이 지는 사막과 부락의 경계에서 그를 보고 조용히 웃었던 적이 있다. 그는 평소 재잘대던 입을 멈추고 말없이 응시해왔다. 사랑이 전해져 온 듯, 그걸 받아들였다. 그는 그 웃음을 좋아했다고 어렴풋이 느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를 몰아갔다. 나누던 정과 온기는 따뜻한 추억이 되었지만 피로 물들어 악몽으로 끝이 났다. 삭막한 부재가 사무쳤을테지. 공연한 짐작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 아픔과 상처는 아기에의 것이었으니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손을 뻗는 건 멈추지 않을테니 그저 쓰린 속만 달랠 뿐이다.

죄책감에 얽매어 움직일 수 없었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가다듬고 나아가기엔 거대하고 복잡한 사연들이 쌓여 여러 나라와 부락이 되었다. 쉽게 받아 들이기엔 어려웠다. 안절부절 하는 사이 기억 깊숙한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도 저도 안 될 것 같을 땐 네 마음에 따라서 움직여라, 왕을 죽인 대역죄인의 것이었다. 머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지 마라, 넌 그게 심해보이니까. 감정에 옳고 그름이 따로 있을까. 그 마음이 들었다고 해서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휘두르는 가가 문제지. 자신의 죄책감은 자신의 것이고, 그것에 무너지고 아파하고 주춤하게 될지언정 본인이 감당해야 한다. 그걸 딛고 일어나게 해준 것은 아기에였다. 단지 잠시 스쳐간 사이라는 이유로 동료들을 잃고 큰 상처를 지고 갈 세 여인들을 생각하면서 제 어머니처럼 무너지지 않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아기에가 곁에 있어 주었기에 가능했다. 아기에는 절망했다. 지금껏 살아온 시간을 바탕으로 학살을 저질렀다. 그러면서도 내내 자신을 생각하며 더욱 깊이 절망했을테지. 아기에를 아니까 확신할 수 있다. 점점 더 죄를 저지르며 결국에 본인의 목숨까지 내어줄 지경에 다다랐으니 더더욱. 그걸 건져올린게 자신이었으니 의심의 여지도 없다. 끝내 밀어내는 손을 그때엔 잡지 못했으나,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임을 서서히 깨달았다. 더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받쳐주어야 했다.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간에.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라야는 적당히 식은 차를 마셨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변했다. 자연이 숨쉬고 인류는 움직였다. 천신의 눈 아래 지신의 자비를 받으며 현자의 손을 움켜쥐었다. 더 나은 나라, 더 나은 삶을 외치는 진화의 이름 아래 적격한 왕들이 소생했다. 배덕하고 교활하며 소심한 왕들 또한 끌어안고 세계는 진보했다. 어둠이 짙어질 때마다 악몽이 태어났으나 ‘악몽’이라는 이름 하에 사그라들었다. 악몽에서 깨어난 세계는 다시금 움직이기 마련이다. 그렇게 긴 세월이 흘렀다. 혼란기 이전의 유물이나 유적을 발굴해 온존하거나 생활방식에 녹여낼 정도로 번영한 나라들 또한 생겨났다. 그동안 라야는 악몽의 그늘 아래에서 살았다. 악몽 본인조차 모든 것을 볼 수 없도록. 다만 끝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때때로 그를 지켜내면서, 바라는 게 없다는 듯 그 자리에서 사라지지만 당신을 온전히 떠나는 것은 아니라고. 굳게 서서 손을 뻗길 주저하지 않았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기해를 뒤에 두고 언제까지나 자신을 무시하지만, 라야는 언제까지나 그의 앞에 설 수 있다는 걸 확인함으로 그가 변치 않았다는 걸 알았다. 성인이 막 된 그 모습 그대로.

찻잔을 비운 라야는 가볍게 닦아내 치워두곤 두 눈을 또렷히 떴다. 새빨간 태양빛이 곧게 빛났다. 햇볕이 부서지듯 깜빡인 시선이 왼손 손등 위를 머물다 스쳐 지나갔다. 투명한 신석을 반대쪽 손으로 쓸어내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느 날 결심했던 그 마음 그대로, 변치않는 서로를 위해서, 라야는 검을 챙겨들고 악몽을 향해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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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정하는 사고 과정 :

오랜 시간이 흘러도 죽음이 둘을 갈라도 서로에게 변치 않는 마음을 품을 것 같은 칠눈

> 쓰고 있는데 라야가 아기에를 사랑하네...하고 깨달음과 동시에 아기에도 라야를 사랑하네...하고 깨달음을 반복한지 몇 년이 지났나 10년이 지났나요?

> 꽃말이 변치않는 사랑인 꽃은 리시안셔스…제목으로 하자.

> …결혼식 부케로도 쓰인다고? 괜히 노‘부부’인게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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