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 소문을 들었소."

쪼르륵, 찻물이 작은 찻잔을 채우는 소리가 고즈넉하게 들렸다. 맞은편에서 말문을 트자, 살짝 고개를 들어 제 주군을 바라본다. 희미하게 웃음을 짓는 얼굴은 창백하고 생기가 없었지만 그 이상으로 묘한 느낌을 주었다.

"전하께서 재밌다 하시니, 무슨 소문인지 궁금하군요."

천천히 잔을 건내는 손은 참으로 작고 희었다. 간계한 책사란 이름에는 썩 어울리지 않지만, 꽤나 어울리기도 한 손이다. 옅은 분홍빛을 띄는 손톱은 잘 정돈되어 있다. 손톱 끝을 잘 갈아서 모양을 내고, 기름을 발라 가꾼 티가 났다. 정왕은 성정이 무심하고 수수하였으나 귀한 신분으로 태어난 까닭에 치장과 멋에 대해서는 어느정도는 알았다. 그의 수하들이 종주의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써주고 있다는 티가 났다. 정왕은 그 손톱에서 거부감과 동시에 제 책사를 조롱하고픈 욕구를 눌렀다.

정왕은 평생 건강이 좋지 못한 탓에 영양분이 손까지 가질 못해 늘 깨지고 갈라지는 종주의 손톱을 마음아파한 견평과 려강이 매일 종주의 손을 만져준단 사실을 알지 못하리라.

어쨌든 종주의 파리한 입술이 찻물에 적셔서 희미하게 혈색이 돌아왔다. 차향을 음미하느라 살짝 찌푸려진 눈썹은 붓으로 그린듯 곱고 긴 콧대는 삐뚤어짐 하나 없이 단정하다.

"선생이 예왕에게..주는 것이 충성만이 아니란 얘기가 파다하오."

소철의 미색이 뛰어나지 않았다면, 절대 퍼지지 않았을 소문이다. 정왕은 그것을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치졸한 질문인 것을 알면서도 그러했다.

매장소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여전히 차가운 미소만을 머금을 따름이었다. 그 초연한 태도가 정왕을 더욱 거슬리게 했다.

"진짜요?"

좀 더 노골적으로 묻자, 종주도 조금은 불편한 모양인지 눈커풀이 살짝 떨렸다. 그러나 곧 그는 평정을 되찾았다. 작은 손이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고는 차분하게 답했다.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답에도 정왕은 이상하게 안심이 되거나 만족스럽지가 못했다. 종주의 긴 속눈썹이 천천히 내리깔리고, 다시 위로 올라왔다. 그 차분하고 고요한 움직임에 이상하게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믿지 못하시나 봅니다."

정왕이 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종주는 정왕의 심중을 넘겨짚은 것인지 덤덤하게 지적하며 다과가 든 접시를 정왕 쪽으로 밀어주었다.

"기다 아니다라는 말로는 부족하신가보군요. 그럼 좀 더 해명을 하지요."

추위를 많이 타서 늘 두꺼운 옷을 입는 그도 한여름에는 목을 두른 수건을 하지 않은채 정왕을 맞았다. 거의 보기 어려운 희고 가는 목덜미가 선명했다. 정왕의 시선이 그 목덜미에 떨어질 줄을 몰랐다. 가늘고 우아한 선, 살짝 도드라진 목울매와 그 아래 곧게 뻗어있을, 옷에 가려져 보이진 않는 쇄골을 상상해 보았지만, 곧 그 망측한 상상을 억지로 밀어버렸다.

"예왕은 제게 몸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원했다 해도, 제 쪽에서 거절했을 겁니다. 물론 이 허약한 몸뚱이야 별 것 아니지요. 예왕이 제 몸을 원한다면야 주면 그만이고,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기꺼이 취하면 됩니다."

제 스스로를 아무렇지도 않게 폄하하는 혀는 맵고 눈매는 차갑다.

"그러나 몸으로 하는 거래는 하수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한 사람과의 색사는 질리기 마련이고, 몸을 내어주면 그 후엔 제 손에 쥐고 있는 것이 없어지거든요. 밑천이 드러나는 거래는 최악입니다."

그리고 종주는 고개를 들어 정왕을 마주보았다. 정왕의 차가운 얼굴을 응시하며 종주가 좀 더 미소다운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러나 그가 정말 웃고 있는 것이 아님을 정왕은 잘 알았다.

"이제 납득하셨습니까?"

종주는 소매로 살짝 제 얼굴을 가리고는 차를 마셨다. 파도처럼 우아하게 움직이는 푸른 팔 소매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왕이 종주가 찻잔을 다시 내려놓자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내가 요구한다면 어떡할 것이오?"

저 고요한 평정을 깨트리고 싶은 일종의 오기였다. 정왕의 도박이 꽤 성공했는지, 종주는 조금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정왕은 이런 사소한 도발에 희열을 느끼는 스스로가 졸렬하다 생각했으나, 이 허약하고 속 모를 서생 앞에서 그는 늘 서투르고 어린 소년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은 착각에 휩싸인다.

"전하께서 저를요?"
"본왕이 선생을."

그대를, 그대의 몸을. 그 말은 입 속으로만 되뇌인다.

"..전하께서 원하신다면야, 제가 못 드릴 건 없지만."

종주의 입술이 살짝 머뭇거리다, 답을 한다. 정왕의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다시 한번 종주의 입술과 목덜미에 닿았다.

"그래도 전 거절할 겁니다. 전하께 절 드린다 해서 제가 원하는 건 얻지 못할테니까요."
"그게 무엇이요?"
"전하의 신뢰입니다."

종주는 쓰게 웃었다.

"그것을 얻으려면 하수로는 성사되지 않을 것 같거든요."

@eiosolu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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