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이게 뭐야?"


어린 카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펼친 책 페이지에는 보기 드문 고대 벽화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백발의 천사가 제게 절을 하는 사람들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축복을 읊어주는 장면. 아슈는 카이가 가져온 책의 표지를 슬쩍 들춰보았다. '잊혀진 천사 신전'이라 쓰인, 이제는 사용되지 않는 언어로 금박 된 책제가 눈에 들어왔다. 서재 깊숙한 곳에 넣어뒀던 책을 잘도 찾아왔네. 아들이 대견했는지, 어린 카이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어준 아슈는 그를 들어 올려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이건 옛사람들이 천사님께 기도를 올리는 벽화란다."

"왜 기도를 하는데?"

"지옥의 불길에 떨어지지 않도록, 어둠에서 구원받을 수 있게."

"어둠이 나쁜 거야?"


아차. 그림 옆 문헌을 생각 없이 읽어내려가던 아슈는 허를 찌르는 질문에 그제서야 제 실수를 깨달았다. 카이의 맑은 적안이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영민한 아이였다. 아무리 나이에 맞지 않는 힘으로 급격히 자라났다지만, 이미 제 본질이 어둠이란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음, 어둠이 나쁜 게 아니라. 으흠,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한담."


아슈가 곤란한 듯 목덜미를 벅벅 긁으며 머리를 굴리는 사이, 제 아비를 바라보던 카이는 말없이 페이지를 넘겼다. 아슈는 헉, 짧은 숨소리와 함께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하필 다음 장에 나오는 그림이 지옥과 연관된 벽화일 건 뭐람. 악인이란 걸 표현하기 위해 검게 칠해진 사람의 형상들은 경계 없이 펼쳐진 용암의 강 속으로 던져지고 있었다. 아슈는 눈에 띄게 차분해진 카이의 눈치를 조심스럽게 살피다, 그만 책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카이야, 우리 맛있는 거 먹을까?"

"아빠,"

"그래, 우리 아들."

"처음부터 어둠으로 태어난 카이는,"


어떻게 구원받아?







어쩌다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내면에서부터 피가 끓어옳으며, 심장이 강하게 펌프질 했다. 몸이 고동칠수록 의식의 끈은 점점 멀어져 갔다. 눈앞이 흔들리고, 하늘과 땅이 뒤집힌다. 넘어진 걸까? 고통이 느껴지지 않으니 돌아가는 상황을 자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카이는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잔뜩 겁에 질린 채 저를 경계한는 수십 개의 눈동자들이었다. 런너들에게 처음으로 그의 또 다른 자아를 들킨 날이었다. 순수하게 어둠으로만 이루어진 두번째 인격을. 어둠에게 집어삼켜져, 고대의 벽화에서 묘사되던 악인들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커멓게 변한 외형은 평범한 인간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요 며칠 새 조금이나마 가까웠다 생각했던 런너들은 순식간에 카이와 거리를 벌렸다. 현자라는 작자는 대체 저런 놈을 어디서 데려온 거냐며 일곱 광대들에게 언성을 높였다. 종종 두려워하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던 아버지를 볼 때부터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몸이란 걸 다시 한번 확인하니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날은 이곳에 처음 왔을 때처럼 햇빛이 유독 강렬한 날이었다. 인적이 드문 공원 호수 근처에서 눈을 붙이고 있던 카이는 제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는 걸 느끼고 찬찬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뜨거운 여름 바람과 함께 양쪽으로 야무지게 묶은 오렌지빛 머리칼이 살랑였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우물처럼 보는 이를 묘하게 빨아들이는 청자안이 카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네가 여길 어떻게."

"원래부터 내가 즐겨오던 장소였거든?"


그러니까 이제 그만 비켜줄래. 혼자 있고 싶어. 말과는 달리, 그녀의 주변에는 반투명한 영체들이 부산스럽게 날아다니며 재잘대고 있었다. 핑계는 잘 들었지만 자리를 내어주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들지 않았다.


"... 어차피 혼자도 아닌 거 같은데, 그냥 여기 있게 해주면 안 돼?"

"흥. 방해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그녀는 품에 안고 온 돗자리를 카이가 누운 자리 바로 옆에 폈다. 오늘의 피크닉 장소는 여기야. 그녀가 말을 마치자, 유령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피크닉 바구니와 파라솔을 줄줄이 들고 와 그녀 곁에 내려놓았다. 얼음이 잔뜩 든 아이스박스. 피크닉 바구니와 샌드위치. 찻잔. 티스푼. 각설탕. 찻주전자. 정신없이 허공에 떠다니는 물건들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현기증이 날 듯해서 카이는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너는 잘도 이런 걸 다 갖고 다니는구나."

"유령들만 있다면 어려울 것도 없지. 빌려줄까?"

"필요 없어."


카이는 그 말을 끝으로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구부린 제 팔에 머리를 뉘이고 다시 낮잠을 청하려 했지만, 찻잔 하나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성을 내는 마키 때문에 결국 포기해야 했다.

얼음이 담긴 찻잔이 불만이 가득한 카이의 얼굴 앞으로 불쑥 내밀어졌다. 찻잔을 받자 콧잔등에 주근깨가 가득한 유령이 제 앞으로 찻주전자를 들고 와 차분히 갈색의 내용물을 따라주었다. 어린 소녀 유령도 다가와 그의 찻잔에 각설탕 하나를 밀어 넣곤 수줍게 자리를 떴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방해하지 말라고 할 땐 언제고, 잠도 다 달아나게 만들더니, 이젠 나도 네 피크닉에 참여하라고? 카이는 설명이 필요하다는 듯 마키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못 본 척 티를 홀짝이며 호수를 응시할 뿐이었다. 마셔도 괜찮은 거겠지.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카이는 조심스럽게 찻잔 가장자리에 제 입술을 가져갔다. 정체 모를 갈색의 티는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처음에는 빛깔 때문에 커피인가 싶었는데, 쌉쓸한 맛과 함께 달콤하고 부드러운 끝 맛이 남는 게 제법 마음에 들었다. 잔을 순식간에 비우자, 주근깨 유령이 기분 나쁜 미소를 흘리며 새로 잔과 얼음을 채워주었다.


"... 나쁘지 않네."

"당연하지. 누가 만들었는데."


호수를 응시하고 있던 마키의 청자안은 어느새 저를 향하고 있었다. 눈가에 살짝 머금어진 미소는 평소 딱딱하던 그녀의 표정과 달리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어쩐지 그녀와 눈웃음을 마주치고 있자니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려, 카이는 그만 고개를 돌려버렸다.

애당초 두 사람 다 말이 없는 성격인지라 한번 내려앉은 침묵은 가실 줄은 몰랐다. 유령들의 수다 소리와 풀벌레들의 합창소리 덕에 심심하지만은 않았지만. 사람과 있는 건 항상 스트레스였는데. 그날 이후로 누군가와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이더라. 카이는 그리 생각하며 두 번째 잔을 비웠다.




"... 그날 그거, 뭐였어?"

침묵을 먼저 깬 사람은 마키였다.

"그거라니?"

"왜, 그거 있잖아. 온몸이 악령처럼 시커멓게 변해서는."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뭐, 불편하면 굳이 말 안 해줘도 돼. 그녀는 재빨리 뒷말을 덧붙였다. 가느다란 그녀의 손가락이 들고 있던 찻잔의 가장자리를 조심스레 매만지고 있었다. 아마 제 심기를 건드렸나 싶어 조마조마한 거겠지. 카이는 빈 찻잔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편하냐고? 사실 카이에게 그리 불편한 주제는 아니었다. 게다가 아버지에게 저가 어떤 상태인지 익히 들어왔기에 설명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카이는 되려 마키에게 묻고 싶었다. 정말 알고 싶냐고. 대게 자신의 정체를 껄끄러워하는 건 그가 아니라 남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해 마지않던 판다 가면 너머의 두 검은 눈동자도 저가 어둠에 침식당할 때면 어쩐지 기피하는 듯했으니까.


"나는 ... 인간이 아니야."

"...이든에게서 들었어."

저를 바득바득 경계하던 그 백발의 현자를 말하는 건가. 카이는 한숨을 쉬었다. 그 남자가 이상하리 만큼 자길 싫어하는 건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그 남자가 뭐라 하든? 조심하라고 했어?"

마키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아무래도 그녀의 정곡을 찌른 모양이었다. 허탈한 웃음을 흘린 카이는 저를 묵묵히 바라보는 청자안을 마주했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표정이 없어 보이지만 아마 남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공포. 두려움. 혐오. 혹은 그와 비스름한 감정.


"현자의 말이 맞아. 나는 어둠에서 태어난 괴물이니까."

언제 이 안에서 괴물이 튀어나와 너랑 네 유령들을 잡아먹어버릴지 모른다고. 카이는 제 가슴을 톡톡 두드려 보였다.

"그러니 나랑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게 좋을걸."


마키는 여전히 말없이 자신을 응시할 뿐이었다. 싱거운 그녀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기분이 개운하질 않아서, 이 자리가 불편했다. 난 대체 저 벽창호 같은 녀석에게 무슨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건지. 쓸데 없는 소리를 한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카이는 혀를 쯧 찼다. 난 이만 가볼게. 그는 풀어진 흰 운동화 끈을 다시 꽉 묶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 나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돌아보자, 그녀의 눈동자가 저를 올곧이 직시하고 있었다. 맑은 자수정색 눈동자 속에서 반사된 태양이 작은 불꽃처럼 반짝였다. 그 모습에서 평소와 다른 생기가 느껴졌던건 기분탓일까. 카이는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에 홀린 듯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둠이니 뭐니 하는 건 잘 몰라. 내 주변엔 유령밖에 없으니까."


렇지만 나를 구해준 그날, 너에게서 빛이 났어.


흐릿해지는 의식과 검게 변하는 시야. 그 속에서 저 석양처럼 붉게 반짝이는 네 눈동자를 보았어. 악령을 쥐어뜯는, 핏줄이 불거진 너의 큰 손과 어딘가 화가 난 듯한 표정. 네가 빛나 보였던 건 유독 그날 정오의 햇빛이 강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어.


"그날 본 너는 적어도 괴물은 아니었어."

"..."

"그러니까, 그런 멍청한 소릴 한 번 더 지껄이면 유령들로 혼내줄 거야."


그리 말한 마키는 제 프릴 치마를 탈탈 털고선 이만 들어가 봐야겠다며 돗자리를 접었다. 잠시 석양의 감성에 젖어있던 유령들도 곧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파라솔이 접히고, 여기저기 널브러진 두 사람의 찻잔이 얌전히 피크닉 바구니 속으로 들어갔다. 주전자와 찻잔이 부딪치며 짤랑이는 소리가 들렸다. 먹다 남은 마지막 샌드위치 조각은 유령들의 손에 잘게 찢어져 호수로 던져졌다. 잔잔한 파동이 수면 위로 나타나며 물고기들이 빵조각으로 주둥이를 들이밀었다.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호수의 검은 수평선 너머로 반이나 자취를 감추었다. 석양의 반대편에서 드리우는 밤을 머금기 시작한 호수가 시커먼 벼룻색으로 물들어갔다.


카이는 제 뺨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열이 잔뜩 오른 듯 양 볼이 뜨겁다. 귓가에서 도곤도곤 심장소리가 울린다. 너에게서 빛이 났어. 그리 말하는 마키의 잔상을 떠올릴 때마다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린다. 이상하리만큼 심장이 저릿한데, 마냥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갑자기 왜 이러지? 설마 어둠이 또 부족해진 건가? 카이는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괴로울 정도로 아프진 않은데.


"뭐 해, 거기 계속 서있을 거야?"


그럼 밤새 그러고 있던가. 마키가 냉담하게 말하며 돌아서자, 그제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카이는 재빨리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자박자박 두 사람이 잔디를 밟는 소리가 삽상했다. 지는 노을을 따라 뒤로 길게 늘어진 둘의 그림자가 겹쳤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닿을 듯 말 듯 가까운 손 끝에 시선이 자꾸 가는건 어째서일까. 카이는 제 얼굴 위로 연거푸 마른 세수를 하며 달뜬 열을 식혔다. 새빨간 고추잠자리 한 쌍이 호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타고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인간의 아이들은 사랑스럽구나, 사랑스러워. 그리 속삭이면서.

칸나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