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났어요?"

여지 없이 눈을 뜨는 순간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들려오는 그의 밝은 목소리에 모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작전 실패다.



시진의 자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부대에 모연을 위한 방 한칸이 마련되었고, 시진은 모연이 잠에서 깰 때부터 잠 들 때까지 일할 때 빼고는 하루종일 그곳에 들러붙어 있었다.

문득 시진의 자는 얼굴이 보고 싶어진 모연은 어젯밤, 특별히 여기서 재워주겠다며 시진을 부둥켜 안고 나란히 누워서 한참을 토닥토닥 해주었다.

근데 이 남자는 말 안 듣는 초등학생처럼 자라는 잠은 안 자고 눈을 빤짝 뜬 채 자꾸 장난을 치는 거다.

"눈 감습니다아."

"감았는데."

"아닌 거 다 알거든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강선생이. 눈 감고서."

"아 진짜!"

모연이 신경질 내며 눈을 뜨자 시진이 기다렸다는 듯 이마에 쪽 입을 맞췄다.

"이쁘네."

"내가 이쁜 건 하루이틀 일 아니고, 유시진씨는 지금 안 이뻐요. 뽀뽀한다고 풀릴 줄 알아?"

"응, 입꼬리 안 올라가네요."

"자자는데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요?"

"자요, 자. 자자니까? 눈 감아요, 강선생."

"유소령님이 먼저 감아요."

"감았습니다. 됐죠."

눈을 감아보이고는 배실배실 웃는다.
어휴 저걸 때릴수도 없고, 하고 눈을 감았더니 또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잡시다."

"네, 자요."

"자자고요, 좀. 우리 잡시다, 유시진씨. 난 지금 유시진씨랑 자자는 거거든요, 장난 치자는 게 아니라."

"자요, 자자니까. 강선생 왜 안 자고 쫑알대요."

어휴.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있자니 웃음 섞인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근데...강선생, 대사가 야해."

"야!!"



결국엔 같이 자는 걸 포기하고 니 방 가서 자라며 시진을 쫓아냈다.

내일 아침 일찍, 진짜 정말 일찍 일어나서, 유소령님 방으로 건너가야지. 꼭 자는 얼굴을 포착 하고야 말테다.

알람까지 맞춰놓고 잠에 들었는데
깨보니까 저 남자가 벌써 내 방에 들어와 있다.



시진이 자는 모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잘 자네. 이젠."

한동안은 불을 끌 때마다 불안해 하더라니.
이제는 제 손으로 불을 끄고 날 막 쫓아낸다.

"씩씩해서 이쁘네요. 우리 강선생."

그녀가 불안해한다는 핑계로, 매일밤 그녀의 잠자리를 지켰다.
악몽이라도 꾸는지 미간이 찌푸려질 때면 가만히 손을 잡아주었다.
그러고 있자면 그녀가 다시 편안해하는 것이 못 견디게 좋았다.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게, 도와주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그녀가 있어 준다는 게
아직도 꿈만 같았다.





"겁나 많이 봤지 말입니다."

정이병의 말에 모연이 배신감을 느꼈다.

혹시, 유소령님 자는 거 본 적 있어요? 하니까 중대 전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실비실 하길래 혹시 아예 못 자는 건가 싶어 걱정했더니만! 그냥 내 말만 안 듣는 거였어!

"보고드리러 중대장실 들어 갈 때마다 졸고 계십니다."

"차에서도 계속 주무십니다."

"저번엔 걷다가도 조셨지 말입니다. 나무에 들이받을 뻔했습니다."

"사격 훈련 하다 조시는 거 같아서 기겁하고 총 뺏었지 말입니다."

모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불면증인가.
왜 밤에 잠을 못 자고, 대낮에 저렇게 존대?
미뤄뒀던 데이트를 할 때가 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트 하자면서요."

"데이트 온건데."

"이건 병원 같이 생겼는데. 나 영어 읽을 줄 아는데, hospital이라고 써 있지 말입니다."

불만스레 말하던 시진이 모연을 홱 돌아보며 여기저기 살폈다.

"강선생, 어디 아픕니까? 다 나은 거 아니었어요? 어디가 아픈데요?"

자기 아픈 거엔 그렇게 무감각 하면서 이럴 땐 하여간 엄청 호들갑이다.

"다 안 나았죠. 당신도 나도. 가요, 여기 정신과 있어요. 데이트면 콜이라면서요. 상담은 영어로, 영어 되죠?"

"영어야 되지만...근데 나는 왜요?"

정말 꾸준하게, 자기 아픈 건 모르는 사람이다.





"잡니다."

그 사람 잠은 좀 자나요? 깜빡깜빡 조는 거 말구 제대로 누워서.
라는 질문에 대영이 확실하게 대답했다.

서상사님 말은 믿을 수 있다.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는 분이니까.
다행이네.
그러나 대영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낮잠 잠깐씩 누워서 잡니다."

"...왜 밤에 안 잔대요."

"밤에는 강선생 자는 거 봐야 한다지 말입니다."

"......"

대영은 차렷 자세 유지한 채 사무적으로 말했다.

"강선생 혼자 두면 사라지는 줄 압니다, 중대장님은. 강선생 의료 캠프 갔을 때나 마이랑 놀러갔을 때, 중대원들이랑 있을 때쯤에나 기어들어가서 조금씩 잡니다."

"그럼 그냥 한 방에서 계속 같이 잘까봐요, 방 따로 쓰지 말고."

대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못 잘 겁니다. 강선생 옆에서는."





"선생님이 뭐래요?"

먼저 상담이 끝나고 기다리던 시진에게 모연이 쪼르르 달려가서 손을 잡으며 묻자 시진이 웃었다.


"어째 대사가 바뀐 거 같은데. 방금 상담실에서 나온 건 그 쪽 아닙니까?"

"음, 나는..."

상담은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걱정할까봐 엄마나 지수, 시진에게도 자세히 얘기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울면서 의사에게 쏟아내었다.

물이 들이 닥칠 때의 공포. 내가 팔려가는 상품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의 자괴감. 누구도 모르는 곳으로 보내진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절망. 누군가 강제로 내 몸을 탐하려 할 때의 수치심.

그리고 죄책감.

시진이 키스를 해 올 때, 가슴 벅차 이 남자의 품에 자신을 던지려 하다가도
그의 손이나 입술이 목덜미에 가 닿는 순간 저절로 몸이 굳었다.
양 손목이 꽉 눌린 채 침대에 눕혀졌을 때 목에 와 닿던 축축한 입술의 감촉이 스쳐지나갔다.
아주 잠깐, 잠시만 몸이 굳는데도 그는 어떻게 알았는지 늘 하던 것을 멈추고 포근히 안아주었다.

이게 아닌데, 하며 모연은 점점 조급해져 그에게 매달렸고 그 때마다 몸이 굳었다.
시진은 점차, 따뜻한 포옹과 가벼운 뽀뽀밖에 해주지 않게 되었다.

그를 거부하려는 게 아닌데. 그는 그 징그러운 새끼들과 전혀 다른 사람인데. 내가 얼마나 그에게 안기고 싶었는데.


"(당신은 굉장히 강한 사람이네요.)"

모연의 수면 패턴, 식사 시간과 식사량, 그리고 무슨 생각이 드는지에 대한 설문지까지 꼼꼼히 체크한 의사가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그런 일을 겪고 그 정도의 거부반응이 남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죄책감 갖지 말아요. 상담 내용은 비밀이라 자세히는 말 못하겠지만, 내가 본 당신 애인은 얼마든지 기다려 줄 수 있는 사람이에요. 절대 당신과 자신 사이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에요. 조급해 하지 말아요.)"

그 말이 엄청난 위안이 되었다.
밀어내는 자신의 모습에 그가 상처를 받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래도 이 정도면 건강하네요. 몸도 마음도. 굉장히 강해요. 지금은 오히려 당신 애인 쪽이 더...)"

의사가 말을 멈추고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지인을 연달아 상담하면 이게 문제라니까. 미안해요. 상담 내용은 비밀.)"

"(내가 강한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이 약한 건 더더욱 아니고.

모연은 그쳤던 눈물이 다시 도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그 사람이 지탱해 준 거에요. 그 사람은 내가 무너질 틈도 주지 않았어요.)"

처음엔 어둠 속에서 눈을 뜰 때마다 무서웠다.
내가 어디 있는지, 지금 살아는 있는건지, 오늘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 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어둠 속에서 따뜻하게 손을 잡아오는 그가 있었다.

혼자 남겨질 때마다 불안했다.
갓난쟁이도 잠깐씩 혼자 남겨지는데, 다 큰 주제에 시야에 사람이, 아니 시진이 없으면 불안했다.
그런 그녀에게 그는 꼬박꼬박 분 단위로 보고해주었다. 십삼분 후, 정확히 십삼시 삼십분까지 돌아옵니다.
군인 아니랄까봐 그는 칼 같이 시간을 지켰고, 그가 떠나도 말한 시간이 되면 다시 볼 거라는 걸 알자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그의 체온을 느끼고 그의 농담에 웃고 그의 시선 속에 안심하면서

나는 확실히 돌아왔고, 악몽은 끝났고, 이제 그의 품 안에서 안전하다는 것에 익숙해지기까지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지탱해 줄 수 있죠? 그 사람을?)"

-강선생 시신...아니, 강선생인 줄 알았던 시신을 본 날 이후로 잘 때마다 악몽을 꿉니다, 중대장님은. 처음엔 그래서 아예 안 자더니...어떻게 잠이 들면, 식은땀에 젖어 강선생 이름을 부르며 깨어납니다. 그 모습을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강선생 옆에서는 못 잘 겁니다.

대영은 담담하게도 말했다. 지난 몇 달 간, 시진은 한번도 제대로 잔 적이 없었노라고.

그리고 그녀가 옆에 있어주는 것도 도움이 되지 못할 거라고.

"(답은 아마 당신이 알고 있을 거에요. 한가지 확실히 얘기해 줄 수 있는 건)"

의사가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이미 그를 지탱해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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