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평생 숙원 중 하나는 물에 뜨기였다. 

우리 엄마는 물을 굉장히 무서워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엄마가 어느 날 수영을 배우겠다 선언했다. 우리 가족은 깔깔 웃었지만, 엄마는 그에 굴하지 않고 집 근처 문화센터에 등록했다. 일주일쯤 지났을 무렵 발차기 연습을 끝낸 다른 아줌마들은 하나둘 물에 뜨기 시작했다. 그때 엄마는 물속에서 걷고 있었다. 시간이 더 지나자 허리 깊이의 유아풀을 떠나 성인풀로 옮겨가는 우등생 회원 역시 생겼다. 그치만 우리 엄마는 그냥 걸을 뿐이었다. 그래도 엄마는 인내심이 강하고 성실했기 때문에, 한 달쯤 지나자 정말 천천히 물에 뜰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두 달 조금 넘게 지나자 스티로폼 판을 잡고 많이는 아니지만 앞으로 나갈 수도 있게 됐다. 발목 깊이의 물에도 절대 들어가지 않았던 엄마가 수영을 한다니 우리 가족에겐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

삼 개월이 지났을 무렵 수영 강사가 교체됐다. 실력에 별 진전이 없었던 엄마는 기초반에 남아있었는데, 그런 엄마에게 새로 온 강사가 물었다. 수영 얼마나 배우셨어요? 엄마는 시끄러운 수영장에서 큰 소리를 내어 대답하는 대신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였다. 석 달을 의미했다. 그러나 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삼 주?"

엄마 역시 이 이야기를 전하며 웃었지만 결국 그다음 달부터 수영 대신 요가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로 엄마가 물에 들어가는 걸 본 기억은 없다.

우리 가족은 모두 체구가 작고 말랐다. 운동 신경 역시 부족하다. 겉으로 보기에도 딱히 건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고, 실제로도 별로 건강하지 못하다. 나는 2.6kg으로 태어났다. 신생아는 2.5kg부터 저체중아로 분류하는데, 고작 100g 차이로 저체중아 신세를 면한 것이다. 그렇게 조그맣게 태어나서, 같은 연령대의 평균 체구보다 작은 상태로 커왔다. 그러니까 난 늘 작고 약하고 어린 사람이었다. 

나 역시 수영을 배웠다. 그것도 꽤 오래, 거의 4년을 넘게 배웠으나 수영을 잘하는 편은 아니고 겨우 버둥버둥 앞으로 떠 가는 수준이다. 그래서 엄마의 저 웃긴 일화가 마냥 웃기게 들리지 않았다. 나 역시 몸으로 하는 모든 것들에 있어서 3개월을 꾸준히 노력해야 겨우 남들 3주 한 만큼 해낼 수 있었다. 

우습게도 '목숨 부지하기' 역시 몸으로 하는 일이었다. 나는 꽤 어렸을 때 부터 살기가 싫었다. 매번 격렬히 죽고 싶었던 건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사는 걸 좀 쉬고 싶었다. 남들보다 한 살 일찍 유치원에 들어간 나는 또래 아이들에게조차 귀여움의 대상이었다. 유치원 친구들은 날 귀여워했고, 간식이나 스티커 등을 나눠주었으며, 나를 보살펴 주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소꿉놀이를 할 때면 늘 아기 역할을 맡아야 했다. 다들 재밌게 어울려 노는 동안 나는 응애, 하고 우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모두가 날 귀여워하길 원했지만 동시에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복어가 몸을 부풀리듯 잔뜩 날이 선 채로 날 귀여워하는 사람들을 찔러댔다. 나에게 살아남는 건 너무 고되고 벅찼다.

초등학교 이학년 때, 또래 남자아이가 날 남자 화장실에 밀어 넣었다. 나는 쉬는 시간 십 분 내내 남자 화장실에 갇혀있었다. 수업 종이 치자 날 구경하며 놀리던 남자애들은 깔깔거리며 반을 향해 뛰어갔다. 난 그런 그들을 향해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고 외쳤었다. 초등학교 오학년 때는 같은 반이었던 남자애가 나에게 커터칼을 겨눴다.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난 죽는 거 안 무서워." 그 아이는 그 말을 듣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난 그냥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은 그 친구들이 사실 나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나에겐 세상 모두가 적으로 보인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도 싫고, 나를 귀여워하거나 가여워하는 사람 역시 싫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은 사실 날 좋아했다고 말하고, 나를 귀여워 한다는 사람들은 내가 그저 응애하고 울기만을 원한다. 살아가는 내내 나는 징그럽게도 약자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겠지. 누가 얼마나 괴로웠냐 물을 때 나는 손가락 세 개를 들 것이다.

가끔 남자 화장실에 갇히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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