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드러지게 피어 보는 이를 황홀케했던 봄꽃도 어느새 다 지고 휑해진 나뭇가지에 생생한 잔해들이 남겨지는 시기. 길바닥을 굴러다니는 꽃잎들은 어느 누구의 여린 순정이었나. 마요이는 생기를 입고 서서히 살아나는 거리의 활력을 피해 연습실로 숨어들었다. 연습실의 창문 너머로는 제법 돈을 들여 조성한 듯한 공원이 바로 보였다. ES 건물 주변으로는 시야를 가리는 빌딩도 없어서 풍경이 직관적이었다. 오늘은 알칼로이드의 연습이 없는 날이었지만 마요이는 습관처럼 연습실을 빌렸다. 이전 같았으면 할 일이 없을 때엔 건물 곳곳을 돌아다니며 귀엽고 열정적인 아이돌들의 연습을 지켜보다 몰래 유령처럼 숨어들어 조언을 남겨두고 왔겠으나, 이제는 그가 직접 면대면으로 책임지고 지도해야 할 멤버들이 있었다. 물론 안무와 노래는 이미 완전히 익힌지 오래다. 그러나 누군가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더 완벽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운동화 끈을 고쳐매다 문득, 거울을 올려다보면 5월의 소란과 동떨어진 피곤한 얼굴이 거기에 있다. 눈꼬리는 사납게 치켜올라가고 눈썹은 늘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는 끔찍한 낯짝. 마요이는 말없이 거울 속의 청년을 마주 바라보다 조용히 일어나 오디오의 버튼을 눌렀다. 익숙한 멜로디가 한낮의 정적을 깨고, 보랏빛 머리칼이 바람도 없이 흔들렸다. 하늘이 파랬다.


창문 그림자가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동안 줄곧 쉬지 않고 움직이던 마요이는 어둠이 거울까지 길게 가닿고서야 발을 멈추었다. 그는 터덜터덜 지친 걸음으로 연습실 한편의 의자에 가 앉아 생수병을 반쯤 비웠다. 그리곤 그 곁에서 뒹굴고 있던 컵 젤리를 두 개쯤 먹어 치우고 빈 플라스틱 컵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다음 손을 뻗어 오디오를 껐다. 혼자 있기엔 지나치게 커다란 공간에 다시 정적이 밀려 들어온다. 물처럼 가득 찬 고요는 처음부터 물러난 적 없었던 것처럼 태연히 자리를 잡는다. 정적의 압력이 은근하게 숨통을 죈다. 익숙한 감각이다. 유리의 모양대로 바닥을 비추는 빛이 어느새 붉었다. 마요이는 의자에 늘어져 구름이 흘러가는 모양을 내다봤다. 건물 안에서는 알 도리 없는 바람의 흐름에 따라 희고 부드러운 것은 느릿느릿 형태를 바꾸며 공기의 결에 편승해 끝없이 흘러간다. 마요이는 검은 운동화에 감싸인 발을 길게 내밀었다. 그러나 기울어진 그림자 속에 파묻힌 발끝은 주홍까지 닿지 못한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마요이는 내민 발끝에 이끌리듯 일어나 느리게 스텝을 밟았다.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은 움직임의 모양을 되새기며 한 걸음, 두 걸음, 반쯤 빛을 걸친 채 어둠이 얼룩진 몸뚱아리를 내려다보다 다시 세 걸음, 턴. 타는 듯 붉은 머리칼에 시선이 멎는다.

히이로 씨…?

골몰한 듯 마요이를 빤히 바라보던 히이로는 한 박자 늦게 깨어나듯 반응한다. 응, 마요이 선배. 히이로는 연습실의 입구에 서 있었다. 왜 들어오지 않고… 아, 제가 방해된 것이로군요. 죄송합니다, 추한 모습을 보여버렸어요. 마요이의 입에서 자기비하며 의미 없는 사과 같은 것들이 자동응답기처럼 줄줄이 흘러나온다. 히이로가 연습실 문턱을 넘어 들어와 문을 닫았다. 

"아니야, 마요이 선배. 방해되지 않았어. 오히려 내가 방해한 것 같네. 미안."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 따위에게 방해씩이나… …그런데 여긴 웬일로 오셨나요? 오늘 알칼로이드는 연습이 없습니다."

"지나가는 길에 소리가 들려서 와봤어. 알칼로이드의 곡인 것 같았거든."

히이로는 의자 옆에서 나뒹구는 빈 젤리 컵과 생수병, 평소보다 더 흐트러진 마요이의 머리 모양 따위를 눈으로 훑는다. 혼자 연습한 거야? 붉은 노을빛이 더 붉은 히이로의 머리칼 위로 쏟아져 내렸다. 마요이는 그 붉음에 반쯤 정신이 팔려 흐지부지 대답한다. 네에, 여러분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저부터가 완벽해져야 하니까요.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붉음이 지척에 다가와 있다. 그런데 아까 추던 춤은 뭐였어? 마요이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을 물러섰다. 그건… 왈츠, 였어요. 왈츠? 히이로는 더 가까이 오지 않고 물러선 마요이를 건너다보며 묻는다. 네, 어릴 적에 어깨너머로 본 게 전부라 부끄럽게도 아는 건 없지만요…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히이로의 머리통이 불쑥 마요이 눈앞으로 디밀어진다. 나도 가르쳐주면 안 될까? 히익, 마요이가 반사적으로 몸을 물렸지만 한 걸음을 채 가지 못하고 창문에 등을 부닥치고 만다. 퇴로가 막힌 마요이는 꼼짝없이 히이로의 얼굴을 마주본다. 창밖으로부터 온 빛을 정면으로 받아내는 히이로의 얼굴은 지나치게 눈이 부셔 똑바로 보기가 어려웠다. 그 얼굴에 마요이가 드리운 그림자가 걸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요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도 잘 모르는 춤인데… 그럼 마요이 선배가 아는 만큼만 알려줘. 처음부터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필패의 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연습실의 한 가운데에 마주 보고 서서 손을 맞잡고 등을 감싼다. 주홍빛 노을로 적셔진 히이로의 손은 보기와 달리 서늘했다. 아니 격렬히 움직인 마요이의 몸이 채 덜 식은 탓인가.

"저도 잘 알지 못하지만… 그냥 제가 가는 대로, 따라오시면 됩니다."

"응, 마요이 선배."

대답만은 한결같다. 괜스레 손 아래서 온기를 뿜어내는 히이로의 단단한 등을 의식하며 마요이는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 원, 투, 쓰리. 둘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음악도 없이 연습실을 빙글빙글 누볐다. 느린 박자로 걸음을 옮기면서 마요이는 꼭 세상에 단둘만 남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연습실 하나를 가로지를 뿐인 걸음이 지구를 가로지르는 것 같았다. 물 같은 고요가 지나온 궤적을 따라 밀려들며 흔적을 지웠다. 그러나 황혼의 다정에 데워진 탓인가 수온은 아까처럼 차지 않다. 마요이는 서늘한 히이로의 손에 저의 체온이 옮겨붙어 두 사람의 손이 조금쯤 따뜻해지고 조금쯤 식는 것을 느낀다. 마음에 드는 이염移染이었다. 


마요이 선배. 

네. 

나 잘 하고 있어? 

네, 아주 잘 하고 계세요.


실제로 히이로는 아직까지 한 번도 마요이의 발을 밟지 않았다. 제법 진중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기는 양을 보고 있자니 심장께가 근질거렸다.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히이로의 눈은 사냥꾼을 연상케했다. 풀숲에 몸을 숨기고 숨죽인 채 사냥감을 주시하는 첨예한 눈빛. 실제로도 고향에서 사냥을 해 본 적이 있다고 했던가, 그건 아니었나… 물 흐르듯 새는 생각을 따라 흘러가다 삐끗, 스탭이 엉키고 만다. 마요이의 무릎이 완전히 꺾이기 전에 히이로의 손이 허리를 단단히 붙든다. 괜찮아, 마요이 선배? 마요이는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히이로가 목표로 하는 사냥감이 무엇인지, 지금 막 그 눈에서 읽어내고 말았기 때문에. 히이로가 눈을 깜박이면, 푸른 눈동자에 비친 마요이도 함께 점멸한다. 어느새 노을도 다 저물어 사위가 까맸다.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누구도 말이 없었다. 영원 같은 찰나가 스치고, 마요이가 히이로를 밀어내며 몸을 바로 세운다. 아니, 세우려고 했다. 히이로가 마요이를 놓아주지 않아 그건 시도에만 그쳤다. 히이로 씨…?


아름다워, 마요이 선배.


히이로가 불쑥 말했다. 

네? 


노을빛을 받으며 춤추던 선배가 너무 아름다웠어.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춤이 아름다운 건 줄 알고 마요이 선배에게 춤을 가르쳐달라고 했는데, 춤이 아니라 선배가 아름다운 거였어.


마요이는 부정의 말을 읊는 것도 잊고 숨을 멈춘다. 그 말을 하는 히이로는 지금까지 봐 온 그 어느 순간보다도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마요이에게. 그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마요이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어떤 짜릿함을 느낀다. 마요이는 천천히 허리를 세우고, 히이로는 마요이의 눈을 곧게, 곧게 들여다보다 이번에는 순순히 그를 놓아준다. 등을 받치던 손은 마요이의 날개뼈를 스치며 아주 천천히 떠나갔다. 자세를 바로 한 뒤에도 둘은 한참 말이 없다가.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이만 갈까요.

마요이의 나직한 음성이 둘의 주변을 가볍게 휘돌고, 창문 너머에서 희미한 벌레 울음소리가 새어들어온다. 달이 밝은 밤이었다.


바야흐로 여름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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