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르카인은 이전에도 본 적이 있는 2층짜리 주택 앞에 곧게 선 채로 잠시간 문짝을 응시했다. 통지서를 받은 다른 입장객들처럼 차분히 신성 기사를 기다리고 있을 미르엘라의 집을.

 

지난여름 데이안과 함께 ‘그믐’에 방문했던 날 이후로 미르엘라를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물론 순찰을 돌면서 멀리서나마 얼굴을 본 적은 있다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하기는 근 한 달 만이었다. 어째서인지 위험하다는 느낌이 든다는 핑계로 열심히 미르엘라를 피해 다닌 덕택에 결국 터무니없이 심각한 용건으로 다시 마주치게 된 셈이다. 하필 그 두려움을 외면하지 말자고 결심하기가 무섭게.

 

 

“아, 하르카인 님이었군요. 오랜만에 뵈니 반갑네요.”

 

 

까닭 모르게 긴장한 마음으로 문을 두드린 하르카인은 몸소 맞이하러 나온 집주인을 보고 놀란 티를 내지 않았다. 왠지 미르엘라라면 시중인을 두고도 직접 문을 열어주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미르엘라는 하르카인을 낮은 탁자가 놓인 넓은 거실로 안내했고, 하르카인은 안락의자에 앉아 미르엘라가 물을 따라주는 양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푸른빛이 도는 회색 벽지가 미르엘라의 어깨 너머로 침착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집 내부는 다분히 그 주인을 닮아 있었다. 불필요한 장식품을 최소화한 듯 그 흔한 벽걸이 양탄자 하나 없었으나 다양한 군것질거리로 채워진 그릇이라든지 손때 묻은 소형 책꽂이 따위의 소품에서 생활감이 여지없이 묻어나왔다.

 

무엇보다도 미르엘라의 공간에는 은은한 흰달꽃 향기가 배어 있다.

 

하르카인은 집에 발을 들이자마자 맡은 향의 정체를 뒤늦게 알아챘다. 그러고 보니 문에서부터 거실까지의 짧은 복도에 꽃병이 있었더랬다.

 

흰달꽃. 화려하지도 않고 망월이 뜨는 밤에만 덧없이 꽃잎을 펼치되, 도리어 그렇기에 자꾸만 눈길이 가는 꽃.

 

환한 보름달의 빛을 머금은 신성 기사는 바로 그런 흰달꽃이 미르엘라와 잘 어울린다고 수긍했다. 수더분하면서도 한편으론 그 속내를 쉬이 헤아릴 수 없다는 점에서.

 

그래서 미르엘라는 흰달꽃의 향기를 모든 공간에 스며들게 할 만큼 좋아하는 것일까…….

 

아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하르카인은 불쑥 솟아오르는 궁금증을 모른 체하려 노력했다. 하여간 미르엘라와 있으면 끊임없이 생각이 다른 곳으로 튀어 문제였다. 당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길이 없어 제 자신이 한심할 지경에 이르렀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아시다시피 이틀 전 열렸던 전시회 입장객들을 한 분씩 방문하고 있습니다. 방락자와 접촉하지 않았을지언정, 혹여 발생할지도 모르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함이니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그럼요.”

 

 

이내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한 은발의 신성 기사는 곧장 닿아오는 신뢰에 부끄러워졌다.

 

황실의 인허까지 얻어 모든 입장객의 주소를 얻고 난 뒤, 하르카인은 행여나 지원 인력이 이 부근을 탐문할까 남몰래 근심했더랬다.

 

디알브는 하르카인과 데이안의 담당 구역이었으므로 이 지역 수색도 그들이 해야만 마땅하지 않겠나. 게다가 구민들로서도 이 걱정스러운 사태에서 그나마 익숙한 신성 기사와 얼굴을 맞대는 편이 낫다.

 

이처럼 누구나 납득할 만한 합리적인 주장이 순조로이 받아들여져 하르카인이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주장이 완전히 거짓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으나, 미르엘라의 상태를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안심이 되겠다는 사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막상 저 말간 낯을 마주보면 수치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추했다. 으뜸된 맹약의 신이 내린 하명을 따르는 과정에 감히 사사로운 감정을 섞었다.

 

불경하다. 지금은 불행 중 다행으로 신성 기사로서의 의무와 개인으로서의 사심이 같은 방향에 이르렀지만, 만약 그러하지 않은 순간이 온다면? 차마 저울질할 수 없는 것을 고민하는 날이 온다니. 가정만으로도 불손했다.

 

 

“괜찮으세요?”

 

 

믿음직하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것을 반성하며 하르카인은 금세 마음을 다잡았다.

 

 

“네. 그럼 이제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충직한 신의 기사가 머릿속으로 기도문을 외웠다.

 

매개체 없이 직접적으로 신성력을 사용해도 될 것을 허락받았다. 여러 명을 약식으로 빠르게 검사해야 하는 특수한 상황인지라 매번 장검을 빼들고 의식을 치를 순 없었다. 아무리 성검이 무해할지라도 일단은 칼날 자체가 불필요한 공포감을 조성시킬 우려가 있는 탓이다.

 

 

“제게 손을, 내어주시겠습니까.”

 

 

하르카인은 제 큼지막한 손을 내밀며 말을 더듬지 않도록 애썼다.

 

기실 손등만 슬쩍 맞대어도 상관없었다. 악을 품었더라면 신성력과의 미미한 접촉만으로도 괴로워할 테니까.

 

이러한 사실을 꿈에도 모를 미르엘라는 한 치의 거리낌 없이 왼손을 신성 기사에게 맡겼다.

 

살포시 맞물린 두 손. 어쩐지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맞닿은 손 틈 사이를 채우는 열감이 너무나도 생생히 느껴진다. 불에 덴 듯 뜨겁다는 착각이 들 만큼.

 

신의 우직한 검이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자꾸만 모든 신경이 손끝으로 향하는 것은 단지 신성력을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신의 뜻을 보다 확실히 지키려는 것뿐이었다.

 

 

“따듯하네요.”

 

 

톄무하브에게서 부여받은 하르카인의 거룩한 기운이 신기한 듯 미르엘라가 눈을 살짝 키운다. 새까만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여전히 미르엘라의 손을 잡은 기사는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불결하기 그지없는 무저갱의 심연 같기도, 더없이 거룩한 별하늘의 공백 같기도 한 암흑이 그 안에 담겨 있다. 하르카인은 어느덧 희미하게 입가에 번지는 미소까지 기억에 꼭꼭 담고 나서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더랬다.

 

 

“특별한 부상이 없더라도 몸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정도는 해도 괜찮다고, 잠깐만 맞잡고 있는 것쯤은 문제가 아니라고, 신의 종은 그 자신마저 속인다. 왜 이러는지조차 모르면서.

 

 

“……끝났습니다.”

 

 

포개어진 손이 아쉽게 떨어진다.

 

미르엘라의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십 초가 십 분처럼 길었다. 미르엘라의 손에서 미지근한 온기를 받아들이는 십 초가 찰나처럼 짧았다.

 

조금은 메마른 감촉이 아득한 후회처럼 손바닥에 남는다. 마냥 대접만 받고 살아오지 않은 사람의 손이었다.

 

하르카인은 비로소 미르엘라의 지나온 삶이 궁금해졌다. 이 자리에 있기까지 어떤 길을 거쳐 왔을지 알고 싶었다.

 

보육원에서는 어떻게 지냈는지, 어리석은 녀석들에게 듣지 않아도 될 소리를 또 들었는지, 보육원 서고에서 어떤 책을 가장 좋아했는지, 독립은 언제 했는지, 따로 교류하는 친구가 있는지, 독립한 뒤에는 무엇으로 생계를 꾸렸는지, 후원자가 있었는지, 그게 아니라면 혼자서 힘들지는 않았는지, 희귀한 골동품으로 가득한 ‘그믐’을 어떻게 운영하게 되었는지…….

 

의심과 호기심은 한 끗 차이다. 그 간극이 너무나 교묘하여 그를 떠올린 주체마저 자각하지 못할 만큼.

 

단 한 가지 확언할 수 있는 것은, 하르카인이 미르엘라에 대하여 더 알고 싶어 한다는 사실뿐.

 

 

“이번 사건이 잘 마무리되면 좋겠네요.”

 

 

하르카인은 미르엘라의 미소가 어딘지 씁쓸해 보였다고 생각했다.

 

 

“안녕히 계십시오. 그럼, 약속된 평안과 함께이길…….”

 

 

달빛 머리칼의 신성 기사는 부디 몸조심하라는 다정한 배웅을 뒤로 하며 집을 나섰다. 왼쪽으로 꺾어 다음 주소로 향하는데, 바로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갓 열아홉쯤 되었을까. 꿀이 흐르는 듯한 금발과 가을하늘 같은 푸른 눈동자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사내의 뽀얀 얼굴을 채우고 있었다.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놓인 그가 신성 기사를 알아보더니 해맑게 눈웃음치며 고갯짓했다.

 

 

“수고 많으시네요, 기사님.”

 

 

상냥한 인사에 하르카인이 반사적으로 묵직하게 끄덕였다.

 

금발의 청년은 그렇게 하르카인을 휙 지나쳤고, 하르카인은 무심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 뒷모습을 응시했다.

 

못 보던 사람이다.

 

디알브에서 지낸 지도 어언 두 달. 아무리 저자가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일지언정 저토록 낯설 리가 없다. 더구나 하르카인도 미감이 아주 죽지는 않았으므로 저 사내가 퍽 매력적으로 생긴 줄은 알았다. 저렇게까지 이목을 끄는 구민이 있었더라면 필시 유명했으리라.

 

다른 지역 구민이겠거니 결론 내리며 다시금 고개를 앞으로 돌리던 찰나, 사내가 방향을 틀어 들어가는 장소를 확인한 기사의 목이 빳빳하게 굳었다.

 

저자가 왜 미르엘라의 집에 들어가지? 어째서인지 가슴께가 선득했다. 누구이기에 미르엘라의 공간에 저리도 자연스럽게 들어갈까? 친한 친구인가? 아니면 혹시…….

 

아무것도 없는 손바닥을 멍하니 내려다보다 덧없이 쥐었다 폈다.

 

쓰라린 허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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