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웹진인 국민회관 (kookminhall.dothome.co.kr) 에 게스트로 참여했던 글입니다.


David Choi - Happily Ever After





  "안녕?"
  "아, 안녕하세요."
  "오느라 안 힘들었어? 멀미 안 했어?"
  "아 네. 괜찮아요."

  기분이 이상했다. 목소리만 들었던 지민을 이렇게 직접 만나고 있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쨍한 금발 머리를 하고 있는 지민은 그동안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정국이 얼떨떨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느꼈는지 지민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긴 눈을 접어 웃는다.

  "배고프겠다. 밥부터 먹을까?"
  "네? 아 네."
  "뭐 좋아해? 바다 왔으니까 회 먹을까? 아님 초밥? 여기 스테이크도 정말 잘하는 집 있는데."
  "저는 다 잘 먹어요."
  "맞아. 그렇다고 했지 참."

  그나마 상상했던 것과 같은 점이 있다면 지민이 웃음이 많다는 것이었다. 한마디 한마디를 할 때마다 물이 솟아나는 것처럼 온 얼굴에서 웃음이 퐁퐁 솟아났다. 전화 통화를 할 때도 정국의 시답잖은 농담에 매번 웃어주곤 했었는데, 실제로도 지민은 웃음이 많은 것 같았다. 상상하던 모습과는 다르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와 웃음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괜히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정국이 멋쩍은 얼굴을 하고선 또 손등으로 코를 문지른다. 그걸 보더니 지민이 "너 진짜 그러네?" 하며 허리를 꺾고 웃음을 터트렸다. 언젠가 통화하면서 뭔가 어색하거나 쑥스러운 일이 생기면 자기도 모르게 코를 문지른다고 했던 정국의 말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쌍꺼풀 없는 두 눈이 도톰하게 접힌 채 웃는 지민의 웃는 얼굴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귀여웠다.

  "이 주위에는 괜히 돈만 비싸고 먹을 데가 별로 없어. 내가 자주 가는 데 고기 정말 맛있는 집 있거든. 거기 가자. 밖에 차 세워놨어."
  "형 차도 있어요?"
  "에이 설마. 엄마 차 빌렸지. 가방 안 무거워? 내가 들어줄까?"

  나름은 형이라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그렇게 말하는 지민이야말로 반으로 반듯하게 접으면 정국의 커다란 가방 안에 쏙 들어갈 것 같은 사이즈였다. 정국이 괜찮다며 고개를 흔들자 다시 한 번 웃으며 지민이 먼저 발걸음을 돌린다.

  터미널 바깥에 세워둔 검은 색 SUV는 안 그래도 좀 작은 편인 지민을 더 작게 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물론 어머니 차를 빌려온 거라고는 했고, 또 좀 작고 귀여운 사람이긴 해도 꼬마자동차 붕붕 같은 걸 타고 다닐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마티즈나 모닝 정도를 상상했는데 이렇게 차체가 큰 SUV 라니 의외였다. 지민이 먼저 운전석에 올라타자 정국이 옆 자리에 올라탄다. 안전벨트 매, 하며 지민이 자신의 가슴을 톡톡 두드리자 정국도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벗어 가슴 앞으로 껴안고 안전벨트를 했다. 정국이 벨트를 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지민이 차를 출발한다. 부드럽게 운전대를 움직이는 지민의 손등과 손목, 그리고 목덜미 위의 문신 같은 것들은 뭐랄까, 가시가 있는 솜털뭉치 같은 느낌이었다. 요즘 세상에 문신은 그냥 패션으로 하는 것이기도 하고, 레터링이나 작은 문양 같은 것은 지민의 하얀 피부와 잘 어울리긴 했지만 그래도 조금 놀라긴 했다. 아마도 너무 오래 상상 속에서 혼자 멋대로 지민의 이미지를 만들어왔던 탓일 거다. 순박하고 다정하고 착하고 사소한 말에도 푸스스 웃는 바다 소년. 정국이 상상했던 박지민은 그런 모습이었다. 원래가 상상이란 건 멋대로 미화되기 마련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밤이면 클럽에서 광란의 락파티를 즐길 것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정국이 지민을 힐끔거리는 것을 느꼈는지 지민이 룸미러로 그런 정국을 보고 도톰한 입술을 끌어올려 웃더니 라디오를 틀어준다.

  "부모님께는 허락 받았어?"
  "네. 당연하죠. 허락 없이 외박하면 저 그 길로 쫓겨나요."
  "잘했네~"

  잘했네, 하며 웃는 게 정말 꼭 어른이 아이 대하듯 하는 말투였다. 그런데 핸들을 쥔 손은 몸보다도 더 작아서 손만 보면 꼭 아이가 놀이공원에서 붕붕 카를 운전하는 것 같았다. 뼈마디는 굵은 편이라서 여자 손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아무리 봐도 제 손보다 반 마디 정도는 작을 것이다. 핸들을 쥐느라 말아 쥐고 있는 주먹은 꼭 찐빵 같아서, 힘을 줄 때마다 금방이라도 앙꼬가 튀어나올 듯 했다. 이 형은 손도 되게 작네. 정국이 지민의 하얗고 작은 손을 힐끔거리는데, 갑자기 차가 휘청거린다. 지민이 한 손으로 정국의 가슴팍을 막으며 핸들을 쥔 손에 더 힘을 준다. 뒤에서 오던 차가 무리하게 추월을 한 것도 모자라, 꼭 놀리는 듯이 차선을 변경하며 진로를 방해하고 있었다. 지민이 급하게 방향을 틀지 않았더라면 위험 했을지도 모른다. 정국도 놀랐는지 이마까지 금세 훅 열이 올랐다.

  "아 왜 저래요. 저 차 음주운전 아니에요?"
  "정국아. 꽉 잡아."
  "네?"

  네? 하고 묻는 말은 갑자기 부왕 하며 속도를 내는 차 소리에 묻혔다. 지민이 핸들을 돌리며 현란하게 차선을 바꿔 옆 차에 따라 붙는다. 놀란 정국이 한 손으로는 가방을, 한 손으로는 머리 옆에 붙은 손잡이를 잡는데, 계속 생글생글 웃던 지민의 얼굴이 더없이 싸했다. 눈을 날카롭게 치켜뜨며 쯧, 하고 혀를 찬 지민이 미러를 내린다. 정국이 뭐라 말릴 틈도 없었다.

  "야 이 새끼야! 운전을 발로 하냐? 똑바로 안 해? 5분 먼저 가려다 50년 먼저 가고 싶냐?!!! 관 대신 그 차에 곱게 누워서 바다 안에 처박혀 볼래?"

  대뜸 미러를 내리고 소리치는 지민 때문에 놀란 건 정국만이 아니었었는지, 요란하게 진로를 방해하던 앞차 운전자도 눈을 부라렸다. 겨우 20대 초 중반 정도 됐을까 싶은 남자도 미러를 내리고 쌍욕을 하기 시작하는데, 지민이 창문 밖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빳빳하게 들어 "이 거나 먹어랏!" 하며 엿을 먹이고는 바로 속도를 높였다. 뒤에 쳐졌던 차도 속도를 따라 속도를 내는 것 같긴 했으나, 지민의 차가 더 빨랐던 데다가 하필 다음 횡단보도에서 신호가 바뀌면서 이내 멀어진다. 그때까지도 살기 위해 손잡이를 두 손으로 움켜잡고 있던 정국이 겨우 한숨을 내쉰다.

   "저런 새끼들은 병풍 뒤에서 향 냄새를 맡아봐야 정신을 차릴 텐데. 괜찮아? 저 미친 새끼 때문에 많이 놀랐지?"

  아뇨, 하고 대답하긴 했지만 놀라긴 엄청 놀랐다. 물론 다른 의미로. 정국이 걱정되는지 지민이 룸미러로 정국을 봤다가 다시 고개를 틀어 정국의 머리부터 팔까지를 빠르게 훑는다.

  "어휴. 쫓아오는 줄 알고 엄청 쫄았네. 운전 저렇게 하면 진짜 안 되는데, 세상엔 진짜 개새끼들이 너무 많아.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다 그치?"

  그렇게 말하지만 여유롭게 웃는 얼굴은 전혀 걱정한 것 같은 얼굴도, 겨우 안심한 것 같은 얼굴도 아니었다. 정국이 동그란 눈을 꿈뻑이며 그런 지민을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 이상한 사람 중 하나에 형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사라졌다. 왠지 모르게 계속 겸손해진다. 박지민이라는 사람은 바르고 고운 말만 사용할 줄 알았는데 저렇게 사포질 안 한 까칠한 단어도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늘 카톡을 주고 받고 통화를 하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 같았다.

  10분쯤 더 가서 도착한 가게는 소고기 전문점이었다. 단골집인 듯 "이모~저 또 왔어요." 하며 애살스럽게 인사를 하며 들어가자, 사장님으로 보이는 듯한 아주머니도 그런 지민과 정국을 반갑게 맞았다. 아이고 우리 지민이는 이제 장가 안가고 시집가야겠다, 이렇게 맨날 예뻐져 가지고는. 그런 농담에 지민이 "뭐든 가면 좋죠~" 하며 웃는 걸로 봐서도 꽤 친숙한 사이인 듯 했다.

  테이블에 앉아서도 지민은 직접 물을 떠오고, 정국의 앞에 가지런하게 수저를 놓아주기도 했다. 이런 소고기 집은 부모님과 함께 가기만 해서 직접 고기를 구워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연장자한테 맡기는 건 좀 그래서 정국이 고기를 구우려 했으나 지민이 먼저 집게를 집어 들었다.

  "아, 제가 할게요."
  "아냐. 나 고기 되게 잘 구워. 많이 먹어~"
  "근데 소고기면 무지 비싸지 않아요? 저 이런 거 얻어먹어도 돼요?"
  "그럼~ 형이 사주는 거니까 먹어도 돼."

  그렇게 말하며 지민은 또 푸스스 웃었다.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전화통화만 할 땐 폭신폭신 달달한 솜사탕 같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직접 만나니 톡톡 터지는 팝핑캔디 같았고, 그래도 여전히 다정하고 달달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아까를 떠올리면 또 보통 성격은 아닐 것 같아 보인다. 메시지를 주고받거나 하며 친해진 후로는 지민에게 장난도 많이 치고 시답잖은 농담도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하면 당장이라도 머리를 눌려서 무릎을 꿇릴 것만 같았다. 그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정국은 '원래가 운전하는 사람 중에 성질 없는 사람 없고, 욕 못 하는 사람 없다더니 이 형도 예외는 아니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다. 길지도 않은 가운데 손가락을 펼쳐서 아까 그 미치광이 드라이버에게 먹인 엿은 애피타이저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두어 시간이 지난 후였다.


  밥을 먹고 근처 커피숍에서 각각 아이스티와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 해서 차로 돌아와 30분 쯤 더 달리자, 인파가 많았던 해변과는 달리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갯바위에 도착했다. 여긴 현지인들이나 낚시꾼들만 아는 곳이라서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아 좋다고 했다. 정국과 지민은 조금 평평한 바위를 찾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에어컨 빵빵한 차에서 내린 뒤라 조금 더웠는데, 이곳은 바로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제법 시원했다. 지민이 신고 있던 샌들을 벗고는 바위와 바위틈에 고여 있는 물에 발을 담근다. 너도 해 봐. 되게 시원해, 하며 웃는데 손만큼이나 발도 작아서 발가락이 까놓은 포도알 같았다. 자기가 한 생각에 본인도 웃긴지 정국이 헛웃음을 웃자 이유도 모르면서 지민도 괜히 따라 웃는다. 아 귀여워.
 
  "너 수영할 줄 알아?"
  "음 바다 수영은 안 해 봤어요. 수영장에선 자주 해 봤지만."
  "그래? 여긴 눈에 보이긴 얕은데 저쪽에서 갑자기 깊어져서, 그럼 너 하면 안 되겠다."
  "형은 수영 잘 해요?"
  "나야 여기서 자랐으니까. 바다 수영하는 거 좋아. 물 안이 진짜 고요하고 뭔가 따뜻하고 좋거든. 좀 위험할 때도 있지만."
  "형 수영하는 거 보고 싶어요."
  "그래? 보여줄까?"
  "근데 수영복 없잖아요."

  정국이 말을 마치자마자 지민이 벌떡 일어나더니 난데없이 입고 있던 티셔츠를 훌렁 벗는다. 반팔 티셔츠 밑으로 드러난 팔 같은 데를 봐도 근육이 잘 잡혀있다 생각은 했지만, 티셔츠를 벗은 맨 몸은 꼭 바람을 모두 빼고 압축한 것처럼 탄탄했다. 그것만으로도 놀라운데 아직 보여줄 게 더 남았는지 지민이 찢어진 청바지 버클을 풀더니 망설임 없이 무릎 끝까지 단번에 내렸다. 헉, 하고 진심으로 놀라는 소리를 내며 정국이 고개를 돌렸다가 슬쩍 다시 지민을 쳐다보니 안에 미리 수영복을 입고 왔었던 모양이었다. 사실 무릎 위로 올라오는 수영복은 사실 그냥 이름만 수영복이지 짧은 사각팬티와 다를 것이 없어보였다. 정국이 놀라는 모습을 보고 재밌다 는 듯 지민이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저렇게 자기 웃음조차 감당 못해 휘청거리다가 갑자기 뒤로 풍덩 빠지진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와, 진짜. 아 놀래라. 형 진짜 간 떨어질 뻔 했어요."
  "하하. 그렇게 놀랐어? 그냥 진짜로 다 벗을 걸 그랬나?"

  아 예, 그러면 감사. 솔직히 호기심이 한창 왕성한 나이라서 좀 궁금은 하네요.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어 정국이 부러 오버스럽게 으-응, 하고 투정하듯 소리 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민이 준비운동을 하듯 팔을 쭉 뻗어 스트레칭을 하는데, 근육이 있기는 해도 원래 몸통 자체가 작은지 벗고 있으니 더 몸이 작아보였다. 어깨와 흉통도 크지 않은 편이지만 허리엔 정말 살이 하나도 없는데다가 남자치고는 엉덩이가 볼록해서, 허리에서부터 이어지는 라인이 유려했다. 그걸 보고 있으니 또 등 뒤에서 심장이 콩콩 뛰어서 정국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준비운동을 마친 지민이 정국을 돌아보더니 싱긋 웃고는 바위 끝에 선다. 정국도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난다. 지민이 하나 둘, 하고 아이처럼 입으로 숫자를 세더니 이내 바다로 뛰어들었다. 예쁘게 호를 그리며 공중에 머물렀다가 풍덩 바다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푸른 바다 깊숙이 들어갔다가 다시 물 위로 나와 정국에게 손을 흔들었다가 다시 바다 속으로 몸을 감추는 지민은, 꼭 평생을 바다에서 살다가 한 번씩 뭍으로 나오는 사람 같았다. 정국이 다시 바위에 앉아 턱을 괴고 그런 지민을 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손을 흔들었다.

  버스를 타고 오면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했었다. 사실 누군가에게 호감을 보였을 때, 정국은 상대가 그 것을 거절할 거라는 생각 자체를 별로 해 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국을 좋아했으니까. 그동안 편지를 주고받거나 전화 통화를 했을 때 지민 또한 마찬가지였다. 정국이 느끼기에 확실히 지민과의 관계는 단순히 나이 차이를 극복한 우정 정도의 느낌은 아니었다. 그러니 정국도 지민을 만나러 오기로 했을 때는, 확실히 서로가 알 수 있는 정도의 선으로 더 나아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얼굴조차 몰랐던 사람이지만 만나면 더 좋아지리란 막연한 확신도 있었고. 실제로 만나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사람이라 좀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전화를 끊고 자리에 누우면 계속 목구멍을 간지럽히던 아슬아슬한 간극 하나를 더 좁히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했다. 물론 지민이 우락부락한 보통 남자 같지 않고 실제로도 귀엽고 괜찮은 외모라는 것도 한 몫 하긴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박지민이라는 사람에 대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호감이 줄어들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아예 영향이 없었다고도 할 수 없었다. 정국도 아직은 타인의 외모에 호감이 많은 10대 소년이었으니까. 성격이나 말투가 귀여운 지민이 실제로도 귀여운 사람이라 더 좋았다.

  물속에서 유영하던 지민이 마치 인어가 뭍으로 나오는 것처럼 촤르륵 물을 걷어내며 바위 위로 올라왔다. 입고 있던 수영복이 젖어 몸에 밀착된 데다가 머리와 몸이 젖어 있고, 어깨와 손 발, 목덜미가 붉어 저도 모르게 헉 소리가 나왔다. 지민이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다가오는데 어딜 쳐다봐야할지 몰라 정국이 괜히 먼 바다에 시선을 둔다.

  "어때?"
  "아, 어... 예쁘네요."
  "어? 예뻐?"
  "네 예뻐요. 바다도 뭔가 반짝반짝 하고."

  형도 그렇고. 덧붙인 말에 지민이 푸스스 웃으며 옆에 앉는다. 내년에는 너도 같이 수영할 수 있음 좋겠다며 웃는 지민의 옆얼굴이 말갛다. 정국이 괜히 옆에 앉은 지민을 힐끔거리는데, 아무리 봐도 젖어서 달라붙은 수영복과 그 밑으로 드러난 맨 다리가 18세 혈기왕성한 청소년 전정국이 가진 심장의 영 좋지 못한 곳을 스친 듯 했다. 정국이 괜히 머쓱해서 머리를 긁적거렸다가 어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가 다시 지민과 눈이 마주치자 팽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입고 있던 하와이언 셔츠를 단추를 풀더니 벗어서 지민에게 건넨다.

  "음? 이거 왜? 나 여기 벗어놓은 옷 있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수영복이 약간. 아무튼 입어요. 햇볕도 따갑잖아요."

  정국이 제 쪽을 보지 않고 고집스럽게 셔츠를 건네자 지민이 알겠다는 듯 눈썹을 찡긋거리며 웃더니 셔츠에 팔을 꿰어 입는다. 워낙 정국이 몸도 좋고 지민보다 키도 커서인지 셔츠가 허벅지를 덮어서, 왠지 더 심장이 시끄러워졌다. 지민이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턱 끝에 흘러내리는 물을 손바닥으로 훔쳐낸다.

  "정국아. 너 나한테 실망했지."
  "제가요?"
  "응."
  "왜요? 키 짝아서요? 생각만큼 작진 않은데요?"
  "뭐... 그런 것보다 나 실제로 보면 다들 이미지가 너무 다르다고 하더라고. 머리도 그렇고 타투도 그렇고."
  "음... 생각하던 모습이랑 다르긴 했지만 실망은 안 했어요. 뭐 염색이나 문신 같은 거야 요즘 세상에 그냥 패션아이템 같은 거잖아요. 형이랑 잘 어울려요. 형은요? 저 실제로 만나니까... 어때요?"
  "너는 카톡이나 전화할 때도 그랬지만 실제로 봤을 때도 귀여워."
  "그냥 귀엽기만 해요?"
  "어?"
  "저기요 형."

  괜히 손바닥에 땀이 차는 것 같아 티셔츠에 손을 슥슥 문지르며 정국이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한다. 버스 안에서 몇 번이고 혼자 중얼거리며 연습을 했었다. 형 나 좋아해요? 나 그냥 동생으로만 좋아요? 형 우리 만나 볼래요? 형 나랑 사귈래요? 나도 남자고 형도 남자지만 그래도 우리 사귀는 건 어때요?? 그렇게 혼자 연습했던 말들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지민이 거절할 것 같거나, 그래서 관계가 멀어질 것 같아서는 아니었다. 지민의 말처럼 박지민이라는 사람이 늘 상상하던 이미지와 달라서도 아니었다. 그저 정국은 누군가에게 이렇게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것이 처음이라, 이 모든 상황들이 왠지 어색하고 멋쩍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형, 있잖아요."

  정국이 다시 입을 떼는데 그때 지민의 핸드폰이 울렸다. 꼭 이렇지, 드라마처럼. 중요한 말을 겨우 입 밖에 꺼내려고 하면 핸드폰이 울린다. 지민이 "잠시만." 하고 핸드폰을 받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곧 빼드릴게요, 하면서 벗어놓은 옷에서 차 키를 꺼내는 걸로 봐선 아까 세워놓은 차를 빼달라는 얘기 같았다. 정국이 낮은 한숨을 쉬며 함께 따라 일어난다. 이미 타이밍은 놓쳤고, 어정쩡하게 말을 이어가는 것보단 다음을 노리는 것이 나았다. 지민이 금방 차 빼주고 온다고 했지만 저렇게 자신의 셔츠에 제법 짧은 수영복 바지만 입고 가는 것이 어쩐지 맘에 걸려 정국도 지민을 따라나섰다. 금방 차만 빼주고 돌아와 다시 은근한 분위기를 잡고 얘기해 봐야지 생각한 정국이었으나, 생각하지 못했던 해프닝은 꼭 이럴 때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차를 이렇게 좆같이 대 놓을 거면 전화번호라도 크게 써놓든지 시발."
  "저기, 이 정도면 지금 여기 옆쪽으로 충분히 그쪽 차 대실 수 있는데요."
  "지금 내 차가 니 차보다 작다고 무시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옆에도 공간이 충분하고, 방향을 틀기에도 좁지 않은데 대체 왜 그러시는지,"
  "뭐 이 새끼야?"

  차분하게 대답하던 지민의 얼굴이 갑자기 구겨진다. 막상 지민과 정국이 차를 대놓은 곳에 왔더니, 딱히 차에 가로막혀 자신의 차를 빼지 못할 만큼의 협소한 공간도 아니었고, 차 한대가 방향을 틀기에도 충분했다. 심지어 지금 남자의 차는 빠져 나가려는 게 아니라 주차를 하러 들어오던 중인 듯 했다. 그러니까 네 차에 막혀 못 빠져나가니 빼달라는 게 아니라, 결국 내 차를 대야 하니 네 차를 빼라는 소리였다. 하도 얼굴이 빨갛게 익어서 고래고래 고함을 치길래, 그 전에 혹시 다른 차가 막고 있었나보다 했더니 그것도 아니었다. 소리치는 남자에게서 역한 술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저기, 혹시 술 드셨어요?"
  "내가 술을 먹든 말든 어? 좆만한 어린놈의 새끼가 차를 뭣같이 대놓고 처 돌아다닌 주제에 죄송합니다 사과하고 빨리 차나 빼야지 이 새끼야!"
  "단순히 차를 주차하시는 거라도 음주 상태에서 핸들 잡으시면 음주운전이세요."
  "하! 시발. 그래서, 뭐 경찰에 신고라도 하려고?"
  "네. 아무래도 그래야겠네요."

  지민이 그때까지 옷과 함께 들고 있던 핸드폰을 꺼내들고 버튼을 누르려는데, 남자가 그런 지민의 손목을 확 휘어잡고는 끌어당긴다. 지민의 몸이 휘청거리는 것을 보고 정국이 놀라 그런 남자의 팔뚝을 움켜쥔 것도 순식간이었다.

  "손 놓고 말씀하세요."
  "하... 넌 또 뭐야? 이 좆만한 어린 새끼가."
  "이 손 놓으시라구요."
  "새파랗게 어린 새끼들이 진짜. 다 죽고 싶냐?"

  그렇게 말하는 남자도 이제 겨우 30대 초반이나 겨우 됐을 법해 보였는데, 정국은 그렇다 치고 지민 역시 아주 어리게 보는 것 같았다. 정국이 개입되자 차분한 얼굴이던 지민의 얼굴색이 변한다. 정국이 남자의 손에서 억지로 지민의 손목을 빼내고 "형 괜찮아요?" 하고 물었다. 원래도 피부가 하얀 편이라서 그런지 지민의 손목에 벌겋게 손자국이 그대로 나 있었다. 그걸 본 정국의 눈썹이 치켜 올라간다.
 
  "말로 하세요. 왜 사람을 잡고 난립니까? 깡패예요?"
  "이 새끼들이 근데."  

  남자가 손을 올려 그대로 정국의 뺨을 올려붙였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정국의 고개가 돌아가고, 방심했던 탓인지 무게중심이 흔들려 그대로 뒤로 넘어진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쓰러지는데, 하필 거기에 깨진 병조각 같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눈을 찌푸리며 엉거주춤 일어나려는 정국의 볼이 금세 발갛게 부풀어 오르고 손바닥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아픈 것보다는 화가 난 게 더 컸는데, 지민이 그런 정국을 보더니 그대로 부웅 몸을 날린 것은 정말 찰나였다. 꼭 머리 위에 모터라도 달린 듯 작고 가벼운 몸이 순식간에 공중으로 부웅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야 시발, 니가 뭔데 얘를 때려 개새끼야!!!!"

  지민이 그대로 주먹을 날려 남자의 얼굴을 가격하고는 넘어지려는 남자에게 야무지게 니킥을 꽂아 넣는다. 남자가 아까 정국이 그랬던 것처럼 바닥에 나뒹굴자 그대로 남자의 허리 위에 올라탄 지민이 짝 하고 남자의 뺨을 한대 올려붙이고는 이내 다른 쪽 뺨을 주먹으로 후려친다. 남자의 코에서 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도 분이 안 풀리는지 지민이 다시 주먹을 치켜드는데, 그때까지도 넋을 놓고 있던 정국이 그제야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얼른 지민의 팔을 붙들었다. 잔뜩 흥분해서 그런 정국의 팔을 뿌리쳤다가 "형!" 하고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든 지민이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스르르 내렸다. 이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이 싸움 구경에 흥미가 있는 듯 삼삼오오 모여들고 있었다. 지민에게 맞은 놈은 손으로 코 밑을 훔쳤다가 피가 흐르는 걸 알았는지 다시 온갖 육두문자를 내뱉기 시작했다. 고소를 하겠다느니, 감방 신세를 지게 하겠다느니 난리도 아니었다.

  "어쩐지 시끄럽다 했더니 너였어? 어이구... 또 간만에 한 건 하셨네."

  그리고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슬리퍼를 딸딸 끌고 나온 남자가 하나 있었다. 지민의 어릴 적 친구인 정현이었다.

  "뭐야 또. 이 형님은 아까 우리 가게에서 소주 1병 하고 가신 분이네? 근데 여기까지 차를 끌고 오셨어? 어휴 그러게 음주운전도 모자라서 왜 시비를 털고 계세요. 그것도 하필이면 쟤한테. 제가 저 새끼를 좀 아는데, 잘못 걸리면 진짜 두 발로 걸어서 집에 못 돌아가세요 형님. 쟤가 저렇게 작고 순하게 생겼어도 이 동네에선 쟤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놈들이 반이에요. 어떻게, 제가 경찰에 신고를 좀 대신 해 드릴까? 맞아 죽기 전에 쟤 좀 잡아가 달라고?"

  빈정거리는 정현의 말에 온갖 쌍욕을 내뱉던 남자가 한층 수그러진다. 아예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취한 건 아니었는지 본인이 더 불리한 상황이라는 인식은 있는 듯 했다. 정국도 피가 난 이상 폭행은 쌍방이었지만, 어쨌든 음주 운전으로 인한 처벌도 면치 못할 것이다. 게다가 이제야 지민의 팔이나 목덜미의 문신도 눈에 보이고. 저 말이 사실이라면 여기서 싸움이 커져 손해 보는 것은 자신이었다. 본인은 한 명이었지만 이쪽 편은 신체 건장한 남자 애들 셋이 되었으니까. 정국이 지민의 팔을 잡고 일으키자, 그때까지도 분을 못 가라앉히고 가슴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거센 숨을 쉬던 지민이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정현을 본다.

  "...야 너 왜 여기 있어."
  "뭐 인마. 이 동네 땅이 다 니 거냐? 개지랄 그만 떨고 너는 집에나 가. 여기 내가 대충 마무리 지을 테니까."
  "......"
  "저 친구도 좀 다친 것 같은데. 뭐 병원 데리고 갈 정도 아님 가서 치료 좀 해주고. 그리고 성질 좀 죽여 이 새끼야. 기어이 남은 인생 빵에 가서 보낼래?"
  "알았어. 내가 전화할게."

  지민이 정국을 데리고 차에 타려고 하자 남자는 일단 자존심에 다시 입에 담을 수 없는 욕들을 난사하기 시작했지만, 정현이 그런 남자를 일으키더니 거의 끌고 가듯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차에 타자 지민이 안에서 티슈를 뽑아 정국의 손바닥에서 흘러내린 피부터 닦아준다. 금세 티슈가 발갛게 젖긴 하지만 다행히 깊게 베인 것은 아니었는지 피는 금방 멎었다. 지민이 트렁크에서 수건을 가져와 정국의 손과 팔을 닦고는 묻어있는 모래도 후후 불어준다. 분이 안 풀려서인지 아님 정국의 다친 손바닥을 봐서인지 지민의 눈가가 발갰다.

  "...미안해."
  "형이 뭐가요? 아까 그 사람이 미친놈인 거지."
  "...그래도 내가, 여기 괜찮아? 피는 멎은 것 같긴 한데, 흉터 남으면 어떡해. 병원 갈까?"
  "아니에요. 그렇게 깊진 않아서 그냥 연고 바르고 밴드 하나 붙여도 괜찮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요."
  "일단 그럼 집에 가서 소독하고 약 바르자. 벨트 해."

  정국이 벨트를 하는 것을 보고 지민이 꽉 다문 이 사이로 낮은 한숨을 쉰 뒤 차를 출발했다. 아까 올 때는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것과는 달리 지민은 계속 아무런 말이 없었다. 쌍꺼풀 없는 눈과 눈썹이 팔(八)자로 쳐진 게 꼭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정국도 어릴 때부터 운동을 하며 몸을 부딪치는 것 자체는 익숙했지만, 직접 감정을 담아 싸움을 한 적은 없었다. 때문에 완력으로 그 남자에게 질 거란 생각은 안 들었지만 그래도 갑작스러운 싸움에 휘말린 것이 당황스럽긴 했다. 남자가 지민의 팔을 휘어잡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끼어들긴 했지만, 결국은 그냥 한 대 맞기만 하고 끝난 것이 괜히 창피하고 또 좀 분하기도 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민의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부모님은 옆 동네 있는 이모 댁에 가신 듯했다고 했다. 주말이라 거기서 주무시고 오실 수도 있다고. 제법 크게 세련된 전원주택에 지민의 방은 2층이었다. 생각보다는 방 안이 심플했는데, 정국의 방처럼 책상 위에 폴라로이드 사진이 여러 장 붙여져 있었고, 그 중의 반은 정국이 보낸 것들이었다. 지민이 정국을 앉혀놓고 밑으로 내려가더니 구급상자 같은 것과 얼음 팩, 물수건 같은 것을 만들어 올라온다. 왠지 아까보다 눈두덩이 더 붉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민이 물수건으로 정국의 손바닥을 조심스럽게 살살 닦아주는데, 아픈 것보다도 그 느낌 자체가 간지러워 정국이 팔을 움찔거렸다. 그러자 상처가 아파서 그러는 줄 알았는지 지민이 걱정이 주렁주렁 달린 얼굴을 하고 쳐다본다. 아까 차에서는 반대편이어서 몰랐는데 불빛에서 보니 정국의 오른쪽 뺨도 발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지민이 정국의 손바닥 상처를 소독하고 연고를 바른 후 거즈를 덮어 테이핑을 한다. 그런 다음 얼음 팩으로 정국의 부어있는 볼을 살살 문질렀다. 솔직히 정국은 아픈 것보다도 아무도 없는 집에 이렇게 지민과 가까이에 앉아 있는 것 자체에 더 신경이 쏠려있었다.

  "진짜 미안해. 괜히 여기까지 와서... 니네 부모님 놀라시겠다. 어쩌지. 내가 전화를 드릴까?"
  "저 어차피 농구하다가 팔도 부러지고 축구하다가 발가락에 깁스도 하고 그랬어요. 이 정도야 뭐 그냥 어디서 넘어졌나보다 하실 걸요? 제가 무슨 애도 아니고."
  "그래도... 내가 참았어야 되는 건데. 너 때리는 거 보니까 내가 너무... 너무 화가 나서..."
  "형도 나도 별로 안 다쳤으니까 됐어요."
  "...응... 너 더 다쳤음 아까 그 새끼 바닷물에 머리부터 거꾸로 처넣었을 건데."

  그 말에 정국이 흣, 하고 헛웃음을 웃긴 했으나 차분히 하는 지민의 말은 장난처럼 들리지 않았다. 진짜 다리에 돌덩어리를 매달아서 그대로 머리부터 바다 깊숙한 곳으로 꽂아 넣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정말 여러모로 다행은 다행이었다.

  "아까 그 사람은 누구예요?"
  "아까? 아... 나 어릴 때 친구."
  "친해요? 되게 친한 것 같던데."
  "초등학교 때부터 스무 살 때까진 거의 붙어 다녔으니까."
  "형 그렇게 싸움 잘 해요?"
  "어?...... 어. 못 하지는 않아."
  "그냥 못 하지 않는 정도는 아닌 것 같던데. 아까 그 형 친구도 형 막 무서운 사람이라 그러고. 혹시 일진... 이런 거였어요?"  
  "아냐! 나 돈도 뺏어본 적 없고 내가 먼저 시비 걸거나 사람 때리거나 그런 적은 없어, 진짜야. 그냥 불쌍하고 약한 사람 괴롭히거나 나쁜 짓 하고 그런 걸 못 참아서 많이 싸우긴 했어. 그러다보니 계속 시비가 걸려와서 좀... 그랬어. 솔직히 철없을 때는 몰래 담배도 피고 술도 마신 적은 있지만... 그래도 내가 먼저 누구 괴롭히거나 그런 적은 없어... 진짜야 이건. 지금은 담배도 안 펴..."
  "음... 그래요?"
  "...거 봐. 그래서 내가 직접 만나면 너 실망할지도 모른다고 했잖아..."
  "누가 실망해요? 되게 든든하고 좋은데요?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저를 엄청 잘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아요. 나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막 대신 때려줄 것 같고."

  정국의 볼을 얼음 팩으로 문지르던 지민이 그 말에 손이 멈춘다. 혹시 너 누가 괴롭혀? 너 학교에서 괴롭히는 사람 있어? 하고 묻는데 얼굴이 사뭇 진지했다.

  "진짜야? 정말 너 괴롭히는 사람 있으면 얘기해."
  "있으면 형이 때려줄 거예요? 쥐도 새도 모르게 주민등록을 말소시켜 줄래요?"
  "아니. 맨날 따라다니면서 떡볶이 같은 거 사주고 정국이 괴롭히지 마!!! 라고 할 거야."

  그 말에 정국이 파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정국을 괴롭히는 놈이 나타나면, 종이컵에 떡볶이를 담아 와서 건네며 "이거 먹고 우리 정국이 개로피면 안대~" 하는 지민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지민이 문지르던 얼음 팩을 내려놓고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돌려보며 정국의 볼을 살펴본다. 아직도 확실히 오른쪽 뺨이 발갛게 부어있었다. 이거 내일은 붓기 빠져야 될 텐데 큰일이다, 하며 지민이 맨 손등으로 정국의 뺨을 살살 문지른다. 그러자 금세 등이 뻣뻣해지는 기분이었다. 지민의 머리카락은 아직도 젖어있고, 자신의 셔츠를 입고 있는데 그 밑으로 드러난 다리는 너무 맨들맨들해 보이고 하필이면 방 안은 너무 조용하고. 눈이 마주치자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이 넘어간다. 꼭 양쪽에서 힘을 주어 단번에 잡아당긴 것처럼 방 안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어느 한 쪽만 느슨하게 잡아도 그 쪽으로 몸과 마음이 쏟아질 것만 같다. 아까 놓쳤던 타이밍이 바로 지금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국이 제 뺨을 살살 문지르는 지민과 눈을 마주본다.

  "형."
  "어?"
  "형 있잖아요."
  "응."
  "아 솔직히 되게 많이 생각했었고, 나름대로 혼자 연습도 했었는데요. 핫씨, 미치겠네. 이걸 뭐라고 말해야 될지... 내가 생각했던 건 이런 거 아니었는데. 아 왜 떨리지. 하필이면 얼굴도 이래가지고... 아 진짜..."
  "무슨 말인데 그래?"
  "그러니까요 그게. 형은..."
  "음? 나?"
  "저기... 나 어떻게 생각해요?"
  "너?"
  "네. 아... 이거 아닌데. 좀 더 제대로 얘기하려고 했는데 그게."
  "정국아."
  "네."
  "뽀뽀할까?"
  "네??????"
  "아 나 미쳤나봐. 어후 갑자기 왜 이 말이 튀어나와. 아니 그게 아니고 나는 그냥... 갑자기.... 니가 그런 걸 물어보니까... 이거 아니지 지금."
  "아니에요, 맞아요. 그거 맞아요.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거 맞는 것 같아요. 완전 그거예요. 해요. 할까요? 해도 돼요?"

  괜히 다급해진 정국이 무릎까지 꿇고 반쯤 몸을 일으킨 채 물어왔다. "우리 사귈래요?" 가 정국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명료한 결론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서론이었고 이미 다음 단계가 진행 중이었나 보다. 지민이 쑥스러운지 뒷목을 긁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국이 무릎을 꿇은 채 다가가자 지민이 슬그머니 눈을 감는데, 부은 뺨이나 상처 난 손바닥보다 심장에 피가 몰려서 왠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물컹, 하고 입술이 닿았다. 이렇게 다른 사람과 입술이 닿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목이 뻣뻣해질 만큼 긴장이 됐다. 보던 것만큼이나 말랑거리는 입술에 닿았다가 이내 떨어졌는데, 그래도 여전히 지민의 눈이 감겨있었다. 아 더 해도 되나? 더 해도 되는 걸까? 혹시 갑자기 더 하자고 들었다가 죽빵을 얻어맞는 거 아닐까? 내일 아침 고깃배에 실려 다시 눈뜨면 소말리아 해안을 부유하고 있을지도 몰라. 아까 부웅 하고 몸을 날려 정확하고 카운트를 꽂아 넣던 지민을 생각하니 잠시 망설여지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 다시 한 번 입술을 갖다대본다. 키스해도 되나...? 아랫입술을 슬쩍 물자 지민의 손이 스르륵 정국의 팔뚝 위로 올라오더니 이내 뒷목을 감싼다. 오히려 지민이 더 적극적인 느낌이었다. 정국이 고개를 틀며 좀 더 빈틈없이 입술을 밀착시킨다. 천천히 밑 입술을 핥고 살짝 깨물었다가 다시 핥았더니 더운 숨과 함께 입술이 열린다. 정국의 팔이 자연스럽게 지민의 허리를 안는다. 기분이 몽롱했다. 아마도 아까 지민이 말했던, 고요한 바다 속에서 헤엄치는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키스를 하다가 볼 안쪽이 뜨끔 하는 바람에 정국의 어깨가 움찔거리자 촉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아까 남자에게 얻어맞은 뺨 안쪽이 아무래도 찢어진 듯 했다. 지민이 뜨끈한 숨을 한 번 훅 내쉬더니 나른하게 눈을 뜬다. 와 이 형 야해.

  "...왜? 손 아파?"
  "그건 아닌데 아까 뺨 맞았을 때 여기 입 안 쪽이 찢어졌나 봐요."
  "역시 아까 그 새끼 혀를 뽑아서 낚싯줄에 걸었어야..."
  "형이 그렇게 말하면 이제 장난으로 안 들리는 거 알죠? 와 무섭다."
  "그래도 니가 다쳤잖아."
  "괜찮아요. 그건 상관없어요. 그보다 형, 우리 그러니까... 사귀는 거죠?"
  "음 나는... 나는 그러고 싶은데."
  "맞아요. 나도 그러고 싶어요. 그럴 생각으로 온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정국이 지민의 어깨를 끌어안는다. 작은 어깨가 한 품에 쏘옥 들어왔다. 계속 몸을 간지럽히던 간극이 드디어 좁혀지는 순간이었다. 정국이 지민의 목덜미에 코를 묻는다. 가는 목덜미에서는 파릇한 바다 냄새가 났다.
 
  "이젠 서울 가면 형 사진 좀 많이 보내줘요. 셀카같은 것도 좀 찍고."
  "나 사진 잘 못 찍어. 맨날 콧구멍이 엄청 크게 나와."
  "그래도 이젠 카톡을 하거나 전화 통화만 해도 뭔가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어서 좋아요."
  "뭘 상상할 건데?"
  "아, 야한 건 아니에요. 뭐... 야한 생각도 아예 안 하진 않겠지만. 근데 형 오늘 보니까 혹시라도 나 바람피우거나 나쁜 짓 하거나 그러면 막 나 죽일 것 같아요."
  "에이 설마. 그래도 그런 걸로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면 안 되지."
  "에?"
  "죽이지는 않을 거야. 내가 어떻게 너한테 그래."

  그 말에 안고 있던 어깨를 떼어내며 얼굴을 쳐다봤더니 긴 눈을 접어 푸스스 웃는다. 혹시나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죽이지는 않을 거란 약속은 지킬게. 근데 아마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생각할지도 몰라. 그러고 싶음 입 안에 강냉이 다 털려서 발음 안 되기 전에 꼭 얘기해 줘~" 하며 지금처럼 웃을 것 같다. 괜히 뒷목이 으스스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 눈앞에서 웃는 지민은 여전히 푸른 바다를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과 예쁜 유리병을 보내왔던 그때 그 모습 같았다. 아 내일 서울 가기 싫다. 정국은 벌써부터 내일 헤어질 생각에 아쉬움이 들어 지민의 어깨를 다시 껴안았다.


***


  "전정국- 너 소개팅 안 할래?"
  "뭔 소개팅이야. 나 사귀는 사람 있다니까."
  "야. 니 애인 알파고라는 설이 있던데 진짜냐? 어떻게 맨날 카톡만 주고받고 한 번도 정체를 드러내질 않냐고."
  "뭐래."
  "우리 학원 애가 너 맘에 든다고 소개 시켜 달래. 한 번 만나 봐. 걔 진짜 예쁘다니까? 인스타 가 봐, 끝장났어 진짜."
  "친구야. 내가 다른 여자랑 소개팅을 하잖아? 그럼 아마 그 다음 날 내가 소말리아 해역 어딘가에서 발견될 거야. 그나마도 거기서라도 발견이 되면 다행이지."
  "왜. 너 연상 사귄다더니 그 누나 되게 무섭나보다?"
  "아냐. 귀여워. 엄청 귀엽고 진짜 착하긴 한데 뭐랄까... 나를 세상으로부터 굉장히 잘 지켜줘. 되게 나를 소중하게 대해주지."
  "근데?"
  "근데 맘만 먹으면 단숨에 그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보낼 수도 있어."
  "넌 뭐 타노스랑 사귀냐?"
  "아무튼 그래. 야 나 먼저 간다! 내 애인 오늘 서울 놀러 오기로 했거든."

  정국이 토끼 이를 드러내고 한껏 웃더니 이내 가방을 달롱거리며 뛰어가기 시작한다. 그런 정국의 뒤로 한 여름의 짙은 꼬리가 가을의 그림자에 닿고 있었다.





 

믜리도 괴리도 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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